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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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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보살님이 말하길 "몸이 마치 공중에 떠 날라 다니는 느낌입니다."
답하길 "날라 다는 것이 아니고 허공에 둥실둥실 떠있는 느낌이지요"
정확하게 살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몸은 솜털같이 가볍기 그지 없고
감각은 마치 구름위에 앉은듯 해서 분명하게 육신이라는 실체는 있으나
마치 허공에 떠있는 듯 한 느낌이 들겁니다. 보살지에 들면 이러한 느낌
을 自覺할 수 있습니다.
이틀전 松巖에게 묻기를 " 당신은 계란 위로 걸어 갈 수가 있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더니 " 아 그렇군요 할수 있습니다." 體用이 되는가? 禪定에
든 것을 自覺할 수 가 있는가?. 自覺못하면 滅定입니다.
차력사들이 수십년간 연습을 하고 얻은 신통한 짓을 평생 한번도 안해본
송암이 '자신있다'고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송암에게 '할수있다' 는
말을 듣고 한마디 덛 부치길 "당신은 작두위에서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차력사는 부단한 반복에 의한 훈련으로 터득하고
무속인은 제정신 아닌 상태에서 작두위를 걷지만
선정을 자각하는 보살은 온전한 정신과 육신으로 이 경계를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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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만날때 마다 한마디 한마디 던지는 말속에 그가 체득한 것을 확인
하고 그 과정속에 空의 실상인 體가 밝아지는 것을 도와 주기 위함입니다.
=色(몸)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몸)입니다. 色을 떠난 空은 없습니다.=
* 그러나 살아있는 육신으로는 空도 涅槃도 自覺 이상은 없습니다. *
이뜻을 모르기에 삼십 여년 전 1970년대 중반 허공에 뜰수 있다고 착각한
수좌스님 세분이 속리산 문장대에서 뛰어 내렸다가 모두 사망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이러한 이치를 모르기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메시지
휴거를 마치 몸이 산체로 공중으로 올라간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차별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하늘을 향해 올려달라고 기도
하는 목사와는 다릅니다. 생각해 보면 스님들은 滅定에 들어 갈수 있는 분
인듯 합니다. 다만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기에 자신이 체득한 경계를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실과 허(色과 空)를 구분하지 못한 착각에서 벌어진 예로서 이 사건을
희화적으로 보지말고 받아 들이는 사람이 귀감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
하면 스님들은 보살행을 하신게 됩니다. 한생각이 지옥과 극낙을 만듭니다.
뭔지도 모르고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휴거를 바라는 행동은 마치 죽은
엄마에게 두팔 벌리고 안아 달라고 떼쓰는 것과 같으니 선지식은 안아주는
사람이 아니고, 스스로 가도록 길을 가르키는 사람(목자)입니다.
이런 착각이 사람을 추종하는 삿된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휴거'를 바로 알면 거짓이 아니고 정확한 선정상태의 표현이 될듯 합니다.
선각보살이 말하듯 공중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이상태를 정진화 보살은
앞장에서 소개 했듯이 "마치 둥근 원통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법화경을 설할때 허공중에 무수한 보살들이 가부좌로 둥실둥실 떠있듯
어느 조사는 '버들개지다' 했지만 이 보살들은 그러한 글자를 모릅니다.
오직 實로 나타나는 느낌과 현상을 쉬운 우리 말로 주고 받을뿐입니다.
이런 감각의 상태를 미사어구로 써놓으면 게송이 됩니다.
멋진 글 벽에 걸어놓고 혼자 좋아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 글과 같이 행하라
携擧 [들 휴, 들 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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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는 말세론에서 주창하는 종말 현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휴거를 찾아 보았더니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올때 기독교인들이 공중에
올라가 그분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뒤에 살아서 남아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참으로 꼭 맞는 말입니다.
종말은 지구가 끝나는 것도 종말이고, 그대 자신이 죽는 것도 종말입니다.
내가 없는 지구는 아무 소용이 없고 내가 사라진 후에는 지구가 부서지던
우주가 무너지던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설명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뒤에 살아서 남아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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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을 득하고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은 이미 허공에 있고, 지금 살아있는
善覺은 공중에 둥실 떠있고, 정진화는 둥근 원통속에서 말을 하고 연화지
는 부드러운 무엇에 감싸 진듯 하다고 하고, 송암은 계란 위를 걸어갑니다.
그들은 항상 살아있는 그대로 휴거를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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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치를 밝혔으니 이해가 되신 인연자는 길을 찾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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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心立命處
'꿈도 생시도 없이 잠이 푹들었을때 안심입명처를 어디에 두는 지 알아라'
달을 가르킨다 하나 그런 말로 누가 길을 찾으리, 문밖의 선소리 그만두고
'그대의 목숨(立命)이 어느 곳에 있는가' 를 확인하면 편안(安心)해 집니다.
자~ 이제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 중에 편안 한 곳을 찾아 봅시다.
'찾았으면 유지하십시요'
平安을 유지한 상태로 숨을 다시 보십시요, 숨결은 변함없이 오고 갑니다.
들어 오고 나가는 숨이 방금전 平安한 마음을 장애하는지 장애하지 않는지
확인해 보십시요. 확인이 안되면 끝없이 찾아야 합니다.
좀더 쉽게 설명하지요.
심호흡을 할때 숨을 들이 마시고 멈추면 가슴이 답답해서 참을수가 없습니다.
곧바로 밷어야 합니다. 참았던 만큼 강하고 길게 숨을 내뿜게 되지요. 그런데
가슴에 체여있던 숨이 모두 나갔을때, 나간 숨이 다시 들어오기 직전, 그때,
잠시 약 1~2 초 정도 숨이 멈추게 됩니다. 그때 참으로 편한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숨은 몸으로 쉬기에 몸(숨)과 마음이 동시에 편안한 것을 느낄 수
가 있어야 합니다. 고로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숨이 멈췄을때의 편안함을 체득하면, 편안함은 지속하는 가운데 오고 가는
숨을 觀察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는 숨이 마음을 장애하지 않게 됩니다.
즉, 대상이 고요해서 편한 것은 올바른 편안이 아닙니다.
숨이 들어오던 나가던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편해야 합니다.
지구가 멸망해도, 달음질로 숨이 헐떡거려도 平安은 장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보통사람들은 마음이 숨결을 따라 움직입니다.
화가 나서 헐떡이면 마음도 헐떡이고 주변이 조용하면 마음도 조용해 지듯,
사리불이 조용한 곳을 찾기에, 장소 대상 그대의 몸까지 공함을 안다면 어찌
고요한 곳을 집착합니까?. 공한 감각을 체득하면 일체 相을 떠나야 합니다.
마음을 멈추지 못하고 대상을 따라 변한다면 응무소주이생기심이 안되겠지요.
'멈춘자는 고요하다'
세존께서 앙굴마라에게 쫓겨서 뛰어가시면서도 "나는 멈춘지 오래다"
涅槃은 寂靜입니다.
몇일전 미국 유학갔다 왔다는 요즘 유명해진 젊은 스님께서 tv에서 말하길
유리 어항에 흙을 넣고 물이 맑아지라고 두손을 넣고 흙을 아래로 누르면
더욱 흙탕물이 되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 바라 보면 흙탕물이 저절로 가라
앉아 맑아지게 된다고 하며 이때 어항을 바라보듯 나를 관찰하라 하더군요.
이런 상태가 참선입니다. 이론은 맞는데 실제 앉아보면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안된다는 것을 경험했고 알고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있으면
오히려 평상시보다 생각치도 못했던 온갖 망상들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가라 앉는 흙탕물과 다릅니다. 그러나 오랫
동안 반복하다 보면 가능해집니다. 저는 이러한 習禪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로 억지 참선을 권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은 대상에 부디쳐도 작용을 하고 가만히 놔두면 제홀로도 작용합니다.
六識은 당장 눈 귀 코 앞에서 펼쳐지고. 七識의 기억들은 제홀로 作用 하고,
八識은 나도 모르게 作用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다시
平安이란 平等할 때를 말하고, 평등이란 일체 것이 균일하게 작용할 때를
말합니다. 조사들이 말하는 평상심에 해당하고 이때의 작용을 平等成地라
합니다. 만물은 이와 같이 평온한 상태에서 이루워지며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때, 변하는 대로 받아들이면 平安이고, 거스르면 헐떡이는 不安이 됩니다.
평등성지란 法의 平等을 말하고 法의 平等이란 주어진 조건에 의하여 균일
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소를 잡아 먹었으면 소로 값아야 하고, 애꾸
짓을 했으면 애꾸가 되어야 합니다. 행한대로 이루어지는 因果法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이루워 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묘관찰지입니다. 고로 평등성지를 대원경지
라 하고 經에서 찾아보니 대원경지를 다른말로 '무등무륜 최상승지' 라고 되어
있더군요. 무등무륜에서 無等이란 등수가 없다는 뜻이니 平等을 말하고 無輪은
돌지 않는 것을 말하기에 멈췄다는 뜻이 됩니다.
고로 '무등무륜 최상승지'란 아미타세계, 연화장세계, 화엄세계를 말하며 일체
존재가 빛으로 오는 것이 보여지는가?. 불에 타버린 후, 밝게 비쳐지는 사물들이
照見되는가?. 照見, 明照, 觀照등은 모두 삼매에 들었을때 가능한 단어입니다.
고로 무등무륜 최상승지란 '마음을 멈추고 비춰보는 세계'를 뜻하는 것이 되고
자연스럽게 무량수경은 이러한 경지(삼매)에서 설하게 될수 밖에 없겠지요.
이것은 삼라만상의 실상으로 사람은 물론 소, 돼지등 짐승도 볼수가 있습니다.
다만 축생은 모르는 상태(無知)로 보고 사람은 자기 생각(편견)으로 볼뿐입니다.
고로 짐승은 보고도 모르고, 사람은 보여줘도 모릅니다.
선정을 체득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풀, 꽃, 나무, 등이 이토록 새록새록 비쳐지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신기하지요 늘상 보던 것들인데 모든 사물들이 새롭게 보이다니...
비로서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로구나 하는 자연의 실상을 터득하게 됩니다.
꽃을 보면 꽃속에서 덩실대고, 숲을 보면 숲으로 들어가 덩실대고...
화두타파시 법열에 감싸져서 저절로 너울너울 춤을 추는 현상과 같습니다.
涅槃은 寂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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究境涅槃은 텅빈충만도 너울너울도 아닙니다. 한없이 외롭고 슬퍼집니다.
뛰어가면서도 고요한 것, 고요함으로 바뿐 것을 인식하는 자각, 체득당시
제일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 상태로 열반에 들고십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롭다' 또 하나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두가지가 하나로 귀결되는데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외롭다' 세간에
서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치와 같습니다.
일체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리고, 三界가 寂莫한 속에 의지할 곳 없는(무소유)
존재가 한없이 외롭고 처량한 느낌이 듭니다. 본래 이렇게 존재 하는 것을
모르고 情에 끌려 일희일비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아직 미망에 헤메는 중생
들이 서글프게 비쳐지는 悲心이 듭니다. 慈心은 悲心에서 오는 것, 그렇지만
스스로 믿고 행하지 않으면 어쩔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열반적정이란 멸진정이 아니고
번뇌가 끊어진 고요한 마음으로 바뿐 것을 인식하는 것, 뛰면서도 고요한 것,
구름이 흘러가도 허공은 항상 깨끗하고, 물소리 요란해도 물에는 소리가 없다.
멸진정과 열반을 구분 못하면 자칮 멸정의 송장선을.. 三昧는 깨어있는 고요함
다시 가벼움으로 돌아가서
차력사가 깨진 병 위를 걷거나 계란 위를 걸을때 몸의 균형을 평균 상태로 만듭
니다. 몸무게의 중심을 골고루 분산시켜야 하는데 차력사는 반복된 연습에 의하
여 이러한 경지를 터득합니다. '얏! ' 기압소리와 함께 숨을 멈추고 걸어갑니다.
보통 사람도 힘을쓰거나 중심을 잡을때 숨을 죽입니다. 죽어야 균형을 잡습니다.
안이비설신의 知覺이 작용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고로 순간에 일념을 만듭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뛰면서도 육신의 중심을 골고루 평등하게 풀수가 있습니다.
이유를 설하지요.
화엄세계는 모든 존재들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공존이란 서로 연결은 되어있지만 동일체는 아니라는 것, 고로 화이부동입니다.
내 육신의 세포들도 한몸뚱이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공존하지만 세포들 마다
나고 죽는 생멸의 주기가 다릅니다. 전체의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생멸주기가 각기 다른 세포들이 하나가 된다면 육체는 썩고 부패합니다.
서로가 균일하게 거리를 두고 공존하며 변하기(생멸하기)때문에 처음의 모양을
유지하면서 균일하게 커지기도 하고 늙기도 하며 변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無常의 이치가 이러하듯 하나의 단풍잎이 이러한 이치로 작을때도 손바닥 만큼
컸을때도 처음 모양을 유지할수가 있고, 우주의 별들이 똑같은 등가비례로 멀어
지기 때문에 상대적 개념에 의하여 판단하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절대세계에서
벌어지는 변화상을 볼수도 알수도 없기에 허망함만 느낄뿐이지요. 不知不見
작게는 균형감각을 터득하고 재주를 부리지만 그러한 현상의 근본에는 각기의
물질(세포)마다 저마다의 중력(업력)으로 존재하고, 그 중력의 기준점에서 공존
하고 있습니다. 고로 세포들의 중력이 다하는 날 서로 엉키면 육신 썩게 됩니다.
하나의 육신이 그러하고 태양계와 대천세계가 그러하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열반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로 열반은 공에도 색에도 끌려가지 않는 영원한 무한정지 괘도와 같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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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현성 개위무위법 이유차별] 이것이 열반입니다. 고로 구경각이란
모든 성인이 무위법에 의해 각각으로 존재 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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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각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지혜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대자행, 서연, 정진화, 연화지, 선각, 송암, 범정, 바로! 어제 확인한 香雲까지
空의 감각을 체득하고 空의 감각을 自覺하지만 아직 여기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自覺은 백호 미간의 작용, 번뇌가 완전히 끊어지면 눈썹 위가 없는 寂靜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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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죽어야 휴거던 공중부양이던 할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기에
공중부양 하겠다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평생 허송세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휴거나 공중부양은 죽으면 썩어없어질 몸뚱이가 공중에 둥둥 뜨는 것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육신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나무토막과 같다고 했고" 예수도 육신은
사망의 몸이라고 했는데도 그러한 몸뚱이로 허공으로 올라가겠다고 하니 기가 막
히지요. 먹고 살기 힘들던 어린시절에도 교회 문턱을 넘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함께 놀던 아이들이 빵과 과자를 얻으러 갈때도 저는 혼자 돌아서곤 했었으니 아마
뼈속까지 佛子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교리를 돌아보니 그 곳 에도
구원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뜻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할뿐이지요.
다만 예수가 체득했던 경계는 '주(하나님, 부처님, 空)의 품에 안기는 것'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는 말도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잘 안됩니다.
품에 드는 것과 '하나 되는 것은 다릅니다.
품에 든다면, 드는자와 받는 자가 둘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가 된다면 나도 하나님도 없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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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깨쳤다는 분이 법문하다 말고 두눈 꽉감고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을 보면
저분이 정말로 깨쳤는가, 하나님 찾는 것과 뭐가 다른가?. 禪那와는 천만리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허공에 달이 있다고...
일천강에 떠있는 달에 속더니 허공 달에 또 속누나
不二法을 말할때 둘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 숫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양쪽이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다시는 혼동하지 마십시요.
兩俱空입니다. 몸과 마음, 죄와 마음, 색과 수상행식(마음)
오온개공 설명하면 누구나 이해가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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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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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전(지난주 금요일) 어느 분 사무실에 들렸습니다.
두분이 있다가 한분이 담배를 들고 일어서며 '나가서 피우겠다' 하더군요.
이때 옆에 있던 분이 말하길 "괞찮습니다 '이분은 이해를 하십니다'
담배 피던분이 말하길 "저는 담배를 끊겠다 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에 제가 말하길, "당연하지요 생각 안한 사람이 끊는 다는 것은 마치 복권
을 사지 않은 사람이 당첨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죽을때까지 그런 마음이
변치않으면 됩니다. 코미디언 이주일처럼 죽어갈때 후회하지 않으면 됩니다.
산길, 서울 가는 길 등 모양이 있는 길은 잘못가면 돌아 올수도 있고, 다시
갈수도 있지만 형상없는 마음과 인생 길은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하고 5분도 못되어
TV 뉴스에서 저축은행 사건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담배피던 사람이 말하길
처먹을때 달게 먹었으면 처벌도 달게 받아야지 하면서 처먹을때 그럴 줄
몰랐냐 며 큰소리를 하더군요. 제가 빙그레 웃으며 참으로 정확하십니다.
이와같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뭐를 안다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지혜가 밖으로만 비출뿐 안으로 자신은 비추지 못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남을 향해 겨눈 칼날이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와같이 자신을 모르기에 법계안에 중생은 없고 중생이라는 이름과 중생
이라고 생각하는 중생심만 있습니다.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생각에 잘못이 있지 담배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병이 들고 또 죽어 갈 때도 방금 전에 스스로 말했듯이 달게
받으면 됩니다. 후회없이 받으면 됩니다. 누구도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더불어 저는 담배 피는 것을 이해를 한 적도 없고, 안한 적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깨쳐있습니다.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고 남만 판단하지요. 불과 오분 전에 자신이
했던 말에 자신이 걸려듭니다. 이와같이 지혜는 있지만 지혜의 본체인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거울에 비쳐진 걷 모습만 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一千江에 비친 달 만 본다' 는 뜻입니다.
이와같이 행한대로 받아들이는 변하지 않는 마음(一心)이면 됩니다.
대원경지는 각자가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무엇이던 바라고 행하는
대로 됩니다. 도둑이 되고 싶으면 도둑이 되고, 부처가 되고 싶으면 부처
가 될수 있는 세계가 대원경지입니다. 본래부터 바탕색이 없기에 그림을
그리는 대로 모양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린 대로 받아 들이면
다 받아 들여서 남은 여분이 없기에(無餘) 완전한 涅槃(寂靜)이 됩니다.
담배피던 사람이 말하듯 '미련없이 달게 받으면' 됩니다.
보살은 어떠한 行(因)의 結果(果報)를 미리 알기에 因行에서 조심합니다.
즉, 깨어있는 선정으로 '一行三昧'가 된다는 뜻입니다.
조심을 찾아보니 操(지조 조)心 = 언행에 실수가 없도록 하는 것,
이뜻도 맞겠지만 보살의 조심은 이보다 調心으로 해야 좋을듯 합니다..
= 문밖에 사람은 操心하고, 문안에 든 사람은 調心(정사유) 하라 =
조심(調心)이라는 글자를 찾아보니 사전에는 없고 일부 사람과 종교에서
사용하는 뜻을 찾아보니 평상심과 거리가 있습니다. 보살이 아니면 調心
(平常心)이 되지 않습니다.
調(고를 조) 心(마음 심)
즉, 마음을 고르게 하라, 평등하게 하라, 평등심이 되고, 편견없는 마음,
조사들이 말하는 평상심이 됩니다. 찾아왔던 淸淨이나 미진한 사람들은
하던 버릇 그대로라고 착각합니다. 業(버릇 習, 衆生心)이 바꿔야 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괴로운 것, 받아들이느냐 괴로움에 몸부림치느냐
육신을 허공처럼 풀어 놓으면 받는 것이 괴롭지가 않습니다.
누구던지 이치는 알지만 현실은 안됩니다. 아는 것과 自覺의 차이입니다.
어제 7월 16일 어느 분이 찾아 왔습니다.
의식은 있는 데 몸뚱이가 사라진 것처럼 마치 머리만 남고 몸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찰라에 "앗!" 하고 정신을 차린후 이게 뭔지 도무지 알수
없는 경험을 하고 찾아와 묻기에 "언제 였습니까?" 두달 전 저를 만나고
돌아가서 이틀쯤 되었을때 였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그후 몸의 변화가
있었을 테고, 예전처럼 앉아 있으면 멸정에 쉽게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물으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몇마디 나누고 "앗!"이 뭔지 함께
당시의 감각을 찾아봅시다. 책상을 "탁! 탁!" 치고... 잠시후 "잘안됩니다."
"나는 되는데 경험했다는 당신은 어째서 안됩니까?"
당신이 모르는 것은 나도 모릅니다. 또 나혼자 아는 것은 알려줄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알고 내가 알기에 함께 갈수가 있고. 저는 그것을 찾아
주고 길을 가르킬 뿐입니다. 몇번 반복하던 끝에 "아!~ 알겠습니다. 찾을
수 있습니다." "됐습니다. 아직 처음이라 잘 안될지라도 염녀 마십시요.
안된다는 생각이 중생심이고 그놈이 길을 장애 합니다.
설명하고 이해를 시켜서 스스로 그것을 재확인 하도록 해주는 것, 그 후
허슬스레 일종의 선문답을 했더니 바로 대답을 하시고 저는 그런 글이나
말을 몰랐습니다. 듣는 가운데 저절로 답을 알게 되는 군요. 그렇습니다.
듣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흐르는 가운데 전체가 보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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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찾아온 사람에게 곧바로 선문답 같은 지혜를 검증을 하고, 만일 그가
올바로 대답했다고 해서 인가를 해준다면 이분은 자신이 체득했던 실체적
사실(空 自覺)은 잃어버리고 발현된 지헤에만 몰두하게 될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했습니다. 사형선고 받고 독방에 갖혔던 김지하,
절망의 고비에서 살아난 유명한 강사, 산속 토굴에서 빤짝 깨친 목사등
그들의 글과 말에서 발견할수가 있는데 정작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강사는 행복을 강의 하지 않고
목사는 설교를 포기하고 깨침의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같은 경험(깨침)이 없으면 듣는 사람이 이해는 되지만
현실에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고기(행복)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지...
숭산스님께서 써줬다는 전법게송을 들고 찾아왔던 淸淨이 그랬고 제가
만나봤던 어떤 선사역시 방장실 벽에 붓글씨로 커더랗게 써놓았더군요.
이러다 보면 상수멸을 찾으려고 멸정선에 몰두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어떤분이 말하길 '벽에다 點을 찍어놓고 점속으로 들어간다'고 하기에
"그속에 뭐가 있기에 그러는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들어가서 어쩌자는
것인가, 잘하면 하면 부지불식간에 환상과 환청(귀신)이나 만날 것이요"
왜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는가?
0.3초, 찰라간에 저도 모르게 죽었던 경험을 하고 다시 그것을 찾으려고
되잡으려 하는 것이지요. 0.3초간에 지나간 현상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찾으면 멸정일뿐, 혼자 죽었다 살아나고 죽었다 살아나는 그러한 반복은
安住의 習禪이지 올바른 정진이 아닙니다. 마치 사리불이 조용한 곳을 찾
아서 참선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0,3초는 寂을 覺하는 찰라. 生滅의 찰라,
산놈이 죽은 놈을 발견하는 생사열반상공화를 체득하는 찰라입니다.
너무 빨라서 보고도 모르고 경험하고도 알지를 못합니다. 0.3초의 감각
을 확인하고, 유지하며 순일한 마음으로 일체 相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空에는 因도 緣도 果도 없습니다. 멈춘 상태에서 흐름(대상)을 관하는...
이것을 모르면 자신이 체득한 것이 뭔지 몰라서 문자에 자신의 견처를
맞추고 그곳에서 답을 구할수 밖에 없습니다.
글을 보면 밝에 알수 있지만 책을 덮으면 자신이 머문 處도 向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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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보면 선지식에게 삶의 지혜를 얻고자 찾아 갔다가 뜻 모를 화두같은
소리를 듣고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찾아간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화두가 있습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시원하지 전혀 엉뚱한 곳을 긁는
다면 짜증이 나겠지요. 친구가 그랬으면 화를 낼텐데 평소 존경했던 터라
짜증대신 경외심으로 그말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 해당도 없는 말을..
그러니 찾아가 본들... 저혼자 아는 지혜는 남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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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들은 이야기 한토막을 옮겨 봅니다.
1970년대 중반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시절 우리나라와 사이가 안좋던
때 코리아 게이트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로비스트로 박동선씨가
미 의회 청문회는 물론 검찰에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게 되었답니다
걱정하던 그에게 어떤 지인이 당시 선지식(법호기억이 안남)을 찾아보라
고 했답니다. 여러가지 많은 대화가 있었겠지만 생략하고,
묻기를 "이번에 미국에 가면 거짓말 탐지기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스님 왈 "이런 바보같은 놈, 기계가 어찌 그대 마음을 알겠느냐?! "
박동선 " 어?~ 어? ~ ( ...) 앗! " '아~ 마음이 편해 졌습니다.'
空寂한 마음은 걸림이 없으니 귀신도 모르는 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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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으로 설할수 있는 여기까지를 터득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쨋던 산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을 겁니다. 그후 코리아 게이트는 4년여 에 걸쳐서
조사를 했지만 구체적인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윗글 내용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렇게 답을 할수가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은 찾아온 사람의 말을 듣고 그가 무엇에 걸려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것을 풀어 줘야 합니다. 見聞覺知의 실체를 보여주신 대목입니다.
삼대독자를 잃은 부모에게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이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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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自覺
오래전 함께 해인사에 다니던 동문 보살님이 어느날 말하길
"산에서 험한 길을 갈때 나무 뿌리를 밟았더니 뒤 따라 오시던 노보살이
말하길 "나무가 얼마나 아프겠느냐, 누가 당신 발등을 밟으면 좋겠는가?"
이에 충격받아 '산에갈때 나뭇가지 잡지않고 뿌리를 밟지 않는다' 하기에
제가 말하길 뒤집어 생각해 봅시다, 만일 그대가 위험한 곳에 있을때 누가
그곳을 지나간다면 그가 위험에 빠지도록 가만히 있겠는가? 마땅히 그를
위하여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발등을 내주어 딛고 오게 할 것 아닙니까?.
나무가 보살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무는 공덕을 짓는 것이 됩니다.
한생각이 지옥을 만들고 한생각이 극낙을 만듭니다.
과거세에 세존께서 연등불을 만났을때 머리를 진흙위에 푸시고 진흙을
밟지않게 하셨던 공덕으로 수기를 받으신 분이 석가모니십니다.
그럴때 그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갇혀있는 생각에서 벗어나라
마치 無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도로 생각에 갇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지혜도 버려야 합니다. 반야(지혜)는 相이 있을때 만 생겨 나는 것으로
'무엇을 알았다' 하면 반야가 아닙니다. 반야는 이름일뿐 텅비었습니다.
그 보살은 듣는 순간 "아~ 앗! 그렇군요' 그날 밤 늦게 문자를 보낼 정도로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실체를 몰라서 그를 이끌지 못했으니
부디침은 찰라요, 인연은 바늘 끝이 서로 부디치듯, 그러나 지난 것은 법문
으로 인도하면 됩니다. 혜능스님이 홍인조사의 법문(금강경)을 듣고 활연히
밝아지듯,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확인하면 됩니다.
이타행에서 오는 안온한 마음,
이글을 보면 바로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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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雲이 좋겠습니다. 아파트 경비실이 밝아지고 다시 홀로 앉았습니다.
가벼움을 인식(自覺)하는 (三昧로)... / 草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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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타행을 하시는 초관선생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