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생물학적인 행복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오해를 살 위험은 있지만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두어야만 하겠다. 되풀이해 두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모두 관능적인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심론자와 유물론자는 언제까지나 서로 오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같은 언어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말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뜻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도 또한 이 행복보전론 가운데서 유심론자에게 속아 넘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참다운 행복이란 다만 정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로 하자. 그리고 곧 우리의 논지를 내세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정신이란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행해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란 주로 소화가 잘 되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주로 오장 육부의 운행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고 있는 명성이나 존경을 잃지 않도록 하려고 생각한다면 저 미국의 어떤 대학 총장의 소매 밑에서라도 숨어야만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의 대학총장은 신입생의 각 클라스에서 훈시를 할 때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꼭 두 가지 있다. 즉(성서)를 읽을 것과 용변을 잊지 말 것."
실로 대단한 슬기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총장의 몸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현명하고 온정이 넘치는 분인가. 내장만 제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불행하다. 문제는 다만 이것뿐인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추상적인 문제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진정 행복한 때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사실에 비추어 해부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다시 말해서 슬픔, 괴로움,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환희하고 부르고 있다.
이를테면 가령 내 경우라면 진짜 행복한 한때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푹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의 공기를 마시면 폐가 충분히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싶어하는 가슴께의 피부나 근육에 유쾌한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 위에 길게 발을 뻗고 있노라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가는 그러한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타는데, 아름답고 깨끗한 샘물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흐뭇하게 들려온다. 나는 신발도 양말도 벗어던진 채 펑펑 솟아오르는 그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근다. 이러한 한 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꼭 드는 친구들뿐이다. 두서도 없는 정담이 끝없이 경쾌하게 계속된다. 몸도 마음도 천하태평인 그러한 한 때.
어느 여름날 한낮이 겨워,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15분쯤 지나면 초여름의 소나기가 틀림없이 퍼부을 것 같다. 비를 흠뻑 맞고 싶지만 우산도 받지 않은 채 빗속으로 나가는 것도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서 얼른 밖으로 나가 들 한복판에서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구실을 댄다.
이윽고 흠뻑 젖어서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는 '허, 그만 비를 만났지, 뭐야' 하고 말하는 그 한때.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듣거나 그 통통하게 살찐 종아리를 볼 때면 도대체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뜻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정신적인 뜻에서 사랑하는지 그런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느끼는 기쁨과 육체가 맛보는 기쁨을 구별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적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즉 그 여인의 웃음, 미소, 머리를 가누는 모양, 여러 가지 일들을 대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을 해부하거나 하는 것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결국 어떤 처녀이거나 좋은 옷을 입었을 때에는 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입술 연지나 볼 연지에는 여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또 미용의 지식에서 오는 정신적인 차분함이나 고요함이라는 것도 있다. 이런 느낌은 곱게 단장한 그 처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진실하고 뚜렷한 것이지만, 세상의 정신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런 심정은 전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육신을 지닌 몸이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딱 갈라 놓는 차이란, 있다면 정신의 세계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그런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촉각, 청각, 시각에는 도덕성이라든가, 비도덕성이라는 것은 없다.
인생의 적극적인 기쁨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주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며, 또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이란 매우 많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공연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보다는 재빠르게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동서양의 모든 위대한 인생 애호자들의 쓴 글 가운데에서 다소의 문례를 뽑아서 그들이 스스로 즐거운 한때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이 귀로 듣거나 코로 맡거나 눈으로 보는 그런 소중한 감각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고찰해 보자.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숲의 시인인 도로우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얻은 시취이며, 굉장히 심미적인 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귀뚜라미는 돌틈에 얼마든지 있다. 한 마리뿐이라면 더욱 흥취가 깊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언지 모르게 유장한 놈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목숨이 다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생물의 운명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벌레 소리를 유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헛되이 발버둥치며 허덕이는 인간의 번뇌를 생각할 때 그런 느낌도 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온갖 시간의 관념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유장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봄의 욕정이나 여름의 광열이 한창일 때에 홀로 가을의 서늘함과 원숙함을 연상하게 해 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새를 향해 귀뚜라미는 말한다. "너희들은 어린이들처럼 일시적 충동으로 울고 있구나. 자연은 너희들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원숙한 슬기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계절의 변화는 없다. 우리들은 4계절의 자장가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래한다. 풀숲에서 영원한 노래를. 미리 그것이 천국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새삼스럽게 끌어올려 천국으로 보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5월에도 11월에도 영원히 변함이 없다. 안 그런가?
고요한 슬기, 그 노래에는 산문과 같은 확실성이 있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이슬을 마신다. 교미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속절없는 사랑의 선율이 아니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원히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4계절의 변천하는 테두리 밖에서 그 가락은 진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지없이 고요하게 맑은 그 마음으로만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휘트먼이 지녔던 후각, 시각, 청각이 그의 정신성을 높이는 데에 얼마만한 힘이 되었는지, 그리고 또한 그가 그러한 감각들을 얼마나 중대시했는지, 다음의 글에서 찾아내어 보라.
아침부터 내리는 눈보라는 온종일 그칠 줄 모른다. 휘날리는 눈을 맞으며 같은 숲, 같은 길을 두 시간 가량이나 나는 걸었다.
바람은 멎었다. 그러나 소나무 사이로 낮은 음악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매우 뚜렷한 이상한 소리, 마치 폭로 떨어지는 소리 같다.
때로는 다시 흘러 떨어지는 듯한 소리, 온갖 감각, 시각, 청각, 후각의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 눈은 내려 쌓인다.
상록수, 물푸레나무, 월계수, 그 밖의 모든 나무라는 나무의 수많은 잎과 가지 위에 쌓이고 쌓여 잎사귀는 하얗거나 부풀어 오르고 에머랄드 빛깔의 가장자리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찬 청암송의 높고 꼿꼿한 기둥...... 아려한 송지 냄새가 눈 냄새와 한데 섞인다
(냄새가 없는 것은 없다. 눈까지도 향기는 있다. 다만 여러분이 냄새를 맡아 낼 수 있느냐가 문제다.
똑같은 두 장소란 없고 또 시간의 경우에도 한 때와 한 때는 어딘지 다르다. 전혀 같을 수는 없다.
정오와 한밤중, 겨울과 여름, 바람이 부는 한 때와 조용한 한 때, 그 향기가 얼마나 다른가!)
정오와 한밤중의 향기, 겨울과 여름의 향기, 바람 부는 한때와 고요한 한때에서 풍기는 향기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시골에서 사는 것보다 도시에서 사는 편이 대개 불쾌하다는 것은 도시의 시각, 후각, 청각의 변화와 뉘앙스가 시골보다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단조로운 잿빛 담장과 시멘트를 깐 보도 속에 그것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흐뭇한 한 때의 참된 한계, 참된 자격, 참된 성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따지게 되면 중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절에서 소개하는 어느 중국 학자가 쓴(유쾌한 한때에 관한 33절)을 번역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전에 그가 쓴 글과 비교하는 뜻에서 휘트먼의 글 가운데서 다시 대목을 인용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으면 중국인의 감각과 닮은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맑게 갠 상쾌한 어느 날, 공기는 마르고 바람은 산들거리며 산소로 가득차 있다. 나를 감싸고 나를 녹이는 건전하고 말 없는 아름다운 갖가지 기적들...... 나무, 물, 풀, 햇빛, 첫서리......
그 가운데서 내가 오늘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가을에 특유한 이상할 만큼 투명한 하늘이다. 구름이라고는 크고 작은 흰 구름뿐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이 푸른 하늘을 난다.
아침나절에는 줄곧(아침 일곱 시부터 열 한 시까지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빛은 투명하고 생생한 푸른빛이다.
그러나 한낯이 가까워지면 빛은 엷어져 두서너 시간 동안은 마치 잿빛이다...... 그리고는 점점 더 빛은 바래서 황혼으로 접어든다......
커다란 나무가 서있는 언덕 위의 짬 사이로 찬란한 빛을 던지는 낙조를 바라본다. .....
불꽃의 방사, 장대한 담황색 경관, 그리고 붉은빛이다. 수면에 비스듬히 넓은 은빛 광택...... 맑게 가라앉은 그림자, 사광, 섬광, 그림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선명한 색조.
굉장히 흐뭇한 가을의 몇 시간 동안 분명히 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무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주로 이 하늘이 있기 때문에 가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로 날마다 하늘을 보지만 제대로 똑바로 참다운 하늘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더 바랄 나위 없는 유쾌한 한때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예전에 읽은 일이 있는데 시인 바이런은 숨을 거두기 전에 친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전 생애를 통해서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는 단 세 시간밖에 없었노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임금님의 종에 관한 오랜 전설이 독일에도 있다. 가까운 문밖으로 나가 숲의 나무 사이로 빛나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이런과 종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
(매우 즐거웠던 한 때의 기억을 기록해 본 일이라곤 없다. 그런 순간을 맞게 되면 메모를 쓰느라고 모처럼의 아름다운 느낌을 잃게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그저 기분에 맡길 따름이다. 마음내키는 대로 간다. 고요한 황홀감 속에 몸을 내맡긴 채).
그러나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순간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
또는 그것과 비슷한 한 때를 말하는 것인가.
굉장히 미묘하여‥… 삽시간에 사라지는 색조인가,
뭐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내키는 대로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즐기게 해 주소서.
신이여, 당신은 그 투명한 짙푸른 심연 속에 나와 같은 환자를 위한 명약이 있나이까
(오, 편안하지 못한 몸의 상태와 마음이 번거로움이 지난 3년 동안 계속되었나이다).
신은 대기를 통하여 나에게 신묘한 명약을 남 몰래 떨어뜨려 주셨나이까.
(임어당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