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로마 10,11).
숨겨진 수치심을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드러낸다면
수치심은 그 힘을 잃을 것입니다.
파괴적인 수치심은 비밀과 침묵 속에 숨어있기 때문에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고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존 브래드쇼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비탄으로부터 나와서
고통을 끌어안아야 한다.
진실로 느끼고 있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
우리는 이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오래 머뭇거리며 주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을
친구 혹은 상담자 아니면 영적지도자에게 드러내고
치유되기를 희망하고 단순히 괴로움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것이 단지 자기-학대로서가 아니라
변화를 위한 자극으로 작용합니다.
치유는 내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들이 지닌 깊은 열등감은
그들의 가치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가 아니라
해로운 환경에서 그들이 배운 하나의 해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이러한 파괴적인 자기-정의를 그만두고
자신들을 새롭게 평가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수치심으로 심하게 상처 입은 상태는
문의 손잡이들이 모두 밖에만 있는 방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옵니다.
우리는 말을 할 수도 없고 경고도 방어 할 수도 없습니다.
수치심을 인정하고
그 근원을 추적하는 힘겨운 투쟁을 하는 목적은
문의 손잡이들을
문 안쪽의 올바른 위치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가 우리의 세계에 들어오게 할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누구와, 언제 그리고 어떻게 가까워질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으므로 친교는 안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단순한 피해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나누고 열 수 있으며 심지어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칼 슈나이더는 건강한 부끄러움은 자기-인식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시선을 자신에게 맞추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달콤한,
한계와 약점에 대한 인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건강한 죄책감과 같이 수치심의 고통스러운 자극은
스스로 자라나는 왜곡된 이념들과 충동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물론 고통스런 감정이지만 이것을 통해
거짓되고 위장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에게까지 위장하기 위해 사용해온 역할들과
장치들을 꿰뚫어봅니다.
치유된 수치심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존 브래드쇼는 이러한 통찰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우리를 묶고 있었던 수치심의 치유는
계시적인 체험이다.
수치심은 존재의 가장 핵심에 자리하기 때문에
수치심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수치심은 참된 존재를 감추기도 하고
또한 드러내어 주기도 한다.
수치심의 치유를 통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그리고 참된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절망적인 필요성과 고통을 가리고 마취시켜 온
그 밖의 이름 붙여지지 않은 중독들로부터 해방됩니다.
부족한 자신을 좀더 편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들이 그저 적이지만은 않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소속되기를 갈망할 수 있습니다.
대중 앞에서의 예수님의 수치스러운 죽음이
그분을 치욕스럽게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수치심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자세를 잃지 않으시고 죽음을 직면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2,2).
영적 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