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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기록2---바람이 나의 흔적 지우지 않았을까❵
(바르셀 3박4일—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공원, 몬세라트 수도원)
세비야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고 바르셀에 도착하였다.
“바르셀로나”
스페인 동북부에 자리한 ‘까탈루냐 지방’의 항구도시로서 사실상 스페인의 경제적 수도다. 이 지방은 상공업과 관광자원 등의 경제력으로 스페인 전체 경제의 20%를 차지하고, 웬만한 중소 유럽국의 경제규모보다 크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가장 먼저 로마의 침탈을 받은 이래 수많은 부족들이 스며들고 융합되어 고유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지방이다.
고유언어(까타루냐어)와 독립주권을 상징하는 깃발(노란색바탕, 붉은줄무늬)이 있다. 17세기경부터 줄기차게 분리독립을 주장하여 1970년대 이후 완전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지금도 시내 곳곳에 노란 고유깃발을 내건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분리독립 지지자들의 의사표현이란다.
‘가우디 버스투어’
유럽(마드리드, 바르셀)은 현대식 높은 빌딩들은 눈에 띄지 않으나 1-2백년 전에 조성된 블록 중심 건축들의 고풍스러움과 사람중심의 대로들이 우아하고 멋있다. 우린 ‘카탈루냐광장’앞에서 가이드 버스투어를 한다.
가이드의 세련된 유머와 설명을 들으면 ‘구엘공원’에 도착하였다.
1900년 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이 이 동산에 아름다운 주택들을 지어 분양하기 위해 가우디의 설계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아쉽게도 분양희망자가 없어-구엘, 그의 변호사, 가우디- 이렇게 달랑 세 동의 집만 지었다.
중앙광장의 가장자리로 들쑥날쑥 길게 둘러진 유선형 의자, 파도를 형상화한 터널 같은 마차 전용도로 교각들, 동화의 나라에 나올 법한 버섯모양 집, 모두가 사람과 자연위주의 가우디 정신의 산물이란다. 입장료를 들일만큼 썩 깊은 감명은 아닌 듯도 했다.
시내에 있는 가우디 작품 ‘까사바뜨요’, ‘까사밀라’를 눈으로만 구경하고(입장료가 비싸다) 황영조가 내달린 몬주익 언덕,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TV로 가슴 졸이며 봤던 그때 그 숨결 다시 한 번 느껴보니, 세월 참 빠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일명 가우디 성당.
어떤 출판 사업가가 바티칸의 산 피에르 대성당을 보고 바르셀만의 성당을 짓기 위한 시민모금운동으로 시작되었다. 1882년 가우디의 스승 비야르가 무보수 참여로 시작하였으나 일 년 만에 포기하고 가우디를 추천하여 그가 죽는 날까지 43년을 이 공사에 전념하게 한다. 1926년 불의의 전차사고로 사망한 그의 유해는 바티칸의 특별 허락으로 이 성당 지하에 묻혀 있단다.
가우디가 일반 서민들을 위한 성당으로 설계하여 근엄함을 배제하고 밝은 내부와 쭉 뻗어 오른 야자수를 형상화한 기둥들이 너무도 조화롭고 신기하다.
그가 과거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절벽의 봉우리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도 한다.
총 3개의 파사드(주 출입구)는 ‘예수의 탄생, 예수의 수난, 예수의 영광’을 주제로 표현하였으며, 가우디 생전 ‘예수의 탄생’(전체공정의 20%)만 완공되었다.
그의 유업을 이어받은 작가의 현대적 감각이 가미된 ‘예수의 수난’은 또 다른 작품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뾰족뾰족 하늘 높이 솟은 기하학적 종탑들이 사람을 압도하고 총 18개의 종탑이 세워질 예정이라 한다.
가우디 사망 백 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타워크레인이 분주하다.
시내 곳곳에 산재하는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의 흔적들이 당시에는 호평을 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 바르셀의 상징이 되고 엄청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원천이 된 것이다.
더 넓은 ‘람블라스 거리’의 활기차고 자유분방함을 체험하듯 즐겨보고 ‘보케리아 시장’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함을 느껴본다. 정갈하고 음식들이 맛있다.
‘몬세라트 수도원’
‘몬세라트‘는 톱니모양의 산을 뜻하며, 카탈루냐의 신성한 수호산이다.
바르셀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30분을 외곽으로 달려 산악용 열차로 환승하여 몬세라트로 오른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방법도 있으나 우리는 열차를 타고 천천히 오르며 스쳐 지나는 경치를 감상하기로 했다.
물기 먹은 짙은 산안개가 조망을 허락하지 않아 언뜻언뜻 구름 위를 걷듯 신비감만 더하다가 종착역에 다다르자 환하게 가슴을 열어준다.
구름사이로 저 멀리 만년설의 봉우리들이 발아래 구름을 두고 봉긋봉긋한 실루엣이 천상인 듯하다. 9C경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이곳은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와 ’검은 성모상’으로 유명하다.
외세침탈을 피해 동굴에 숨겨둔 성모상이 꼼짝을 하지 않아 그곳에 터를 마련하고 수도원을 짓고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신앙심의 발로인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바실리카 대성당에 들어서니 마침, 그 유명하다는 성가대공연 시간(13시)이라 사람들로 가득하다. 외부공연은 일절하지 않고 오직 여기서만 들을 수 있다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사람의 신앙심을 자극한다.
본당 정면에 모셔진 ‘검은 성모상’은 치유능력이 영험하여 항상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우리는 몬세라트 정상부터 가기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축축한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궤도차(푸니쿨라)를 타고 급경사를 5분정도 올라 정상부 언덕에 다다르니 비가 딱 그쳤다. 두 갈래 등산로 중 정상부가 있는 길을 따라 오르다 그 귀한 산양가족 일행도 만났다.
태초에 이곳도 바다에서 융기한 곳이라 사암층이 세월의 풍화에 의해 깎이고 파인 형상들이 우리나라 마이산을 여럿 합쳐 놓은 듯하다. 한 참을 오르니 오래된 작은 기도원이 언덕위에 서 있고, 그 지붕 위 높은 하늘에 십자가가 선명하다.
절벽의 석굴 같은 수도사의 흔적을 조심조심 지나 푸석푸석한 지면을 기다시피 오르니 마침내 1236M 정상의 두 번째 봉우리에 올랐다.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날린다. 이국의 땅 정상에서 느끼는 산행감이 묘한 희열을 준다. 산악열차에서 본 멀리 보이는 산맥줄기가 ‘피레네 산맥’임을 그제야 알았다. 저 넘어 프랑스다.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이국의 풍경이 경이롭다.
바람처럼 왔다가 흔적 없이 떠나야 미련이 남지 않은 법.
무엇인가 미련이 남아 정상부에 누군가 쌓은 작은 돌무더기에 돌멩이 하나 더하고 내려왔다.
성당의 많은 관람객이 빠져나가고 넉넉한 마음으로 검은 성모상을 경배하고 은총도 빌었다. 나이가 들면 소원도 단순하고 소박해지나 보다.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저 앞 전망대에서 화구를 펼친 화가를 만났다. 18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시는 재미교포 박장환 화백이라 소개한다.
부부가 여행을 하면서 그 곳의 풍경을 아크릴화로 남기고 전시회도 열 예정이란다. 그림으로 보는 절벽과 어우러진 수도원의 모습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노부부와 한국의 사회, 미국과 한국의 보험제도 등 살아가는 대화들을 나누며 아쉬운 이별을 고하였다.
몬세라트 수도원에 가시거든 반드시 정상부에 오를 것을 권한다. 거기에 그곳의 진면목이 있고, 그리고 나의 작은 흔적 있나니.....
‘정상에 두고 온 돌멩이 하마 바람에 아니 흔들릴까‘
또 다른 근심 하나 가슴에 자리 잡는다.
버스를 타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뵈는 구엘 공원 인근 벙크(벌크)에 올라 어둠을 하나 둘 밝혀내는 야경을 구경하며 그렇게 바르셀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다.
(파리 3박4일--개선문, 에펠탑, 베르사유 궁전, 노테르담 대성당)
처음엔 스페인과 인접한 포르투칼을 가고자 희망했으나. 스페인과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다수(3:1)의 반대로 ‘파리’로 바꾸었다. 유럽의 중심지이고 예술과 문화적 자부심이라는 파리.—뭐 한마디로 실망이었다.
지하철통로 천정은 환풍기 배관이 늑골처럼 뻗어있고 녹물이 뚝뚝 떨어진다.
벽면은 도색조차 안하고 승강장은 짠 내 가득하여 앉기가 두렵다.
지하철의 역사가 오랜 된 탓도 있지만 서민들만 이용하는 대중교통을 시정의 무관심도 한 몫 한다고 한다. 시내를 활보하는 절반이 흑인이고 스페인과는 달리 밤거리가 조금 무섭다.
여기선 500유로 이하 소매치기는 훈방조치 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말이 있다.직업이 소매치기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분들이 무서워 크로스백을 외투 안에 메는 마눌이 더 웃긴다.
숙소에, 호텔이라기엔 너무한, 여장을 풀고 걸어서 5분 거리인 개선문에 도착하였다.
‘개선문’이라—1806년 나폴레옹이 전쟁승리를 자축하고 당당하게 이 문을 통과해서 행진하고자 ‘에투알광장‘에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자신이 살아서는 통과하지 못하고 사후 1836년 완공되었다. 별모양의 에투알광장은 12개 대로가 연결되어 있고 그 중의 한 대로가 ’상젤리제 거리’다.
지금은 로터리 한 가운데 고립되듯 서 있고 차량들로 둘러싸인 모습이다.
정상부에 입장료 내고 올라가 전망할 수 있으나 그러고 싶은 맘이 없어졌다.
그 역사적 의미는 잘 모르겠고 그냥 권력자의 상징적 기념문으로 보인다.
‘에펠탑‘--세느강이 시내를 끼고 돌아나가는 강가에 떡하니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다. 수많은 예술가와 연인들의 애환을 실은 센강이 과거에도 지금도 유유히 흘러간다. 다리난간에 기대어 예술가가 되어보고 연인도 되어본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만국박람회 기념으로 에펠이 설계한 301M 철구조물 탑이다. 당시에는 파리의 흉물 취급받아 철거까지 논의되었다고 한다. 마치 가우디의 건축물들처럼 오늘날 환생하여 파리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으니 알 수 없는 게 인간사다.
최근의 국제정세를 반영하듯 주변이 펜스로 통제되고 철저한 보안검색을 한다.
조명을 밝힌 에펠탑 야경이 아름답고 사진빨이 좋다. 특히 유명한 알렉산드로3세 다리 건너 강가에서.
다음날, 지하철을 타고 외곽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니 벌써부터 중국인들이 찬 겨울비를 맞으며 길게 줄을 섰다. 파리의 겨울은 확실히 춥다.
‘베르사유 궁‘--스스로 태양왕이라 칭하는 루이14세가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나타내고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외진 습지인 이곳에 궁을 조성하여 1682년 완공하였으나, 국력을 낭비하고 끝내는 프랑스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수많은 내부 방(아폴로 방, 헤라크레스 방, 왕의 침실, 왕비의 침실, 전쟁의 방, 평화의 방 등)에 걸린 전시물과 초상화, 장식들, 그 유명하다는 거울의 갤러리 연회장 등을 둘러본다. 여기서 1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2층 한 켠의 커피숍에 앉아 몽블랑 빵과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본다. 아직도 겨울비는 내리고, 줄지어선 인파는 줄지 않고, 우리는 이렇게 여유롭고...이곳의 유명세를 실감한다.
프랑스식 정원의 표본이라는 정원으로 내려오니 넓은 뜰과 연못, 격자처럼 정돈된 나무숲이 더 넓은 공원처럼 펼쳐진다. 전기차를 대여하여 이동해야 할 만큼 넓다. 우린 한 참을 걸어서 구경을 하며 정문이 아닌 곳(후문?)으로 나왔다. 시민들에게 정원이 개방되어 조깅하고 반려견과 연인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한가롭다.
루이왕이 화려하고 넓은 궁에 화장실을 일부러 안 두어 초대된 귀족들과 귀부인들을 골탕 먹였다고 어디선가 들은 듯 만 듯, 내 꼴이 그 꼴이다.
파리 외곽의 조용하고 고급주택가인 부유한 이곳 동네에 공중화장실이 없었다.
화장실 찾아 헤매는 이 한적한 전원주택가에도 500여년 된 이름 없는 성당이 있었다. 내부가 정갈하고 종교적 엄숙함이 가득했지만, 화장실은 찾지 못했다.
겨우 맥도날도를 찾아 영수증에 부여된 화장실 비밀번호 입력을 통해 체증을 해결하니 살 기분이다. 문득 한국이 그립다.
‘노테르담 대성당‘
센강의 섬에 위치한 유서 깊은 대성당은 12C 건축이 시작되어 나폴레옹 대관식 등이 거행되었으며 빅토로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 배경이 된 곳이다.
여기 비는 추적추적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비를 맞으며 어둡고 침침한 성당 안을 구경하고 광장의, 밟으면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는, 표시판도 밟아 보았다. 딸은 재작년에 밟았었는데 2년 만에 다시 오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종탑에 올라가고 싶었으나 비가 와서 출입을 통제해 못내 아쉬웠다.
‘루브르박물관’
과거 식민제국주의 시대부터 세상의 온갖 예술품들을 강탈하다시피 끌어 모아 자랑스럽게 전시한 곳.
마치 자기들 예숨품인양, 원소유국의 반환요구에 ‘간수할 능력이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묵살하는 나라가 프랑스고, 대영박물관의 영국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안 보기로 했다. 다 볼려면 최소 3일은 걸린다는데 시간도 없고 이미 프라도미술관을 보았고, 거기서 거기 아닐까?
입구 안쪽 광장에 설치된 중국인 설치예술가 작품이라는 피라미드형 유리구조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쁘렝땅 백화점과 맞은편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능력이 없어) 우아하게 눈 쇼핑을 하는데, 명품관마다 중국인들로 꽉 찼다. 뭔 돈이 그렇게 많은지 다들 쇼핑백 몇 개씩 들고 또 줄을 서 있다. 대륙인 기질인가?
샹제리제 거리를 걸어 길게 늘어선 브랜드별 숍을 구경하며 쭉 올라오니 개선문이 나온다.
우리의 스페인-파리 여행은 여기까지다.
“여행(사랑)을 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태어나고, 살아가는 과정이 조금 다를 뿐, 누구나 돌아간다. 즐기며 살고 싶다.
“YOLO(you only live once)”
(에필로그)
길고도 짧은 시간들이 흘러가고 이제는 다시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갈 땐 뭣 모르고 갔지만 돌아올 땐 고통스런 장거리비행 증후군에 시달릴 걱정이 앞섰다. 혼자 계신 본가 모친께선 잘 계셨을까? 더 정직하게 말하면 혼자 두고 온 우리집 야옹이 ‘심바’는 잘 있었을까?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차로 인한 귀국일자 착각으로 부랴부랴 지사 전화하고, 이미 떠난 인천공항-부산행 KTX 위약금 20만원 공중에 띄우는 소동 끝에 우린 한국에 도착하였다.
밥에 척척 걸쳐 먹는 김치맛과 된장 푼 시레기국이 간절했던 한국이 좋다.
깨끗한 거리와 기차 차창으로 스치는 시골풍경들이 새삼 정겹게 다가옴에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유럽(스페인)에서의 추억은 우리가족의 가슴에 아름다운 그리움으로 남았고, 우리가 부대끼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새로운 원천이 될 것이다.
어쩌면 몬세라트 정상에 두고 온 그 돌멩이 다시 찾을 날 있으리라---.
‘바람이 나의 흔적 지우지 않았을까?’
첫댓글 가족 통채로 갔단 말이가 대단하고 멋지고 축하함당
이래 살아야 되는디 ㅋㅋ ~~~~~~~ ^_^
너무 현지에서 돌아보는 것 처럼 잘 썼네
와~~~~우 대~~~~단 혀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슴당
다시한번 가족여행 추카추카해 ~~~
근데 경비 얼마 드더노 ????? ㅎㅎㅎ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3.15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