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화심花中花心에 그 꽃울대 심히 울려
여섯장 꽃잎 고이 쓸어모아 품에 안아담고
붉은 넉 묻어 그리다.
첫번째 꽃잎 -(01).
동짓날 섣달그믐에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아직 채 자라지 않았던 어린 어
깨를 들썩여 흐느꼈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던지, 내 어미 죽어 장사, 49
제 적에도 보이지 않던 그 눈물이 너무도 쉬이 흘렀다.
...中略...
그 날은...아침부터 꽤나 부산스레 소란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지주 어르신 경성 나들이 갔다 돌아오시는 그 적에 이리 둘러 오신 다며
주인 아주머니 둥근 얼굴 가득히 웃음이 번지었다. 지주어른이 이리 쉬러
오겠다 기별이 온 것은 채 축시丑時가 넘었을까 했던 이른 녁이었다. 도
로록- 숨 꽤나 차게 뜀박질한 작은 시동 아히가 정오 되기 전에 지주어르
신 이리 둘러 잠시 쉬고 가시겠다 전언해준 것에 주인 아주머니 함지 웃
음인 것은 어찌하면 당연지사인 일이었다.
하지만 왜 이리 허름한 주객酒客에 들려가시겠다는지, 내가 한참 고개를
갸웃일적에 부엌에서 쇠고기 국물을 우려내려고 장작불을 지피던 아주머
니, 혀를 쯧쯧- 차며 한다는 말이
"첩년 치마폭에 놀아나, 가산 반은 탕진하더니, 아- 썩을 그 첩년, 더럽게
비싼 몸뚱아리인가 보네, 그 년 피곤타고 어르신, 이리 누추한 곳에 묶겠
다고 하시니..."
그리했다. 그리고 보니, 지주어른, 당신 큰아들, 죽자마자 들여놓은 첩년이
어쩌네, 주책입네 하며, 동네 우물가에 모여 수다떨던 아낙들의 입방아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 어미 죽어나간지 두해라, 그 적까지 내치지 않고 잔심부름이나 시키며
먹여주고 재워주고 있는 실정이니, 주인 아주머니 박복치 않은 인심이야
잘 알겠다만...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다 치면, 입에 주섬주섬 쓸어 담는 그
네의 욕지거리는 걸하기 그지없었다.
"아- 너는 뭐하고 있는게야? 어여 가서 물 한 동만 떠와라"
그리 말하는 아주머니 말에 나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서릿 대문을
나섰다.
이른날 내린 눈은 아직도 채 녹을 기미도 없이 뽀드득- 숨 가뿐 소리와
함께 밟혀난다.
그 적이었다. 저어 멀리, 마을 언덕 기슭에서 아직 어리던 내겐 꽤나 생소
했을 자동차 엔진소리가 울려대던게,
그리곤 생전 처음 봤을 법한 검은 차안에서, 저어 멀리 어렴풋이 보았던
지주 어르신과, 그 뒤를 따라 내리던 그녀가...아직도 기억에 아로박힌 채
남았다.
내가 이 곳에 신세진지 석해 동안, 보지도 못한 음식들로 꽉 채워진 저녁
상을 물린 어르신과 그녀는 각기 준비해 놓은 방으로 들어섰다. 주인 어
르신 밤 중 불편하신거 없나 수발 들라며 날 떠밀던 아주머니에게 어르신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난 됐으니 넌 승호 곁에나 있어 주어라"
승호?
난 잠시 무슨 소린지 몰라 고개를 갸웃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 이름이
승호라는 걸 깨달았다.
승호...승호...여자 이름치고는 참 묘한 어감이 났다.
그리 입에 잘 맞는 듯, 편한 것 같으면서도 위태한 느낌마저 나는 이름을
가진 그녀를 따라 내가 방에 들어선지 한시간 쯤이다.
문방지가 찢어진 탓에, 남실- 꽤나 매선 겨울바람에 촛불 하나가 일렁였
다. 어언 한시간 째, 빳빳이 긴장한 채, 안면 근육을 굳히곤 무릎을 꿇고
앉아 꼼짝도 안한 탓에 다리가 저려 눈물이 나올 양 했다.
"다리 아프니?"
"아..."
웃음기 묻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거의 그 시점이었다. 울상이 되어 있
던 내가 우스웠던지, 그리 물어준 그녀의 음성에 나는 얼굴을 붉히곤 고
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던 노릇이었다.
"편히 앉으렴...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지만, 다리가 많이 저린 탓에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무릎을 펴고, 가만히 한숨을 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나에게 손짓하였다.
"이리 와보렴"
난 무릎을 굽히곤 몸을 일으켜 그녀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왠지 몰랐지만 난 그녀가 무서웠다.
흰 피부가 아닌 다갈빛 피부는 꽤나 매혹적이었고, 동그랗고 말간 갈빛
눈동자를 받쳐주는, 한쪽만 진 쌍꺼풀과 그에 따르는 긴 속눈썹은 작은
잔향에고 파르르- 진동을 냈다. 내밀어진 다갈빛 손은 작았고, 목소리는
여자치곤 좀 저음이긴 했지만 딱 듣기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은 그런 외향적인 모습과
는 좀 거리의 차이가 있었을 듯 싶다.
왜 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꽃잎 - (02).
쭈뼛쭈뼛, 다가선 나를 보며 그녀는 붉은 입술 끝을 동글게 말아 웃음소
리를 냈다. 목소리를 크게 내어 웃는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웃음보다는 미
소 쪽에 조금 더 가까워 보였다.
"올해로 몇 살이니?"
"아...여덟 살이요..."
"이름은?"
"재원이요...이재원"
내 손을 잡은 그녀는 조용한 어조로 내게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가족 이야기가 나왔을지 싶다.
"어머니는? 아까 그 아주머니?"
"...아니요...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아..미안"
괜찮다고 고개짓 했다. 하지만 전혀 괜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비가 먼저
세상을 뜨고,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전전하던 어미가 이 곳에 닿은 것은
세해 전, 내가 다섯 살 적 일이었다. 그러다가 재작년에 아비를 따라 세상
을 뜨고 만 어미의 병명을 어린 나는 몰랐다. 마을 어른들이 쉬쉬하며 숨
기는 눈치였지만, 지난해 알아버린 것은 '매독'이란 이름의 병명 하나였다.
입술을 꼭 깨물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였다. 어미 살아 생전에 늘
하던 말이, '어쩌면 저리도 애비를 빼닮았을꼬...'하는 한탄이었다. 그만큼
난 아비를 닮아 꽤나 메마른 심장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미가 죽
었을 적조차 난 울지 않았으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랑 참 많이 닮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게 되는구나"
"...."
"얘기해 줄까?"
장난스런 미소가 스치었다. 지주 어른 뒤를 따라 내릴 적에 죽은 듯한 표
정을 가만히 머리 한 켠에 생각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녀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눈을 적셨다. 그리곤 느릿하게 입이 열렸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지 알았어...눈만 마주쳐도 피하려 들
었거든? 아주 어릴 적 이야기지만, 하여튼 그 때부터 자기 감정 표현을
잘 못했었지..."
"...."
"아...옷부터 갈아입어야 되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그녀의 말에 난 냉큼 그녀의 가방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옷가지들을 그
녀에게 밀어주었다. 식전, 상을 차리던 아주머니가, 왜 조선사람한테 왜놈
들 옷을 입혀 놨느냐며 욕을 했듯이,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왜놈들의 기
모노라 하던 옷이었고, 내 손에 들린 것은 유카타였음직 했다. 지주어르신
노모가 일본 혈통계라 하더이니, 과연 취미가 그러했나 보다.
그녀에게 옷가지를 건내주고나선, 방문을 나서려던 차에 그녀가 빙그시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여기 있으렴- 밖에 춥잖아..."
"예? 하, 하지만..."
순간 당황해 버리고 만 나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쩔 줄 모른 채, 안전부절 서 있던 내 앞에서 그녀는 천천히 옷깃을 풀
어냈다.
"합!...."
그리곤 말을 잃곤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어미의 가슴과는 달리 아
무 것도 없는 가슴이 그녀...아니 그가 남자라는 것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낸 눈에 띈 것은...
"피?!!!"
"아니..."
".........."
그의 말대로...피는 아닌 듯 했다. 유카타를 걸치며 뒤돌아 내게 좀더 자세
히 보인 그의 등에는 피처럼 붉은 꽃이 흐드러진 듯 피어있었다.
"예쁘지? 미술 전공한 사람이 새겨 준거야..."
"그...꽃, 뭐라고 하는 꽃이예요?"
호기심이 와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저리 붉다는 꽃은 들어본 적이 없다.
흡사 사람 피처럼 붉고 붉어, 쓸어 내리면 그 붉은 물이 배어들 듯한 붉
은 꽃은....들어본 일조차 없는 나였다.
"이거? 상사화相思花야"
"상사화요?"
상사화...불길하다 여겨, 옷 무늬로도 피한다던 꽃이다. 사람이 죽어 그 피
를 머금고 핀다는 속설 때문인지, 그 피처럼 붉은 빛깔이 참 끔찍하게도
아름답다 하여 꺼려하는 그런 꽃이 그의 등을 타고 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벗어놓은 옷의 무늬 역시 온통 상사화 천지매.....
"졸리면 무릎 배도 돼-"
생긋이 웃으며 말하는 그는,...자신의 무릎을 보여 두어번 툭툭- 쳤다.
"내가 그 사람을 알게 된 건...꼭 네 나이 때구나..."
세 번째 꽃잎 - (03).
-승호-
어미의 손을 잡고 들어선 곳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발을 붙이는 곳이었
다. 대궐만큼이나 크게 과장되어 보이는 장지주 댁은 과연, 그 고장 유지
답게 어마하긴 했다. 본채는 말할 것도 없고 앞뜰에 정원에, 별채에 사당
채에....
석달만 해도 어미와 함께 지내던 먹골, 삼식이네 뒷방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식모로 들어간 어미 말고도 지주 어른 댁에는 온통 일하는 사람으로 늘
부산스러웠다. 대략 30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일을 했고, 나와
같은 어린아이를 상대해 줄 이는 없었다.
그날도 난 혼자 놀고 있었다. 본채 뒤쪽에 자리잡은 연못가에 나를 데려
다 놓은 어머니는 내 입에 달콤한 사탕 하나를 물리곤, 노오란 고무공 하
나를 쥐어주며, 혼자 잘 놀 수 있지? 라는 다짐까지 받아냈다.
통.....통.....통.....
고무공을 바닥에 던졌다 놓았다 놀이에 열중하던 난, 어느새 입 속에 사
탕이 녹아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 달콤함이 아쉬워, 손가락을 물고 잠
시 멍청하니 서 있던 난 내 고무공이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미처 눈치채
지 못했다.
"어? 내공...."
그리곤 공이 손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낸 눈이 쫓아간 곳은 본채 뒤편
과 이어져 있던 별채 대문이었다. 열리져 있던 문 사이로 흘끗 보이는 것
은 틀림없는 내 손 때 묻은 공이었다.
별채에 도깨비가 살아 어린아이만 보면 데려가 버리니 절대로 별채엔 발
을 들여놓아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어미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포기하고 돌아서기에 나는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었고, 노오란 공에 미련
이 컸다.
조심스레 별채 대문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누가 볼세라 얼른 고무공 쪽으
로 뛰어갔다.
그리곤, 숨가쁘게 달려가, 공을 들어올릴려던 순간, 왠지 모를 시선에 고개
를 들었다.
―거기엔...도깨비가 있었다.
"으왓!"
".......
대청마루 끝에 서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 아이를 난 틀림없
는 도깨비라 생각했다.
다만- 상상했던 도깨비와는 참 많이도 틀렸지만...
서릿발처럼 하얀 피부 위에 유독 붉은 입술이 기억에 남는 그 아이는 나
와 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 이마를 덮는 먹물처럼 까만 머리카락 아래
눈동자 역시, 한없이 검고 검어서 하얀 피부가 더 없이 도드라졌다.
순간, 바보같이 저런 예쁜 도깨비라면...날 데려가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드
랬다.
놀라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그 아이
가 몸을 돌려 들어갈 적까지 나는 꼼짝도 앉고 그 아이와 시선을 맞추어
야만 했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겨우 한숨을 놓고, 공을 집어들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지만 여기 있다가 어미에게나, 어른들에게 혼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앞섰다.
뒤돌아 별채 문을 나설 즈음에 무언가 날아와 내 머리 뒤로 부딪혀 '딱'하
는 아픈 소리를 냈다. 무언가 하고 땅에 떨어진 그 것을 바라하였더니, 다
름 아닌 사탕 하나였다. 내 어미가 나를 달랠 적, 입에 하나씩 물리던 그
사탕보다야 한 서너배는 더했을 고급품이 분명하였다.
사탕을 주워들고 뺄줌하니 서 있던 낸 눈에 다시 띈 것은 조금 전의 그
예쁜 도깨비 아이였다. 양손 가득히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사탕과 동일한
사탕을 쥐고 있는 것을 봐, 내게 사탕을 던진 것은 다름 아닌 그 아이였
으리라...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던 그 아이는 그 사탕을 냅다, 대청 마루 아래로
쏟아버리듯 던져버리곤, 후다닥- 뛰듯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한참 후, 내가 별채를 나설 적에도, 나오지 않았다.
네 번째 꽃잎 - (04).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 말로만 듣던 그 댁 큰 도련님이었다 하더구
나...나랑 나이가 같았지만, 천식이 있어 좀처럼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던...."
조그맣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그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쿡쿡....."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꾸만 스르륵 감겨오는 눈꺼풀에, 그만
나도 어린아이고, 이미 나와 같은 어린아이가 잠들기에는 너무나 지나버
린 시간이었다.
그런 내 모양새에 그가 즐겁게 웃으며 물었다.
"졸린거니?"
그 날에 나는 있는 힘껏 도랫질을 해대었다. 붕붕하고- 바람 스치우는 듯
이상한 소리가 났지만 나는 고개를 계속 저었다.
"그래, 오늘은 동지 밤이 긴 날이구나. 좀 더 얘기를 해도 밤은 끝나지 않
겠지....."
그는 계속 말을 했다. 그 큰 도련님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장지주댁 큰 도련님 이름은 우혁이라 하였는데, 좀체 말을 걸어와 주지
않아, 한동안 심통이 났었던 것과, 늘상 사탕만 던져 대던 그 얄궂은 도련
님과 친해지게 될 적까지의 이야기를....그 도련님에게 글쓰는 법과 읽는
법을 배웠고, 몸이 약해 별채에만 틀어박혀 있는 그 도련님 유일한 동무
는 자신이었노라고....한참 동안 즐거운 낯으로 가만가만히...말을 이어가는
그의 표정은 흡사 상기 된 듯 즐거워 보였다.
허나, 결코 즐겁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아직 어린 나였지만 알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고 소중히 품어 간직하는 그런 귀하신 도
련님과, 일하는 사람의 자식 따위는 결코 친해져서는 안됨을...간간이 우울
한 빛이 되어 가는 동그란 눈동자에 슬픔 깃이 서려 서글픔을....모를 턱이
없었다. 그리고....도깨비인줄 착각했던 그 도련님이 살던 그 곳에는 정말
도깨비처럼 무서운 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모를 리가 없었다.
-승호-
내 나이 13살 적에, 전염병으로 어미가 죽어 나가, 별채 뒷마당에서 쭈그
리고 앉아 한없는 설움을 토해내야했다. 그 옛날 아비의 사나운 발길질에
등짝 가득 피멍이 들도록 나를 감싸 안던 어미가 없다는 사실이 그토록
서럽고 아프고 슬플 줄은...감히 예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병 환자는 반드시 화장을 지내는 것이라고, 잡부들이 들처업고 뒷산으
로 간 어미의 주검이 활-활-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구름연기가 증명이나 해주고 있듯이 기세 좋게 타고 있었다.
흡사 누가 들을 새라, 누가 볼 새라, 그리 작은 몸 동그랗게 웅크리곤, 무
릎을 모아 세운 끝에 눈을 묻고 한참을 울어댔다. 목이 쉬어라...눈물이 말
라라....
끅-끅- 토악질 해내는 그 설움 따위 누가 알아? 누가 알아주리...
토닥토닥....감싸 안아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은 걸....저어쪽 멀리 한켠에서
보고 잇는....창백한 피부의 예쁜 까망 눈을 한 도련님 심정....
알아줄 이 없었음에다....
"그리고 나서 난 그 집 허드렛 일을 하는 아이가 되었지, 어미와 친한 주
방 아주머니들이 꽤나 날 예뻐해 주었고, 그다지 힘든 일이라곤 없는 듯
했어...아니, 오히려 어미의 눈을 피해 만나던 그 사람과는 오히려 더 가까
이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눈을 몇차례 깜빡거리며 그 속에 물기를 머금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곤
나는 의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한차례 더 밀어닥친 찬바람에 날아갈 듯 휘청 이는 촛불을 간신히
한 손으로 버텨 막곤, 그의 입에서 다음 말들이 쏟아질 듯 터져 나왔다.
그가 16살 되던 해, 장 지주 어른의 얼굴을 처음 뵙다 하더라...경성에서
큰 사업 벌리다가 실패만 하고 돌아온 장지주 어른 맞으러, 그 커다란 집
안 한참 동안 시끌시끌해, 어린 그 역시 그 날을 잊을 수 없었을 것 같이
들떴고, 정말 죽으래야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노라고...그리 말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도깨비는 정말로 그곳에서 살고 있었어."
이어, '빌어먹을-!'이라고 울분에 찬 듯 소리치는 그가 한순간 참말로 남자
처럼 보여, 그만 놀라,
'딸꾹-'하고 딸꾹질과 함께 뱉어낸 나의 급작스런 울음 소리에 나 자신조
차 놀라서 한 동안 어안이 없었다.
"이런...너무 재미없는 얘기를 해서 지루했나 보구나."
곱게 웃는 그 모습이 슬펐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고 결국 얘기 해 줄 수 없었다.
울고 있는 나를 달래느라 그는 결국 나를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는 내가
듣는 것에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졸리기 시작했고 따뜻한
품속에 있었기에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무릎을 내어 주
며, 가만히 나를 토닥거려주었다.
졸기 시작한 나의 귀에 가만히 속삭이던 그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단지 생각나는 것은 장지주 어르신이 그날 밤 그를 범하려 했다는 것과,
반항하다가 무수히 매를 맞았다는 것.....그리고 결국은 어르신 큰아들인
그가 구하러 왔다는 것....
잠들기 직전까지 나를 보듬어 쓰다듬던 손길 역시 생각났다.
그 손이 너무나 차갑고...처량 맞아서- 그토록 슬펐다.
다섯 번째 꽃잎 - (05).
-승호-
"흑.....흑흑....어떻게 해...."
어미가 죽은 후, 이리 많은 눈물을 흘려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의 이마
위로 넘실- 배어나오는 핏줄기가 하얀 수건을 붉게 적시고 또 적셔서, 손
까지 배어들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나를 구하려다 역정이 나신 어르신이 던진 재떨이에 이마가 찢어져, 멈출
줄 모르고 배어나오는 그의 피만큼이나 나의 눈물 역시 마를 기미를 보이
지 않았다.
오늘은 그렇게 물러섰겠지만, 날이 밝으면 어찌 할까....무사하지 못할 텐
데....하는 그런 걱정보다는 눈앞에 그의 안위가 너무나 걱정스러워....반항
한번 하지 못한 채 나를 구하려다 다친 그가 너무나 아파서...그리 나를
아프게 해서....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내 손을 잡고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별채에 위치한 그의 방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그는 상관 말고 어서 와 앉으
라 했다. 가만히 앉아 내 옷을 벗겨 내어 보니 팔안쪽과 등쪽에 시뻘건
피멍이 잔뜩 배어들어 있었다. 조심스래 약을 펴 발라주는 그는 자신의
이마에 난 상처가 덧날까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오히려 내 걱정만 한가
득이었다.
"아팠지?
약을 바라던 그의 하얀 손을 잡았다.
"나 문신 새겨줘...."
....그 것은 욕심이었다. 고작 16살짜리 어린 내가 부릴 수 있는 그 정도의
욕심....그와 이어지는 단 하나의 매개물.....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려면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이렇듯 가 버리면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 조금이라도 더 기억에 남게 하려는, 조금이라도 그를 내 기억에 남
게 하려는 나로서는 최선의 생각...
당황한 얼굴로 안된다 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사화相思花를
새겨 달라 했다. 그 피처럼 붉은 상사화가 어떤 멍이든 숨겨줄 거라, 어떤
상처든 그 붉은 꽃잎 밑에 묻어줄 거라고...그리 간곡히 청했다.
"...난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많이 아플텐데..괜찮겠니?"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새겨준 붉은 상사화 밑에 누워 숨
지고푼 생각을 했었다.
가만히...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는 아픔 따위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
가 더 아파....가만가만, 미세히 떨리는 손길로 붉은 꽃잎을 새기는 그 손
길에 어린 온기를...다시는 보지 못할 거란 상념이 더 아파서......어찌 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지쳐서....
"왜...사랑하는 건데..왜...난데......."
그렇게 울먹이며 나는 그에게 입맞췄다. 도망갈 곳조차 없는 지쳐버린 우
리들은 달조차 부끄러워 숨어버린 동짓날 나는 그에게 안기었다.
몇 번을 까무라 칠 뻔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새겨지는 고즈넉한 넉을 가진 상사화는 나의 욕심이었다. 그
의 마음을 독점해버리고픈. ....
그 언젠가 치기 어린 옛 시적, 대청 마루 끝에 서서, 양손 가득 사탕을 쥔
채 어찌 건내줄지몰라 난감해 하던 예쁜 도깨비 아이를....고요히 짓던 미
소가 티 한점없이 어여쁜 도련님을.... 조금조금 사근사근 짜증 하나 부리
지 않고 고운 손, 검은 먹물이 배어들 정도로 열심히 글을 가르치던 동무
를....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좋아한다...부끄런 고백을 속삭이던 내 사랑
을....
사랑한다...사랑한다...
머리 속, 가슴 속 백만번 되뇌어, 왼눈 안쪽에 고이 숨겨, 평생을 아픔에
짓이겨도 좋다할 사랑을 나는 했다.....아니..여지적 하고 있다.
여섯 번째 꽃잎 - (06 - 完).
웅성거리 듯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열어 놓
은 창문에서 불어닥친 겨울 바람에 눈이 뜨여졌다. 부스스- 울었던 탓에
부어 벌개진 눈가를 비비며, 나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궁금하여, 까치발을
딛고, 열려진 창가 위로 목을 쑥 내밀었다. 그 적까지 나는 내가 잠들어
있던 방이 누구의 방이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잠들기 직전까지 내게
무릎을 내주었던...마땅히 있어야 할 이의 자리가 밤새 차가운 기운만 담
았다는 것을 미처 깨달지 못했었다.
"!!!!"
하얀 싸릿눈, 녹지도 못할 그 쓸모없는 눈 사이에, 겨울에 보기 드문 붉은
꽃이 피었다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억지로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
른다. 목뼈가 부러진채 처참히 눈 위에 붉은 꽃을 피우는 그 시체가 누구
의 것인가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무서워했던 것은 그의 근처에서 내 어미
와 같은 향기가 났기 때문이었음을....
이제 곧 죽어 버릴 이의. 망자의 향이 났기 때문. 나는 그의 죽음의 참관
인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유로 선택되었던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악!!"
나중적에 들은 일이었지만, 난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사흘동안 앓아 누웠
다 했다. 마을 어른들은 어린것이 그토록 끔찍한 시체를 처음 봐 놀랬을
거라며 가엽다는 듯 혀를 쯧쯧 쳐댔고, 주인 아주머니는 더 이상 아무 것
도 묻지 않았다. 자살이 확실했기 때문에...
여전히 마을 뜬소문의 출처가 되는 우물가에 간혹 나갈라 치면, 거기에
모인 아낙들의 수다 소리는 늘 일정하게 정해진 듯 싶었다. 지주 어르신
댁 첩실이 죽은 것은, 그 댁 마나님이 투기해 저주를 해서 그런 것 때문
이 틀림없다고, 또한 몇달전 그 댁 큰 도련님이 갑작스레 천식이 악화되
어 돌아가신 것만 봐도, 아무래도 그댁에 저주가 내렸거나 귀신이 씌운
것이 틀림없다며....그네들은 저희들끼리 그리 수근거렸다.
괴담이 되어 버린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냥 예쁜 사람의 갈곳 없는 사랑 얘기였을 뿐이었는데....
그냥.....한 소년과 그보다 작은 소년이 만나서 살려고 했던 이야기일 뿐인
데.....그네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연애 소설의 닳고 닳은 한 부분같은 얘기
였을 뿐인데....
그랬을...뿐인데....
"재원이 형아~!"
뒤쪽에서 나를 부른다 싶던 소리가 나나 했더니, 시야에서 좀 더 아랫쪽,
두 꼬맹이가 올망졸망 동그란 눈을 굴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수그려 주자, 그제서야 그 중 눈에 익은 한 아
이가 한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열살적에, 주인 아주머니, 건너 황골, 안씨 홀아비와 합방하여 생긴, 올
해 열살난 아이였다. 칠현이란 자기 이름을 싫어해 현-현아-하고 부르는
걸 더 좋아하는 아이는, 생긴 건 몰라도, 성격만큼은 아주머니를 똑 닮아
야물차기 그지 없어 동네 웃 어름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이 손에 꼬옥 잡고 있는 하얀 얼굴에 눈이 큰 아이는, 이 고
장에서 제일 큰 소학교 교장선생님의 손주 같았다. 귀하게 자란 티가 난
흰 피부가 제 단짝과 무척인 대조적이었다. 아이 역시 문선생댁 자제라며,
동네 어른들이 챙기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니? 현아?"
일부러 아이 듣기 좋으라 아이가 좋아하는 투로 부르니, 그 얼굴 기쁨에
홍조가 어리었다.
그리고는 작고작은 손으로 무언가를 쓱 가르키더니 물어온다.
"형- 저 꽃은 뭐야?"
"아아....저꽃 말이니?"
아이의 손가락 끝에는 붉은 꽃이 닿아있었다.
내게 평생을 두고 못 잊을 기억 중 가장 생생한 그와 지낸 동짓날 밤....
그 예쁘던 사람....승호 그의 등 뒤에 흐드러져라 피어있던 상사화....
몇해 전, 불길한 저승꽃 싹을 왜 얻어왔느냐고 기겁하던 주인아주머니 몰
래 뜰 한쪽에 숨기듯 가꾸워왔던 것이 어느새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상사화가 붉은 꽃을 피워낼 쯤이면 그 입을 흉하게 퍼석하게 말라 비틀어
땅으로 곤두박질 친다는 것을 알았을 때...왜 그 이름이 상사화相思花인지
겨우 깨달았을 때...그의 등 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사화 붉은 꽃잎에
묻은 고즈넉한 그 슬픈 넉이.....기다리고 그리워 한다는 뜻이었음을 알았
을 때...나는 또 한번 눈물을 떨구워 냈다.
그 동짓날....나는 눈물을 배웠다. 한 없이 목마름에 메말러 넘치길 원했던
눈물 역시....그에게서 배워버린 사랑 대신에 채넣어 버린 가르침이었다.
상사화- 그 꽃을 등진 상처에 가리워진 승호, 그가 가르쳐 준....
"...저 꽃은 말이지......."
화중화심花中花心에 그 꽃울대 심히 울려
여섯장 꽃잎 고이 쓸어모아 품에 안아담고
붉은 넉 묻어 그리다.
상사화相思花 end
글쓴이의 후기
여기저기서, 흔해빠진 스토리....라고 중얼되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은 저의 환청만은 아닌듯 싶습니다(웃음)
주저리주저리 딴 이야기가 많았지만, 이로서 끝입니다.
정말로 단편이군요(식음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