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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순례를 하다 길을 잃었을 때 나는 생존 본능이 발동하여 간단한 스페인어로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올라 소이 페레 그리노 까미노?”(Hola! Soy peregrino. Camino?). “안녕하세요 나는 순례자입니다. 까미노가 어느 쪽입니까?.”
신약성서에 “천둥의 아들”로 불리우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산티아고의 정식 스페인 명칭은 el Camino de Santiago de Compostela이다. 야고보의 스페인식 표기는 Iago 이고 성인을 뜻하는 San과 합성어가 되어 San-Iago로 출발하여 Santiago로 변했다. Compostela 는 라틴어 “campo”와 “stella”의 합성어로 각각 “field”와 “star”를 뜻한다. 따라서 el Camino de Santiago de Compostela의 정식 명칭의 뜻은 “별들의 벌판에 있는 성 야고보의 길”이다. 이를 줄여서 “Camino de Santiago”로 부르고 더 줄여서 그냥 “camino”(까미노)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까미노는 2가지 중요한 루트가 있다.
1. Camino Frances(불란서길): 통상 불란서 남부 St. Jean Pied Port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Santiago로 들어가는 불란서길
2. Camino del Norte(북쪽길): 불란서 국경 근처 Irun을 출발하여 북쪽 해안선을 따라 가다 산티아고 직전 40km 지점에 있는 Arzua에서 불란서 길과 합쳐 진다.
산티아고 순례에 나서는 순례자는 먼저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 그리고 언제 갈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필자는 유럽의회에서 1987년 유럽 문화의 여정(European Cultural Itinerary)이라는 공식명칭을 부여한 역사와 문화의 향기 그윽한 불란서 길을 택했다. 그리고 순례 시기는 4월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정 하였다.
길을 떠나기 전에 순례자로서 나의 정신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Constantine P. Cavafy의 시 Ithaca를 읽고 영감을 얻어 산티아고로 출발 하는 나의 마음의 자세를 표현 해 보았다.
Have Santiago always in your mind.
산티아고를 늘 마음속에 기억하라
Your arrival there is what you are destined for.
그곳에 도착하는 것은 너의 숙명이다.
But don’t in the least hurry the journey.
그러나 너무 서둘지 마라
Better it last for extended period of time,
여정이 길수록 좋다
So that when you reach there you are old,
그래서 네가 그곳에 도달 했을 때는 늙어서
Rich with all you have gained on the way,
길 위에서 터득한 것으로 풍요롭게 될지언정
Not expecting Santiago to give you wealth.
산티아고가 풍요로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Without the destination Santiago you would not have set out.
산티아고가 목적지가 아니었다면 너는 출발 하지 않았을 것이다.
The holy place hasn’t anything else to give you except making humane bonds on the way.
그 성소가 너에게 주는 것은 길 위에서 맺은 인정이 넘치는 유대 관계 외에 아무것도 없다.
필자가 순례기 제목을 “그 길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이라고 정 한 이유 이기도 하다.
내가 까미노를 걷기로 하고 금년 초에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자 가장 먼저 찬성을 한 사람이 집사람이다. 이미 집사람의 친구 한 분이 그 길을 다녀와 그 길에 대한 좋은 인상을 품고 있었던지 “당신은 마라톤을 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나의 뜻을 즉석에서 받아 들였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 더니 산티아고 순례가 확정되어 4월달에 출발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히자 갑자기 4월7일 개최되는 파리 마라톤에 참여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 없었다. 그때가 2월초였다. 마라톤 전문 여행사를 통하여 주최측에 문의를 했더니 1월말로 엔트리가 마감되여 불가하다는 연락이 왔다. 마음을 비우러 가는 사람이 욕심을 냈으니 빨간 불이 켜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자기 반성을 하며 마라톤을 포기 했다. 잠시 어지럽던 마음이 가라앉자 순례가 다시 여행의 중심 테마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순례출발지로 가는 교통편으로 파리 직항 아시아나 비행기를 택했고 그날 바로 연결이 되지 않아 그 이튿날 TGV를 타고 Bayonne역으로 가 거기서 지선 열차로 갈아 타고 Saint Jean Pied De Port로 가기로 온 라인으로 예약했다.
4월15일 12시 50분 인천에서 출발하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나의 모습을 살펴 보면:
머리에는 고어텍스 천으로 만든 챙이 넓은 청색 K2 모자를 쓰고
자켓은 소매 끝에 Helly Tech Protection 이라고 쓰인 Helly Hansen사의 기능성 겉옷을 입고
안에는 K2 보온용 남방을 입었다. 남방 위에 현금과 여권이 들은 방수 천으로 되어
어깨 끈이 달린 레드 페이스 제작 소지품 보관 휴대 지갑을 메고 있었음.
바지는 양쪽 주머니에 자크가 달리고 바지안쪽에 기모가 있는 Deteur 제품이고
안에는 Helly Hansen사의 기능성 내의를 입었음
신발은 발목이 짧은 라푸마 제품이고
통가죽으로 된 Mid-Cut 등산화를 새로 사서 발에 익히다 불편하여 포기했음.
양말은 몇 번 신어 본 국산 기능성 양말을 착용했음.
스틱은 티타눔으로 만든 North Face 제품을 채택했음(아들 것을 빌림)
배낭은 용량 38리터로 비올 때 보호하는 비닐 카버가 있는 Deteur 제품임.
배낭 안에 숙소에 도착하여 갈아 입을 옷 한 벌과 티셔츠 2장, 기능성 빤스 3개, 양말 3켤레, 바람막이, 가벼운 오리털 침낭, 스포츠 타월, 손전지, 잭크 나이프, 빨래비누 한 장, 빨래 건조용 찝게 5개, 치약, 칫솔, 여행 안내서, 알베르게 정보(스페인 순례자 협회 온라인 자료 다운 받은 것), 일기장, 침대 카버, 판초, 스펫치, 산달 한 켤레, 선식 한 봉지, 고추장복음 한 병, 빈 물컵 하나, 선 그라스, 민속 소품 30개 그리고 손톱 깍기 등 신병용품이 들어 있었음. 스틱 두 개를 따로 부치지 않고 분해해서 배낭 안에 넣었음.
아시아나 항공 인천 check-in counter에서 배낭을 부치면서 담당 하는 직원에게 중량을 물었더니 정확히 11.5kg이라고 알려 주었음. 순례 중에는 스틱은 배낭 중량에서 제외 되었지만 그대신 물 한 병, 오랜지 나 사과 하나 그리고 간식, 빵 등이 추가 되여 실제 배낭의 무게는 12kg 내외를 벗어 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됨
순례중 휴대한 핸드폰은 삼성 갤랙시 SIII이고 거기에 사진 데이터 전용으로 사용할 대용량 칩을 장착하여 순례 중 역사 문화 현장의 스냅사진을 집적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준비했음. 아울러 친구의 협조를 받아 바로크 뮤직 등 고전 음악과 그리고 내가 선택한 우리가곡, 행진곡 등 음악 900여곡을 스마트 폰에 입력 하여 무료한 시간에 대비했다.
4월 15일 오후 6시에 아시아나 항공 501 편으로 CDG Terminal 1에 도착하여 배낭을 찾고 있는데 North Face자켓을 입은 한국인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산티아고로 가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자 자기도 같은 목적지로 순례 여행을 가는데 파리에서 이틀 동안 관광 계획이 있어 SJPP에서 출발이 나보다 늦다고 해서 순례 길에서 만나자고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출발 당시 서울의 아침 기온이 8도였고 정오에는 10도 까지 상승한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하니 날씨는 좋았으나 기온이 19도 까지 치솟아 무척 더웠다.
RER B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저녁 8시 50분쯤 Montparnasse역 부근에 있는 Central Hotel에 도착 했다. 당초 세느강 유람선을 탈까 생각했었는데 호텔 프런트에서 알아 보더니 지금은 저녁식사를 포함한 유람선 티켓만 판다고 하여 포기 했다. 왜냐하면 이미 비행기 안에서 저녁식사를 한 이후이라 저녁식사비까지 포함된 추가 요금을 내고 관광을 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내일 기차 출발 시간이 낮 12시27분이라 늦잠을 자도 되겠다 싶어 호텔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에펠탑 까지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필자가 에펠탑에 도착 했을 때 밤 10시 가까운 시간이 지만 많은 관광객과 부근에 사는 시민들이 공원에 나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관광객에게 부탁하여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일정 시간주기로 마치 크리스마스 추리에 명멸하는 조명같이 에펠탑 전체가 휘황찬란한 광채를 내며 한 5분 정도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 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많은 시민들이 길거리 카페에 앉아서 정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호텔로 돌아 오면서 노숙자들이 버려진 쓰레기 자루같이 건물 입구나 길 위 여기저기서 새우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늦은 시간이 지만 호텔로 돌아 오는 길에 Montparnasse역에 들러서 이미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예약한 기차표를 막 퇴근하려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 자동 기계에서 출력하여 내일 출발하는데 더욱 여유시간을 갖게 되었다.
공항에서 RER B기차표를 사려다 여행길에서 처음 분실 사건이 일어 났다. Counter에 모자를 두고 온 것 같아 기차표를 개찰한 후 직원에게 이야기하여 다시 들어온 문 밖으로 나가나가 매표소 직원에게 혹시 내가 놓고 간 모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 보았으나 머리를 저어 모자 찾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모자를 잃은 후 내 일기장에는 “모자를 잃은 비교적 가벼운 손실에 감사 그리고 서둘지 말고 차분하게 행동하라는 교훈”이라고 적혀 있다.
스페인 태양이 강하여 순례 길에 모자는 꼭 필요하고 어차피 내 신발이 라푸마 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같은 값이면 모자와 신발의 브랜드를 일치 시키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여 다음 날 아침호텔 프런트에 문의하여 라푸마 대리점을 찾아 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테레비를 켜니 보스턴마라톤 대회 결승선에서 폭발 사고가 났다는 뉴스 특보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필자도 201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눈에 선한 그 결승선 부근에서 폭발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 필자는 보스턴마라톤 축제에 참가한 순수한 마라토너와 무고한 시민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한 야만적인 행위에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호텔 식당에서 커피와 주스 한잔 그리고 크로와상 두 개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비교적 가까운데 있는 라푸마 대리점을 지하철을 타고 찾아가니 아직 개점 5분전이었으나 점원의 배려로 특별히 일찍 들어가서 전시된 용품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챙이 짧은 모자 뿐이었다. 모자 사기를 포기 하고 돌아오다 부근에 개선문이 있어 지나가는 젊은 아가씨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자기 시계를 들여다 보며 시간이 없다는 시늉을 하고 지나가 버렸다.
돌아오는 지하철 표를 자동기계에서 사기 위해 내 차례가 되어 기계조작을 하는데 잘 안되어 한 세 번쯤 반복하다 뒷사람에게 양보를 했다. 노신사 한 분이 나의 행선지를 묻더니 표를 두 장 뽑아 나에게 한 장 주는 것이 아닌가. 지하철 표 한 장에 1.75유로 이지만 감사 하다고 돈을 드리려고 하자 자신이 주는 선물 이니 그냥 받아도 된다고 하면서 가 버리신다. 아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여 거절 당한 아가씨에게 품은 미운 감정이 중년 노인의 아름다운 친절로 상쇄 되어 파리시민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편견을 지울 수 있었다.
내가 본 개선문은 샤를드골 에뚜왈 광장에 있는 개선문 2호였다. 내가 이번 순례에 성공하면 귀로에 파리를 경유하여 귀국하므로 개선문 1호(루브르 박물관 경내에 있음), 2호(샤를드골 에뚜왈 광장에 있음), 3호(라데 팡스에 있음)를 모두 방문 하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개선문 2호를 보면서 중앙 바닥에 새겨진 글에 내 눈길이 갔다. 한국전에 참전한 불란서 참전 용사 부대에 관한 내용 인 것 같았다:
Aux Combattants
Du Battallion Francais
O.N.U.
Guerre De Coree
1950-1953
모자 분실 사건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순례를 마치고 관광을 하던 중 그라나다에서 핸드 폰 을 분실(나는 도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하는 피해를 입은 것은 정말 수치스런 일이다. 핸드폰에 입력된 26일간 순례 모습을 찍은 사진Data를 잃은 사건으로 필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사건을 당한 즉시 5월말까지 계속 하려던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기차편이 연결되는 대로 피리로 돌아와 22일 한국으로 조기 귀국한바 있다.
돌아와서 순례기를 쓸 의욕도 나지 않아 차일 피일 하다 지난주 일요일 이러다 머리 속에 남은 기억마저 사라지지 않을 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여 사진 자료 없는 순례기를 쓰기로 마음을 먹고 순례기를 시작 한바 있다.
이번 순례 여행 중 나는 내 생각을 지지하는 하부구조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상황이 전개된 몇 가지 큰 사건을 겪었다. 그 중 하나가 핸드 폰 분실 사건이다. 핸드폰이 감 쪽 같이 사라져 분실인지 도난인지 애매 하나 나는 도난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도난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나는 늘 자크가 달린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주머니에 넣고 자크를 채웠다. 그리고 순례기간 동안 내가 25회나 숙소를 바꾸면서 내가 소지한 현금과 핸드폰을 분실할 정도로 방심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 가지로 필자도 여행을 떠나기 전 일반여행 보험에 가입했다. 그러나 보험회사에서는 휴대품이 도난 당한 경우에만 보상을 해준다고 한다. 내가 가입한 보험 약관에 의하면 휴대품 손실 보상 금액은 한 품목당 이 십 만원 이다. 보상 금액이 얼마 되지 않아 실익이 없고 현지 당국에 도난신고를 하지 않아 나의 경우 보험청구를 포기 하였다. 앞으로 여행 하실 분들은 휴대품 손실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현지 관계당국에 도난신고를 하여 도난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파손의 경우는 별개 입니다.
Montparnasse 역에서 TGV를 타고 Bayonne으로 가는 차 중에서 배낭을 소지한 여러 순례 객들이 눈에 뜨였다. 옆자리에 않은 Wales에서 오신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Bayonne까지 갔다. 가냘픈 몸매의 이 아주머니가 채식주의자란 사실을 알고 Bayonne역에 도착하여 다음 연결 기차를 기다리는 도중 내가 가져간 선식의 1/4가량을 비상식량으로 쓰라고 그 분 에게 드리며 행운을 빌었다.
역 대합실에서 SJPP로 가는 기차는 사고로 버스로 대체한다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뜨자 Bayonne 역 광장으로 나가 버스를 기다렸다. 승객 50명 정도를 태운 버스 가 Bayonne출발후 몇몇 시골기차역에 손님을 내리고 태운 후 저녁 8시경 SJPP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Bayonne을 출발부터 한 시간 반쯤 걸린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린 일단의 순례 객이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마을을 가로 지르는 개울 위에 다리를 건너 비탈진 언덕을 얼마쯤 올라 가니 순례자 사무실이 나왔다. 이미 출발지역 국가 순례자 협회에서 순례 Passport를 발급 받은 사람은 굳이 이 사무실을 들릴 필요가 없어 버스에서 내린 모든 순례 객이 순례자 사무실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사무실은 한꺼번에 몰린 순례객 들로 붐볐다.
한참을 기다린 후 내 차례가 되어 순례 Passport를 발급하는 자원봉사자 앞에 앉았다. 여권을 달라고 해서 제시 했더니 Carnet De Pelerin De Saint-Jacques 라는 순례자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그 안에는 순례자의 성명, 국적, 여권번호, 발급일자, 순례수단(도보 또는 자전거 순례)이 적혀 있다. 순례자 여권에 불란서 순례협회 도장을 찍어 주면서 불란서길 도중 거쳐야 할 마을 이름과 거리 그리고 알베르게 정보가 담긴 유인물과 함께 피레네 산을 넘어 가는 약도를 비닐봉투에 넣어 넘겨주었다. 자원봉사자는 피레네산을 넘는데 6-8시간이 걸린다고 강조했다.
내 여권을 발급한 불란서 자원봉사자는 영어를 전혀 몰라 자신이 하는 틀에 박힌 일을 처리한 후 내가 추가로 요청 하는 내용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옆자리에 영어를 좀 할 줄 아는 자원봉사자에게 부탁하여 그를 통하여 나의 담당자에게 내 뜻을 설명하자 이해가 되었는지 나의 요구를 받아 들었다.
나의 순례자 Passport가 발급되자. 나는 설명 하기 시작했다. 이번 순례 여행을 온 사람은 나 혼자 이지만 내 가슴속에 또 한 사람의 순례자가 동행 하고 있다. 바로 서울에 있는 집사람인데 지금 무릎이 아파 걷지를 못한다. 그러니 내 가슴에 담고 함께 걷고 있는 나의 처를 위해 나와 똑 같은 순례자 여권을 발급해 줄 수 없겠는가 라고 요구 하였고 이 요구가 받아 들여 져 나는 두 권의 순례자 여권을 가지고 순례를 떠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내 순례 passport에 도장을 받을 때마다 집사람 passport를 꺼내어 같은 도장을 받았다.
순례자 여권수수료는 각각 2 유로 였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얼마간의 헌금을 하고 조개껍질(Scallop Shell) 두 개를 골라 배낭 안에 넣었다. 순례자들은 이 조개 껍질을 순례의 상징으로 배낭에 달고 다닌다. 조개껍질의 상징은 야고보성인의 시체를 물속에서 건져냈을 때 조개 껍질에 덮여 있었다는 전설에 유래하고 있다. 순례길의 표시가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되기도 하지만 옛 건물이나 도로에 조개 껍질을 새겨 넣어 그 길이 역사적인 길임을 알리며 순례자들에게 산티아고로 나갈 방향을 제시 하고 있다.
순례자 여권이 필요한 이유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지방 자치단체나 교회 또는 순례협회 등에서 숙소를 제공 하는데 숙소에서 등록 할 때 꼭 자기나라 여권과 더불어 순례 여권을 제시 해야 한다. 사설 숙소도 있으나 등록 절차는 마찬가지이다. 등록을 하면서 관리자는 자기숙소에서 머물렀다는 도장을 순례자 여권에 찍어 준다. 순례가 끝나고 도장이 찍힌 순례여권을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 제시하면 순례사무실 직원이 이를 확인한 후 라틴어로 된 까미노 완주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순례증명서의 발급 요건은 걷는 경우 산티아고를 기준으로 최소한 100km를, 자전거를 타는 경우 최소한 200km를 주행 했을 경우에 발급해 준다. 다시 말하면 순례완주 증명서를 목적으로 산티아고로 가시는 분들은 불란서 길 800KM를 다 도보로 행군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시간이 허락하고 역량이 닫는 범위 내에서 산티아고 도착직전 최소한 100KM 즉 한 4-5일만 걸으면 된다.
핸드폰 분실 사건과 관련된 일화를 끝으로 순례길 출발 직전까지 두 번째 순례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내가 귀국한 후 친지 몇 사람 에게 간단한 안부인사와 순례 중 내가 체험한 사건들을 들려드렸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핸드폰 도난 또는 분실사건이다. 금전적 손실 이외에 26일간의 사진 데이터를 집적한 결과물이 거기에 담겨 있기에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충격의 파장이 매우 컸었고 이를 사실로 받아 들이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떨쳐 버리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고 2주째 되는 날 아침 나의 고종 사촌 동생이 전화를 걸어 왔다. 내용인즉 형님과 비슷한 시기에 까미노를 다녀온 자신의 선배 일행이 계시는데 사진 데이터를 좀 구 할 수 있는 지 문의 중이라고 알려 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내 사촌 동생의 주선으로 지난 월요일 드디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산티아고를 다녀온 순례자 한 분을 뵙는 기쁨을 누렸다.
내가 만난 분은 사진 작가 이선모 선생님이다. 이 선생님은 나보다 하루 늦은 4월18일 SJPP를 일행과 더불어 자전거로 출발하여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마치셨다고 한다. 원래 자전거 순례길이 따로 있으나 순례자 들이 도보로 가는 순례 길을 따라가며 자전거를 타며 끌며 고생 끝에 순례를 마치셨다고 한다.
이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진 파일 가운데 우선 순례출발 부분을 검색한 결과 다행스럽게도 한가지 사진에서 공통관심을 발견 했다.
제가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카나리 섬에서 온 스페인 부부가 개와 함께 순례하는 것을 목격하고 내 핸드폰으로 여러 번 스넵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부인은 독일 출신이고 남편은 스페인 인인데 남편은 출산직전 임산부의 배 볼륨보다 더 큰 복부 비만을 안고 있었다. 부인 배낭은 보통이나 남편 배낭은 너무 커서 그 안에 조립식 개 우리를 짊어 진 것으로 추측 할 정도였다. 그리고 개도 자신의 순례 중 소비할 일용품을 허리양쪽에 달고 주인과 같이 길을 가고 있던 좀 이색적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이 사진이 이 선생님 일행이 찍은 사진 파일에도 존재하고 있어 나와 다른 순례자 간의 관심의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사진이 없는 것이 흠이 될 수 있으나 개의 치 않고 있다. 순례 중 나의 모습은 늘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어떤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증명 이 외에 별 다른 의미는 없다고 본다.
앞으로 순례 이야기를 전개 하면서 이선생님 일행과 저의 안목이 일치 하는 부분에 한하여 아주 선별적으로 사진을 골라 올릴까 한다. 우선 지면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공해주신 이선생님과 그 일행 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이것이 제가 전편에서 주장한 까미노 정신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는 너무나 우연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오늘 순례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일 내가 파리 마라톤에 참가 했다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로 가는 기회를 붙잡지 못 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 지만 피레네산맥을 넘어 가는 전통적인 길은 내가 그 산을 넘어 가기 직전까지 막혀 있었다고 한다. 잦은 악천후로 인하여 다른 지역에서 순례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어서 그런지 기후변화로 위험지역 통행이 더욱 강화 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마음이 졸여 출발직전까지 한국에서 www.viewweather.com을 통하여 현지 기상을 모니터 한바 있다.
내가 파리 마라톤을 놓친 것이 오히려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발로 들어가는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내가 핸드폰을 분실하여 이선생님 일행이 더 좋은 구도에서 찍은 사진을 접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여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인생길에서나 순례 길에서 좋은 일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어난 일을 받아 들이고 더 큰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세월이 지나 과거를 회고 해보면 좌절과 고통을 안긴 바로 그 사건이 나중에 전화위복의 계기로 반전된 경우를 생활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오늘의 교훈 A mal tiempo, bueno cara. (불순일기에도 웃음을 잃지 마라.)-스페인 속담. “끝”
첫댓글 한 달 이상의 영상 기록이 담긴 핸드폰을 분실(도난?)하고 상심한 심정은 십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하나를 놓치고 나서 또 다른 하나를 붙잡을 수 있음도 인생의 한 단면일 수 있다고 강조하시는 듯, 잘 익은 과육의 냄새처럼 향긋합니다. 다리가 불편해서 동행치 못한 마나님을 생각하며 두권의 순례 패스포트를 준비한 마음에 정 大兄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큰 일 달성하신 것,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