믿음은 성품의 변화입니다/전남식
신앙 또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신앙이나 믿음을 구원의 확신으로 이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고 암기하는 것으로 이해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너무 방대하다 보니 사영리와 같은 아주 단순한 소책자를 읽고 동의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저도 한 때는 사영리와 같은 소책자를 들고 매주마다 길거리 전도를 나가거나, 이웃,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멘’으로 대답하면 된다고, 아주 쉬는 것이고, 동의해서 손해 볼 일 없잖느냐고 은근히 몰아부치곤 했습니다. 그 때는 신앙은 곧 지적 동의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후 제자훈련이 트렌드였을 때는 제자훈련 원리 - 그때는 ‘프린시플’(principl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왠지 더 제자답게 보여서 그랬을라나요? - 수십 개를 배우고, 아침마다 QT를 하고, 네비게이토 암송 카드를 달달 외우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6개월 간 매주 한 번 이상 만나 제자훈련에 참석하면 그 다음 단계로 진급했고, 그런 단계가 6단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미국의 새들백교회 릭 워렌을 비롯해 빌 하이벨스 목사가 제자훈련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내린 기사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제자훈련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데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이 우리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의 저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비롯한 학자들은 성품의 변화는 공동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무엇일까요?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다양하다는 것은 나와 다르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의 성품이 다듬어집니다.
교회는 “위선 혹은 포장”의 충동을 극복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약점을 나눌 수 있는 용기이고,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생각과 아픔, 약점을 나눠도 안전한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