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우춘(遇春, 1530.03.27.~1579.12.23)
公의 자(字)는 응서(應瑞), 2세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종실(宗實)의 현손(玄孫),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정(訓練院正) 변림(變林)의 장자(長子)로 울산부 서오리(西五里) 말응정에서 태어나서 나중에 웅상면 주남리에 입향(入鄕)·시거(始居)하였다.
벼슬은 충순위(忠順衛)를 거쳐 선무원종공신 관(官)은 계공랑(啓功郞) 행(行)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이 되었다. 묘소는 울주군 웅촌면 대복리 대양산 간좌(艮坐)이고, 봉분이 웬만한 왕릉(王陵)처럼 크고 웅장하여 주위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다.
중묘(中廟) 경인 3월 27일 졸하셨으며, 선조 기묘(己卯) 12월 23일에 묘는 대양 선영하 제이위 량좌(良坐)이고, 배는 안인(安人) 흥려박씨 장무공(莊武公) 允雄之后父 자공(自恭)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고, 조(祖)는 치장절충장군(致章折衝將軍)이고, 증조(曾祖)는 조진진의(祚進振義) 부위(副尉)이었으며, 중묘(中廟) 갑오(甲午) 8월 14일 졸하였다. 선조(宣廟) 계사 8월 4일 묘는 합폄(合窆)이고 비석이 있으며, 비석은 치암 남경의가 찬함
아들에는 겸수(謙受), 겸록(謙祿) 겸광(謙光), 겸복(謙福), 겸익(謙益)
울산 울주군 웅촌면 대복리 산 3-7
비신높이:120cm, 너비:50cm 두께:21cm
직장이공묘표(直長李公墓表) 원문
安人興麗朴氏祔啓功郞行尙瑞院直長李公之墓
有明朝鮮國啓功郞行尙瑞院直長李公墓表
鶴城李氏先有訓練院正尙瑞院直長父子兩世墓道之托及於景表按直長公 諱遇春字應瑞嘉靖庚寅三月二十七日生於扶鷹亭晩家周南里萬曆己卯十二月 二十一日卒配興麗朴氏禦侮將軍自恭女甲午八月十四日生 癸巳八月四日卒 訓鍊公及高氏合窆之下左右而睾如者是其藏也公先世及五子見訓練公墓碣謙受 生一男一女男駿發贈掌隷院判決事女適朴珪謙綠謙光謙福皆無後謙益生 六男二女南廷元未娶卒次廷憲察訪次廷義廷禮廷信女長適李光恪次適金重 碩駿發□□□□□廷憲子文佐文佑廷義子文葛生員文翁廷禮子文白廷智子文郁廷信子文相文徵文植文根六世孫養吾隱居讀書能文章覲吾文科官兵曹正郞 後進多力學之此豈先世厚積之驗嗚呼兩世文獻俱泯公舊兩廷義氏所撰旦曰 無意仕宦優游田里雖其與世相違而然自得之趣可以想見然先輩質而不夸 懼其 誣祖而寧失於略還可恨也惟傳其信以示後之人知其爲某之子某之祖而剪伐不 及於宰木則是子孫報本無窮之心哉
通政大夫前行兵曹佐郞永陽南景羲撰
六世孫養吾謹書필
崇禎後四癸亥十一月二十六日 立
整下敎宗孫依址歸正
우춘 묘비석 번역문
전면
안인 홍려박씨를 합장한 제공량 행상서원직장 이공의 묘
후면
학성이씨 선대에 훈련원정과 상서원직장 부자가 있으니, 이 두 분의 묘도를 나 남경희에게 부탁했다. 삼가 살펴보니 직장공은 휘 우춘(遇春) 자 응서(應瑞) 이다. 중종 25년(1530) 3월 27일 말응정 만가(晩家) 주남리에서 태어나서 선조 15년(1579) 12월 21일 사망했다. 부인 홍려박씨는 어모장군 자공(自恭)의 딸이다. 중종 29년(갑오, 1534) 8월 14일에 태어나서 선조 26년(1593) 8월 4일 사망 했다. 훈련원정 공(公) 및 고씨를 합장한 묘 아래에 좌우 봉분이 있으니 두 분의 묘소이다.
공의 선세 및 다섯 아들이 훈련원정의 묘갈에 보인다. 겸수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준발(駿發)은 증(贈) 장예원판결사이고, 딸은 박규(朴珪)와 결혼했다. 겸록(謙祿), 겸광(謙光), 겸복(謙福)은 모두 후사가 없다. 겸익(謙益)은 6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정원(廷元)은 결혼 전에 사망했다. 다음 정헌(廷憲)은 찰방(察訪)이고, 다음은 정의(廷義), 정례(廷禮), 정지(廷智), 정신(廷信)이다. 장녀는 이광계(李光啓)와 결혼하고, 차녀는 김중석(金重碩)과 결혼했다. 준발은......)이다.
정현의 아들은 문좌(文佐), 문우(文佑)이고, 정의의 아들은 생원 문구(文耈)와 문옹(文翁)이다. 정례의 아들은 문백(文白)이고, 정지의 아들은 문욱(文郁)이고, 정신의 아들은 문상(文相), 문징(文徵), 문식(文植), 문근(文根)이다.
6세손 양오(養吾)는 은거하여 독서했으니 문장에 능통하다. 근오(覲吾)는 문과에 합격했고, 관직이 병조정랑이었다. 많은 후진들이 학문에 힘쓰니 이것이 어찌 선세에서 후하게 덕을 쌓은 징험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양세의 문헌이 다 없어졌는데, 정의씨가 찬술한 공의 옛 묘갈명에 다만 이렇게 말했다. "벼슬할 뜻이 없어 전리(田里)에서 노닐었다.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그러했지만, 스스로 취한 아취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선대의 자질이 자랑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 선조를 무함하기 보다는 차라리 돌려주는 것을 감수하려 했으니 가히 한스럽도다."
오직 이 신뢰를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그가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선조임을 알려 무덤가의 재목(宰木)을 베지 않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손들이 선조에게 무궁하게 보답하는 마음일 것인저!
우면
통훈대부 전행병조좌랑 영양 남경희 짓고
6세손 양오 삼가 글씨와 전액을 씀
철종 14년(1863) 11월 26일 세움
하교에 따라 종손이 옛터에 따라 사실을 바로잡음
해설
이우춘(李遇春)은 조선 중기 무신이다. 1530~1579. 이변림의 아들이며, 이겸수 이겸익 형제의 부친이다. 비문에 본인의 행적보다 후손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고, 말미에 "종손이 옛터에 따라 사실을 바로 잡는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합력하여 묘소를 재정비하고 종통(宗統)을 과시하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