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설레고 있었다.
'1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단 이 말씀이야. 가장 빠른 사나이 장영석! 흐흐'
영석이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루학교에서 가장 빠른 바람의 사나이 영석이는 자기 다리를 믿고 있었다.
'적어도 금메달 두 개는 따고 싶다. 재수 좋게 400 이어달리기에서도 한 개 보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는 3관왕이 될 수도 있다.'
태종이는 결코 꿈만 아닌 기대 때문에 몸이 부르르 떨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큰 걱정이 하나 있다. 연신 주위를 살피는 까닭을 지금 이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리라.
운동하기에 좋은 구름 끼인 날씨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 근처 자두나무가 콩새 알처럼 작은 열매를 달고 있다. 그 나무 밑에서 운동모를 쓰고 있는 손 선생님은 느긋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아이들 육상 지도를 끝낼 셈이다. 나이가 쉰을 넘었으니 이제 젊은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운동이 좋아, 아이들과 뛰는 것이 좋아 이때껏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지도했고, 해마다 성적도 좋았다. 올해는 기필코 좋은 성적을 거두어 영광스럽게 물러나고 싶다. 기대를 할만한 아이들- 영석이와 태종이 그리고 지은이다. 태종이는 연습하기 전의 기록보다 3초나 앞당겼다. 그리고 높이뛰기에서도 잘하면 메달을 기대한다. 눈부신 발전이다. 영석이는 100m에서 이변이 없는 한 금메달이다. 기록이 그걸 증명한다. 지은이도 어쩌면 금메달 한 개쯤 딸 줄 모른다. 800m는 남녀 다 우승이 목표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운이 좋으면 종합우승도 바라보고 있다.
빵!
승합차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으스대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너희들은 학교 이름이 박힌 이런 유니폼을 입어 봤어?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은 신났다.
차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느리담. 흔들리는 차 속에서 서로 밀리며, 들뜬 마음을 대화로 푸느라고 시끄럽다. 그 중 긴장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아이는 태종이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창 밖으로 눈을 자주 주고 있다. 누구를 기다릴까?
"태종이 힘내!"
손 선생님은 태종이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한마디했다. 오늘 경기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깨에 학교의 명예가 걸려 있다는 것을.
오늘 기대하는 두 아이는 서로 달랐다. 영석이는 성격이 밝고, 키가 크고, 재빠른 아이다. 태종이는 어딘지 성격이 어둡고, 덩치가 작다. 하지만 태종이는 운동 신경이 좋고, 오히려 영석이 보다 열심히 하는 아이다. 높이뛰기도 키다리 기종이를 처음에 시켰지만, 도저히 자세가 나오지 않아 태종이를 시켰다. 그런데 작은 태종이가 놀랍게 소질을 보여 연습을 시킨 것이다.
2
"끽!"
갑자기 차가 급정거를 했다. 그 바람에 아이들이 앞으로 쏠렸다가 제자리에 오면서 깔깔거린다. 손 선생님은 갑작스런 사태에 운전석을 바라봤다. 운전을 하던 이 주사는 작은 창을 열고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당신! 제 정신이요?"
웬 승용차가 앞지르기를 하여 위험하게 달리는 차를 가로막은 것이다. 손 선생님도 일어서서 밖을 보다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태종이 큰아버지가 턱 버티고 서서 차안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빨리 내려!"
태종이 먼저 손 선생님이 내렸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풀이 죽은 태종이도 뒤이어 내렸다.
"태종이 큰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손 선생님은 태종이 큰아버지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왜 이러십니까?" 되묻고는 삿대질하며
"내가 태종이는 운동을 시키지 말라고 찾아가서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를 꾀어 계속 운동을 시켜서 나를 속여요?"
"속이다니요? 태종이가 계속 운동 연습시간에 나와서 허락한 줄 알았지요. 아무튼 오늘은 경기 날입니다. 이왕 연습하였으니 참가토록 해 주세요."
"안 돼요. 태종이는 못 보냅니다. 태종이 빨리 이 차 타."
태종이는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리고 큰아버지 차에 오른다. 그 모습을 보는 손 선생님은 애가 탄다. 태종이가 빠지면 오늘 대회는 망친다. 날씨가 궂으려면 먹구렁이 나온다더니 다 된 밥에 코 빠지는 격이다. 이 고집불통의 사나이 고집을 어떻게 꺾을 수 있을까?
급히 교장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교장 선생님은 차를 몰아 문제의 장소로 쫓아왔다.
화가 잔뜩 난 태종이 큰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 와서 사정해도 한치의 양보도 없다. 절대 오늘 태종이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교장 선생님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아이들과 손 선생님을 달래 보냈다.
손 선생님은 맥이 탁 풀렸다. 아이들도 힘이 빠졌다. 종합운동장에 내려서니 벌써 관중석에는 응원하러 온 학생들이 가득 차서 떠들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교감 선생님은 사정을 모르고 방글방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 우승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태종이를 자기 큰아버지가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왜요? 태종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연습을 시키지 마라고 했는데 연습을 시켰다고 그럽니다."
"딱 경기하는 날에? 아버지면 몰라도 큰아버지가 왜 방해를 하지요?"
"자기 아버지가 운동하다가 비딱하게 빠지는 바람에 자식들은 절대로 운동을 시키지 않는다는 고집이군요."
"이왕 연습하였으니 우리 학교를 위해 보내드리라고 부탁할 것인데."
"교장선생님이 사정해도 고집이 꺾이지 않았어요."
"참, 교장선생님은 왜 안 오시지요?"
"화가 나서 오시지 않을 모양입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응원하러 온 많은 학부모들의 얼굴이 보였다. 태종이가 빠진 나루학교 아이들은 눈에 보이게 기가 꺾여 있었다. 태종이가 혹시 오지 않나 두리번거리기도 하였다.
3
한편 교장선생님은 태종이 큰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었다.
"학교를 위해 태종이를 보내주세요."
"참 교장선생님도! 학교보다는 가정이 더 우선입니다. 어머니나 동생이 알면 펄떡 뛸 것입니다. 동생은 아마 태종이가 운동한다는 것을 알면 서울에서 당장 내려올 것입니다."
"큰아버지만 비밀로 하면 되지 않겠어요? 운동으로 직업선수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육상대회에 나가서 자기 실력을 뽐내는 잔치입니다."
"그런 일을 어떻게 비밀로 할 수 있어요? 태종이를 데리러 온 제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교가 태종이 큰아버지를 속였다고 아마 마음을 상해서 그러시는 모양인데 태종이를 생각해 보세요. 이때까지 연습하다가 오늘 출전도 못하고 교실에 앉아 있을 모습을요"
"미안합니다. 안됩니다."
"단순히 감정으로 그러지 마시고, 태종이 입장을 먼저 생각해 보세요."
"교장선생님은 제 고집을 모르는 모양인데 한번 안 된다고 하면 안됩니다."
"큰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내주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태종이의 이름으로 보내주세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앞으로 태종이는 체육 시간에도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할까요?"
"참, 교장선생님도! 누가 체육 시간의 운동도 안 된다고 했습니까?"
아이들이 어른들의 소유물인가, 노리개인가? 하고싶은 일도 어른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아버지가 운동하다가 나빠졌다고 아들이 같은 길을 걷는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교장 선생님은 태종이 큰아버지와 헤어져 나오다가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4
본부석 마이크에서는 진행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다음은 초등 200m 차례입니다. 선수들은 출발선으로 모여 주십시오."
"선생님! 태종이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원택이가 나가기로 했다."
"원택이가요? "
"걱정 마라. 원택이도 잘 달릴 것이다."
원택이는 낯이 붉어졌다. 마음이 떨린다. 연습했지만 오늘 당장 경기장에 나갈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등위에 들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놓고 힘껏 달려라."
손 선생님은 원택이 등을 툭툭 쳐주었다. 원택이는 출발선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시고는 앞을 노려보았다. 트랙을 따라 한 바퀴다. 출발이 좋았다.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런데 결승선 가까이에서 두어 명이 원택이를 앞질렀다. 그래도 무사히 예선전에는 통과하였다.
"원택이 참 잘했다. 힘껏 뛰면 결승에서도 메달을 딸 수 있겠다."
하며 손 선생님이 웃음을 가득 담고 칭찬했다. 손 선생님은 태종이가 왔으면 틀림없이 금메달인데 아까운 생각을 하면서도 원택이로 인해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100m에서 기대대로 영석이는 다른 학교 선수를 제치고 당당히 1위로 예선을 통과하였다. 여학생 부에서도 질세라 지은이가 100m에서 예선을 통과하였다. 예상대로 금메달이 눈에 보이자 다시금 태종이로 하여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던지기에서 명일이가 뜻밖에 첫 금메달을 땄다. 여자 던지기에서는 아깝게 보경이가 은메달을 땄다.
이제 남자부 400이어달리기 예선이다. 손 선생님은 태종이 대신 정남이를 넣어놓고는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도 우선 목표는 예선 통과다. 첫 번째 주자 영석이는 기분 좋게 1위로 춘길이에게 배턴을 넘겨주었다. 춘길이도 힘껏 뛰어 그대로 1등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배턴 받는 곳에서 정남이에게 배턴을 바로 넘겨주지 못하고 땅에 떨어뜨린 실수를 하였다. 그래도 키가 작은 정남이는 재빨리 주워 달려 4위로 달려나갔다. 마지막 주자 원택이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3위를 하였다. 손 선생님은 만족하였다. 일단 예선은 통과하였기 때문이다. 배턴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2위도 할 뻔했다.
여자부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여자부도 3위로 턱걸이로 예선을 통과하였다.
이와 달리 기대를 모았던 800m 기현이는 처음에는 선두로 기세 좋게 나가더니 점점 힘을 쓰지 못하고 처져서 메달 권 밖으로 밀려났다. 점심이 맛있다고 많이 먹어서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고 해서 쓴웃음을 지웠다. 여자 800m에서는 줄곧 1위로 달리던 소희가 결승선 가까이에서 뒤떨어져 은메달이 되었다.
여자부부터 100m 결승이 있었다. 여자부는 결승에서 아슬아슬하게 지은이가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남자부는 영석이가 잘 달려 주어 예상대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5
"다음은 200m 결승이 있겠습니다. 학교이름과 선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등록한 대로 여전히 태종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때
선생님, 태종이가 왔는데요."
영석이가 손가락질하는 곳에 태종이가 배시시 웃으며 서 있었다. 손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태종이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태종이가 보이자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힘이 솟아났다.
"되었다. 마침 잘 왔군. 원래대로 뛰는 거야."
태종이는 힘차게 뛰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초등부 여자부 400m 이어달리기 결승이 열렸다. 겨우 3위로 오른 여자 팀은 예상대로 맨 꼴지를 하며 응원하던 아이들의 힘을 빼버렸다.
"그래도 결선에 오른 것만도 대단하다."
손 선생님은 선수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해 주었다.
다음은 남자 400m 결승이다. 사기가 오른 나루 학교 아이들은 자신이 있었다. 100m 200m 금메달 선수가 끼어 있는 팀을 과연 어느 학교가 꺾을 수 있겠는가.
나루 초등학교 남학생들은 처음부터 멀찍이 거리를 두며 선두를 달렸다. 태종이는 예선에서 달리지 못한 미안함을 남김 없이 쏟아 붓겠다는 듯 마지막 주자로 나서 화살처럼 달렸다. 1등이었다.
나루학교는 당당하게 종합 우승도 차지하였다. 손 선생님은 기쁜 중에 의아심도 들었다. 어떻게 해서 태종이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건 태종이 아버지와 교장 선생님 이외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응원석에서 교장 선생님이 팔을 높이 올리고 서 있는 모습이 손 선생님 눈 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