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간 아덜 집에 갔다가 오늘 오후 돌아온 주인님이 환하게 웃으며, "아직 점심 먹덜 않았쪄?" 하고 말한다. 난 "아니, 늦게 일어나서리 정오 쯤에 아침겸 점심으로 먹었지." 라고 대답하니, 배가 고프냐고 묻지도 않고 곧장 "기럼 쪼끔만 기둘려. 내가 밥 차려 줄 텡게."하면서 주방으로 들어간다.
곰탕거리를 가스레인지에 얹어 불을 켜고, 무채를 곱게 썰더니 고추장에 슥슥 비벼 내고 난 다음 김치를 꺼내 맛깔스럽게 썰어내더니, 김 몇 장을 구워 내곤 말한다. "맛있게 드슈. 씻고 나올 텡게." 하면서 세면장으로 들어가 버린다.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자 먼저 하얀 김치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울 엄마, 아부지 생각에 눈시울이 더워 온다. 가난하게 살았던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언제나 하얀 김치를 아부지 밥상에만 올려 놓으셨다. 요즘에야 배추의 하얀 줄기 부분보다는 파란 잎 부분이 훨 영양가가 높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 시절 어른들은 김칫독에서 꺼낸 김치를 썰면서 하얀 줄기 부분은 웃사람들께 내어놓고, 잎 부분은 으레 여자들이나 아이들의 차지였다.
아버지가 부재 중이실 때 어머니는 자주 우리들에게 "에공! 일본에서 기냥 살지 돈도 없음서 왜 조선으로 나와 우릴 이 고생 시키는지 몰러."라는 둥, "느그 아부지는 농삿일은 제쳐 두고 마을 일만 하시제."라는 둥 온갖 아버지의 훙을 보셨는데...그런 어머니가 아버지께 드리는 음식 만드는 데에선 언제나 정성을 다하셨으니, 아버지에 대해 흉 보는 것과 아버지께 정성을 다하는 게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동아전쟁 중 물자수송 관련 업무에 징집되었다가 트럭이 뒤집어지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온몸에 화상(火傷)을 입으셨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시 생업에 뛰어 드신 데다, 해방이 되자 그런 상흔(傷痕)을 오롯이 짊어진 채 무일푼으로 귀국했으니 이후의 아버지의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던 슬픈 세월일 수밖에 없었다. 화상으로 온몸에 피부가 벗겨진 건 그렇다 쳐도 인후(咽喉)까지 심각한 손상을 입는 바람에 아버지의 기침은 그칠 때가 없었다. 아버지의 그때 그 모습들을 지금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나온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세상에 좋다는 약은 어디를 가서든 구해 갖고 오시고, 몸에 좋다는 음식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드렸다.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아버지는 동네 이장 일을 하셨는데, 당시 마을에서 문자를 깨우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일을 놓지 못하셨다. 해서리 아버지는 늘 밤이 이슥해서야 귀가하곤 하셨는데, 아버지가 오시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잠시 달그락 소리를 내다 소반에 저녁상을 차려 내 오셨다. 특이한 것은 하얀 이밥에 앞에서도 말했듯 하얀 김치가 올려져 있는 데다, 빠지지 않고 올려진 갈치, 고등어와 같은 생선은 항상 바싹 구워진 것이었다. 하얀 이밥에, 하얀 김치, 글고 바싹 구운 생선은 아직까지도 어젯일처럼 생생하게 그려지는 아버지의 밥상이었다. 물론 우리에겐 꽁보리밥에 이파리 김치와 멸치볶음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또 기억나는 건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건강 회복을 위해 닭, 염소 등 보신용 고기를 많이도 장만하셨다는 거다. 집에 일부러 염소를 길러 겨울에 잡아서 가마솥에 푹 고은 후 한 달여를 아버지께 드리는데, 염소 잡는 일은 아버지가 그걸 싫어하시니 그 일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으니...덕분에 집 안에서 염소, 개 잡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한창 커가는 우리들에게 누린내는 충분히 견딜만 한 내성(耐性) 이 생기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돌이켜 보아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우리 어머니는 남자 못지 않게 참으로 억척스런 분이셨다. 주인님이 내어준 하얀 김치를 보며 불현듯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시울 적시지만, 혹여 주인님 흉 볼까봐 언능 곰탕국에 밥을 말아 훌훌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