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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양심 (늘푸른교회 / 이장우 목사)
[ 序詩 ] 윤동주(1917-1945)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론
이 시인의 양심이 신앙의 양심일까 아니면 일반 시인의 양심일까요? 시에 대한 해석은 읽는 자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주제로 이 시를 보면 이 시인의 양심 또는 마음이 얼마나 예민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문학가나 시인의 감수성은 일반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적절한 언어와 기호와 심지어 생략으로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인용한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일하심에 민감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고자 하여 인용하였습니다.
성령과 양심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싶은 이유는 복음을 듣고 자유 한다는 사람들이 그동안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하지 않던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면서 자신은 진리로 자유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자유가 성경이 말하는 자유인가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이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양심이 무엇인지 성령은 어떻게 사람의 양심과 더불어 일하시는지 보려고 합니다.
1. 양심(良心)이란 무엇인가?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착한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아는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양심의 한계를 압니다. 사람이 아무리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하여도 이미 타락한 인간이기에 자신이 옳고 선하다고 한 양심적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과 행위이기에 결코 옳거나 선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경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기에 여전히 사람들의 양심을 바르게 쓰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는 곳에 자주 쓰레기를 버리면 당신의 양심을 버리지 말라는 글을 붙여둡니다. 심지어 이번에 대통령으로 출마한 사람의 출마동기가 양심 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선거 홈페이지의 글을 인용합니다.
[‘양심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이다. 공군장교 제대 이후 철학과 고전, 종교와 영성에 대한 연구 끝에 ‘양심이 답’임을 깨닫고, 이후 양심문화의 교육과 보급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는 ‘남이 바라는 것을 잘 헤아려 해 주고,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가하지 말자!’를 ‘양심운동’의 구체적인 실천 과제로 삼는다. 그는 국민들에게 ‘양심’의 이해를 돕고, 생활 속에서 ‘양심’의 실천을 격려하며, 정치적으로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양심’에 따라 정치와 행정을 하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상이 얼마나 양심이 없었으면 양심이 승리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대통령으로 출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발견한 양심이 답이라는 내용도 성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남이 바라는 것을 잘 헤아려주고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가하지 말자는 것은 성경의 황금률이라고 알려진 마태복음 7:12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사람은 철학과 동양사상과 성경까지 보면서 양심이 답이라고 하여 많은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양심운동을 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양심운동을 하겠다고 대통령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모르는 것은 양심 운동한다고 양심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양심에 자극을 주면 어느 정도의 반응이야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이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이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결정과 판단을 자기중심으로 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입니다(창6:5, 8:21). 이런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인간의 양심적이고 율법적인 행위들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2:14~15절입니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바울사도는 율법의 기능과 양심의 기능을 같이 보고 있습니다. 율법이나 양심의 기능이 죄나 잘못을 고발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능으로 고발하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자이거나, 양심으로 깨끗하다고 하는 자일 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결과밖에 안 나옵니다. 물론 율법으로 죄인이며 양심적으로도 죄인으로 인정 된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롱하고 모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2. 성경은 양심을 어떻게 말합니까?
한글개역에서는 구약에서 양심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에서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시편에서 다섯 번 나옵니다. 이러한 양심을 전에는 사람의 심장 또는 마음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 쓰임새를 보면 양심에 대한 풍성한 내용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콩팥, 내장, 쓸개, 심장, 양심, 마음, 속, 폐부, 허리, 심중, 숨, 콧김, 가슴, 감동, 간담, 결심, 생각, 진심, 기력, 관념, 인심, 심장, 염통, 한마음, 성심, 전심, 뜻, 충심, 총명, 지혜, 지식, 의사, 생각, 명철, 지각, 굳센 자 이렇게 명사로 사용되기도 하고 동사로 사용하면 말하다, 간곡하다, 낙심하다, 염려하다, 개의하다, 근심하다, 깨닫다, 감동시키다, 위로하다, 주의하다, 담대하다, 살피다, 무지하다, 간교하다, 착심하다, 진술하다, 기억하다, 양심이라는 단어의 이런 사용용례만 봐도 양심의 기능이 어떠한지를 풍성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약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는 스무 여덟 번 나옵니다. 양심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거듭나지 아니한 양심이 있고 이런 양심을 악한 양심이라고도 합니다. 거듭났지만 약한 양심이 있고 선한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거듭나지 않은 양심으로는 결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합니다.
3.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인간은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선생이라는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에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하여 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떻게 늙은이가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일이 가능한지를 물었습니다. 율법 선생만이 아니라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양심적인 총독이라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양심도 없어 보이는 헤롯도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할 때에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한 말로 인하여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 자기 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거나 양심으로 올바르다고 하여도 거듭나지 않으면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4. 어떻게 하면 거듭납니까?
요한복음 3:5~8절입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거듭나는 일은 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며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육의 영역에서 영의 영역으로 넘어갈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난 자는 오직 성령이 임함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과 성령이란 옛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성령이 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물을 세례라고 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전적인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사람의 육으로 나올 수가 없기에 오직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에 사람이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선택과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수동태로만 사용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이 임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함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그 영을 넘겨주십니다(요19:30).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오순절에 일어남으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를 갈며 돌로 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6~41절입니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ㄷ)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부어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은 33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그 약속은 요한복음 14~16장까지 상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하신다고 합니다. 이 처소가 성령입니다. 이 처소가 마련되어야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한 그 관계 속에 자기 백성이 참여하게 됩니다. 이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심으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처럼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의 일하심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성령운동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책망합니다.
요한복음 16:7~15절입니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압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신이 만든 의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책망을 받습니다. 유일한 의가 되시는 예수님이 떠나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달리 의가 없기에 자기 의를 책망 받을수록 주님을 믿음으로 그 의롭다함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책망입니다. 또한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는데도 이 세상의 위협에 두려워하는 우리 자신이 책망을 받습니다. 이렇게 책망을 받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책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설명을 하십니다.
이어지는 16~23절입니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임마누엘 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임마누엘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사7:14).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의 성취를 마태복음 1:23절에서 증거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야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이해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성령이 임하게 되자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이해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것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한 내용이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너희가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전하자 마음에 찔림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는 다는 것은 양심이 살아난 증거입니다. 이때 사도들이 전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2:37~42절입니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5)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복음을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려 어떻게 해야 할지 탄식을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것도 율법을 따라 할례도 받고 정결규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말을 듣는 자들은 유대인들과 흩어진 유대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온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세례를 받은 자가 삼천이나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한 자가 120명이었으니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자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거듭나는 것은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습니다. 각주 5)를 보면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성령이 임하지만 성령이 임하여야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성령이 그 안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갈며 돌을 치는 자가 나옵니다. 이들도 마음에 찔림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46~53절입니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ㄷ)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이사야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마음과 귀가 할례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 내신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귀와 마음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들은 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이어지는 54~60절입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베드로의 설교에도 스데반의 설교에도 마음에 찔린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한 쪽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쪽은 이를 갈면서 복음 전하는 자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의 마음과 양심이라는 것은 베드로의 복음을 들은 자나 스데반의 복음을 들은 자나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한 쪽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데 한 쪽을 돌로 쳐 죽입니다. 둘 다 양심의 찔림을 받았지만 그 반응의 내용은 정 반대로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양심에 찔려 돌을 던져야 하는데 회개하는 자들이 나온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도들이 전한 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을 것이며 또한 돌로 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죽어가면서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의 좌우편의 강도가 처음에는 동일하게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나중에 예수님은 죄 없이 죽으시는 메시아임을 믿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가장 믿을 수 없는 강도였는데 말입니다. 자신과 같이 저주 받아 죽는 예수를 어떻게 메시아로 믿었을 까요? 한 강도는 끝까지 욕하고 죽었는데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하신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이 말씀을 듣고 믿었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입니다만 한 강도는 이 용서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스데반이 죽는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이 말을 들을 귀와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 교회를 잔멸하려고 달려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대낮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주여 당신은 누구시냐고 하였을 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순간 바울은 눈이 삼일동안 멀었다가 아니니아 선지자가 기도함으로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모든 가치관이 다 전복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율법관이 다 바뀌었습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신약에서 양심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의 모든 인간의 양심은 전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양심을 마음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합니다. 이러한 양심으로 아무리 선을 행하고, 율법을 받아 법을 지켜도 그 행위로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근원적으로 그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양심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말은 내 안에 주인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들어오십니다. 이 영은 또한 말씀이기도 합니다(요6:6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양심으로 더불어 일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하실까요?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5. 양심에 대한 성경 본문의 문맥적 이해
양심에 대한 성경구절을 다 찾아 볼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서 다섯 번 나오는 시편의 양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마지막 장을 보고 신약으로 들어갑니다.
시편 73편 21~28절입니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구약에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오는 중에 마지막 내용입니다. 시편 73편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으로 인하여 불평을 한 아삽의 시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내가 경건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고민이 되었는데 성전에 나아가서 깨달았습니다. 악인은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자신의 양심에 찔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 찔림으로 인하여 자신이 우매 무지한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과 땅에서 주 밖에 사모할 이가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육체와 마음이 쇠약하여지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반석이시며 영원한 분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이며,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합니다. 이제 신약의 처음 나오는 양심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9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사람들은 돌로 쳐야 한다고 예수님께 모세 율법으로 들이 됩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너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없다고 합니다. 간음하는 현장에서 끌려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서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양심에 찔려 돌아간 그들이 나중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는 자들이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본 것처럼 양심에 찔림이 있다고 다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3:1~2절입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복음을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잡혀서 고난 받을 줄 알고 왔습니다. 온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회중들에게 자신이 가말리엘 문하로서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내었는지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변화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더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천부장이 출동하여 소요를 진정시키고 다음날 공회에 세웁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자신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니 대제사장이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합니다.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를 전하고 있으니 입을 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의 양심은 어떤 양심입니까? 거듭나지 못한 악한 양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용기를 주십니다.
로마서 9:1-3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이 자신의 형제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주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봅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내 양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 줍니다.” “and the Holy Spirit is a witness to my conscience.” 성령과 양심, 양심과 성령이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3:4~5절입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세상의 정당한 권세에 대한 복종이나 세금의 문제에 대하여도 양심을 따라 하라고 합니다. 물론 조세저항이 일어나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들과 사업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거래들로 인하여 국민에게 돌아오지 않으니 조세저항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기 양심을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8:1~6절입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상 제물에 대하여 자유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가책이 되어 그 양심이 약하게 되고 더러워지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 한다는 양심으로 행한 일로 인하여 믿음이 약한 자를 넘어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9절)를 양심이 약한 자(10절)로도 봅니다.
이어지는 7~13절입니다.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자신은 진리를 아는 자가 되었다고,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유롭게 행하는 일들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 약한 양심을 가진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이것은 믿음이 강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이 강한 자, 양심에 담대함을 가진 자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선한 양심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 10:23~33절을 새번역으로 봅니다. “23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24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25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한다고 하여 그 출처를 묻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먹으십시오. 26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27 불신자들 가운데서 누가 여러분을 초대하여, 거기에 가고 싶으면,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한다고 하여 묻지 말고, 드십시오. 28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여러분에게 말해 주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29 내가 여기에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의 비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30 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내가 감사하는 그 음식 때문에 비방을 받을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33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이방인 사회에서 나오는 고기는 우상에게 제사한 고기들입니다. 이런 음식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유 한 양심이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을 이유가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다고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함으로 그들도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바른 양심사용법입니다.
고린도후서 1: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육체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이 양심이 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여기서 각 사람의 양심에 추천한다고 합니다. 이 양심을 마음이라고 봐도 됩니다. 복음의 광채가 사람의 마음에 비추어지지 못하도록 이 세상의 신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어둠인 세상에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사람의 생명이라고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 빛이 우리 안에 비추어지는 길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전하고 받아들이는 자리를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양심에 추천한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3~7절입니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디모데를 남겨둔 이유는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온갖 신화와 신들과 사람들의 족보를 논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지만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말하든지 족보를 말하든지 죄를 깨닫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 바른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의 복음의 열매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8~20절입니다.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자가 후매네오와 알렉산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탄에게 내어준 것을 출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판을 통하여서도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고전5:3~5). 그러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앞의 12~17절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복음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만 드러납니다. 인간은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납니다. 이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착한 양심, 곧 믿음에 파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착한 양심이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8~10절입니다.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감독이나 집사의 직분을 받는 자들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자격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의 괴수임을 아는 사람이 믿음의 비밀을 가진 양심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세상의 가치관과 얼마나 다른지 놀랍습니다.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지 못하니 직분을 마치 감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이들의 고백은 동일합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인 바울이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 하고 맹세하며 부인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의 비밀을 가진 직분자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4:1~5절입니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육신은 더러운 것이니 혼인을 금하여 육신의 증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특정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율법의 정결규례를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자들이 양심의 화인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앞에서 본 바울의 고백을 하는 것처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행위를 주장합니다. 자신들의 금욕적인 모습과 신비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더 이상 십자가에서 머물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천국에서도 죽임 당한 어린 양으로 찬양을 받습니다(계5:12).
디도서 1:14~16절입니다.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유대인들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한 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양심이 더러워져 있기에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더러운 자라는 것과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들과 같은 뜻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시인을 하지만 그들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행위로 시인을 합니까? 우리의 행위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가지 않습니까? 이러한 말씀이 우리의 양심에 찔림이 된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이들은 양심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양심에 책망을 받음으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9:8~15절입니다.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양심에 대한 내용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모형으로는 온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과 제사와 성막과 성전들은 다 그림자입니다. 짐승의 피나 부정함을 씻는다는 암송아지의 재로서 정결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14절을 새번역으로 봅니다.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면 죽은 행실에서 떠나게 됩니다. 죽은 행실이란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로 자신을 단장하는 것이며 이방인들은 양심적인 행위로 자신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왜 죽은 행위가 됩니까? 이러한 행위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행실입니다. 오직 그 피로 그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요6:29), 하나님의 뜻이며 영생입니다(요6:40).
히브리서 10:19~22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이 아침저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피를 가지고 들어 갑갑니다. 얼마나 거룩한 곳인지 대제사장도 잘못하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19절의 성소란 지성소를 말합니다. 이 곳에 나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실 때에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마27:51). 우리가 그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맑을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그 물과 피로 인하여 씻음을 받았기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이어지는 23~29절입니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성도가 자주 모여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았습니까? 진리의 지식 곧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살과 피로 이루신 새 언약입니다. 이 복음을 배척하는 것이 짐짓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양심이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한 것은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나 양심적인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고 깨끗하게 된 것임을 알고 믿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부인하고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행위가 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이 세상의 복이나 하늘의 상급은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도 다시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는 행위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는데 다시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이 와서 율법을 요구를 이행하여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는 자들을 향하여 책망한 것입니다. 물론 성령으로 시작한 자가 육체로 마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마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온갖 미혹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으로 더불어 일하시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3:15~19절입니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18절에서 선한양심이 있는 줄 안다고 합니다. 선한양심이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은 양심입니다. 이런 양심은 자기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모습은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는 줄 알고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나가셔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피 뿌림을 받았다면 다른 것을 붙들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치욕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선을 행함과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3:15~16절입니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서신이나 히브리서나 베드로 사도가 다 같은 영을 받았기에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런 선한 양심으로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썩어지고 낡아지고 불에 타 없어질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에 세상 사람들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양심이 피 뿌림을 받았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앤드류 머래이는 우리의 양심을 창에 비유합니다. 창이 더러워지면 바깥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양심이 더러워져있으면 더러운 줄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이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으면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집니다. 양심이 깨끗해 졌다는 것은 죄가 제거되고 죄 지을 마음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이 깨끗하여 짐으로 죄에 더욱 민감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3:18~22절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 본문을 난해구절이라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옥의 영들에게 가서 선포하셨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18절을 해석하는 말씀입니다. 18절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육으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는 죽으심이 우리에게로 버림을 받아서 우리와 함께 되셔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데 이러한 인도하심이 노아시대에도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노아가 은혜를 입고 방주를 예비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구약의 노아 홍수사건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홍수 때에도 사람들이 복음을 노아를 통하여 듣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방주를 예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드는 동안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방주에 타지 않았습니다. 노아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갈3:8). 그리스도의 영은 노아시대에도 노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방주를 타지 않고 지금 옥에 갇혀있는 자들에게 전하였다고 보기 보다는 이미 그들이 살고 있을 때에도 복음이 증거 되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6절입니다.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라는 말씀과 바로 앞에서 본 옥의 영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졌다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미 죽은 자들은 겉모습은 다 죽은 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은 자들은 고난을 통하여 죄가 그쳐지고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간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삭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가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5절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 2 이제부터는, 육신으로 살아갈 남은 때를 인간의 욕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3 여러분은 지난날에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였으니, 곧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져 살아 왔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4 그들은 여러분이 자기들과 함께 그런 지나친 방종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면서, 여러분을 비방합니다. 5 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분에게 사실을 죄다 아뢰어야 합니다.”
성경의 장과 절은 찾아보기에는 좋으나 문맥을 연결하는 부분에는 상당한 방해가 됩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나 죽은 자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다는 것은 베드로전서 3:18절부터 연결하여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은 이미 죽은 자들에게도 선포된 것입니다. 물론 그 때는 그림자의 모습입니다만 노아 방주를 타는 것이 복음의 초대입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의 그 물이 세례와 연결됩니다. 그 물에 함께 빠져 죽어야 하는데 방주를 탐으로 살아난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는 세례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물로 씻어 낸다는 개념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말합니다(롬6장). 이렇게 연합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성령이 임한 자는 양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양심이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된 자는 죄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 죄를 깨닫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자리를 양심이라고 합니다. 양심을 마음이라고 해도 됩니다. 전인격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렇게 양심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율법의 죄나 양심의 거리낌과 차원이 다른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본 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우리의 양심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됨을 압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선하고 옳은 것으로 치장을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지 못함을 압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세상의 심판에 벌벌 떠는 것이 죄가 됨을 압니다. 죽음에 메여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이 성령으로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망을 받는 자리가 양심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책망을 받는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율법적 행위로 자신을 단장하지 않습니다. 율법 대신 사용되는 양심운동이 아닙니다. 율법주의로 가거나 양심운동으로 가는 것은 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자기에게로 되먹이는 현상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에 책망을 받으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히브리서 12:1~2절입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허다한 증인들은 믿음이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길을 갈 때에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무엇이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가 됩니까? 믿음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죄가 얽매이기 쉬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선악과 이후의 인간들이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선악체계에 따른 인과율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꾸만 원인과 결과를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책망하는 것이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에 책망을 합니다. 그러면 그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음의 창조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우리가 자꾸만 인과율에 빠져들어갑니다. 자꾸만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이 세상의 신이 유혹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는 징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징계가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이라고 합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끊어지는 것은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서 끊어지고 예수님을 믿는 방향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의 양심에 일하시는 내용입니다.
결론
성령은 우리의 양심을 말씀으로 자극하여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렇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십니다. 이러한 책망을 받을 수 있는 양심이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양심이며 예수님을 믿는 양심입니다. 이러한 양심은 죄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죄가 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에는 죄라고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 성령의 역사로 양심이 예민하여 지면 죄인 중의 괴수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옆의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고 성화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죄인 중의 괴수라서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자가 됩니다. 앞에서 본 내용을 다시 봅니다.
디모데전서 1:15~20절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사도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면서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그의 양심에 확신을 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 자신의 옛날 그 모습이 악한 양심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양심을 버리는 것이며 믿음에 파선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에 비추어주시면 우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여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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