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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090206a창45장a
20090206a 울산강의-창세기45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창세기 45장 할 차례입니다. 창세기 45장에서 거기에 5절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것은 현재 요셉이, 여기 애굽입니다. 이거는 약속의 땅. 약속의 땅에서 볼 때 애굽은 비약속의 땅이죠.
지금 대대로 내려오는 게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서부터 이삭, 야곱 이렇게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서 오거든요. 복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그 자리가 어디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야곱 다음에 누구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가야산 수련회에서 역대기를 했는데 역대상 5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그렇게 돼있지요.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들 가운데 여기에 누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 다음에 열두 명, 이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이 두 사람 있지요. 이스마엘이 있고, 이삭이 있는데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 한 사람이에요. 에서도 있었는데 에서는 아니고 야곱이 되는 겁니다. 야곱이 될 때 이 사람들 앞에서 이걸 ‘장자’ 이래 되죠.
그렇다면 여기는 비율이 2:1이 아니고, 12:1이죠. 아들이 열두 명이란 말이죠. ‘아들이 열두 명 가운데서 누가 장자가 될 것이냐’ 하는 그 문제에 있습니다. ‘장자’라 하는 것은 ‘맏이’죠. 흔히 말하는 맏아들. 맏아들이 왜 성경에서 중요하냐 하면, 맏아들만이, 장자만이 뭘 하느냐 하면, 아버지 이름으로 행세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출장 갔을 때, 아버지가 그 집안에 계시다 안 계실 때 그때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맏아들, 장자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돼있지요.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돼있지요. 지금 일반 평신도뿐만 아니고 목사도 마찬가지고 울산에 사시는 교인, 성도도 마찬가지인데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게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이야기가 어려워요. 시편에 보면 여러 번 나오는데 “나는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 이름을 의지하련다”라는 말이 있거든요.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병거, 요새 말로 탱크 아닙니까? 말은 기마부대 아닙니까. 기마부대나 탱크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도화지에다 이름 써서 그것 오려서 들고 있으면 승리합니까? 이게 대체물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가서 여러 과일이 있는데, ‘애야, 너 과일 먹고 싶다 했지. 여기서 어느 과일을 먹고 싶어? 바나나야, 딸기야, 수박이야. 어느 것 먹고 싶어?’ 애가 말하기를 ‘나는 딸기도 아니고, 바나나도 아니요. 나는 저 피아노를 먹고 싶어.’ 이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피아노하고 과일하고는 같은 류가 아니잖아요. 대체로 집어넣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피아노를 뜯어먹을 순 없지 않습니까?
전쟁을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 되고 무기는 손에 쥐고 다룰 수 있어야 되고, 손으로 다뤄서 활을 쏜다든지 병거, 활, 창. ‘너는 창을 의지할래, 활 의지할래?’ 하면, ‘나는 창을 의지하지 않고 활을 의지해’ 이러면 말이 되는데 ‘너는 활 의지할래, 창 의지할래, 기마부대 할래?’ ‘나는 기마부대도 아니고, 활도 아니고, 창도 아니고 여호와 이름으로 한다’는 게 어떻게 납득이 됩니까? 대체물이 납득이 안 되잖아요.
성경은 흔히 그러려니, 교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은 하나님 이름을 의지해야 됩니다’ 말은 하지만, ‘그럴 수 있구나’ 하지만 실제로 따져 보세요. 예를 들어서 누가 기업하다가 부도났다. ‘목사님, 자금이 딸립니다.’ ‘그래요. 그러면 돈을 믿지 마시고 여호와 이름을 믿으세요.’ 돈과 여호와 이름이 대체물이 되지 않습니다. ‘돈 말고 그러면 수표나 어음 쪽으로 해보지.’ 이러면 말이 되는데, ‘현찰 말고 여호와 이름으로 하세요’ 이게 얼른 와 닿습니까? 와 닿는 사람은 어떤 논리로 그게 대체되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현찰은 셀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돈 말고 이름이라. 이름을 도화지에 써서 이름을 셉니까? 어떻게 이름으로 한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모르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니까 맞겠지’ 하고 넘어가는 거예요.
‘나는 이번 전쟁에서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나는 오직 여호와 이름을 의지하겠다’라고 했을 때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 이런 말도 안 되는, 참으로 문장 자체가 안 되는, 성립이 안 되는, 딸기, 바나나 대신 피아노 뜯어 먹을란다. 이게 말이 안 되듯이. ‘나는 바다에서 오징어 잡을래, 문어 잡을래.’ ‘나는 바다에서 호랑이 잡을래.’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전쟁에서 여호와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개야’ 부르면 됩니까?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름의 대체물로 ‘언약궤’로 봅니다. 이걸 누가 설명을 해줘야 되는데. 말 대신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의 이스라엘의 최후의 무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언약궤가 일종의 가마 정도로 보면, 언약궤가 있는 곳에 신명기 12장에 보면, 언약궤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궤 위에다 매직으로 ‘여호와’ 써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놨습니까? 아니잖아요. 도대체 제일 어려운 게 뭐냐? 그래도 어려워요. ‘이름이 있다’가 뭔 뜻입니까? 저기는 철수가 있다면, ‘철수가 있네. 세온이 있네’ 할 때는 세온이 이름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세온이 실체가 있잖아요.
‘우리 세온이가 어디 갔지? 벌써 회사 가버렸나?’ ‘세온이는 갔지만 이름은 있구나.’ 그런 뜻이 아니란 말이죠. 사람들이 찾을 때는 실체가 떨어진 이름만 달랑 있는 게 아니잖아요. 진짜 그 사람을 찾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따로 계시고, 하나님 이름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언약궤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한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려면 하나님의 이름 자체에서 팔, 다리, 무릎, 갈비뼈 이런 게 있어야 된다 말이죠. 이게 언약궤라면 건방지게 앉아 있잖아요. 할 때 다른 사람이 뭐라 합니까? ‘언약궤 위에 이 목사님 계시네’ 된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걸 뻔히 아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어떻게 자기 백성과 이동합니까? 달이 이동합니까, 별이 이동합니까? 어떻게 보면 별이 따라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별은 움직이지 않죠. 달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데 이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말고 하나님 이름 되시는 분이 따로 계셔서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면서 함께 하시는데 눈에 안 보이지만, 왜 그러면 하나님 따로고, 이름 따로냐? 이름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언약을 다른 말로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간여하시는 거기에 개입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이름이에요.
한번 물어봅시다. 하나님 불러서 구원받습니까, 하나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다른 사람도 똑같아요. 하나님이나 하나님 이름이나 그게 그거다. ‘철수나 철수 이름이나 똑같지.’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게 사람한데는 똑같은데 죄송하지만 하나님한테는 안 똑같아요.
신의 존재는 모든 인류가 다 인정해요. 알라신이고 무슨 신이고 다 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알라신도 아니고, 오직 ‘여호와’하는 것은 뭐냐 하면, 로마서 10장 13절에서 하나님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 할 때에 주가 뭐냐 하면, ‘주’를 깨보면 약속한 대로 다 이루었음이라. 다 이루심이니까 주의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한 것을 알아채고 그 약속에 자신의 모든 걸 건 사람은 구원받는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로마서에 처음 나오는 게 아니고, 바로 구약 전체에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서 주의 이름이 이뤄진 거예요. 그렇다면 언약궤는 사람의 뜻에 의해서 움직입니까, 아니면 언약궤 주인님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의 약속대로 움직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께서 언약궤 위에 계시면서 언약궤를 조종하잖아요. 조종하게 되면 여기서 이동할 때마다 약속이 이뤄지지요.
그렇다면 다시 봅시다. 시편에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활, 창으로 이기는 게 아니고, 나는 어디에 맡긴다? 모든 걸 맡기죠. 그러면 주의 이름이 노시는 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은 부지런히 자기가 남긴 약속을 이뤄나가시는 분이죠. 그러면 이번 전쟁을 자기 전쟁으로 보지 않고 무슨 전쟁으로 본다? 주의 이름의 전쟁으로 주님께 속한,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 전쟁으로 보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굿이나 보고 자기는 떡이나 챙기겠다는 이거에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자기는 콩고물이나 뜯어먹는 그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로마서 10장 13절에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뭡니까? 나의 구원의 모든 근거와 바탕과 모든 것은 누가 하셨고? 주의 이름이니까 내 이름이 아니잖아요. ‘주의 이름 되신 분이 다 이룬 것을 나는 의지한다.’ 그게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대로 나는 그저 주의 약속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구원받아야 될 내가 주의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때부터 나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하여튼 요한복음 6장 38절을 제가 읽어 볼게요. 목회하면서 이 말씀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게 없어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면 목회자가, 목사가, 설교자가 자기가 말실수, 설교 잘못 또는 자기가 행동 잘못해서 택한 백성 지옥 가는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게 없다니까. 그게 안 돼요. 이건 돼요. 아무리 내가 설교 잘하고, 기도하고, 심방해도 절대로 구원받는 사람은 목사의 공로로 단 한 사람도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그런 약속을 알 수 있는 혜택으로써 목사가 목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다른 분은 사업하면서 직장 다니면서 어떤 식으로 주님 계시는 걸 확인하는지 모르겠지만 목사 입장에서는 어떤 걸 통해서 주님이 살아 계신 걸 느끼느냐 하면, 아무리 설교하고 아무리 심방, 기도해서 내 힘으로는 단 한 사람도 구원 보낼 수도 없고, 단 한 사람도 지옥 보내지도 못한다는 거예요. 나는 단지 주의 이름에 의해서 사용되어질 뿐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목사로서는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모든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을 얻는 거예요. 자유를 얻는 겁니다. 자기로부터 해방을 얻는 거죠. 이것이 바로 목사한테 혜택을 준 너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그 목사의 실생활에 체험이 되지요.
아니, 목사치고 주의 이름 안 부를 때가 어디 있습니까? 신학교 가기 전부터 주의 이름 부르고 다 했어요. 하지만 그 주의 이름을 말로써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진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 뒤에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매 순간, 순간마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공로, 주의 주신 약속을 이뤘다는 공로로 구원된다는 것을 그 사람 일분일초도 빠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거기서 뽑혀 나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잊어버려서 그렇지. 엉뚱한 게임한다고 다 잊어버려서 그렇고, 엉뚱한 영화 볼 때 그렇지 실제로는 우리가 잠잘 때나 우리가 밥 먹을 때나 우리가 엉뚱한 생각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주의 이름이 그 사람에게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일종에 우리가 언약궤가 되는 거죠.
언약궤가 위에다 깔고 나는 끌려가고 주의 이름은 나를 끌고 가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 얻으리라’ 한 것이 처음 예수 믿을 때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십 년을 믿든 이십 년을 믿었든 그 순간 탁 찍어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 내 이름은 아니야.’
적어 볼게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 그 전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내 이름은 아니야.] 내 이름이니까 [나는 아니야.] 내가 아무리 철야해도 나는 아니고, 아무리 공부 많이 해도 나는 아니냐.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 이것이 실생활 늘 순간순간 튀어나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왜 주의 이름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구약에서 주의 이름은 반드시 맏이로,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혈통 안에서는 맏아들로 주어집니다. 맏아들로 주어지는 이유는, 맏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맏이가 아버지 이름으로 행세한다면 나머지 형제들은 누구한테 복종해야 돼요? 아버지 대체물이 누굽니까? 맏이한테 복종하는 것이 아버지께 복종하는 거죠. 이게 바로 아브라함이 복을 줘야 복을 받고, 아브라함이 저주하면 저주받게 돼 있는 그 방식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믿음의 조상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누가 장자냐 하면, 이삭이 장자고, 이삭에게 누가 장자냐 하면, 바로 먼저 태어난 에서는 아니고 야곱이 축복을 받았어요. 복이 꼭 두 명, 세 명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꼭 맏이한테 줘서 하나님의 복이 임한 그 맏이를 다른 사람인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시시하게 보면 저주받고, 복된 자로 본다면 그 사람은 복 받는 거예요.
여기서 로마서 8장을 찾아봅시다. 로마서 8장 29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맏아들을 통해서만 구원하는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맏아들 되게 하고. 그러면 형제들은 뭐냐? 형제들이 아버지 바로 만난다?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구원한 적이 없어요. 그런 건 이슬람교에 찾아요. 불교는 내 안에 신이 있기 때문에 내 안에 신 가지고 신을 찾으면 돼요.
그러나 복음에는, 성경에는 내 안에 신 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창조한 요소가 있다, 그 창조한 것을 통해서 창조자를 만난다. 철학적으로 신의 존재론적으로 그렇게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일반적인 상식이고. 성경을 보게 되면 반드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신 자를 통해서만 건지게 돼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아들만이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고 죄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죄인은 천국에 못 가거든요. 그래서 죄에 물들지 않은 증거가 30절에 보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미리 정해놓고 천당 보내면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로 하여금 불러서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해야 되고, 그 다음에 영화롭게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비록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라도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고, 그들이 죄인에서 의인된 것은 순전히 저들 공로가 아니라 맏아들 되시는 분의 의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그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을 때 어떻게 믿는 자? 나는 아니고, 내 의는 아니고, 내 거룩은 아니고, 내 선행은 아니고, 내 열심은 아니고 반드시 나는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성도의 일상생활에서 균열이 일어나면서 가끔가다 쏟아져 나와야 됩니다.
지금 제가 강의 한 것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이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언약궤에 의해서입니다. 언약궤가 왜 언약궤냐?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언약궤니까 약속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만약에 ‘나’가 있다면 나의 이름이 있지요. 나의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서 모든 행함이 나오고, 그 행함은 나에게 속해야 됩니다. 전쟁이다. 그러면 내가 승리해야 돼요. 그런데 시편에 신앙에는 뭐라 하느냐? 전쟁이 있다 할 때 내가 내 이름으로 활 들고 창 들고 나의 승리로 가겠다는 게 아니고, 이 전쟁 뭘 없애느냐 하면, 나의 행함, 나의 의지, 나의 욕망, 나의 기대 이런 걸 다 없애고, 이 전쟁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약속 성취하기 위해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노선이 이리로 가버린다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름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을 통해서 방향이 이렇게 되도록,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렇게 되도록 반드시 갈 때는 여기서부터 바로 가는 게 아니고,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42장부터 45장까지 ‘나’가 누구냐 하면, 바로 열두 명이 대기해요. 열두 명이 누구죠? 요셉의 형제들이에요. 아버지가 이 사람한테 뭘 받았다? 맏이로서 복 받은 걸 알았죠.
그러면 열둘 가운데 누가 맏아들입니까? 누가 복 받고 싶어요? 사람들은 누굴 지목했습니까? 맏이가 뭐예요? 막내입니까, 중간입니까? 맏이 뜻이 뭐예요? 제일 먼저 태어난 사람이잖아요. 그럼 누굽니까? 르우벤이죠. 르우벤은 분명히 아버지한테 복 받을 거라 생각했고, 야곱도 그렇게 생각했고, 다만 요셉을 사랑했지만. 전부다 심지어 요셉도 그렇게 생각했고 다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이게 나 아닙니까. 거기서 나의 이름이 나오고, 나의 영광, 나의 명예,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자존심을 위하여 살다가 모든 행함이 전부다 끊어져버리죠.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아브라함 뒤에 모든 약속은 어디서 이뤄진다? 약속의 땅에서 이뤄지잖아요.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절대로 안 돼요. 아브라함이 애굽 갔다가 도로 어디로 와야 됩니까? 도로 여기로 와야 되잖아요.
약속의 땅에서 이뤄지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전부다 약속의 땅에서 이뤄졌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열두 명 가운데서 탈락된 자가 있죠. 버림받은 자. 누굽니까? 요셉은 어디로 갔습니까? 애굽으로 갔지요. 이건 저주 받은 땅이에요. 애굽은 약속 받은 땅이 아니잖아요. 버렸으니까. ‘에이 너는 필요 없어.’ 필요 없는 그 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맏이가 돼있어서 도리어 아버지하고 형제들 어디로 올라갑니까? 전부다 그들이 버렸던 곳으로 가는 거예요. 이 방향입니다. 이게 십자가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우리가 그렇게 미워하고, 그렇게 싫어하고, 진짜 두 번 다시 꼴 보기 싫은 그런 이야기, 그런 복음의 이야기 속으로 집어넣어서 우리가 가해자며, 우리에 의해서 피해 본 예수님이 버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서 누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 바로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약속 차원에서 준비된 과정인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람들이 흔히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를 그려보겠습니다. 십자가를 누가 죽이느냐를 봐야 돼요. 그 당시에 누가 예수님을 죽이느냐 이런 걸 생각 안 하고 그냥 십자가 봐버리면 이 사람은 뭐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다 제치는 사람, 안 보는 사람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고, 사도서신을 보면, 십자가가 그냥 생긴 십자가가 아니고, 누가 예수님을 죽이느냐에요.
마태복음에 보면 누가 죽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죽였지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이해할 때는 십자가에 죽인 사람하고 결합해서 십자가를 이해해야 돼요. 바리새인들이 뭐하는 사람이냐를 봐야 되죠. 첫째로 여호와만 섬기는 사람. 그 다음에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켜서 이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도 최등급으로 제일 내신 성적이 가장 높은 등급에 속한 사람이 누굽니까? 바리새인이죠.
그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누구든지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씀 지키는 모델케이스가 누구다? 바리새인입니다. 아무리 오늘날 인간들이 말씀 지킨다 해도 누구보다 못하다? 바리새인이 지키는 것보다는 못해요. 최고의 말씀 준수.
세 번째, 자기가 지킨 말씀준수로써 복도 받고, 구원도 받고, 기도응답도 받는다고 여기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디 다 들어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두개인은 특별히 뭐냐 하면,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 한 통속으로 예수 십자가에 죽였거든요.
사두개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한다. 이래 보는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한 것은 성전 안에 뭐가 있었습니까? 언약궤가 있었어요. 물론 나중에 언약궤가 없습니다만. 언약궤가 있는 곳에 성경에 보니까 누가 있다? 주의 이름이 있다. 따라서 성전을 지키는 것은 언약궤를 지키는 것이고, 언약궤를 지킨다는 것은 언약궤에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결합해 보면, 실천적으로 인간의 삶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되고 그리고 종교적인 제사를 충실하게 순종할 때 이 둘이 결합해서 하늘나라에 구원받는다고 여겼던 이 자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면 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오늘날 누구의 대표자입니까? 모든 인간이면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종교적인 품성을 대변해주고 있는 사람이 이 사람들이죠.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게 이것 하고 이것 아닙니까. 예배당 무시하지 말고, 말씀을 실천해야 되고 순종해야 된다. 이 두 무리가 결합해서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두 가지 요소가 바리새인, 사두개인 요소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내 행동이니까 나의 이름에서 나왔지요. 결국 이 둘 없다는 것은 나도 아닌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라는 것은 나 자체를 죽이는 거예요. 나에게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안 죽일만한 요소가 안 나올 법을 없다는 겁니다. 나한테 어떠한 요소가 나와도 인간은 그것을 고이고이 담아서 보석함에 담아서 훌륭한 자기의 기념품으로 마음 한 구석에 보관합니다.
십오 년 전에 기도원에 은혜 받았고, 오 년 전에는 열두 명 전도했고, 십삼 년 전에는 교회재정 구멍 났을 때 내가 천만 원 냈고, 작년에는 교회 피아노 없어서 내가 피아노 들여놨고, 이것. 여러분 그런 것만 있는 줄 알아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오 년 전에는 교회 싫다고 소주 먹고 땡깡 부리고 교회 왔고. 두 번 다시 예수 안 믿는다고 성경책 불태워버리고. 이런 것도 포함되죠. 그리고 팔 년 전에는 바람 피웠고. 이런 것도. 온갖 것. 십오 년 전에는 야동 봤고, 삼 년 전에는 집사님하고 멱살 잡고 교회에서 싸웠고.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선, 자기가 못했던 악, 주님께서 십자가 질 때 둘 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보관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요셉은 나중에 장자가 됩니다. 요셉이 두 아들에게 직접 옛날에 야곱이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해버려요. 그래서 역대기 5장에 장자가 르우벤에서 요셉으로 바뀌었다. 누가 하늘의 복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다른 형제들은 거기에 종속 되어야 돼요. 종속되지 않으면 저주 받습니다.
그런데 복을 주는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복 주는 자리가 지역적으로 애굽이었죠. 약속의 땅이 중요하지만 특히 복을 주는 장자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모든 형제가 그를 좋아했습니까, 싫어했습니까? 싫어한바 되고 모든 자가 그를 버렸죠. 그 버린 그 자리에 형제들이 참여해야 돼요. 이것이 오늘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성도를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아니고, 미안합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주님 안 믿어서 미안합니다.’ 이게 아니라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과 아픔과 외로움과 주님이 우리 때문에 버림 받아서 아팠던 그 고통 이런 것을 맛보도록 주께서 이끌어내십니다.
이렇게 되면 거기서 뭘 만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입니다. 다른 말로 대신 죽으심과 그 다음에 앞에 마주치는 것은 내 자랑. 내 자랑 가운데 자기 선행도 포함되지만 악행 해서 그걸 회개하고 반성했던 선행, 이거 중요합니다. 내가 나쁜 짓 했지만 얼마나 인간성이 좋았기에 나쁜 짓하고 난 뒤에 그날 철야기도해서 회개하고 반성했습니다. 이것도 내 자랑이에요. 내 마음의 보배함에 새겨져 있는 거예요. 이 자랑이 주님의 십자가 대신 세워질 때 이것 양쪽 다 의미 없습니다.
왜 두 번째 선행도 무의미하지만 자기가 악했는데 회개했다, 반성했다 이것도 무의미하냐 하면, 만약에 이걸 생각해 보면, 시선이 그리스도에게 가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가는 척하다 도로 자기한테 와버려요. 이거 못 됐지요.
목사가 ‘김 집사님, 요새 왜 교회에 안 보입니까?’ 김 집사가 할 말 없으니까 ‘지난달에 수요예배 참석 안 해줬습니까?’ 미리 농땡이 필 줄 알고 지난달에 수요예배까지 참석해줬잖아요. 예수님 근처 가다 도로 유턴해버려요. 이건 누구 이름으로 삽니까? 자기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은 주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믿는다는 자기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신앙세계에서 이런 점을 잘 참작을 해주셔야 돼요.
이런 게 있다고요. 제가 어릴 때 기억인데 일가친척들, 어른 세계에서 어떤 것으로 대화 하는가 쭉 봤어요. 우리 집안도 장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장사하는 이야기, 여자들 모이면 애 이야기보다 장사하는 이야기 많이 했어요. 오늘 여기 울산 오려고 시내버스를 탔는데 나이 육십 넘은 할머니 비슷한 사람들이 아주 떠들면서 사는 이야기 다 해요. 내용이 뭐냐 하면, ‘누구 집 껌둥이하고 산다는데 아직 사나’부터 해서 누구 친척 이야기 하더란 말이죠.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릅니까? 그 사람 주의 이름 안 부르지요. 평소에 나누는 대화가 껌둥이하고 아직 붙어사는가 몰라. 사랑의 대상이 누구에요? 자기 자신이죠. 우선 나를 사랑하고 그 다음 내 자식, 내 남편 사랑하고 순서가 그렇게 되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주의 이름 부르라 하면 억지로 부를 수 있다 이 말이죠. 총으로 협박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든지, 아니면 봉투에 이십 만원 넣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시면 이십 만원 드리겠습니다’ 하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거든요. 불러봤자 누구 사랑입니까? 자기 사랑인 거예요.
그래서 지금 생각하니까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했던 모든 이야기를 한 묶음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전부다 자기 사랑이에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6장 보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계명이 아니고, 법이 아니에요. 이걸 지키라가 아니라 헌법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약에 우리 삼촌이나 고모가 누구 하나 여자를 남자를 사랑한다면 조카들 붙들고 하는 이야기마다 자기 애인 이야기한다고. ‘삼촌 그만해라.’ ‘너거 숙모 될 사람, 얼마나 예쁜 줄 아나? 내가 뿅 간다.’ 만날 왔다 하면, 자기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한다고. 여러분 그렇습니까? 지금 주님 이야기합니까? ‘경제가 어떠니, 울산마저 무너지다니?’ 이러면서. 울산화학공단이 문을 닫고, 중국의 수출 길이 막혀서 앞으로 우에 살지 모르겠다. 앞으로 교회 못 나올 것 같다. 맞벌이 한다고. 전부다 그 이야기에요.
그래서 요새 김 집사님 안 보이는데. 옛날 교회 많이 나가줬잖아요. 옛날에 성경공부 많이 했잖아요. 이게 뭐냐? 십자가 갔다 도로 와버렸어요. 자기의 마일리지 쌓아놨어요. 복음 믿고, 성경공부하고 전부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 이름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근사한 총 만들고, 병거 만들고, 탱크 만들고, 기마부대 만들었어요. 그것도 복음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기독교 십자가 모양 비슷하게 만들어서.
신약에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면 그런 모양새, 법 지키기 그런 것 가지고 나한테 갖고 오지 마라. 내가 아예 그런 것 안 원한다. 네가 날 사랑하면 그만이지 뭐 법이 어떻고, 십일조가 어떻고, 교회를 몇 번 가고, 기도를 몇 시간 하고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거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앞에 뭐가 있어요? 너를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라.
인간의 힘으론 사랑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는 항상 꼴보기 싫은 리스트 중에 포함돼있어요. 북한의 김정일부터 해서 알카에다부터 해서 나한테 돈 떼어먹고 도망간 사기친 놈, 그 리스트 속에 예수도 포함돼있어요. 예수는 내가 싫어 버린바 속에 포함돼있고 내가 좋아하는 예수는 따로 만들어내요.
여러분 이것 하나 아셔야 돼요. 구약에서 우상이 뭐냐 하면, 이사야 같은 경우 우상의 정의 이렇게 내립니다. 알아놓으시면 좋아요. 우상이란 조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듬으면 되거든요. 신약 시대 우상이란 정신적으로 다듬는 신, 내 욕망, 희망과 내 기대, 맞춤 양복처럼 맞추는 신이 우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했거든요. 그리고 “내가 전하는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미 우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은 가짜 예수요, 가짜 복음이요, 가짜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누구하고 식사를 했는데 그 목사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이래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도 맞고, 다른 사람 복음도 맞고, 내 복음도 맞고, 네 복음도 맞다는 거예요. 이근호는? 이근호도 맞고, 박영선도 맞고.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거는 사도 바울이 과했고, 오바했고. 그게 샌더스라는 유명한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학자의 주장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철이 없어서 세상을 잘 몰랐다는 거예요.
그 오류가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의 계시가, 모든 성경 계시가 예언자의 계시가 미래에서부터 와서 현재를 통해서 과거를 정죄하는 식으로 온다는 것을 모르고, 그들은 말하기를 과거가 쌓여서 현재가 되고, 현재가 쌓여서 미래가 되는 식으로 생각해요.
사도 바울은 이미 삼층천에 올라갔다 이 말이죠. 이미 끝을 안 입장에서 십자가 외에는 예수의 피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요한계시록의 사도 요한도 피로 말미암아 흰옷 입고 온 사람이라고 이미 미리를 다 알고 이야기했는데 소위 성경을 펼쳐놓는 유명한 언어학자,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사도 바울은 아직 미래까지 몰랐기 때문에 그따위 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독단적인 소릴 했다는 겁니다.
사람이 성경을 볼 때 자기 입장을 반영하여 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그냥 부여하면 안 돼요. 반성하면 또 나의 괜찮은 속성이 되니까 난 반성도 잘하고 회개도 잘해. 이게 아니고 십자가 앞에 서면 내가 그토록 싫어하신 분이 내 대신 피를 흘린 거예요.
하나님이 요셉에게 모든 형제들을 불러내느냐 하면, 요셉을 뜯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요셉을 보냈다는 사실이 들어 있어요. 모든 형제들이 버린 것을 창세기 45장 5절에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나를 버린 게 아니고, 누가 나를 먼저 보냈다. 말이 참 좋잖아요. 형들은 요셉을 버린 것으로 보지만 하나님께서 미래에서 보면, 형을 위하여 요셉을 앞서 보냈다는 겁니다. 방향이 달라요. 지옥 가지 말라고.
우리 보기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보고 지옥 가지 말라고 먼저 막았는데 우리가 발로 밟아서 그 터진 피를 보고 ‘아, 우리가 밟았구나’ 하는 것을 알고, 우리가 철없이 주님이 보내신 구원자마저 우리가 싫어하는구나. 도대체 내 안에 어떤 속성이 있기에 나를 구원하는 분을 이렇게 싫어할 수 있느냐? 어느 정도로? 나보다 덜 좋아하잖아요. 나보다 덜 사랑하잖아요. 내가 제일 사랑스럽고 예수님은 한참 뒤에. 그 다음에 내 자식이고, 내 남편이고, 그 다음 저 뒤에, 뒤에 한참 뒤에 예수 있다고.
선 볼 때 예수님 믿습니까? 그런 이야기 안 하지요. 대번 파토 나니까. 직장은요? 부모 가운데 난치병은 없고? 그 다음에 서너 번째에 교회는 다니고? 복음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지요. 우리는 매일 살면서 기껏 한다는 게 요새 그 집에 깜둥이하고 사나? 이런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내 사랑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 이걸 미리 아시고 주께서 미리 메시아를 보내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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