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the day"
1998년 9월21일(이하 한국시간) 볼티모어 캠든야즈.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뉴욕 양키스의 경기를 앞두고 누가 볼티모어 레이 밀러 감독의 방문을 두드렸다.
칼 립켄 주니어였다. 립켄은 위의 말과 함께 밀러 감독에게 자신을 선발 라인업에서 빼줄 것을 부탁했다. 팀은 이미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으며, 시즌 종료를 일주일밖에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굳이 경기에서 빠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록 연장이 팀의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립켄은 16년을 이어온 2632경기 연속 출장의 대기록을 스스로 중단했다. 자신이 더 이상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루 게릭이 1939년 시즌 시작 후 8경기만에 은퇴를 선언한 것처럼.
립켄이 메이저리그 역사에 또 하나의 'the day'를 만들었다. 10일 발표된 2007년 명예의전당 투표 결과에서 545명의 투표자 중 537표를 얻어 98.53%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 비록 '만장일치 사수파' 8명의 고집 때문에 100%에는 실패했지만, 톰 시버(98.84)와 놀란 라이언(98.79)에 이은 역대 3위의 영광을 안았다.
[95% 이상 12인] 1. 톰 시버(98.84) 2.
놀란 라이언(98.79) 3. 칼 립켄 주니어(98.53) 4. 타이 콥(98.23) 5. 조지 브렛(98.19) 6.
행크 애런(97.83) 7. 토니 그윈(97.61) 8.
마이크 슈미트(96.52) 9. 자니 벤치(96.42) 10.
스티브 칼튼(95.82) 11. 호너스 와그너(95.13) 12. 베이브 루스(95.13)
립켄이 이렇게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은 1981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21시즌을 뛰면서 성적과 명예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2001년 올스타전에서 선발 유격수로 나선 알렉스 로드리게스(왼쪽)가 3루수인 립켄에게
자기 대신 유격수를 맡으라고 떠밀었던 모습. 로드리게스는 이후 유격수를 포기함으로써
많은 부문에서 립켄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성적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낸 유격수는 립켄이다. 립켄은 통산 431개의 홈런 중 345개를 유격수로서 기록하며 어니 뱅크스(512홈런)의 277홈런을 경신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464홈런)는 2003년까지 유격수로서 344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2004년 뉴욕 양키스 입단을 위해 유격수를 포기했다.
립켄은 로드리게스와 같은 거포도
토니 그윈과 같은 안타머신도 아니었다. 하지만 10년 연속 20홈런과 20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18년 연속'을 포함해 풀타임 20시즌 중 19시즌에서 100안타 이상을 때려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2번의 MVP를 수상한 유격수는 단 2명. 뱅크스(1958-1959)와 립켄(1983, 1991)이다. 로드리게스도 2003년과 2005년 2차례 MVP에 올랐지만 2005년은 3루수로서의 수상이었다.
립켄은 1982년 신인왕에 이어 1983년 MVP에 올라 '1년차 신인왕-2년차 MVP'를 달성한 첫번째 선수가 됐다(지난해 라이언 하워드는 역대 2호 선수가 됐다). 립켄의 1991년 MVP 수상은 아메리칸리그에서는 역대 최초로 승률 5할 미만팀에서 나온 것이었다(메이저리그 최초는 1987년 안드레 도슨. 2003년 로드리게스는 역대 3번째 선수가 됐다).
립켄은 역사상 8번째로 많은 경기(3001)에서 4번째로 많은 타수(1만1551)에 나서 14번째로 많은 안타(3184)와 13번째로 많은 2루타(603)를 날렸다. 역사상 400홈런-600 2루타는 애런(755-624)과 야스쳄스키(452-646) 립켄뿐이다.
3000안타-400홈런은 애런(3771-755) 윌리 메이스(3283-660) 라파엘 팔메이로(3020-569) 에디 머레이(3255-504) 스탠 뮤지얼(3630-475) 데이브 윈필드(3110-465) 야스쳄스키(3419-452)와 립켄(3184-431)의 8명. 유격수는 립켄이 유일하다. 1루수를 제외한 내야수도 립켄이 유일하다.
그가 기록한 8개의 실버슬러거는 배리 라킨(9개)에 이은 유격수 역대 2위 기록. 로드리게스는 유격수로서 7개를 기록하고 3루수로서 8개째를 따냈다. 이들 셋을 제외하면 4개 이상을 기록한 유격수는 없다.
립켄은 결코 공격만 잘하는 유격수가 아니었다. 그가 193cm 102kg의 거구로 등장했을 당시 메이저리그 유격수의 표준은 175cm 73kg의 루이스 아파라시오나 180cm 68kg의 아지 스미스였다. 볼티모어도 처음엔 립켄을 3루수로 기용했다.
하지만 립켄은 강력한 어깨와 뛰어난 위치선정능력, 놀라운 집중력으로 '빅 사이즈' 유격수도 얼마든지 좋은 수비를 보여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 립켄은 1990년 95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을 포함, 시즌 내내 단 3개만의 실책을 범하며 .996의 수비율을 기록했고, 1991년과 1992년에는 골드글러브를 차지했다. 역사상 립켄보다 더 많이 경기에 나선 유격수는 아파라시오와 스미스뿐이다.
루 게릭을 넘어선 2131경기 연속 출장의 순간. 립켄은 20분간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과 악수를 나눴다명예 배리 본즈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세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타자다. 팔메이로는 3000안타-500홈런을 달성한 4명 중 1명이다. 마크 맥과이어는 타수당 홈런 생산률(10.61)이 베이브 루스(11.76)보다도 높다. 하지만 이들은 명예를 잃었다.
립켄은 명예의전당이 원하는 바로 그 '명예'를 가지고 있는 선수다. 그가 16년 동안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고통을 참아내며 기록한 2632경기 연속 출장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기록이자 명예다. 1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경기에 나서는 사이 립켄은 29명의 2루수와 호흡을 맞췄으며, 522명의 상대팀 유격수를 만났다. 그리고 3695명의 선수가 부상자명단에 올랐다.
더 대단한 것은 '연속 경기 출장'의 질이다. 립켄은 첫 5년간 904경기에서 8243이닝 전이닝에 나섰으며, 기록을 세우는 동안 팀 이닝의 99.2%를 소화했다. 그가 7회초가 끝난 후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이 울리기 전에 경기에서 빠진 것은 단 4번으로, 그 중 2번은 심판과 언쟁을 벌이다 퇴장당한 것이었다.
립켄은 그윈과 함께 충성심과 의리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한 팀에서만 20년 이상을 뛰고 은퇴한 선수는 17명. 돈과 팀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팀을 택했던 립켄은 평균 322만달러의 연봉을 받는 데 그쳤다(그윈은 더 심해 연평균 236만달러를 받았다).
립켄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모범사례였다. 그가 구설수에 오르거나 누구를 비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현역 시절 팬과 악수하거나 사인을 해주는 사진이 가장 많은 선수였을 만큼 팬을 진심으로 대했고 팬들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립켄은 풀타임 데뷔 이듬해인 1983년부터 마지막 해인 2001년까지 19년 연속 올스타의 메이저리그 최고기록을 세웠는데 이 중 18번은 팬들이 팬투표에서 1위로 뽑아준 것이었다(립켄은 1991년과 2001년 올스타전에서 MVP에 올랐다).
2001년 시즌 중반 립켄이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자 아메리칸리그 구장들은 '립켄 특수'를 누렸다.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그가 방문하는 원정구장들에도 관중들이 몰린 것이었다. 립켄은 일찌감치 '칼 립켄 주니어 재단'을 세워 사회봉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92년 가장 많은 사회봉사를 한 선수에게 주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상과 그라운드 안팎에서 모범을 보인 선수에게 주는 루 게릭상을 동시에 수상한 장면은 바로 야구팬들이 생각하는 립켄의 이미지다.
토니 그윈 토니 그윈 역시 역대 7위에 해당되는 97.61%의 득표율로 명예의전당에 입성했다. 그윈을 반대한 사람은 립켄보다 5명이 더 많은 13명. 립켄과 그윈은 2005년 웨이드 보그스에 이어 후보 자격을 얻은 첫 해에 입성한 역대 42,43번째 선수가 됐다.
[레전드 스토리 : 영원한 타격왕 토니 그윈] 반면 큰 관심을 모았던 마크 맥과이어는 23.5%에 그쳐 합격선 75%에 한참 모자랐으며, 폭로전을 주도했던 호세 칸세코는 1.1%로 후보에서 완전 탈락했다.
한편 재수생들 중에는 지난해 64.6%를 얻었던 8년차 리치 고시지가 71.2%로 합격선에 접근, 내년을 기대하게 한 반면 13년차 짐 라이스(64.8→63.5) 6년차 안드레 도슨(61.0→56.7) 10년차 버트 블라일레븐(53.3→47.7) 5년차 리 스미스(45.0→39.8) 8년차 잭 모리스(41.2→37.1) 등은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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