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주단같이 펼쳐진 잔디축구장과 롱구장을 사이두고 저편에는 3800평방메터의 간부기숙사가 있었다. 공장정원은 소철나무, 유칼립투스로 가꾸어져있었는데 자그마한 양어장도 있었다.
천명이 동시에 식사할수 있는 식당옆 마당에는 수백대의 자전거가 빼곡이 서있었는데 지금의 회사위치로 천이하기전의 원 공장부근에 2만 6000평방메터의 로동자기숙사가 있다고 안내하던 번주임이 설명했다.
깨끗한 사무청사에 들어서니 복도마다 고풍스런 옛 가구들이 장식돼있는데 수백점은 될듯싶었다. 사무청사의 5층에 위치한 리사장사무실에 들어서니 그야말로 놀라움과 경탄이 저절로 나왔다. 널직한 회의실을 지나 응접실,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각종 골동품으로 질서정연하게 장식된 이곳은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각종 청동기, 도자기, 조각, 사진기, 고검, 조선민족의 고풍스런 장롱, 일본군도, 명화, 악기 등 수장품은 리성일리사장의 애호와 수양을 시사해주고있었다.
훤칠한 키꼴에 탄탄한 몸집의 리성일시장과 인사를 나누고나서 그의 응접실에서 자리를 같이했다.
당시 광주에서 개최중인 중국수출상품교역회에서 모두모어의 성과를 묻자 리성일리사장은 아주 만족해하면서 올봄철교역회가 사스의 영향을 받은데서 이번 가을철교역회에 특별히 참가인수가 많았는바 교역액도 대단했다 했다.
리성일은 1956년2월15일 길림성 왕청현 하마탕향에서 태어났다. 1958년 그는 부모를 따라 길림성 전곽현 선풍촌에 이주했다. 교원인 아버지의 얄팍한 로임으로 일곱식구가 살아온 리성일의 동년은 가난과 고생 련속이였다. 그러나 고난은 또한 인생의 재부로서 가난한 집 애가 일찍 헴(철)이 든다.
1980년에 리성일은 길림성석탄관리간부학원을 졸업하고 길림사범학교교원으로 있으면서 영화예술에 대한 남다른 꿈을 지니고 주강영화촬영소를 찾았었다. 리성일은 석달동안 광주에 머무르면서 시험까지 치고 다시 학교에 돌아와 기다렸지만 종무소식, 그러나 광주는 그의 미련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뒤로 1년이 지난 1981년에는 길림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하게 되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문을 나서서는 또 장춘시공안국에서 사업하게 되었다.
장춘시공안국에 있을 때 리성일은 우연하게 광동성당위에서 보내온 한국에 관한 자료를 번역하게 됐다. 광동에 한글번역인재가 결핍하다는 것을 감안한 리성일은 번역한 자료와 더불어 짧은 추천신을 써보냈다.
기회는 잡는 사람에게 속했다. 1986년에 광주에 온후 그는 광동성당위 제3판공실에서 사업하게 됐다. 후에 이 판공실은 광동성국가안전국에 편입됐고 1989년 가을 리성일은 광주무역추진회에 상무대표로 전근돼 경제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남방행을 동의하지 않은 안해를 겨우 설복시켜 마침내 광주에 가긴 했으나 처음에는 집 한칸도 없어 10평방메터밖에 안되는 세집살이로부터 출발했다.
광주의 상업배경과 인문특색은 은연중에 리성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바 광주에 와 몇 년간 사업한후 그의 가치관은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는바 격렬한 시장경쟁에서 또 다른 인생의 가치를 실현하려 했다.
1989년 그는 향항상인과 합자해 광주에 부산술집을 꾸렸는데 처음엔 잘되였지만 후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리성일은 기관의 평범하고 우월한 사업환경에 점점 안착하지 못했다. 오랜 생각 끝에 그는 결연히 사직하고 "하해"했다. "하해"의 처음 몇 년간은 그가 련속 비릿한 "바다물"을 들이키는 허우적거림이였다.
"하해"후 처음 손댄 것이 고무로 만든 자전거경음기, 2∼3년만 타면 쉽게 녹이 쓰는 쇠로 된 방울보다 값도 5분의1밖에 안되는 경음기를 만들었다. 자전거에 고무경음기를 달면 매년 1억 5000킬로그람의 강철을 절약할수있다며 정부관리를 설득해 특허까지 받았으니 누가 봐도 성공은 보장된 것 같았다. 하지만 사업이 수학공식처럼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가. 자전거공장들에서는 접수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당시에 이 자전거공장들에서는 자전거방울 등 부품을 모두 집체소유제인 가족공장에 생산하게 한 것이다. 리성일은 첫 번에 80만원을 밑지고 나앉았다.
두 번째는 깻잎재배였다. 한 한국인기업가로부터 중동에서 일하는 한국근로자들에게 깻잎을 수출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광동에서 시험재배했는데 1년에 두 번 수확하면 아주 좋은 경제적효과성을 볼수 있었다. 리성일은 50킬로그람의 종자를 사서 광주 락담진에 보급했다. 그런데 깻잎이 앞당겨 꽃이 필줄이야. 1메터 높이로 자라야 할 깨가 30센치메터도 안돼 꽃이 피고 잎은 섬유가 질겨 먹을수 없었다. 리성일은 농민들의 일체 손실을 배상, 120만원을 손해보았다.
세 번째는 김치공장. 중국 남장지역의 대학교기숙사를 돌며 김치장사를 했는데 처음엔 상당히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랭장창고가 없어 김치보관이 어려운데다 판매원들이 수익금마저 빼돌렸다 한다.
3년간의 실패 끝에 침구장사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피줄이 같은 동포의 도움이 컸다.
"1982년 통역을 통해 알게 된 한국 조웅기회장을 찾아가 2만딸라만 달라고 부탁했지요. 갚을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피가 뜨거우니 해낼수있을거라고요. 처음엔 한심한 눈으로 보시다가 믿어보겠다며 이튿날 돈봉투를 주시더군요"
리성일은 또다시 시도했다. 그는 상기 돈에 또 수만원의 고리대를 꾸어 8대의 재봉기를 사 또다시 침실용품을 생산하였다. 1992년 7월에 설립된 광주모두모어침구유한회사이다.
그는 제품을 가지고 복주, 광주, 상해, 북경, 장춘 등지의 백화점을 일일이 돌고 실천, 모색, 론증을 거쳐 가능성을 확인한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품은 시장에 투입된후 인차 환영을 받았는바 당해 성도에서 있은 방직박람회에서 품질 1등상을 받았다.
실타래처럼 얽힌 사업도 갑자기 매듭이 풀린것처럼 술술 풀렸다. 처음에 재봉기 8대로 시작한 침구장사가 2년새 재봉기 130대로 늘었다. 수입은 다시 기계설비에 투자해 품질을 높였다.
이때 연변대우호텔이 건설된다는 것을 안 리성일은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8개월내에 24차나 연길에 다녀갔다. 광주에서 비행기로 장춘에, 장춘에서 기차로 연길코스로 오갔는데 어떤때는 침대권을 사지 못해 경석에 앉아 하루밤을 들볶이며 오군 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정성에 감복되고 또 품질, 가격 등으로 승부해 리성일의 회사에서는 5개 경쟁사를 물리치고 700만원의 침구계약을 체결했다.
대우호텔의 주문을 완수하는 과정에 자그마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연길에 부친 침대커버와 카텐이 3분의 1이나 잃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우호텔과 협상해서 화물교부시간을 늦추자고 했지만 리성일은 24시간을 밤낮없이 다그쳐 제기한내에 잃어진 수자를 보충했다. 하여 대우호텔개업시에 대우그룹에서 수여한 감사패까지 받게 됐다. 리성일은 끝내 창업의 길에서 성공의 탄탄한 한걸음을 내디디였다.
침대용품생산업체가 많아질 때 리성일은 퇴출, 주단, 매트를 생산, 70%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광주모두모어주단주식유한회사의 전신은 광주시신태양실업발전유한회사로서 1998년6월26일에 설립됐다. 기업발전을 추진하고 현대기업제도로 기업을 규범화하여 기업의 경제적효과성과 사회적효과성을 진일보 제고하기 위해 2001년 8월, 광주신태양회사 주주회에서는 광주신태양회사를 주식제로 개조해 주식시장에 상장시키기로 결정했다. 광주양성회계사사무소에서 회사의 1999-2001년 자산정황과 경영업적에 대한 재무심계에 따르면 광주신태양회사는 자산이 량질, 고효과적이고 량호한 리윤창조능력과 업무장성잠재력이 있었다.
2002년 1월15일에 광주시인민정부에서 광주모두모어주단주식유한회사설립을 비준했다. 2002년2월8일에 광주시공상행정관리국의 비준을 거쳐 영업허가를 받았는데 경영범위는 방직물, 편직물, 화학공업제품에 대한 제조, 가공, 판매였다.
주식회사 소속회사로 광주번우모두모어주단유한회사, 번우모두모어기계제조유한회사, 광주모두모어침실용품유한회사, 장춘분회사가 있었다.
광주모두모어에서 생산하는 "핑크하트", "가거상반"브랜드의 카페트, 발매트, 방석 계렬제품은 국내국제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있는바 제품은 미국, 영국, 이딸리아, 일본, 프랑스, 브라질 등 36개 국가와 지구에 판매되고있으며 그들과 장기적인 무역파트너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엔 1300여개 판매점이 있고 북경, 상해, 성도, 곤명, 장사 등 10여개 지구에 판사처가 설립돼있다.
회사제품은 가정장식용 카페트, 매트 제품을 위주로 선후로 PVC, 방사주단, 융단, 긴털주단, 기계방직주단 등 5개 계렬제품을 개발했다 새로운 제품, 새로운 양식, 새로운 색상과 무늬를 개발해 업종에서 가격주도지위의 자리를 굳혔다.
회사의 당면 촉융년생산규모는 150만평방메터로 업종독점지위에 처했다. 회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외에서 설비와 설계소프트웨어를 인입한 주단생산업체이다. 회사에서는 세계주단기계왕국인 벨지끄로부터 국제선진수준의 평융미세통제직기 7대를 구입, 평융년생산능력이 200만평방메터에 달해 초보적으로 규모생산능력을 구비했다.
국내, 국제 류행추세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회사에서는 제품이 연구개발, 설계를 중시, "다른 회사에 없는 것은 우리가 있고 다른 회사에 있는 것은 우리것을 보다 훌륭히:"라는 제품창의책략을 견지, 인원배치, 시설배치, 대오강습 면에서 부단히 투입을 강화해 회사의 핵심경쟁력을 구축했다. 회사에는 당면 20명 공예, 미술 전문설계인원이 있으며 5개 세트의 국제 최신주단설계소프트웨어가 있다. 정기적으로 설계인원들을 조직해 국내, 국제 전문박람회에 참가 국제류행추세를 장악하며 국제 최신설계사상을 흡취했다. 적극적으로 고등학교와 전략파트너관계를 건립, 주단연구개발중심을 설립해 기업이 장기적인 건전한 발전에 새로운 활력을 주입했다.
회사설립 5년래 리사장 리성일이 인솔하에, 3억자산에 년생산액이 3억원, 년간 리윤세금액이 6000만원에 달하는 대형현대화기업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