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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환 칼럼 ■ 스크랩 서운산에 올라2
김석환 추천 0 조회 56 06.09.27 16: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계절이 호룡골 골짜기에도 호화로워서 오히려 더욱 슬픈 가을색들을 막 뿌리려고 준비하는 중이다.

이 가을 전에는 작업실 서쪽에 툇마루를 내서 그 놈들을 무념으로 맞이하려던 계획이 또 해를 넘어가나 보다.

문득 고개 들어 만나는, 어릴 적 감기 끝에 만나던 그 미궁의 깊이처럼 거꾸로 깊기만 한 하늘.

그 하늘이 얄밉고 또 지울 것이 있다는 생각에 문득 산에 오른다.


복장이라고 해야 그 어느 날 길거리서 만원 주고 산 ‘니코보코’ 등산화.

이십여 년 전에 산 세모가죽 등산화는 무겁기만 하고 또한 딱딱해서 아킬레스건을 압박함으로 꼭 두꺼운 양말 두 개를 신어야 그 나마 좀 나았다. 그래도 헤진 곳은 없어 그냥 신발장 미이라가 되어버린 놈 생각하면 새로 산 이 놈은 너무 가볍고 편하기만 했다. 하지만 몇 번 신지 않아서 접히는 부분이 모두 터지고 늘어나 신발 안에서 발이 놀기만 하는 그런 등산화다.

평생 싸구려는 내 인생이고 짐이다.

그래도 에베레스트 오를 일 있을까?


색은 빨강과 청색으로 화려했지만 바래고 여기 저기 물감이 틔어서 두 색이 이제 친구가 되어 버리고 어느 날 못에 걸려 허벅지 부분 뜯어져 속살 보여 엉성한 바느질로 막은 반바지.

늦더위 기승에 그 놈도, 그 놈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내 아랫도리 휘감은 채 산행의 동행이 되었다.


언뜻 멀리서 보면 하얀 바탕에 파란 평행선 긴 줄무늬가 마도로스 티셔츠 같지만 그 또한 물감 묻고 잡티 묻어 지저분해서 시골 ‘푸세식’ 화장실 똥 풀 때나 딱 맞는 그런 옷이다.


모자도 써야지.

올 여름 베트남 들릴 때 사서 무슨 유물 들고 오기라도 하듯이 기내까지 들고 들어와 국내에 반입했던 1달러짜리 월남 풀잎 모자. 색정적인 핑크 빛의, 조금은 널찍하고 나풀거리는 나일론 턱 끈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내 마음을 포근하게만 만드는 모자.


늘 그 자리에 염치 좋게 버티고 있는 중 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 산에 오른다.

길가의 물봉선. 할 이야기나 웃음이 많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 듯 양 볼 따귀가 봉긋하다.

그 흔한 개망초는 이름이 부끄러워서 인지 눈에 잘 안 띈다.

꽃 바로 밑에서는 제 각각 올라오다 위에서 싹둑 잘라져 꽃 핌이 신기하고 그 평원에서 흰색 노란 색으로 마냥 식탁보 수놓기로 여름 한 철을 즐겁게 지내는 마타리들. 이름이 고약한 ‘며느리 밑씯개’.


그럴 즈음 늦더위로 내 놓은 내 종아리를 간질이는, 등산로 위 양 옆에 고개 숙여 도열해 있는 풀들의 간지러움이 허망함의 모든 것을 뛰어 넘는다.

긴 여름에 지쳐 물소리도 잦아들고 낮잠을 자는지 새소리도 없다.

처연한 산을 짓밟은 사람들의 발자국 할큄은 순결한 여인의 아픔과 관계없이 꼬불꼬불 즐겁게 이어지고 나무들의 호흡은 내 숨결과 하나 되어 잡념을 잠시 접게 만든다.


갑자기 떡 버티고 서 있는 마애불.

시멘트로 코 성형해 붙이고 서 있는 그 모습이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무표정인지 장엄인지 가름이 안 되지만 그 옛날 그것을 만들었을 그 누군가의 숨결은 내 마음을 적신다. 아마 그는 신심이나 기쁨을 새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오로지 아픔을 새기고 싶었을 것이다.

기쁨은 염원이고 슬픔은 현실이다.

나도 쪼그리고 앉아 그이의 아픔과 같이 하고 싶지만 내겐 눈에 보이는 아픔이 없다.


휘적거려 땅만 보고 걷는 미련한 걸음은 어느 덧 산 능선에 이르고 트인 공간에서 바라보는 진천 쪽으로 이어지는 산등선의 꾸불꾸불한 선과 공기가 만든 심연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고통의 하잘 것 없음을 비웃는다.

그 중앙을 가르는 백곡저수지 가는 길은 . '하늘 호수'로 가는 길이다.

 

내 걸음을 앞서 가는 남녀 한쌍의 재잘거림은 통속적인 감정을 거세당한 내가 놓친 언어들을 대신한다.

뾰족한 돌 두어 개가 엉덩이 붙이기도 힘든 곳 정상에 올라서서 안성 시내를 내려 보지만 잔가지들이 가리고 키도 작고  마음도 뿌옇고 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더 이상 아파서 못 견딜 때까지 엉덩이 대고 있다 산을 내려온다.

이럴 때 담배를 한 개피 물어 들면 폼 날것이지만 오래 살아서 남보다 더 큰 아픔의 눈덩이를 만들어 어느 날 산꼭대기에 지고 올라가 굴려 떨어트려야 할 숙제가 있는 나는 그럴 일이 없다.


산 사면에 사람이 발 구름이 만든 길은 너무 정겨워서 혼자 가는 길이 오히려 슬프다.

이럴 때 혼자 부르는 노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산에 오지 말고 노래방을 먼저 들려야 할 것이다.

늙어 가는 나로서야 ‘허공’이 좋지 않을까? 청산 어쩌고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숲의 터널이 고맙게도 내 마음의 그늘을 해로부터 감싸주는 듯하다.

덩치와 그늘은 비례해야 되겠지만 난 암만 생각해도 반비례다.

내 그늘만 공중에 매달아 실컷 패면 시원할 지도 모르겠다.


넓은 길.

하지만 여름 장마가 제 길을 천방지축으로 튕겨나와 도랑으로 착각하여 할퀴고 간 길은 곡예사처럼 걸어야 한다.  그 정신 쏟음을 요구하는 길은 내 정신을 일순 뺏아간다. 속 아픔이 있어도 겉 고통이 있으면 덮어진다. 하지만 밟힌 풀이 죽지는 않는다.

평생이 긴 건지 짧은 건지 모르고 덤벙대는 나로서는 덮어짐의 시간적 길이를 가름할 수가 없다.


누군가 길 위의 잔디를 군데군데 떼 갔다.

아마 자기 아버지 묘지에 덮으려고 그랬나 보다.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그 분이 매달렸던 사후의 염원에 한 개도 보탬이 된 것이 없다.

이제 꿈에도 안 나타나는 그 분을 위해 작은 돌 주워 다가 퇴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이름 석자  새겨 묘지 앞에 내 고통으로 박아 그 분 뼈 삭는 소리 지켜드리고 싶다.


어김없이 다시 만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처음의 그길.

산은 오르는 길이 있어 내려오는 길이 있건만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이나 아픔은 왜 사라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닐까?

산을 내려와 다시 일상에 묻히니 내가 뱉어서 만든 그 무게와 형체를 알 수 없는 덜었던 것 같은 허념은 여인의 손톱자국으로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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