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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찾아서
박진화/화가
일전에 학우(學友)인 평론가 박응주 선생을 만난 기회에 우리 화단의 근현대 화가 고암(顧庵) 이응노의 작품을 망라해 볼(도판으로) 영광을 가졌다. 놀라운 사실은 약 3000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작품이 기적처럼 도판으로 정리되어 있더란 점이다. 이후 며칠간 그 전체 광경을 되새기다보니 어떤 죄의식에 따른 의무감 같은 게 밀려들었다. 까닭은 고암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해 중심을 놓친 채 곁가지들만 무성하게 알고 있었단 생각에서다. 고암의 이력과 업적을 충분히 알지 못한 후학의 입장에서 고암의 작품을 만난 계기로 지난세기 우리화단을 사색해보는 일은 여러모로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컸다.
지난 20세기 우리 화단(畵壇)을 다시 더듬어본다는 건 사실 그리 흔쾌한 일일 수 없다. 나라를 잃은 식민과 분단과 독재정치로 거의 채워진 20세기의 역사성에 실린 미술의 전모를 살피는 일은 버거울 뿐 아니라 유쾌할 수 없다. 어떤 이유든 어두운 질곡의 뿌리를 들춰보는 일은 불편하다. 그럼에도 후학인 입장에서 앞선 처지를 들추는 일은 피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나를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이 노트는 그러한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런 심중(心中)의 결과이며 의미일 것이다.
그림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림의 일이 사람의 일이란 전제는 어떤 예술이라도 향하는 꼭지의 초점은 인간에 있는 것이고, 그 바탕 또한 사람살이의 한 면에서 생겨난다는 확신에서다. 그림도 사람의 삶의 의식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으로 볼 때, 그동안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림’이라 불리는 예술세계의 모습은 지나치게 특별하단 인상을 아니 가질 수 없다. 여기에 나의 문제의식이 있다. 화가인 나부터라도 어떤 반성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에의 어떤 반성인가. 좁게는 나의 그림에 따른 것이지만 넓게는 지난 20세기에 활동했던 당시의 화단(畵壇), 즉 우리 근현대의 선배화가들의 성과와 문제점을 포함한다. 지금은 지나치듯 잊어진 사실이지만 20세기 미술의 역사로 볼 때 우리 화단은 어떤 무감각으로 일관했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기억되는 항일(抗日)그림(미술)이 얼마나 있던가? 그 누구를 항일화가로 꼽을 수 있는가? 식민치하, 이후 분단과 독재의 엄혹한 세월에 선배화가들은 어떤 예술적 포즈를 취했던가. 더불어 그동안 이에 대한 미술내부의 성찰과 비판의 결과들은 무엇이던가.
그림은 육체성과 정신성이 같이 개입된다. 육체성이 개인적 처지의 삶의 문제라면 정신성은 함께 지니려는 공동체적 꿈이자 이상(理想)의 문제다. 20세기 우리 화단의 그림들은 그 점에서 확실히 특별하다. 공동체의 삶에 깃든 갈등이나 고통, 신음(呻吟)이 없다. 뭔가에 홀려 시종 딴 곡조의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전체사회에서 들린 고난과 불안의 낌새가 없는 것이다. 현실을 등지기 위해 예술성이라는 애매함에 기대고 편승했다는 느낌만 짙다.
인간의 역사는 차곡차곡 쌓이며 줄줄이 이어진다. 임으로 싹둑 잘나낼 수 없다. 어떤 구습(舊習)이나 악습도 마땅치 않다고 팽개칠 수는 없다. 인간의 필연성이요 삶의 까닭이다. 역사의 현실성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그림문제를 미술만이 아닌 함께 사는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야할 이유이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인가? 왜 뿌리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목적성을 앞세우는 건 얄팍하다. 그 무엇을 그 누구를 향하지 않으면 어떠한가. 역사의 수레는 목적성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이 전해지는 이유다.
기다렸던 2021년이 시작되었다. 21세기의 20년이 벌써 소비되었다. 과연 나는 지금의 일상생활이 지난 20세기의 것이 아니란 실감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가? 또 나의 지금 생활은 화가로써 사는가. 아니면 한 개인으로 사는가. 과연 내 삶은 어느 쪽에 더 치중해있는가. 나는 화가이면서 일반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 경계는 늘 분명하지 않다. 화가의 책임을 위해서라도 일상의식을 져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게 전부이다. 화가의 몸으로만 살고 싶지 않은 자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내 그림의 특성이 그러하다. 어차피 나는 화가이다. 더하여 화가임을 강조하는 생활의식은 나의 것이 아니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부터다. 지난 몇 년 지속해서 그림이라는 것에 대해, 그 둘레에 끼어든 그림의 견해에 대해 나름 생각이 많았다. 거의 내 그림의 문제가 주축을 이루지만 그림으로 예술적 특권(特權)을 치켜드는 세태를 생각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예술의 지나친 권위는 왜 생기는가? 애매한 의식으로 우쭐해진 작품들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가? 내가 생각한 그림의 본령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들이다. 사실 ‘그림’이라는 말도 언제부터인가 ‘회화(繪畫)’라는 말로 대치해 쓰고 있다. 그림이란 말을 촌스럽게 여기려는 풍토가 생겼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그 까닭을 나는 모른다. 전문적인 그림의 위상을 담지 못하더란 합의가 있었던가. 좌우간 우리가 그림을 회화로 불러야할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건 단숨에 버려도 된다. 회화라는 말로 그림의 권위를 지니려는 발상은 사대(事大)의식에 잡힌 문화적 열등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림에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시대인 건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바로 전문적인데 또 다른 전문성을 많은 화가들은 원하는 것인가. 하기야 언제부턴가 현대적 삶은 전체보다는 부분적 전문성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변화되었다. 학문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전문성이야말로 전체적 입장을 지니지 못하면 자칫 자기 독단성과 우월성을 내세워 타자(他者)를 강제하고 소외시키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암암리에 사회적 양상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인데 그림은 의심할필요가 없는 전문적인 분야다. 그림은 그러므로 오히려 미술만의 내부적일 이유가 없다. 그림을 미술계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건 화가들의 도리일 수 없다. 어떻게 그림이 미술내부의 세계에 갇혀야하는가. 이야말로 그림의 전문성을 훼손하는 일인 것이다.
현대그림의 난해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게 아니라 뭔지 알 수가 없는 차원을 향한다. 세상이 달라진 탓으로 보더라도 칭찬할 일은 아니다. 예술의 본령이 무엇인가? 과학과도 다르고 종교와도 다르다. 왜 다른가? 예술은 인간의 현상(現狀)을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시대의식이 중요해진다. 예술성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데 반기를 들 수 있고, 신비의 세계에 의심을 품을 수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예술성이 일상의 초월적 상태일 수는 없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 예술성의 바탕이자 심미의식의 근거인 때문이다.
물론 예술도 나름의 논리를 갖는다. 일상의 굳어진 습속을 부수기도 하지만 인간의 영원성을 이끄는 몫도 지닌다. 그러므로 예술은 모두가 생산자일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설자리가 좁은 건 당연하다. 화가는 소수이며 사회적으로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하지만 예술은 소수자의 위치에 있기에 거꾸로 세상전체를 무시할 필요가 없다. 예술은 소수자의 산물이지만 전체의 뜻으로 번져야 마땅하다. 그 점이 예술의 고유한 성격이다.
화가들의 의식은 항상 위태롭다. 불안정하다. 자신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의식이 있는 까닭이다. 어쩌면 불안을 자청하는 게 화가의 특권이랄 수 있다. 왜 자신을 부정하고 의심하는가. 자기세계를 누르고 타자(他者)의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런데 자신의 불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작품을 한다면, 그 작품은 타자와의 만남을 뿌리치는 밀폐된 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다. 스스로 밀폐된 세계에 찾아들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현대작품의 소외현상은 일차적으로 화가들의 자기방어에 결과한다고 볼 수 있다. 화가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다. 불안이 없는 예술가가 있는가. 종교인이 자기믿음에 불안하듯이, 화가 또한 자기신념에 불안한 것은 너무 지당하다. 화가가 자신을 방어할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 그림은 무엇이 되겠는가.
예술의 관대함은 넓고도 깊다. 차별성이 없다. 예술성은 본래 인간의 덕성에서 길러지는 탓이다. 사회적으로 소수자임에도 화가가 인정받는 까닭은 차별성과 불평등의 습속에 저항하는 인간성의 심지(心地)가 있어서다. 외톨박이도 가능한 꿈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인간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인격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화가는 어쩌면 지성인의 반열에 속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예술은 각박한 현실에 등지지 않으며 지배자들의 폭압에 굴하지 않는다. 사회적 정의를 외면할 수 없음이다. 예술의 내력은 깊고도 깊다. 예술의 본질은 천지자연의 도(道)까지 내포한다. 대지의 평평한 여유로움이 있는 것이고 자연성을 본뜬 너그러움이 있는 것이다. 예술의 위치는 좁지만 그 지평은 너르다. 예술이 인류사의 표상이 되는 근거는 그것이다.
나의 출생 년은 1957년이다. 20세기 중반에 나서 그 세기의 환경에서 40년 넘게 살았다. 이후 21세기에서도 20년 이상을 살았다. 양세기의 양상이 몸에 고스란히 배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내 그림의 자취는 무엇일까? 지금껏 살아온 만큼의 부피를 지녔을 것이다. 내 그림에 삶의 그늘진 처지와 아픔이 들렸다면 그건 질곡의 20세기를 더 살아온 영향이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아픈 세월의 고단함이, 그러한 사회적 특성과 편견이 더 많이 담겼을 것이다. 내가 지금이 아닌 지난 20세기 화가로 자칭(自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화가이다. 그 까닭에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적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니려 노력했다. 한 인간이면서 화가인 나의 삶은 그렇듯 늘 이중성을 지닌다. “돈을 사랑하면서 돈을 경멸해야 한다.”는 선배 소설가의 말이 쌔게 들린 건 그 탓이다. 내 그림은 우여곡절이 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두루 삶의 처지를 외면하지 못한 성향이 강해서다. 나는 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초기시절 나는 세상을 대신해 울어야하는 대곡자(代哭者)라는 생각도 있었다. 좌우간 심성적으로 그늘진 세상에 더 기울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오랫동안 내 붓의 특성은 좌충우돌한 성격이 짙다. 일관성이 부족하단 지적도 많았다. 갈 지(之)의식이자 겹의 미학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내 삶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급하게 변한다. 어제 오늘이 다르다. 그새 나도 나이가 들었다. 세월이 나를 변화시킨 것인가? 전과는 사뭇 다르다. 따뜻한 세상에 몸이 더 쏠린다. 차분하고 넉넉한 붓의 자취가 생겨나길 바란다. 이념과 정신도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커진다. 의식을 더 쫒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게 만족스럽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생각은 다르다. 세상이 나를 바꾼 탓인가. 위로와 격려가 없는 그림이 싫어진다. 용서하고 위로하고 싶다. 용서받고 위로받고 싶기도 하다. 지금의 생각은 그러하다.
문제는 바탕일 것이다. 근거(根據)이다. 지난세기 미술계인 우리 화단(畵壇)을 짚어보려는 생각은 당시의 화가나 작품들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그와 별개로 어떤 죄의식을 받아내고 감당하자는 데 있다. 나는 지난 20세기 미술사적 맥락을 찬양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당시 화단의 풍토를 외면할 수도 없다. 딜레마이며 죄의식이다. 지난세기 이 민족이 지닌 미술적 현실에 사죄하고픈 의식이 내게도 있는 것이다. 앞선 화맥(畵脈)의 끝에 내가 포함돼 있는 현실성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지난 20세기의 기억이 아직 내게 있다. 그때를 살았던 기억이다. 고질적인 권력의식과 우격다짐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나 그 불미스런 기억이 내 뜻이던가? 지난세기 미술계의 처지는 나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죄의식은 내게도 있다. 20세기 우리 미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이다.
세상은 말로하기 어려운 어떤 필연성이 있다. 인과(因果)라고 할 수 있고 숙명(宿命)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더란 말이다. 인간의 삶의 문제는 그런 것인가.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1950년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짐이 무엇인가. 이념의 변화인가, 영토의 변화인가. 아직도 우리는 그 상태다. 답답하다. 그 무거운 마음을 끊어낼 방안이 내겐 없다. 그러한 몸으로 이 땅의 화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겐 나름의 어떤 임무가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권리라고 부를 수 있겠다. 화가로의 나만이 지니는 권리가 있을 것이다. 이 역사가 나에게 건네준 ‘이건 너의 일이다’라고 부여된 임무가 있지 않겠는가. 20세기를 지나 20년을 소비했는데도 지금의 나는 지난세기의 의식을 그대로 지닌다. 뒤집어 생각하면 오히려 그 맥(脈)을 더 단단히 잡고 있으라는 격려일 수도 있다. 뒤틀린 질곡의 내용들을 쉽게 팽개치지 말라는 계시(啓示)일 거란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식민과 사대, 분단과 독재, 강제와 억압, 열등감과 소외감, 민주와 평화… 등등의 용어들이 아직도 내 안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질곡의 몸을 버리지 말고 더욱 움켜쥐라는 천명(天命)이 내게 들린 건 아닐까. 외면하지 말고 그 짐을 단단히 지라는 이 땅의 뜻이 분명이 있을 거란 생각이다.
이 와중에 비보(悲報)다. 원로이신 김창렬 화백이 며칠 전 운명했단 소식이다. 그러고 보니 김창렬이란 원로화가분이 계셨다. 물방울작가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분이다. 거의 60년간 물방울만 그렸다는데, 여태 프랑스에 계셨던 것일까? 탄탄한 명성을 누렸으니 다복하셨을 터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작품의 세계에 공감(共感)이 어렵다.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의 삶과 붓은 무엇을 지향했을까? 붓과 평생 함께하며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 화가로써 그가 꿈꾸던 세상은 무엇일까.
오직 물방울이라니, 왜? 그것만 그렸을까. 화가 김창렬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좋게 보자면 그의 창작세계는 일념(一念)의 쾌거이고 일관성으로의 광휘다. 한국미술을 세계에 과시한 공로도 클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의 예술세계는 자기욕망의 세계일뿐이다. 오직 예술가로 남아야겠단 욕망의 의지이다. 어쨌건 시종(始終) 물방울 그림에 자기 생을 건 이유가 있을 터이다. 만약 그가 화가가 아니고 시인(詩人)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시인이라도 평생 물방울만 읊고 노래해도 된다고 그는 생각할까. 어떻든 화가 김창렬의 세계는 무참하다. 그 창작의 가치는 후학이 감당할 수 없다. 미술시장(市場)에 신경이 곤두선 방어적이고 폐쇄의 세계로만 보인다. 결코 드넓은 예술의 세계라는 느낌이 없다. 실내(室內)의 방 하나의 세계이지 햇빛 찬란한 바깥의 세계는 아니다. 가난한 시대를 그대로 따른 가난함의 세계다.
꼬리를 물게 된다. 당시 우리화단(畵壇)으로 넓혀 생각하자. 지난세기 그 정도의 사례는 수두룩하다. 모두 그런 양상이고 그러한 세계였다. 우리의 근현대미술은 정신이 없었다. 암흑기의 측면이다. 모두 정신을 잃은 시대이다. 그럼에도 궁금하다. 당시 우리 선배 미술인들은 왜 그토록 현실에 무관심했을까? 왜 하나같이 사는 시대의 통증이 없을까. 현실에 무감각한 예술적 성향이 그리 오래도록 견고했을까. 물론 짐작은 가능하다. 망한 나라마저 뺏겼다. 가난한 식민치하다. 모든 게 처음이고 시작이다. 일제강점기 상황만이 아니다. 서구의 문화도 문명도 모두 낯설었을 테다. 제정신일 수 없다. 어떠한 자신감이 있었겠는가. 당연한 열등감이다. 그런 암흑한 상황에서 어찌 정면으로 세상의 어둠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이 점에서 나는 중국의 근대미술과 일본의 근대미술이 궁금했다. 하지만 중국의 근대미술과 일본의 근대미술은(도록일지라도) 보지 못했다. 얼마 전 간신히 몇몇 중국 근대화가의 도록을 볼 수 있었는데 확실히 그들의 작품엔 주인의식이 있었다. 어떤 차이가 났다. 하여간 일제강점기 우리미술계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선전>의 시행이다. 그 대략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위키백과 검색자료에 따른다.
“1919년 3.1운동 이후, 3년만인 1922년 5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가 창설된다. 일제 강점기에 개최된 미술공모전의 시작이다. 이 <선전>은 1944년까지 매년 개최되어 총 23회에 걸쳐 열렸다. 이 선전은 일제 문화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사업이었다. 이 선전은 식민통치 사업이 길어지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대형 행사로 자리를 잡았고, 미술계 신인 등용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많은 유명 미술인들이 이 <선전>을 통해 등단했다. 조선전람회는 일본 문무성 주최의 전람회인 문전(文展) 또는 제국미술원전을 본 딴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부분 외에 조선미술의 특성을 살려 서예 부분이 추가되었다. 심사위원에는 조선인도 위촉되었으나 중반 이후로 갈수록 일본인의 비중은 더욱 늘어났다. 제15회 전람회부터는 추천작가 제도가 신설되어 기성 작가들의 작품무대로도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선전>의 내력과 실상을 무시하고 우리 근대미술을 살필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왜? <선전>을 시행했는가에 대해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다. <선전>의 이유와 기능과 역할이 무엇이고 어떠했는가는 그 <조선전람회>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 다만 <선전>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저의(底意)가 해가 갈수록 드러났을 터인데도, 24회까지 공모에 참여한 미술가들이 단 한 번도 참여거부의 보이콧이 없었고, 언론 또한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선 생각해야한다. 우리 근대미술의 태동의 본질이요 모습이다. 그러한 역량과 의식으로 근대미술은 시작된 것이다.
이어보자. 일제강점기 시대의 다음, 그러니까 해방이후 우리의 미술적 상황은 어떠한가. 해방 후 좌우의 분열의 시기, 1950년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시기,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에 이르는 긴 독재정치의 시기까지 포함해보자. 마찬가지 핵심에는 <국전>이 있다. <선전>을 모태로 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실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색자료에 의한 그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1949년 9월 문교부 고시 제 1호에 의하여 창설된 미술전람회이다. 문교부 내에 예술분과위원회를 두고 여기에서 국전 규약을 만들어 경복궁미술관에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개최하였다. 한국의 미술 진작에 기여하였으나, 심사위원 선정 및 특선작품 선정 등에 미술계 제도와 권위가 지나치게 작용하는 부작용도 많아, 1981년 제3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민전(民展)으로 이양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1952년까지 3년 동안 공백을 두었다.” 이다. 덧붙여 <국전>의 의의와 평가를 보충하면,
“<국전>은 국가가 주도하는 미술전람회로서 미술문화 진작에 기여한 바도 있으나, 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였을 뿐더러, 심사위원 선정과 그에 따르는 수상작 선정에서 화단의 파벌에 의해 좌우된다는 비판을 계속 받았다. 몇 차례에 걸친 규정의 개정과 공모 부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관전(官展)식 아카데미즘을 고수함으로써 본래의 취지인 미술문화 발전을 저해하였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이다.
위에 예시한 <국전>의 실상을 상상하면 해방 후 우리미술의 분위기를 그대로 엿볼 수 있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미술의 면모는 화단의 파벌싸움이 중심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근현대 작품들이 하나같이 어떤 권력, 그러한 권력의 소산으로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의 증명이다. 말하자면 미술가들이 예술성을 내세워 권력에 매진하고 그것에 따르려는 노력이 정당화 된, 몇몇의 예술권력의 목적을 위해 모두가 엎드려 종사하는 악순환이 20세기 내내 거듭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을 핑계로 자신의 권력을 형성해가는 모습, 그게 우리 근현대미술의 가치지향이자 초상이었던가.
물론 그 대열에 속하지 못한 미술가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보의 화가들은 여지없이 소외와 나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 테다. 권력에 밀려 뒤편으로 사라진 소수자의 행로를 상상한다는 것은 씁쓸하고 또 씁쓸하다.
우리 전통미학의 정신성은 관념성이 짙다. 그림들에 사의(寫意))성이 강하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 전통의 맥락이다. 예컨대 사군자의 난(蘭)을 추상으로 사유(思惟)로 보는 근거도 그래서 생긴다. 그러나 관념성이 현실을 배제한 순수의식에 있다는 점은 옳지 않다. 관념이란 순수한 것인가? 난(蘭)이든, 죽(竹)이든 그걸 치는(그리는) 자의 몸은 현실성이 없는가. 사군자를 치려는 생각이 현실의식을 벗어나기 위함인가. 그 단언은 억지다. 최고(最高)의 난(蘭)이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초월한 것일 수 없고, 비범한 죽(竹)이 세속적인 낌새로 졸작(拙作)이 되란 법도 없다. 만약 지난 20세기의 미술작품에 삶의 징후를 외면하고 무시한 시각이 집단적이었다면, 그들이 지향한 순수적 시각은 분명히 다른 무엇을 겨냥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하나같이 지배권력과 밀접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후학의 입장이다. 공감을 떠난 이해이다. 사회의 아픔보다는 순수예술의 신기루로 빨려갈 수밖에 없는 모두의 필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서글픔을 승화(昇華)하기 위해 예술의 빛에 온통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생각하자. 시종 암울한 시대였고 상황이었다. 그 마당에 예술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위안이었을 테다. 예술로의 일관(一貫)된 세계관은 혼란된 세계의 또 다른 요청일 수 있겠다. 예술을 더욱 순수한 작품으로만 제시하려는 발상은 다난(多難)한 시절의 반어(反語)적 희원(希願)이자 산물일 수 있다. 혼란스럽고 아픈 화폭이 암울한 시대에선 더 역겨울 수 있지 않겠는가. 참담한 사회를 자위(自慰)하기 위해 붓을 든 정황도 헤아리자. 당시 선배들의 한계와 고통, 열등감과 수치(羞恥)심도 모두 이해하자.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 이해의 바탕은 후학의 공감과 아량으로서가 아니다. 오직 그러했던 근거의 확인일 뿐 다른 이해일 수 없다. 후학인 나는 당시 상황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자격이 없다.
그림의 세계는 창조의 세계가 아니다. 그림은 무(無)에서 생겨난 영물(靈物)이 아니다. 그림의 세계는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아픈 세상에서 아픈 그림이 나오는 건 너무 당연하다. 모든 세상의 삶이 그림의 질료(質料)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이 세상이 없이 홀로 가능한가. 그림은 사람들의 삶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내 그림의 뿌리는 항상 지금의 현실이다. 그것의 근거는 이 땅이다. 시공(時空)을 넘는 세계미술의 흐름에 있지 않다. 내 붓은 우리의 사회역사 문화의 전통(傳統)에 기대야 한다. 민족성의 유지와 계승(繼承)의 측면이다. 짧게는 20세기지만, 길게는 고조선시대까지의 문화적 맥락이다. 반만년 역사의 전통의 공덕으로 그 고단한 유산으로 내 그림이 있다는 생각이다.
2021년이다. 21세기도 한참 지났다. 지난 습성이 지속되면 안 되지만 지난세기 미술의 역량을 통째로 버릴 수는 없다. 그걸 묵살하고 무시할 권리가 내겐 없는 것이다. 잇는다는 것은 넘어서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화단의 권력적 성향이 설사 전체 사회상이 아닌 자본이나 진영논리에서 나온 폐해일지라도 그 위험성에 대해 나는 낙관하고 또 낙관한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는 시인 김수영의 시 구절을 기억한다. 나는 오히려 20세기 화가임을 과시하는 입장에 서야하는 것이다.
예술이 인간을 거느려야 맞는지, 인간이 예술을 거느려야 맞는지를 헤아리려는 고민은 늘 벽에 부딪힌다. 여하튼 그림이 항상 인간과 함께해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그림이라도 나름의 인격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림에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림에는 겉에 쉬 드러나지 않는 나름의 속살이 있다. 그림의 속마음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인간도 겉과 다른 속마음이 있듯이 그림에도 그러한 속마음이 있더란 말이다,
사람의 눈은 분명히 사실을 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속까지 꿰뚫어보기 쉽지 않다. 보이는 그 너머까지 볼 수 있는 것은 눈만으로는 어렵다. 그러면 안 보이는 걸 볼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은 무엇인가? 첫째가 마음이다. 마음으로는 현실너머의 현상도 훤히 볼 수 있다. 마음의 눈이란 말이 있는 이유다. 사랑 위로 격려라는 말은 마음이라는 눈을 증명하기에 자연스럽다. 사단(四端)이나 인연(因緣)도 마음의 눈을 인정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은 알게 모르게 상호 교감의 기능을 통해 우리의 심미적 기준과 척도를 제공한다. 그림을 마음으로 보는 혜안의 중요성이다. 그림을 마음으로 살펴온 전통성이다. 그림과 글의 어원(語原)이 ‘그리움’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단서인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거꾸로 그림의 마음을 무시한 사례이다. 우리 현대미술의 맥락에 1970년대 단색회화(모노크롬)운동의 유행시기가 있었다. 소위 ‘미니멀리즘’이란 사조(思潮)이다. 단색회화의 주창(主唱)은 파격이었다. 작품의 형상적 의미를 부정하고, 작품자체의 물성(物性)에만 주목한다는 점이다. 작품의 의미는 물질일 뿐이라는 사조다. 작품행위도 무위(無爲)나 무념(無念)의 결과로 어떤 의미도 마음도 없다는 것이다. 작품은 물질일 뿐임으로 인간의 감정이 개입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작품이 색을 버리고 형상도 버리고 의미와 마음까지 버린 물질일 뿐이어야 한다는 그 주장은 무엇인가. 세상을 무시하려는 어떤 선입견과 편견의 사조가 아닌가.
너무 부분적이다. 전체의 시각이나 마음이 없다. 우리 현대미술의 맥락 또한 그러하다. 단색회화운동은 운동으로서 집단적인 성격도 지녔다. 그런데 미니멀리즘 사조가 박정희 정권 때에 시작되었고 1970년대 내내 왕성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2013년 이후 박근혜 정권 때도 단색회화 작품전들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결코 우연일 수 없다. 미니멀리즘 사조가 물성(物性)을 토대로 무념과 무위(無爲)의 수행자(修行者)적 세계를 지향했음에도 특정한 정치사회현실과 맥이 겹친다는 점은 무엇인가. 그림과 의식과 마음은 서로 뗄 수 없다는 하나의 사례가 아닌가.
예술이 현실을 매개로 하듯이 당연히 그림도 사회성을 지닌다. 화가의 이념과 몸의 결과이기에 그렇다. 그 점에서 나는 20세기 근현대화가 중 특히 두 화가를 주목한다. 바로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 1904-1989)와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이다. 내가 보기에 그 두 화가에겐 시대를 살아낸 의식과 마음이 있다. 그들의 그림엔 세상의 삶이 있다. 갈등과 번민이 있고, 냄새와 소리와 기척이 있다. 현실도 있고 절망도 있고 꿈도 있고 이상도 있다. 그런데도 자기 우월성이나 독단성이 없다. 속마음이 훤히 보인다. 고암의 그림은 ‘바람’의 메타포로, 소정의 그림은 ‘땅’의 메타포로 다시 여겨볼 여지가 있다. 물론 내 생각이다.
우선 고암(顧庵)이다. 고암의 전 생애와 작품세계는 요약하자면 ‘바람의 세계’로 여겨볼 수 있다. 그가 남긴 3000여점 작품의 가장 주요한 특성은 머무르는 정처(定處)가 없다는 점이다. 바람의 메타포로 보이는 이유다. 과거와 현재가 추상과 구상이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여 뭉텅뭉텅 거침없이 덩어리 채 흐른다. 얼핏 보면 모든 게 뒤엉켜 난마처럼 보이나 주목하면 충실한 완성도에 미리 지닌 선입견이 없다. 작품의 내용이 모두 바람처럼 흐른다. 그의 삶의 처지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머물지 못하고 덩어리째 부유하는 그의 세계는 우리 화단의 경우 매우 특이하다. 요지부동 자신만의 작품세계의 형식을 고집했던 당시 현실로 볼 때, 고암의 거침없이 좌충우돌하는 작품들은 확실히 낯설면서도 남다르다.
고암의 그림들엔 살아 꿈틀대는 몸이 있다. 내가 고암(顧庵)의 세계를 주목하는 이유다. 그의 대표작격인 말년의 ‘군상도(群像圖)’로서만이 아니다. 그는 시종 자기 밑바탕을 걷어차기 위해 붓을 들었던 성싶다. 자신을 부정하며 성찰함으로 붓을 든 기미가 역력하다. 그러므로 고암의 그림에는 권위의 근엄함이 없다. 자신의 운명과 처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자의 곤혹스러움이 있다. 곤혹스러움으로 응결된 수많은 작품의 놀라움은 그런 까닭에서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이유들로 자신의 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의식이 굳어버린 당시 화단과 왜 불화가 없었겠는가. 고암은 대한민국화가라는 명함하나로 이국땅에서 말년의 30년을 살았다. 그 용기는 그러나 경이(驚異)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한(恨)때문이라도 스스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의지를 줄곧 유지했다.
고암의 내용들은 바람과 같다. 억압과 강제의 눌림에서 벗어나려는 기척이다. 이것저것을 타고 넘는 바람의 산물이다. 그는 예술이라는 미증유의 진상(眞相)을 위해 거침없이 대들고 두들겼다. 자기를 내세움과 자기부정의 모순이 그림으로 흔들린다. 자존(自尊)과 자학(自虐)이 함께 휘감긴다. 참으로 답답했을 터이다. 답답한 고단함이 바람을 탄 듯 화폭 가득히 소용돌이친다. 그의 그림에 서린 바람기는 현실의 모순의 낌새다. 바람의 붓으로 살다 보니 수시로 바람이 일었던 게 아닐까. 고암은 분명 우리 근대의식의 바람의 메신저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소정(小亭)은 고암과는 대척점에 있다. 소정은 젊을 때 잠시 일본에서의 수업기간을 빼고는 이 땅을 떠나지 않는다. 소정의 그림세계는 마땅히 ‘땅’의 메타포다. 그의 그림은 산수(山水)에 집중되어있다. 시종 발랄함이 없는데 말년으로 갈수록 두텁고 거칠면서도 유연함의 특징을 지닌다. 땅의 과묵함이요 자존의식이다. 나는 소정의 그림을 처음 대할 때의 느낌을 선명히 기억한다. 1989년 호암미술관의 <山水畵4大家展>에서이다. 당시 소정의 그림들은 무거우면서 부드러웠다. 거칠면서 섬세했다. 유연하면서 꼿꼿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잔잔히 흐르면서도 군데군데 응어리가 응축된 여러 점의 산수그림들, 소정의 그림은 사실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팍팍한 현실로 가득한 울림이 있다. 맨몸으로 산천을 헤매며 쏘다니는 느낌이다. 몸이 닳도록 숨차게 땅을 헤매는 그런 느낌. 소정의 산수는 그대로 우리 자연이고 산천이다. 화폭에 깃든 특유의 소란, 감춰진 흐느낌, 의연한 불안감, 부드럽게 스민 삶의 의지. 한눈에도 소정의 그림은 이 땅의 반사(反射)였다. 당연히 소정의 삶이 그랬을 것이다. 그의 그림 또한 당시 자신의 처지로 볼 수 있다.
소정의 그림은 전통화의 맥락에 있으면서도 형식적인 묘법(描法)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마치 겸재(謙齋)의 그것처럼 기존의 준법(皴法)에 얽매임이 없다. 특유의 갈필(渴筆)은 심사(心事)의 흔적이지 묘법의 궁리가 아니다. 거기서 소정 그림의 현실성은 살아난다. 그의 그림은 다채롭지 않지만 따뜻하다. 삿됨이 없고 소박하며 무심하다. 마치 어느 농부의 모습처럼 흙냄새가 물씬하다. 소정의 산수들은 어떤 의지(意志)이다. 기필코 포기할 수 없는 살아내려는 땅의 의지다. 그럼에도 자기처지에 대한 어깃장이 간혹 그림에 등장한다. 왜 열심히 땅에 붙어있어야만 하느냐는 한탄(恨歎)이다. 한 가운데 거대한 바위산을 무겁게 배치한 그림들의 마음은 무엇인가.
소정의 화풍은 1960년을 기점으로 더욱 확실해진다. 금강산 시리즈 그림들이 특히 그러하다. 이유가 있다. 1960년은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4․19의 해이다. 소정의 산수는 그때부터 새롭게 피어난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처지다. 그 후 말년으로 갈수록 풍요로움이 물씬하다. 확실히 소정의 그림들은 1960년을 기점으로 전후의 변화가 크다. 필시 소정은 4․19혁명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암과 소정을 짧게 살폈다. 나에겐 나만의 눈과 마음이 있는 것이다. 내가 고암과 소정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그림엔 당대의 시대와 삶을 느낄 수 있음이다. 그들이 항일의식에 투철했거나 저항의 작풍(作風)을 구사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름의 현실적 번민이 그림에 녹아있는 점이 돋보이더란 뜻이다. 물론 근현대미술의 시공간에 다른 많은 화가들이 있다. 고암이나 소정보다 높게 평가되어지는 화가들도 적지 않다. 가령 익숙한 이름인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이쾌대, 김은호, 이상범, 허백련, 박생광… 등등. 하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시각은 다르다. 그들의 작품성이 고암이나 소정에 비해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굳이 비하자면 고암과 소정의 갈등의식이, 모순성이 다른 화가들에선 덜하다는 것이다. 다들 너무 완벽한 자기세계에 빠졌다고 할까, 아님 자기의식에 너무 취했다고 할까. 아무튼 박수근의 작품들도 내심 소박하고 서정적인 친밀함이 있지만 지나치게 울타리 안에 울리는 실내악(室內樂)의 범주에 갇힌 느낌이다. 풍경화가 정물화 같다. 흔들림이 없다. 불안하고 마땅찮은 시대에 흔들리고 갈등하는 의식의 낌새가 그림에 없다면, 화가라는 몸의 진정성은 과연 무엇에서 찾아야 할까?
지금은 역사의 시간에서 항상 끝이다. 지금의 현재성은 전통적 입장에서도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내가 우리 근현대미술을 다시 사색해보는 일은 앞선 화가들의 우열을 가름하자는 게 아니다. 나만의 입장을 고집하잔 뜻도 아니다. 결국은 나의 문제인데 지금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붓을 들고 있느냐에 초점이 있다. 그 생각의 초점은 항상 삶과 붓의 이중성에 있다. 화가와 일반인으로 사는 이중성이다. 그 이중성을 같이 보듬는 문제다. 조화를 꽤하자는 게 아니라 그 이중성의 권리를 지속시킬 마음의 문제다. 지금의 세상은 겉으론 어떤 예측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변화한다. 그러나 속을 살피면 지난 세기의 현실의식과 별 다름이 없다. 생활모습은 달라졌지만 사람들의 내면성(마음)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는 뜻이다.
지금도 우리 삶의 변화는 항상 정치에서 비롯된다. 정치의 결과에 따라 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요인까지도 영향 받게 된다. 그래서인데 우리의 정치적 조건은 세기가 바뀌고 세월이 변했음에도 두 가지의 난제(難題)가 계속되고 있다. 분단이고 분열이다. 민족의 남북분단의 문제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의 문제다. 이 책임을 정치인으로 돌리는 건 옳지 않다. 지금은 박정희식의 독재정치의 시대가 아니다. 왕조시대가 아닌 것이다. 분단과 분열의 문제는 먼저 자신의, 나의 문제로 여겨야 한다. 실제로 모든 세상사는 자신들의 책임이다. 그 책임감만이 사대(事大)의식을 벗긴다. 세상의 섭리는 민중의 뜻으로 흐르고 흘러야한다.
분단과 분열의 문제는 당연히 정치인들만의 사안이 아니다. 정치적 문제에 앞서 인간의 본래성의 문제로 여겨야한다. 인간의 심중에는 본래 지향적 가치가 충돌한다. 모든 사람에겐 비인간적 속성이 있는 것이다. 반목과 시기심을 감안하더라도 분단과 분열의 문제는 본질적인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다. 인간의 삶의 조건은 계속해 반목과 분열의 연속성에서 유지된다. 갈등이 없는 집단적 사회성은 없다. 이를 간과한 인간의 사상은 비록 예술의 것이라도 깊이가 없다. 갈등과 모순이 없는 삶은 본래 인간의 삶이 아닌 것이다.
2016년 4월 16일 아침을 기억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생긴 때이다. 300명이 넘는 인명이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수장된 참담한 사건이다. 그 희생자중 거의 상당수는 어린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그 비통함과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사건으로 우리나라는 반년 이상 진실로 흐느꼈다. 국민 대부분이 그처럼 오래도록 슬픔에 젖어 하나가 된 사례가 있던가. 우리는 그 아픔으로 너나없이 모두가 하나였다. 좌도 우도 없었다. 모두가 그토록 오래 하나가 된 경험은 나로서도 처음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다 같이 분노하고 슬퍼하며 하나가 된 경험. 우리 역사성으로 볼 때 세월호 비극성의 참의미는 국민 모두가 하나 된 그것이지 않을까.
화가로써 한 인간으로 나는 무엇을 보며 보기를 원하는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2016년 겨울의 ‘촛불혁명’이다. 그 내용과 결과는 부연할 필요가 없다. 나는 촛불혁명이 완성된 후 조금 다른 면에서 흥분했다. 동학(東學)에서의 ‘다시 개벽’의 낌새를 느꼈고 실감했던 것이다. 무참했던 질곡의 20세기가 이렇게 완성되는 것인가? 촛불혁명이 우리 역사적 실상(實狀)의 완성태란 말인가? 내내 그런 생각이었다. 2016년 촛불혁명은 지난 역사의 완성의 현실태라는 생각이었다. 20세기의 총체적 난맥상이 고스란히 반사되면서 그 이유들을 모조리 들춰냈다. 촛불이 광장을 이뤘던 점을 생각하자. 지도체계도 없이 100만이 넘는 민중이 스스로 광장을 이뤘다. 그 수평적인 광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직적인 권위와 억압의 강제성을 수평의 힘으로 부쉈다는 의미다. 촛불혁명은 20세기 질곡의 난맥상을 광장의 뜻으로 완성한 역사적 자부심이 아닌가.
지난세기 우리는 진정한 주체성을 갖지 못했다. 노예의식에 찌들어 살았다. 그러면 주인은 누구였나. 다수의 민중이 아니었다. 역사와 사회가 과연 누구의 동의(同意)로 움직였던가? 민중은 항상 들러리였다. 그런데 촛불혁명의 상황은 달랐다. 국민의 75%이상이 찬성했고 지지했다. 거의 모두 광장의 뜻에 동참했다. 초점이 무엇인가? 촛불혁명도 다수가 하나 됨으로 가능했다. 무능한 정권을 탄핵하자는 뜻에 다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하나 된 자발성이요 마음이었다. 모두의 마음으로 모두의 동의하에 다 함께 완성했다. 촛불혁명은 질곡의 20세기는 과거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람과 하늘과 땅이 지닌 마음의 선언이다. 지배자들이 휘둘렀던 과거의 억압과 폭력은 무효라는 선포였다. 이 땅의 굴욕의 역사는 비로소 끝난 것이다. 그게 촛불혁명의 의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림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림은 개인적 의식과 감성에서 형성된다. 함께 이루는 집체(集體)적 창작방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개인성의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림이 개인성에 한정 될 뿐이라는 생각은 억지스럽다. 둘러보라. 개인적 생각이 단단해지는 것은 자기만의 것이 아닐 때이다. 진리의 객관성이나 이성의 합리성의 본보기다. 종교도 개인성을 넘어서야 진정함이 발휘되듯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하여 그림은 개인적인 것임으로 개인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논리는 틀리지 않다. 화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통념이 있다. 특히 정치를 경원(敬遠)시하는 사람 중에 화가들이 다수인 점이 그런 통념을 짙게 한다. 그러나 정치성은 사회성이고 사회성은 공동체적 삶의 공동의식이다. 화가의 정치성은 오히려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주장을 펼치자는 게 아니라 정치의식으로 개인성의 한계를 더 넓혀야한다는 뜻이다.
작년 2020년은 코로나19 유행병이라는 예기치 못한 팬데믹으로 온 세상이 여태 어수선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분명히 우리가 되어가는 나날을 경험하고 있다. 주인의식은 갖겠다는 노력이 없이는 스스로의 것이기 어렵다. 습관적인 사대(事大)의식을 지속하는 한 우리는 언제든 노예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현재의 팬데믹 상황은 무엇인가. 우리사회는 우리에게 주인의식이 왜 있어야 하는지 시험 당하고 있다. 일부 태극기와 성조기를 같이 흔드는 마음은 무엇인가. 이 점에서 지금 미국의 모습들은 의미심장하다. 최다수 코로나 희생자가 발생한 건 둘째 치고 대선결과에 불복해 의사당을 불법 점거한 폭력의 경우는 무엇인가. 지금의 펜데믹의 의미가 있을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를 증명해가고 있는 중이다.
나를 민중미술화가로 부른다. 나도 이견이 없다. 이에 민중미술을 소략히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민중미술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발생했다. 주체적이고 현실적인 민주적 미술의 시대적 요구이다. 이는 1980년 민주화과정의 사회상과 맞물린다. 다른 하나는 삶을 등지는 순수한 예술중심주의와의 단절의 뜻이다. 삶의 의식을 배제한 순수미술조류의 비판에서다. 이 또한 시대의 요청이다. 이러한 이슈를 진보미술가들에 의해 확산된 80년대 미술운동이 민중미술인 것이다.
민중미술운동은 박정희 독재정치의 반작용의 성격으로 파악해도 무리가 없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의 민주화 정치상황과 맞물려 있음이다. 이념적으로 정치와 미술의 민주화가 겹쳐있는 것이다. 민중미술은 미술과 삶의 의식이 연결되는 주안점을 지닌다. 당대의 정치 역사 사회성이 미술과 호환(互換)되기를 바라는 진보의식의 미술이다. 1980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으며 나는 1984년부터 ‘서울미술공동체’ 일원으로 뒤늦게 가담한다. 하지만 나의 민중화가적 위치는 1세대보다는 2세대에 해당한다. 내 그림의 성격이 그러하다.
내가 민중화가임을 자처하는 것은 민중미술의 모토가 삶의 미술에 근거하는 데 있다. 민중미술은 미술계의 내부가 아닌 전체 사회성과 맞물린 미술이다. 그 의식으로 나도 민중미술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제 민중미술의 역사도 40년이 넘어섰다. 그만한 세월의 변화를 거쳤다. 어느덧 정리할 국면으로 들어섰다는 얘기다. 지난 1980년대 10여년이 민중미술의 출발시기였다면, 이로부터 20여년은 그것의 성숙기라 볼 수 있고, 촛불혁명을 지난 지금의 상황은 민중미술이 정리되는 완성의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민중화가로 자처해왔지만 나는 늘 민중미술의 가장자리에 위치해있다. 내 뜻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민중미술의 경직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민중미술의 경직성이란 소통을 앞세운 사실주의(리얼리즘)에로의 과도한 치우침이다. 나는 그림의 문제가 소통에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림은 대상(對像)의 재현(再現)이나 모사(模寫)에 그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꿈도 이상도 관념도 당연히 현실성이라는 판단에서다. 생각과 관념도 현실성의 주된 요인으로 보는 점에서 초기 민중미술의 미학은 나와 그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민중화가인 입장이 아니더라도 지난 2014년 세월호 사건과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을 거치는 3-4년의 시공간적 의미는 실로 중요하다. 그걸 계기로 우리나라는 새롭게 정립되는 조건이 갖춰졌다고 생각한다. 민중미학이 내 그림의 바탕인 이상 지금의 시대국면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민중미학의 완성될 수 있는 결정(結晶)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시점을 그렇게 여긴다. 민중미술이 민주화의 열망에서 출발했다면 민중미학의 완성 또한 이러한 시대성에 따라야한다. 1980년대에 출발한 민중미술도 이젠 마무리할 시기가 된 것이다.
내가 민중미술의 마무리를 얘기하는 것은 당연히 가당찮다. 자격이 있지도 않다. 다만 내 생각으론 그렇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세력들은 이제 뒷자리로 물러서야 한다. 그 물러섬은 기왕의 업적정리로만 가능해질 수 없다. 그 한계를 제대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게 만중미술의 미학적 완성의 절차가 아니겠는가.
민중미술이 우리의 미술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사회적 미학을 모색함으로 순수예술의 권위를 내려놓은 의미는 결코 무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미술의 한계도 크다. 우리 현실에서 미술의 특권의식을 바꾸지 못했다. 리얼리즘에 한정된 미학의 폭도 넓히지 못했다. 지금도 미술작품의 세계는 일반인들에겐 너무 먼 세상이다. 또 하나, 우리의 미술제도를 새롭게 하는데 전혀 앞장서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비엔날레라는 미술잔치가 20년 넘게 광주와 부산에서 어김없이 되풀이 되지만 그 잔치는 남(서구미술)의 눈치를 보는 잔치로 일관하고 있다. 주체성이 없는 것이다. 그 점을 민중미술 진영은 오롯이 방치했다. 영화와 같은 타 장르의 사례와 비견해 볼 대목이다.
어쨌거나 민중미술은 이제 시효가 끝에 다다랐다. 민중화가일수록 그렇게 여겨야 옳다. 최근 몇 년, 민중미술운동의 의미를 되살피려는 몇몇 시도는 한편으론 민중미술 진영의 막바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민중미술은 촛불혁명을 기점으로 종착역에 다다랐다. 남아있다면 민중화가의 개인성인데 그 점은 나의 몫이기도 하다. 민중미학의 완성을 위해서도 나는 더 너른 역사적 지평을 생각한다. 그림의 본령에 더 집중하고픈 까닭이다. 내 뜻이 무엇인가? 이 땅의 뜻은 또 무엇일까. 내가 이 땅에 사는 문제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이 내가 누릴 혜택인가를 생각하면 항상 벽에 부딪힌다.
역설(逆說)적인 얘기지만 그래서 나는 북쪽에 인접한 민통선지역의 처지를 벗지 못하는 것이다. 줄곧 북쪽을 볼 수 있는 이곳 볼음도에서의 나의 생활환경은 사명감도 주지만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북한 땅의 풍경을 보노라면 삶이 부질없단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순간 북쪽의 모습이 뚜렷해진다. 어떤 소리가 들린다. 경계의 무너짐을 상상한다. 누군가 부추긴다. 내가 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남과 북 사이에서 생긴 통찰(洞察)의 사유는 내 것이다. 나는 나만이 아니라는 반성도 내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을 위해서 내가 중요하다고 떠들 생각은 없다. 그만큼 자유롭다.
남북이 갈린 민족분단 문제는 우리의 것으로 고유하다. 내 것으로 삼을 만하다. 분단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사회역사적인 전체적 관점과 윤리도덕적인 개인적 관점이다. 사회적인 관점은 분단체제를 역사적으로 해결하는 문제이다. 반면 개인적 관점은 분단문제를 나의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분단문제는 전체와 개인의 문제로 나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체제를 통합하는 통일방안의 문제는 개인적일 수 없다. 한반도 통일문제는 남과 북의 당사자를 초월한 훨씬 크고 복잡한 문제다. 전체의 인류의 과제로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건 개인의 문제일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 관점의 분단문제는 다르다. 분단문제를 나의 것으로 삼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태도나 책임성과 겹친다. 분단문제의 개인성은 책임의 문제다. 분단의 모순을 남이 아닌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이다.
어쨌거나 분단의 개인성은 고통의 문제로 다가온다. 내 아픔의 문제다. 그 고통과 아픔은 책임지려는 고통이고 아픔이다. 책임성이 없는 경우엔 고통과 아픔이 따를 수 없다. 나에게 분단은 왜 고통스러운가? 정상적인 역사성이 아닌 까닭이다. 왜곡된 편견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분단의 현실은 주체적 자율성을 무시하고 강제한다. 타력(他力)에 기대고 복종한다. 자부심을 가두고 누른다. 타력으로 억압당하는 현실은 노예의 종속의 현실이다. 내가 바로 노예의 처지인 것이다. 종속된 노예의 현실이 아픔과 고통의 현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종과 노예의 비극은 스스로 종과 노예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70년 분단의 역사는 그만한 무감각을 키웠다. 우리는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분단의 통증에 감각이 없어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철책의 인격성이란 말을 했다. 분단의 고통에 책임지려는 인격성을 생각한 말이다. 분단의 상황은 전체 역사의 비극이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의 고통은 아니다. 모든 국민이 분단으로 고통스러울 수는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분단에 책임지려는 태도가 없다면 그 고통을 감당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단의 아픔의 책임성은 누구의 것인가? 그 통증에 시달리는 자이다. 사회적 고통에 예민한 자이다. 타자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비정상적인 현실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그러한 생체(生體)감각이 없는 한 철책의 인격성은 나의 것일 수 없다.
철책의 인격성에 더 보태자. 화가의 책임성은 오히려 무형(無形)에서 생긴다. 실증의식에 앞선 감각의식이기에 그렇다. 분단의 책임성을 나는 분단의식이라고 부른다. 그 분단의식은 철책의 인격성을 지닌다. 철책은 분단의 벽이자 상징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것이다. 경계의 인격성이다. 그러기에 슬픔의 정감(情感)이 있다. 철책인격성은 슬픔과 아픔을 알고 느끼는 인격성이다. 그것이 분단의식이다.
분단의식이야말로 그림의 심미적 근거일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래되었다. 내 그림의 뜻을 민족공동체 차원으로 넓히지 않고서 그것의 진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나의 분단의식은 통일을 원하는 소망과는 다르다. 통일에 앞서 분단의 모순을 분열적 사회를 깊게 사유해보려는 의지이며 책임의식이다. 나는 통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다. 통일그림을 도맡겠다는 생각도 없다. 오히려 통일의 환상부터 먼저 물리쳐야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벽이 무수하다. 분단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벽은 인간의 심상(心狀)에 늘 상존한다. 남북분단의 삶의 현실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각기 마음의 벽을 키우고 공들여 기른다. 분단이 우리의 현실인 만큼 그 실상은 우리의 것이지만, 인간의 반목(反目)의 비극성은 세상 도처에 흔하고 또 흔하다. 분단의 벽이 없는 삶에서도 인간의 편견의 벽은 여전히 무성할 수 있다. 시기와 반목은 인간사회의 본질적인 습속(習俗)의 하나다. 그러니까 인간사회의 소외와 반목의 문제는 분단국의 것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에게 남북분단의 그 분단의식의 의미는 오히려 중요하다. 분단의식은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성의 바탕일 수 있겠단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의 분단은, 분단의식에는 그러한 심(心)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상대의 그릇됨을 헐뜯고 비난하는 심사(心事)는 강(强)자의 못난 심리로 여겨야 마땅하다. 인간성의 핵심은 자기성찰이요, 자기를 내려놓는 부정의식이다. 그것이 철책의 인격성이다. 분단국에 사는 뜻은 자기의 부정의식과 성찰의식을 더 넓히는 데 있다. 자신의 내면을 되살피는 마음을 지니는 의미다. 내 안에 편견이 있다는 것, 내 안에 남을 배척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 이기심을 인정하는 마음, 반성하는 마음, 고심하는 마음. 그러한 성찰의 마음으로 분단의식의 몸은 뜻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분단의 벽을 나의 마음의 벽으로 이동시킬 때 내 삶의 의미는 더 확실해지지 않을까. 내 마음의 벽을 의식하고 깊이 통찰할 때 비로소 분단역사의 의미는 새로운 길을 열게 되지 않을까.
우리의 남북분단의 상황은 결과적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는 중요한 요인일 수 있다. 경계선의 철책은 개개인의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실질적인 도구인 셈이다. ‘평화’라는 말이 공중에만 떠도는 인간사에서 분단의 상황은 사람은 왜 사는가를 증명하는 현실적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픈 역사에서 산다는 것은 아픈 역사를 청산할 권리를 지닌다. 인간은 떳떳할 이유가 있어야 떳떳해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이점에서 나는 앞선 문학가 최인훈을 떠올린다. 최인훈의 작품세계는 분단의식의, 철책인격성의 집대성의 가치를 지닌다. 분단의 삶은 어떤 것인가? 최인훈 문학의 성과는 분단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가의식의 성과이며, 분단의식을 통해 인간애를 드높인 우리민족의 성과인 것이다.
초점을 옮기자. 분단의 윤리성으로 드넓은 세상을 조금 더 마주하자. 세상이 변하고 있다. 서구 중심의 문화적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문화적인 차등이 거의 없다. 과거의 문화적 권위가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서구문명의 파워가 예전과는 다르다. 문화의 경계가 무너진 까닭이다. 미술의 경우로도 실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세계 어느 대형 미술관이든 쉽게 관람한다. 거리낌 없이 찾아가고 또 찾을 수 있다. 그러한 미술관들이 우리나라에 없다는 것일 뿐, 두루 찾아보겠단 의지엔 장애가 거의 없다. 시간과 여유와 성의만 있으면 가능하다. 어디든 언제든 마치 우리의 미술관처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이미 문화의 우열을 따지는 시대는 지나고 있다는 증거다.
격세지감이다. 세상의 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어느덧 우리의 생각을 일으킬 내외적 조건이 탄탄해졌다. 여태 옹색했던 후진국의 열등감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여야 한다. 그러한 이유들에 힘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명확한 입장이 더욱 필요하다. 주변 그림들이 우리 것으로 당당해지려면 우리 발밑의 자긍(自矜)이 더 살아나야 마땅하다. 어떤 예술도 타력(他力)으로 남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림은 그림의 현실적 이유가 담길 때 그림이 되는 것이다. 뜻이 없으면 가치도 없다. 물음을 빌려온 그림들은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그림은 널리 객관적 가치를 높이기 쉽지 않다. 국가의 문화적 수준은 뒤로하더라도 지금까지 미술적 역량이 그만한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그렇다. 그러기에 초점은 더더욱 자기 자신이요, 스스로 사는 사회요 문화요 역사성이다. 나의 발밑이요 몸의 처지다. 그림의 드넓은 의미와 가치를 지나치게 욕망하는 것은 자칫 자신을 무시하고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허깨비에 홀려 먼 곳만 쳐다보는 꼴이다. 그림이 위대한 거라면 그건 세계적인 인증서가 붙어서가 아니다. 지난세기 내내 식민과 전쟁을 겪고 지금껏 고난과 반목의 분단의 역사를 지닌 나라(國)가 달리 어디 있나? 이 땅에서 화가로 산다는 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살아낼 용기(勇氣)다. 화가로의 이름을 포기하는 용기까지도 포함한다. 분단의 철책의 힘으로 목적성을 뭉개버릴 용기이다. 스스로 바닥에 뒹굴려는 태도다. 더 외롭게 붓을 들 마음가짐이다. 리얼리즘이 어떻고, 앵포르멜이 어떻고, 추상표현주의가 어떻고, 팝아트가 어떻고, 에코아트가 어떻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세상에 존립한 모든 미술의 유파나 작풍(作風)들이 그 무엇에 누구에게 초점이 있나? 어떤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가. 어떤 감동과 메시지를 주는가. 바깥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때(時期)가 된 것이다. 나를 위로할 사람은 바로 내 자신이다. 내 물음으로 내가 있는 것이다. 시기가 이미 닥친 것이다.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란 말이 익숙하다. 그림의 떡이란 무슨 말인가. 그림은 가짜라는 것인가, 아님 그림에 그려진 대상은 아무 쓸 모가 없다는 것인가. 이 말의 이유는 그림의 무상(無常)함이나 무의미(無意味)를 직시하잔 뜻이 아니다. 그림의 떡이란 우리의 속담에는 아주 중요한 그림의 실마리가 들어있다. 그림의 떡이란 말대로 그림이 허상(虛像)의 본질을 지닌 것이라면, 그것의 위상 또한 허상임이 분명하다. 그림은 헛것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반드시 실생활의 가치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림의 예찬(禮讚)은 그것의 격려를 위해 필요하겠지만 그 신화적 권위는 자칫 인간의 보편성을 왜곡시키고 억압한다. 그림의 떡이란 말은 그림의 신화적 권위를 벗기기 위해 화가의 진정한 심미의식을 위해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림의 본령은 그림이 신화의 구조로 편입될 때 어지럽게 흩어진다. 그림의 본질이 저마다 다르게 편의대로 언급되는 까닭은, 그것의 신화야말로 일관성과 보편성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림의 문제는 화가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받아들이는 사회성이 없다면 그림의 세계는 공중부양의 처지에 빠진다. 많은 화가들은 나름의 신화를 꿈꾼다. 별다른 창의성에 탐닉하는 까닭이다. 그러한 자신만의 탐닉의 세계는 세상과 단절의 위험성이 있다. 삶의 공동체에서 들린 보편성이 무시될 위험이다. 그림의 떡의 진의를 되새겨볼 이유다. 화가는 늘 자기 눈을 의심하는 자기부정의 신심(信心)이 필요하다. 허욕(虛慾)을 누르고 자신을 의심하는 길(道)의 행로는 신화의 조명(照明)이 꺼진 쓸쓸한 뒤안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안길은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물리치는 생활의 길이요 살림의 길이다. 그 살림의 도정(道程)에 동학(東學)사상이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림이 모두의 마음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요즘엔 오히려 특별한 경우가 되었다. 여기서 동학의 수운(水雲)의 가르침은 중요하다. 특히 수운사상의 ‘시천주(侍天主)’와 ‘오심즉여심(吾心則汝心)’의 의미는 크다. 하느님이 내 안에 모셔져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라는 것 또한 무엇인가. 수운사상은 일상의 가르침을 떠나 그림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그림도 세상의 일이고 마음의 일이기에 그렇다. 그림이 세상의 일이며 마음의 일이라는 전제는 그림에 대한 시각이 천주(天主,하느님)의 마음으로, 천지자연의 섭리로 확장될 필요성에 따른다. 세상마음의 일이 한 개인으로도 가능해질 수 있음이다. 당연히 사람의 일엔 천지자연이 상존한다. 시천주(侍天主)는 인간의 자아는 하나일 수 없음을 가르친다. 수운사상의 ‘시천주(侍天主)’의 초점이다. 자기 안에 하느님(天主)이 모셔져있음에 대한 의미는 내 마음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일 수 있다는 뜻이다. 굳이 각자위심(各自爲心)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뜻과 통한다.
그림의 속성은 유물(唯物)적으로 생기는 것만이 아니다. 보고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마음의 현상에서도 생겨난다. 그림의 태도에 위선(僞善)이 가능해지는 까닭이 무엇인가. 마음의 행로가 무시된 때문이다. 마음은 속일 수 없다. 안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드러난다. 사람의 마음은 침묵상태로도 쉽게 공감되는 차원을 지닌다. 서로의 마음은 속이기 힘들다. 수운사상의 ‘오심즉여심(吾心則汝心)’과 겹치는 얘기다.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라는 것은 천지만물이 동등하다는 말씀도 내포한다. 자아가 어찌 홀로일 수 있는가. 수운사상의 세계는 우리그림의 화론(畵論)일 수 있다. 나의 생각이다.
세상일엔 항상 두 세계가 공존한다. 능동성과 피동성이다. 세상일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주어지지 않으면 어렵다. 능동적인 마음먹는 것에 따라, 수동적인 허락된 마음이 겹쳐야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두 세계가 필요하다. 무얼 그리겠단 일방(一方)적 마음으론 약하다. 나의 뜻과 천지(天地)의 뜻이 같이 서려야 한다. 사회의식과 시대의식은 하늘의 천지의 뜻이다. 그림은 능동성과 수동(피동)성의 겹침의 세계이다. 그것들의 조합이다. 그러므로 산(生)마음이 서린 살아있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의 문제는 그에 따른 세상의 의식이 제때에 들렸는가의 문제와 통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림의 주체적 자아는 하나일 수 없는 것이다.
엄하게 얘기하면 그림의 역할은 주어지는 것이다. 가지려는 뜻으로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수동성이 능동성을 끌어내지 못하면 역할의 당위는 그만큼 허약해진다. 그러면 화가로써 나의 소명(召命)은 누가 부여하는가. 내 그림의 역할은 무엇으로 가능해지는가. 나의 주체는 본래 있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다만 내 그림은 내가 그린 것으로 끝나는가? 진실로 내가 전부 그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림을 찾으려는 저의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존재적 당위는 나를 벗어나있다는 생각. 그러므로 내가 바로 지금의 사회와 역사가 된다. 헷갈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우선일 수 없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 먼저다. 다난(多難)한 현실이 없다면 나는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능동(주체)과 수동(객체)이 겹쳐 움직이는 세상을 생각한다. 나를 살리는 세상의 뜻이라는 게 있을 거다. 나는 그것을 겹 주체성 의식이라 부른다. 서로주체성의 마음이라 해도 좋다.
그러므로 내 그림은 내가 그린 것만이 아니라는 견해가 가능해진다. 나의 그림은 나로 비롯될 테지만 그 역할은 이 땅의 뜻이 관여한다. 따라서 내가 탁월한 화가라는 생각은 자만(自慢)일 수밖에 없다. 늘 고민하는 바지만 우리의 미술적 역량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문학이나 음악의 역량에 비하더라도 미흡한 게 현실이다. 첫째 이유는 자신을 이 땅의 전체로 삼으려는 까닭이 약해서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붓을 드는지의 의문이 자기 안에 맴돌고 있음이다. 내가 20세기를 성찰하려는 이유도 이 땅을 기반으로 홀로주체성을 넘어서려는 데 있다. 인간은 항상 미흡한 존재다. 화가 역시 미흡할 수밖에 없다. 해결점은 없는가. 수운말씀의 ‘내유신령(內有神靈)과 외유기화(外有氣化)’를 생각하자. 내 안에 신령이 모셔져있고 그 신령함이 밖으로 기화(氣化)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살피자. 내 그림의 문제다. 그림은 무엇인가? 나는 그림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분명하다. 그림은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왜? 그리는가의 문제다. 그 물음을 그리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문제가 아니라 왜? 문제가 더 우선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그림의 근거를 묻는 뜻이 곧바로 그림의 내용을 이루는 경우다. 왜? 그리는가의 문제로 그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문제는 전체의 필연성이 무시된 생각이다. 그 생각은 결국 미술내부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창의성이나 조형성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왜? 그리느냔 물음으로 형식이 나와야 하고 나올 수 있다. 우리의 과거는 너무 빌려온 답에 의존했다. 우리의 역사가 부여한 수동이 능동이고 객관이 주관이라는 서로주체성의 개념이 선배들에선 부족했다.
결국 내 그림의 내용은 다른 게 아니다. 묻는 뜻이 바로 내용이다. 왜 그림인가? 왜 그려야하는가? 그 의구심으로 내 그림의 내용이고 모습이며 주제이다. 왜? 그리느냐는 물음으로 자연스럽게 내 그림은 완성된다. 소재나 주제도 그 뜻으로 찾아든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들이 대상과 주제와 형식을 불러낸다. 내용과 형상을 이루고 모습과 표정을 만든다. 그렇다면 내 그림의 물음의 근거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화가에 앞선 사람으로의 물음이다. 미술로의 물음에 앞선 세상의 물음이다. 평가의 물음에 앞선 의식의 마음의 물음이다. 인간으로의 나의 물음이다.
그러므로 나의 그림은 뜻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뜻을 지닌 말이, 지향하는 의미가, 그리는 까닭이 색과 형식과 특성을 만든다. 애초부터 말(言)을 그리는 화가로 인식되길 나는 바란다. 처음부터 그림을 불러내는 말이 먼저라 생각했다. 그 말은 무엇인가. 내 삶의 이유를 캐는 뜻이며 삶의 뜻을 나누는 생각이며 그림의 역할을 생각하는 이유들이다. 내 그림의 모티브는 말뜻으로 생겨난다. 뜻이 불러낸 말(言語)의 뜻에 따른 대상일 뿐이다. 본 것을 그릴 뿐, 보고 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일찍부터 내게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뜻에 모양이 있나 없나? 언어(말)에 형태와 색은 없는가? 그리움은 추상일 뿐인가? 언어는 인간적인 몸과 마음의 뜻으로 발생한다. 인간의 말(言)은 바른 뜻을 지니는 한에서 제 모습이 생긴다. 알맞은 모양과 색과 울림이 발생한다. 어떤 식이든 참뜻의 말에는 적절한 형식의 모양과 색이 따른다. 하지만 세상을 억누르고 배척하려는 언어에, 시기하고 질투하려는 말에, 독단을 강조하려는 뜻에 적합한 형상이 있을 리 없다. 형상을 배제한 추상의 경우를 생각하자. 추상그림엔 뜻의 초점이 없다. 비인격적 몰이성이 개입될 소지가 있다. 동양그림의 전통성은 그럼으로 애초부터 추상회화의 세계를 경계해왔던 것이다.
돌아보자. 그림이 뜻을 담는 것임은 우리 전통의 맥락이다. 전통적으로 사군자나 산수화, 풍속화의 경우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대상(對像)에 뜻의 표현을 중시했다. 하나의 대나무(竹)을 칠(그릴)지라도 그 죽(竹)은 뜻의 형상이지 배제한 형상이 아니다. 사의(寫意)가 먼저이지 사생(寫生)이 우선이지 않다. 옛그림의 대상(소재나 주제)은 거의 화가의 뜻으로 선택되었다. 우리의 전통 그림의 세계는 그리는 이의 뜻이 도해(圖解)를 형성시킨 세계다. 도해를 위해 뜻을 무시한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금강전도’ 하나만 보더라도 그 진의가 확연히 드러난다. 겸재의 그림이 진경(眞景)이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금강산을 그리는 마음의 뜻이 그리움이 ‘금강전도’를 생성시킨 것이다.
그림의 전통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일은 당연히 후학(後學)의 몫이다. 단순한 전달의 전업(轉業)의 문제가 아닌 새로운 만남의 문제이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조선 중후기 단원(檀園) 김홍도의 작품을 흠모(欽慕)하는 경우는 무엇인가. 만남이다. 사리(事理)의 만남이고 신명과 흥의 만남이고 이유의 만남이다. 전례(前例)의 만남이요 길의 만남이다. 우리의 전통그림의 길(道)은 무궁하고 무진(無盡)하다. 옛말의 ‘난(蘭)을 친다’에서 그 ‘친다’라는 말은 기른다는 말과 같다. 화폭에서 난(蘭)을 기른다는 마음의 뜻이 바로 ‘친다’의 의미다. 대상을 그리는 문제는 대상을 키우고 기르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붓을 통해 화폭에 대상을 기른다는 전통의식은 무엇인가. 단순히 화폭의 대상을 키운다는 의미가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난(蘭)을 친다’라는 말을 더 살피자. 친다가 기른다는 것이라면, 화폭에 난을 기르는 것으로 화가의 역할은 끝나는가. 그리는 주체인 화가의 몸과 마음은 어찌 기르고 넓히는가. 화가의 인격성은 무엇에 의해 길러지는가. 여기에서 ‘친다’의 의미는 더 확장된다. 대상을 기르는 뜻에 화가 자신도 함께 커나가는 의미도 내포돼 있음이다. 화폭에 대상을 기르고 키우는 행위를 통해서 화가 자신의 인격도 한층 더 성장하는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다. 화가가 인격성을 잃은 허툰 마음을 지닐 때 화폭의 대상이 그와 무관하게 바르게 길러질 수 있는가.
어떤 경우든 이 땅의 그림의 전통성은 무시될 수 없다. 예컨대 멀리 스페인의 경우를 보자. 피카소 없는 벨라스케스는 있을 수 없고 벨라스케스 없는 엘 그레코는 있을 수 없다. 피카소의 문맥(文脈)이 엘 그레코의 문맥과 새로 만날 수 있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그게 문화전통의 힘이요 전통의 내력(來歷)의 깊이다. 여기서 다시 동학(東學)의 수운사상의 문맥을 조금 더 더듬자.
촛불혁명 이후 나는 수운사상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의 ‘심고(心告)’의 뜻을 주목하게 되었다. 심고(心告)는 수운이 가르친 수행(修行)법이다. 하느님께 마음으로 아뢰며 행동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행위는 심고(心告) 즉 마음의 고(告)함을 통해 객관성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나의 뜻이 그림을 통해 객관적 당위를 얻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그간의 주된 고민이었다. 주관을 그대로 객관화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았다. 그런데 심고(心告)의 가르침이 그걸 해소시켰다. 심고(心告)로 주객(主客)이 만나는 객관성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심고(心告)는 능동으로 수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다. 자발성에 타자(他者)성이 흡수되는 것이다. 개체의 길이 전체의 길이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심고(心告)의 상대는 천주(天主)이다. 시천주(侍天主)이다. 이점이 중요하다. 천주는 하느님이자 천지만물이다, 세상전체다. 심고는 내 안의 하느님(천지만물)에게 뜻의 당위를 묻고 응답하는 행위다. 심고(心告)가 주체로서 객체성을 지닐 수 있는 당위는 거기에 있다. 심고는 하느님께 일방(一方)으로 속삭이는 기도(祈禱)의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과 만물과 소통하는 만남의 행위이다. 하늘의 뜻과 천지만물의 입장이 무엇인지. 거기에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심중(心中)의 뜻으로 주고받는 겹침의 행위, 그게 심고의 의미다. 수운께서 심고(心告)를 인격성을 일으킬 수행법(修行法)으로 전제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심고(心告)의 방안(方案)으로 그림을 보자. 그림의 행위도 어차피 쌍방의 응답이자 겹침의 행위다. 그림에서 쌍방의 겹침의 문제는 그러나 무엇인가? 나와 상대가 함께하는 차원이다. 내가 곧바로 상대가 되는 문제다. 그림의 쌍방성은 주체가 객체가 되는 성격이다. 능동이 피동이 되는 상황이다. 수운사상의 시천주(侍天主)의 요점이다. 내 안에 천주가 모셔져 있는 것이다. 인내천(人乃天)의 요건이다. 사람이 바로 하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심고(心告)의 참뜻이다. 일찍이 ‘내 그림은 내가 그린 것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나만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이 이미 고스란히 동학사상에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그림엔 정체성의 문제가 따른다. 그림의 정체성은 왜 중요한가. 우리만의 자존의식이 필요한 때문이다. 우리그림이라 부를 수 있는 독자적 특성이 따로 있는가의 문제인데, 과연 우리만의 것이라는 심미의식이나 공통된 감각의식이 별도로 있는가? 간단치 않은 문제다. 우리의 언어를 통한 문학과는 다른 점이다. 우리그림, 우리화단, 우리문화의 ‘우리’라는 범주가 지닌 독자적 심미성에 대한 문제인데 그걸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타문화와 다른 우리만의 공통된 문화적 성격은 무엇일까? 한반도 땅의 심성(心性)에 국한되는 문제인가, 아니면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민족의 잠재된 심미의식의 문제인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필 수 있겠다. 공간과 시간이다. 공간은 민족의 삶터의 부피 문제요, 시간은 역사성의 유래(由來)의 깊이이다. 함에도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객관성은 실로 막연하다. 동양적 특성과 구분이 모호하다. 어찌 규명해낼 수 있을까?
때문에라도 동학사상은 중요하다. 그림의 시야를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넓히는 길을 수운사상은 제시하고 있다. 심고의 수행법은 그러한 주체적 심미성과 정체성을 확립시킨다. 수운사상은 이 땅의 사는 이유로 의식을 형성시킨 총화(總和)의 사상이자 가르침이다. 그만큼 주체적이며 독보적이다. 그림의 주체성은 화가가 홀로 이루는 문제가 아니다. 그림을 함께 주재할 상대가 실재하기에 그렇다. 그 상대는 이 땅의 천주(天主)인 하느님이다. 우리 역사를 이어온 천지의 뜻이며 만물의 마음이다. 그 길을 명확히 개시(開示)한 게 수운사상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림의 정체성의 특성은 독단성과 배타성을 불허한다. 자의(自意)에 타의(他意)가 스민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특성을 지닌다.
동학이 종교가 아님은 익히 아는 바다. 천도교(天道敎)라 일컬은 건 훨씬 이후의 얘기다. 그러므로 동학사상은 동학교리가 아닌 것이다. 수운사상의 핵심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인격성을 고양(高揚)함에 있다. 시천주(侍天主)나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말씀의 의미도 그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느님이 내 안에 모셔져 있다는 것,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의 진의는 무엇인가. 교리를 전하여 교세를 넓히는 목적함이 없다. 하나님의 수직체계인 기독교와 다른 점이다. 서로 섬기는 마음의 인격성에는 강제하려는 목적성이 있을 수 없다. 그림도 그와 같아야한다. 그림이 섬기는 마음에서 얻어진 거라면 누구라도 그것에 등질 까닭이 없다. 화가도 모심의 인격성이 필요한 것이다. 목적을 뒤로하는 모심의 마음이다. 위가 아니라 아래다.
동학사상의 또 다른 핵심은 모성(母性)이다. 수운사상의 본질은 어머니 마음이다. 차별이 아니라 평등이다. 여성성의 자애로움이다. 조선말기 나라의 안팎이 온통 위태롭게 흔들릴 때 수운사상이 발현됐음을 생각하자. 외침의 폭력성으로 자존이 무너진 열등의 시대에 필요한 마음이 무엇일까? 강압과 수탈이 난무한 시대의 덕성은 또 무엇인가? 수운의 가르침은 힘이 아니고 무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운사상은 시공을 넘어 지금도 유효하다. 현재의 분단의 시대에도 필요하다. 모성의 자애로움, 섬김의 관용(寬容)성은 수운사상의 본령이다. 수운이 득도체험을 한 구미산 용담정의 지기(地氣)에 모성(母性)의 낌새가 자욱함은 우연일 수 없다. 동학사상의 바탕은 어머니 사랑의 무공(無功)함이다. 모시고(侍), 키우고(養), 체현하는(體) 천주(天主)의 사랑에는 앞에 내세울 공(功)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공(功)을 따지는 어머니의 기르는 마음이 있는가. 수운의 말씀에 따르자면 하느님(天主) 자신도 노이무공(勞而無功)하다고 했다.
그림은 협업(協業)이 어렵다. 화가는 홀로 전체성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가는 외로울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 망망대해의 돛단배의 처지가 나의 처지와 같다. 몸과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벗은 마음의 심중(心中)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의 역사 안에 내가 있다. 그 사이에 천지만물은 변해가고 사회 문화 역사는 흐르고 있다. 나는 20세기 우리 선배 화가들을 생각한다. 화단(畵壇)의 내력도 곰곰이 생각한다. 무엇이 중요하고 왜 필요한가?
거듭 생각하는 바지만, 그림에는 주체(主體)도 있고 객체(客體)도 있어야한다. 그림은 헛것의 의미를 지님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의 노릇도 한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에 엄중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인가? 얼마 전부터 나에게 반개(半開), 해염(解染), 호명(呼名)이란 말(言)들이 줄줄이 찾아들었다. 절반만 연다, 흩어져 물든다, 이름을 부르다 인데, 모두 겉에 드러날 수 없는 속마음에 굴러다니는 말들이다.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가 있다 치자. 산수를 그리려는 욕망과 그걸 허락하고 부추기는 계시가 같이 들려있는 경우다. 능동과 피동이 겹친 서로주체성이다. 무당(巫堂)의 주체성이라 불러도 되고 겹의 주체성이라 불러도 된다. 서로주체성, 무당의 주체성은 자신의 몸에 타자(他者)의 영혼이 깃든 주체성이다. 흔히 신내림의 상태라 불린다. 신(神)이 내린다는 건 나와 신이 동시에 만나는 일이다. 타자와의 만남으로 주체의 역할이 확실해진다. 세상의 아픔과 곤란을 보듬고 위로한다.
그림의 길은 늘 새로운 길이다. 그림은 만남의 세계이기에 그렇다. 나는 그림의 즉시(卽時)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만남은 늘 순간적이며 즉각적이지 않은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폐쇄되고 굳은 형식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그림의 세계는 울림의 깊이가 없다. 갈등이 들락거리는 매력도 없다. 만남의 설렘과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그림은 시간(時間)의 호흡이 담겨야한다. 그림은 항상 순간의 계기(契機)의 세계이다. 시간성과 연관이 깊다. 계기의 순간을 무시한 만남의 세계는 그림의 길을 고정시킨다. 그리는 방법뿐 아니라 그려진 결과로서도 그렇다. 살아있는 그림이 무엇인가. 개방된 울림이 스며든 그림이다. 미리 계획하지 않은 그림의 즉시성은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마련된 미학은 미학일 수 없다’는 내 생각과 맞물리는 경우다.
나의 그림은 고정된 형식을 쫒지 않는다. 그림의 모습과 울림은 매순간 달라야한다고 생각한다. 내 그림의 작풍(作風)이 매 그림마다 다르다는,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은 그러므로 틀린 지적이 아니다. 일관된 개인적 형식을 그림에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반대이다. 무당을 만신으로도 부른다. 만신은 만신(萬神)이다. 만신(萬神)은 만(萬)번의 만남을 상징한 말이다. 모든 만남은 절대 같을 리가 없다. 즉시즉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울림으로 들리는 것이다. 각기 다른 나름의 빛과 소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림은 그러니까 매번 그릴 때마다 다른 울림을, 소리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림은 시각(視覺)만이 아닌 청각(聽覺)감각이 시간의 호흡(呼吸)이 가능하다. 만물의 신(神)이 각 그림에 달리 들린다는 점을 상상해보라.
이제 미술은 미술을 반성해야할 때가 되었다. 그림으로 그림의 이유를 성찰할 필요가 생겼다. 그럴 때가 된 것이다. 그림이 그림을 반성할 까닭은 그림이 인간의 마음을 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림이 사람을 소외시키는가. 본령을 등지게 되는가. 그림은 사람의 일이다. 그리움의 일이고 동경(憧憬)의 세계다. 공중으로 떠도는 그림의 위상은 내려져야 한다. 그림으로 그림의 마음을 회복해야한다. 지난시절 화가의 특권은 무엇이었나. 예술성이 기발한 착상이나 변별성으로 확보되리란 믿음은 버려도 된다. 과도한 차별성으로 현대의 그림은 삶의 자리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 그들만의 별세계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다. 세상의 만물은 서로를 무시하기 위해 실존하지 않는다. 그림이 그들만의 세계로, 허공으로 암호의 세계로 줄줄이 빠져가는 경우를 차분히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이 날(飛) 수 있는가. 멀리 날아갈 수 있는가. 그러기에 그림은 현실에 발밑에 바짝 더 밀착해야 한다. 웅크린 채로 데굴데굴 굴러도 상관없다. 그림의 기능을 함축해 말하면 그림은 죽은 것은 살릴 수 없으나 산 사람의 멋은 살릴 수 있다. 그 멋은 자신의 처지와 스스로의 생존성에 닿아있다. 노자(老子)의 전언(傳言)에 ‘불출호지천하(不出戶知天下)’라는 말이 있다. 문밖을 나가지 않더라도 천하를 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박경리 문학의 경우가 떠오른다. 대하소설 <토지>의 경우다. 읽어본 이들은 다 같은 생각일 테지만, <토지>는 사유로 집필된 소설이다. 취재나 답사를 통한 고증의 역사문학이 아니다. 작가는 평사리의 최참판댁은 실재하지 않고 만주 용정에도 가본 사실이 없이 써나갔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그 작풍(作風)이나 서술의 깊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감동을 전해준다. 없는 사실이 있었던 사실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된다. 박경리 문학의 이념은 사유를 통해 이념을 부수는 이념인 것이다. <토지>를 읽어본 사람은 이 점에 공감할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작가의 산 내력에 의해서다. 자신을 포함해 이 땅과 역사 전체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색한 결과이다. 삶의 주관성이 객관적 현실로 파고드는 형국이다. 주관이 객관을 더 단단하게 영글어내는 것이다. 요컨대 박경리 문학은 미리 결정된 로드맵이 없이 줄곧 스토리가 전개된다. 만 25년간의 집필과정이 그걸 증명한다. <토지>의 가없는 웅장함과 깊이는 미리 선결된 의식으로 쓰지 않았음으로 이뤄진 성과이다. 우리의 예술적 부피는 이 정도이다. 나는 <토지>를 그렇게 읽었다.**
첫댓글 엄청 긴 글이네요. ㅎㅎ 아직도 읽는 중.....정독이 필요한 글.....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