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지 말자 3일차.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 생각한다."는 발음 훈련 종이 속에 적혀져 있던 문장 그대로다. 지난 수업 이후 정말 머리가 펑 터질만큼 이런저런 고민과 생각을 했다. '잘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야만이 나를 알아가고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나는 이제부터 '잘' 하지 않기로 했다. 근데 이거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잘' 해야 한다고 우기고 협박하는 마음을 무시하고 꾸깃꾸깃 밀어내며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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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 1, 7화: 무등산 타잔 박흥숙 편
마지막에 박흥숙 씨의 최후진술서를 장현성 배우님이 읽는 장면이 나왔다. 보자마자 이 장면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장현성 배우님은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턱턱 자꾸만 말이 걸려 멈춰지고 눈물에 목이 메여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셨다. 진술서 내용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주어야 하기에, 눈으로 먼저 읽고 나서 말로 또박또박 천천히 읽으셨다. 특히 더 힘주어 이야기하는 단어들과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눈물과 보여지는 모습, 표현에 집착하지 말고 조금 더 그 안에 마음을 보려고 노력했다.
진술서의 원문을 읽어야 될 것만 같아서 인터넷에 검색했다. A4 용지 15매를 세로로 빼곡히 채운 글씨. 나는 필체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이 사람은 참 올곧고 단단한 사람임이 느껴졌다. 나의 느낌으로는 그랬다. 그것을 소리 내어 읽는데 ?? 11분이 걸렸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고, 그렇기에 그 이유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죄를 가진 사람이지만, 그의 글을 다 읽고나서 정말 아무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도, 어떤 말이 적당할지도 가늠이 안갈 정도로 말문이 막혔다. 어떤 책과 시집을 읽다보면 자세를 고쳐앉게 된다. 누워서 읽을 수 없는, 바르고 꼿꼿한 자세로 읽어야 되는 책이 있다. 박흥숙 씨의 최후진술서도 나에게 그러했다.
진술서를 외우는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생각보다 긴 내용이었지만, 원문을 읽고나니 이 내용은 제작진이 중요한 문장들을 편집하여 이어붙인 아주 짧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가 뇌리에 깊게 박혀서 금세 외워졌다. 빈 원고지(진술서가 원고지 같은 종이에 적혀있었기 때문에)를 들고 연습을 하면서, 뻥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박흥숙씨가 감옥에서 꾹꾹 눌러적은 글씨가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정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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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시작하며 학준쌤은 나와 혜인이에게 어렸을 때 기억나는 한 순간이 있는지 물으셨다. 질문에 답하면서 내가 머릿속 한켠에 넣어두고 있었던 동영상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그러자 그날 현관문 우유구멍과 엄마 핸드폰의 벨소리와 같은 아주 자잘한 조각들도 어제일인것처럼 되살아났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이십년전 일인데도 오류없이 재생되다니!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으며 얼마나 겁먹었는지 토로하는 나와 혜인이의 모습까지. 그러게. 정말 이미 우린 다 살아있게 할 수 있는데 왜 '연기를 할 때'는 갑자기 입력값을 넣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지 모르겠다..
"늦춰지면 안돼."
학준쌤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전에는 말하기전에 이미 주도적으로 빠른 속도로 해왔는데, 요즘은 말을 해야지만 움직이는 것 같다고.
김창옥 씨의 강연에서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고 싶어하는 것의 차이를 이야기해주셨다. 좋아한다면 내가 잃을 것들을 재고 따지는게 아니라 그냥 계속 상대를 향해 가게 된다. 내가 생각해도 봄에는 눈이 번쩍번쩍 떠지고 수업 세시간 전에 가서 학원을 독차지하며 연습하는게 전혀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즐거웠고, 행여 늦잠을 자서 한시간 전에 도착하면 자책을 했으니.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 중에 제일 중요한 건 연기다. 제일 좋아하는 것도 연기다. 그런데 지금은 30분전에야 도착하고, 자꾸만 미루게 된다. '잘' 해야 한다는, 엇나간 방향을 잡아 생긴 부담 때문이 역시 클 것이다. 다시 방향을 다잡아야지. 건강하게 좋아하는 법을 배워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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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를 두 번 했다. '학준쌤과 혜인이가 보고 있다..!'는 의식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혼자 연습하듯이 하자고 생각하며 임했다. 코멘트를 들었을 때, 확실히 수민이는 초반보다 중반 이후에 집중력과 힘이 쌓여진다는 말에 완전히 동감했다. 어떻게 하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상태에 완전히 들어가 있을 수 있을까? 여전히 내겐 큰 숙제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발표를 하면서는 아주 조금은 더 일찍 빠르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근데 대사는 내가 달달 외워서 툭 치면 바로 나올 정도로 입과 몸에 붙여야겠다. 그리고 발음도. 잘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말을 더듬거나 잘못 뱉어버리면 하는 나도 보는 사람도 집중이 확 깨져버린다. 연습은 몸에 다 익을 때까지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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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월부터 썼던 두번째 연기노트가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중간중간에 빈 장도 있고 매 수업 시간을 빼곡하게 적어두진 못했지만, 새삼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짧지만은 않구나를 어렴풋이 느낀다. 세번째 노트를 펼치고 '이번만은 반드시.'의 새로운 다짐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움직이는 것이겠지! 그 다짐을 실행시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