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이는 저 곳이 천하(天下) 명당(明堂)인데 현재 다른 사람이 뫼를 쓰고 있다는 박 풍수의 말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현장에 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상주(喪主)들이 우겨서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묏자리를 닦으려하니 물이 쏟아져서 뫼를 쓰지 못하고 돌아간다면서 철수하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돌아서는 상주에게 “우리가 이 자리에 묘를 들여도 좋습니까?” 물으니 “우리가 쓰지 못하는 자리에 들이든지 말든지!” 라는 무뚝뚝한 대답을 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물어서 뫼를 써도 좋다는 확답을 듣고 난 박 풍수는 조용히 작업을 지시했다. 먼저 광중(壙中)에 고여 있는 물위에 겨(벼껍질) 한 섬을 갖다 풀고, 대젓가락 세 매를 물 속에 집어넣으라고 시키고, 인부 세 사람을 호미 한 개씩을 가지고 자기를 따라 오라면서 현장(現場)에서 멀리 떨어진 “도마” 라는 마을 논두렁 밑에 가서 호미로 논두렁 밑을 파라고 하였다. 세 사람의 인부는 박 풍수의 지시대로 각각 세 곳의 논두렁 밑을 호미로 긁적이니, 갑자기 겨가 섞인 물이 꽐꽐 쏟아지기 시작하며 대젓가락 한 매씩이 물에 딸려 나오더니 세 곳이 모두가 샘이 되어버렸다. 뫼를 쓰려고 하는 현장의 물은 이 세 곳으로 빠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처음 이 묏자리에 물이 고였을 때 금붕어가 놀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겨와 놋젓가락이 나왔다고 하는 샘들은 현재 “도마” 동네 사람들의 식수(食水)로 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날씨가 가물어도 수량(水量)이 한결 같고, 수정(水晶)처럼 물이 맑고 맛이 좋다고 하며, 지금 이세 개의 샘 이름이 “도마샘” “어룽샘” “옥로정”(玉露井)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명당(明堂) 터를 잡은 사람은 박씨로만 알려지고 있을 뿐 이름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 정사(鄭賜)
정사(鄭賜 : 1400~1453)는 본관이 동래(東萊), 귀령(龜齡)의 셋째아들이다. 1420년(세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고 이조좌랑, 예조 ,형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정성을 다하였다. 문학과 덕행(德行)이 뛰어났고 지조와 절개가 높아 완담사(浣潭祠)에 모셔졌으며 웅천(熊川)고을 동헌(東軒)에서 읊은 시가 전해온다. 『겹겹이 두른 뫼뿌리는 삼면을 에워싸고(千層列峀圍三面), 넓고 넓은 물결은 끝간 데를 모를로고(萬頃波濤浩一邊)』 지보면 도장리 명산에 있는 “정묘”(鄭墓)가 그의 묘소이다.
1476년(성종 7)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으로 내산군(萊山君)에 봉군(封君)되고, 중종 11년(1516)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다시 증직되었고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첫댓글 묘와 석물들이 아늑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