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아산(牙山). 기녀 소생으로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 출신. 과학적 재능이 있어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서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발탁,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었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오르고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採訪)별감이 되어 구리[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上護軍)에 특진되었으나 이듬해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잡혀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우리 역사에 있어 과학문화의 황금기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서슴지 않고 세종대왕의 재위기간(1418년 8월∼1450년 2월)이라 답할 것이다. 이 시기에는 실로 방대한 과학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한 사업에 주류를 이루었던 분야는 물론 천문학 및 역학분야이다. 농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여 온 천문학, 역학은 4계절을 정하고, 1년간 할 일을 규정하는 사업으로써 제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되어왔고, 그런 이유로 해서 정부, 즉 왕이 관할하는 과학분야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 볼 때 신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서는 좀처럼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미천한 신분, 가장 천대받던 노비의 신분으로 과학기술과 응용에 탁월하여 놀랄만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노비출신이었던 장영실이 신분적 제한이 엄격했던 당시 봉건적 사회에서 어떻게 상호군(上護軍)의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노비의 신분에서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로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항주(蘇杭州)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하여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이 글은 장영실의 출생과 그가 관직에 등용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기록된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에 수록된 내용이다.
장영실의 관직 등용에 관한 <세종장헌대왕 실록> 권 61의 기록
장영실(將英實)은 조선조의 과학자로서 본관은 아산(牙山)이다. 기생의 소생으로 태어난 장영실은 경상도 동래현의 관노 출신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때문인지 정확한 출생일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적부터 아주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전해진다. 사물에의 관찰력 또한 뛰어났으며, 기계의 원리 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기계 등을 만들고 고치는 일에 능통했으며,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등 금속을 다루는 일에 능숙했다고 한다. 장영실은 비록 관노 출신이었으나 그는 탁월한 재능을 어려서부터 발휘하여 주위로부터 인정받았고, 한양의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세종의 부왕(父王)인 태종(太宗) 때 발탁되어 궁중에서 일하게 되었다. 장영실이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태종 때가 아닌 세종 때였다. 세종은 제련 및 축성, 무기, 농기구의 수리에 뛰어난 장영실을 가까이 두어 자신이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사업중의 하나인 천문의기 제작사업을 비롯한 과학진흥사업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신분제가 행해지던 당시에 노비출신인 자를 궁중에 두어 관리로 중용케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모든 문무(文武) 대신들의 반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과 같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들을 설득하여 결국 장영실을 채용하였다.
이리하여 동래현의 관노가 엄격한 신분제의 벽을 넘어 상의원 별좌[5品]가 된 것이다. '상의원 별좌'라는 것은 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대궬안의 재물과 보물의 관리를 맡아 관리하던 관서로써 태조(太祖) 때 세워진 것이다. 장영실을 상위원 별좌로 발탁한 세종은 그를 항시 가까이 두었는데 이는 세종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천문의기 제작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
세종 14년인 1432년네 대대적인 천문·기상의기 제작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장영실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였던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여러 가지 천문의기 제작을 감독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된 세종 15년(1433)에 장영실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5품이던 상의원 별좌에서 4품인 호군(護軍: 조선시대 5위의 정 4품 무관)에 오르는 영예를 안기에 이르렀다. 이해에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434년에 완성하였는데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혼의(渾儀)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로 적도좌표를 관측하고,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의기였다.
그러나 혼천의는 관측용과 실내용 혼천시계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장영실이 만들었던 것은 실내용 혼천시계로 보인다. 이 혼천의는 세종 14년(1432)에 시작된 여러 천문의기 제작사업 중에서 가장 먼저 완성을 본 의기(儀器)였으며 간의(簡儀: 기능이 많아지고, 구조가 복잡해 진 혼천의에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의 세 고리만을 떼어 간략히 만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임) 등 다른 많은 의기들의 모태가 된 기구이다. 이 혼천의 제작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세종은 혼천의의 완성을 위하여 세종 3년(1421)에 장영실과 윤사웅을 명(明)에 파견하였고, 세종 13년(1431)에는 수학자를 명에 파견하여 그 기술을 습득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천문학적 지식이나 기술은 다른 어떤 분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야였던 까닭에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영실을 비롯한 일행은 기기들의 목적과 성능 그리고 구조만을 보고 온 후 자신들의 기술을 총 동원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혼천의는 중국의 기술적 영향과 우리 고유의 과학적 전통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기기라고 할 수 있다.
자동시보장치 자격루 제작
세종시대에 중국은 송(宋)나라였는데 당시 송에서는 자동시보장치 물시계가 있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에 이러한 기기가 없음을 세종은 항시 안타까워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시간을 아는 장치로서 물시계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백제에서는 6세기에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고 누각박사(漏刻博士)를 두어 물시계로 시각을 관측했으며, 통일신라의 정치 조직을 살펴보면 '천문박사(天文博士)', '누각박사'라는 기술관을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천문박사는 '사천박사(司天博士)'라고도 하여 천상(天上)에 관한 일을 보았으며, 누각박사는 물시계 관측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고려시대 역시 태사국(太史局)이라는 기관이 있어 역법과 누각의 일을 맡았다.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은 모두 3종류의 물시계를 만든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세종 6년인 1424년에 만든 것인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구리로서 경점(更占)의 기(氣)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자동시계가 아닌 단순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양을 측정하여 시간에 따른 부피 증가고 시간을 알 수 있는 장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0년 후인 1434년에 만든 것이 두 번째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이다. 이것은 자동시보 장치가 붙어 스스로 움직이는 물시계이다. 즉, 경루(更漏)와 같이 눈금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물시계에 시, 경, 점에 따라 종, 징, 북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 몇 시인지 알려주는 것으로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었던 시계이다. 그 구성은 4개의 파수호(播水壺),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 및 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들어올린다. 이것은 처음 만든 경루와 같은 원리이다. 살대가 떠오름에 따라 이 부력이 쇠구슬과 지렛대에 전달되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한다. 즉, 파수호보다 높은 곳에는 목인(木人) 3명이 있어서 하나는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종을 치는 일을 맡으며, 다른 하나는 경을 알리기 위하여 북을 치는 일을 맡고, 나머지 하나는 점을 알리기 위하여 징을 치는 일을 맡는다. 목인 보다 낮은 곳에 평륜(平輪)이 있어서 그 둘레에 12지신(十二支神)을 배치해 놓았다. 이들 신은 각각 한 시각씩 열두 시를 담당하였다. 만약 자(子)시가 되면 자시를 맡은 신이 자시의 시패를 들고 솟아올라왔다가 내려간다. 이처럼 자격루는 종·북·징의 소리와 12지신의 동작을 통해서 각각 시각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덕수궁에 보전되어 있는 자동물시계 자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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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 김종록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관청의 노예로 살던 천민이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인정한 왕의 후원으로 2차례나 중국유학을 다녀오는 것은 물론 종3품 대호군에까지 오른다. 오늘날의 장관격인 판서가 정2품인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높은 벼슬이다. 왕의 총애와 후원은 이 천민출신 대호군으로 하여금 자격루와 측우기, 실내 혼천시계 등을 발명케 했고, 중국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천문도(天文圖)'를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으로부터 550여년 전인 15세기였고 그의 천문관측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쓴 코페르니쿠스보다 100여 년을 앞선다.
위에 언급된 '천민출신 과학자'가 장영실, 왕이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은 조금이라도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토록 상대방을 신뢰했던 두 사람의 결별과정은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1442년 봄. 세종대왕이 사용하던 안여(임금의 전용 가마)의 일부가 파손된다. '군주=나라'의 공식이 적용되던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몸이 상할 수도 있었던 실수를 했으니, 안여의 제작자가 문책 받았음은 불문가지. 가마의 제작을 총괄했던 장영실은 관직을 빼앗기고, 곤장까지 맞은 후 유배된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선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던 장영실이 겨우 가마를 만들면서 실수할 리가 없고, "어제 잘못한 일이라도 오늘 뉘우치면 용서한다"는 태도를 취했던 현군(어진 임금)인 세종이 겨우 안여의 장식물 일부가 부서진 걸 가지고 그토록 가혹한 형벌을 내렸을 까닭이 만무한 것. 게다가 벌을 받은 사람이 자식처럼 아끼던 장영실이었다니.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혹시, 세종과 장영실 둘 사이에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 그게 아니면 둘만이 아는 모종의 밀약이 있었던 건 아닐까?
땅에 대한 역사와 사상을 소재로 한 <풍수>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된 김종록의 신작 장편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전2권·랜덤하우스중앙)는 바로 이 의문점을 소설의 출발로 삼고 있다. 이에 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날 조선과 명나라, 오늘날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는 비슷한 형국
"세종 당시 중국(명나라)은 세계 최강국이었다. 그들은 조선을 자신 발아래 조그만 속국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그 보잘 것 없는 나라의 왕과 한 과학자가 천문도까지 만들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꽃 피우겠다고 나섰으니 곱게 보았을 리 없다. 이는 오늘날 미국을 필두로 한 강대국이 핵이나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핑계로 약소국을 가차없이 밟아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종과 장영실은 바로 이 강대국의 전횡에 희생당한 것이 아닐까?"
문헌에는 분명히 등장하는 장영실의 '천문도'가 중국의 천문도에 밀려 역사의 전면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사실은 김종록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는 '조선의 새 하늘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한 천민출신 과학자의 삶에 밀착 접근해 그의 '소설 같은 삶'을 차근차근 복원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조선시대에선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왕(세종)과 천민(장영실)의 우정까지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한다.
"<풍수>와 함께 이번 소설 역시 천지인 삼재사상의 문학적 형상화 작업이다. 곧 최종편인 <오다선생 행장기>가 출간되면 10년에 걸친 대장정을 마치게 된다"고 작가는 덧붙인다.
그리고, 여담 하나.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가장 많은 왕자를 생산한 왕은 누굴까? 의외로 세종이란다. 그는 왕자 18명과 공주 4명 등 22명의 자식을 뒀다. 정치적, 과학적 정열과 함께 육체적 에너지 또한 대단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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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장영실 - 이 종 봉
1.
과학사에 있어서 15세기(세종대), 간의대(7×7×10m)·日星定時儀·해시계(仰釜日晷)·물시계(自擊漏·玉漏)·曆法(七政算內外篇)·測雨器·水標·醫書·農書·갑인자 등을 체계화함.
·과학기술자하면 이런 제품을 만든 장영실(蔣英實)을 거론하고,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게 한 인물로 평가.
·장영실에 관한 자료, 『세종실록』·『연려실기술』 등에 간략하게 수록. ·장영실에 관한 글, 한반도에서 출판되는 모든 위인전에 수록(수십종).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논지를 전개함.
2.
·출생의 시기는 알 수 없음. ·장영실의 출신과 관련한 문제.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3자료가 참고.
『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7월 을미조에는 '행 사직(司直) 장영실은 그 아버지가 원의 소항주(蘇杭州)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官妓)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동』 권65, 세종 16년 7월 병자조에는 '영실은 동래현 관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아산장씨족보』에는 아버지가 고려 말 정 3품 전서(典書)를 지낸 장성휘(蔣成暉)라고 기록함. →위의 자료에서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서로 차이가 있음. 『세종실록』과 『아산장씨족보』를 통해 추정한다면 아버지(장성휘)와 동래의 관기 사이에서 출생.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비.
·출사의 계기
위의 『세종실록』에서 장영실에 대해서는 '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하거나 '성품이 정교하여 궁궐 내의 공장을 맡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동래현의 관노시절부터 어떤 물품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 동래현 관의 노비에서 중앙정부의 관리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등용시기
장영실의 재능은 중앙에 전해졌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그를 보호하였다. 나도 역시 그를 아낀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태종 후반·세종 초반에 등용된 것으로 보여짐. 여하튼 장영실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을 알 수 있음.
·관직
초기 알 수 없음. 임인(세종 2년)·계사(세종 3년) 무렵에 왕실의 기관인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에 임명, 세종 7년(1425) 이전에 무관직인 사직(司直; 정 5품)으로 전직되었고, 세종 15년(1433)에는 호군(정 4품), 세종 20년(1438)에 대호군(종 3품)에 임명. 장영실은 세종 중반에 여러 차례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음.
3.
·구체적 활동(세종 4년∼세종 24년)
세종 3년 明에 파견되어 원대의 발달된 과학기술 자료들을 접함. 중국의 과학 기술과 자료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장영실에게 새로운 과학기술을 실현케 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추측됨.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세종 4년에부터 천문기기의 제작을 지시 받음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함.
·물시계의 제작
『연려실기술』과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6년(1423)에는 '청동물시계'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는 청동제물시계에 대해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새로운 모델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체제를 참고하여 주조한 경점(更点)의 기(器)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 16년에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을 만듬. 김빈과 함께 2년이나 걸려 제작함. 자격루는 청동제 자동물시계를 만든 지 꼭 10년만의 일. 이 자동물시계는 경회루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세종 16년 7월 1일부터 공식 국가의 표준시계로 사용됨. 조선은 새로운 정밀기계 장치의 자동 표준 시계를 가지게 된 것. 해시계의 단점을 보완함.
세종 20년(1438) 1월에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글자 그대로 임금님의 물시계인데, 천상시계(天象時計). 세종은 특별히 경복경 천추전(千秋殿) 서쪽 왕의 침실 옆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옥루를 설치함. 흠경각에는 또 자동시계의 배경으로 농촌의 4계절의 광경을 그린 화폭을 세우고, 선녀가 방울을 들고 나타나는 모양, 사람·동물·나무 등을 나무로 조각하여 농촌의 자연을 재현하는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움직이는 모습을 한 인형이 나타나고 사리지게 만들었다. 이로써 세종대에는 표준시계인 자격루, 천문시계인 혼천의, 그리고 천상시계인 옥루 세 자동시계를 갖추게 되었음.
장영실의 옥루는 그 후 100년이 넘게 신기한 자동시계로 왕들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명종 초에 경복궁의 실화로 불타 없어졌다가 명종 9년(1554) 장영실이 남긴 설계도에 의해 복원됨.
·활자주조
세종 16년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특히 갑인자로 인쇄한 책들은 조선초기에 남겨진 책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인쇄물로 여겨짐.
·천문기기의 제작
세종 14년(1432) 정인지와 정초가 연구하여 정리한 천문고전 자료를 바탕으로 이천(李천)과 함께 먼저 나무로 만든 간의(簡儀)를 완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장영실은 청동으로 여러 의상(儀象)을 부어 만드는 일에 착수하여 7년만인 세종 19년(1437)년까지 여러 가지의 기기를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仰釜日晷, 휴대용 해시계인 懸珠日晷와 天平日晷, 지남침을 쓰지 않아 남북이 스스로 정해질 수 있게 만든 定南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인 日星定時儀 등의 제작에 참여.
4.
·장영실은 세종 24년(1442) 그의 감독 하에 만들었던 왕이 타는 수레 즉 승여(乘輿)가 부러지고 허물어지는 일로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세종의 배려가 있었지만 결국 장형을 받은 이후 파면됨. 이후 행적을 알 수 없음.
·장영실의 추모 사업.
→'과학선현 장영실 선생 기념사업회(서울)'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고, 이들에 의해 충남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 장영실의 묘역을 새롭게 단장, 1984년에는 추모 기념비가 제막됨
·부산은 '장영실과학고등학교'의 校名을 지었음.
5. ·세종대의 과학기술, 동아시아에서 더 나아가 세계사적 시야에서 볼 때에도 유례가 없는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평가하고 있음.
·세종 대의 과학기술이 발달한 이유, ①세종의 지도력과 관심, ②농업생산력을 높이려는 강한 요청에 따라 그 수단으로서의 과학기술이 발달, ③세종대의 정치·사회적 환경과 재위시기 등이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고, ④동양적 왕도정치의 권위를 세우려는 견해.
·세종대 이후 과학기술이 쇠퇴한 이유, ①세종과 같은 지도자의 부재, ②주자학이 자리잡으며 만연하기 시작한 기술천시풍조, ③연산군의 폭정과 왜란의 피해 등으로 과학기술계가 위축되었다는 견해, ④세종대의 노력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국가적 기반기반이 갖춰졌으며, 그와 함께 새 왕조의 정통성이 이미 인정되고 확보되었기 때문에 그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가 약화됨.
세종 과 장영실
어느 날, 세종이 장영실에게 부탁 한 가지를 하였습니다. "가마가 불편하니, 그것을 타고 내리기 편하게 고쳐 주오." "좋은 가마를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장영실은 가마를 만드는 일에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가마를 크게 하고, 문을 양쪽에 달아서 드나들기 편리하게 해야지.' 또한, 가마의 계단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계단식으로 하려고 장영실은 세밀히 설계하여 제작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장영실은 세종이 타는 새로운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과연, 그대의 솜씨는 참으로 훌륭하오!" 세종은 새 가마를 타고 종묘를 떠나 창덕궁 쪽으로 향했습니다. 가마가 돈화문에 가마가 이르렀을 때, 가마꾼들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중심을 잃었습니다. "우지직……." 가마가 부서지고, 세종이 땅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장영실은 의금부로 잡혀가서 곤장 1백 대의 형을 받았습니다. 세종은 그 소식을 듣고 장영실의 형을 가벼이 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뒤, 장영실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관노가 되었던 장영실이므로 태어난 연대조차 모릅니다. 다만, 세종을 도와 과학에 이바지한 그의 공로만이 찬란히 빛날 뿐입니다.
장영실의 생애
장영실은 경상도 동래현 관기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글을배우고 어린나이에 노비가되다.
1400년 관청의 노비로 있으면서 영남지방에 가뭄을 이겨 낼 수 있게 하다. 1423년 세종의 인정을 받아 노비의 신붕에서 벗어나고 상의원 별좌 벼슬에 오르다. 1432년 이천과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대를 만들다. 1433년 간의를 발전시켜 혼천의를 만들다. 명나라로 유학을 가다. 1434년 이천과 함께 구리활자인 갑인자를 만들다 김빈과 함께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다. 1436년 납활자인 병진자를 말들다 1437년 천문괸측기구인대간의, 소간의 해시계인 양부일구, 현주일구, 천병일구, 정남일구를 만들다 1438년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는 옥루를 만들다. 1440년 측우기를 만들다,물의 높이를 재는 수표룰 만들다. 공을 인정받아 벼슬이 상호군에 오르다 1442년 측으리글 계량하여 비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있응 통일된 규격을 만들다, 세종의 가마를 허술히 만들어 귀양을 가다
언제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충남 아산에 그의 묘가 있다
장영실의 업적
▶ 전통적인 농업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농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천문학이 매우 중시되었다. 세종 때에는 이러한 관심이 잘 반영되어 천문학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과학발명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 1414년에는 측우기를를 제작하게 하여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한 일이 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에서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한 흠경각을 만들어 경복궁 내에 설치하였다.
▶ 흠경각은 옥루에 기륜(물시계)을 설치하여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기륜이 회전하면 흠경각 안에 있는 인형들이 북·종·징 등을 치면서 시간을 알리도록 한 것이다. 그 외에도 천체(별, 태양, 달, 행성 등)를 관측하던 천체관측기기인 혼천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등을 이용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에 바탕을 두고 세종 24년에는 『칠정산』이라는 달력을 만들었다. 우리 나라 역대의 역법에 원·명의 역법을 도입하여 서울을 표준으로 작성한 우리 나라의 달력이다.
▶ 사회가 안정되었던 세종대에는 적극적인 중농책과 함께 정치질서를 하늘의 이치와 관련시키려는 성리학자들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 세종 때의 뛰어난 과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출신이었다. 그는 제련·축성·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서 1423년(세종 5)에 궁중 기술자가 되어 간의대, 천문의 등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 이후 혼천의 제작과 함께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천체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등을 제작 완성하였다. 또한 측우기와 수표 등을 제작하는데도 참여하였다.
오늘날 본받을 점
장영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뜻을 세워 꿋꿋이 노력하는 열의와 자신감으로 노비의 신분으로써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 자신이 가진 소질과 재주를 마음껏 발휘한 장영실의 굳은 의지를 본받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