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3. 20. 교회가 교회다움 행26:30-32
오늘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바울에 대한 심문을 한 베스도와 아그립바왕과 그의 무리들이 바울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30-31절입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고 합니다. 즉 바울에 대해서 문제가 없다는 좋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평가 앞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 해봐야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라는 기독교 단체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고 묻는다면 분명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답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나 목사에 대한 시선 역시 동일할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 모든 목사에 대해 이러한 시선을 보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다대수의 분위기가 이렇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교회가 현대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교회답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은 현대 사회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제대로 평가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오늘 본문과 같은 평가를 억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현대사회에 잘 보여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사회에 잘 보이고 좋은 평가를 받음으로서 교회에 득이 되기를 꾀하는 것도 많이 있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자기 이득을 위한 속셈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바르게 보이고 칭찬을 듣는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교회다움을 얘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회가 무어라 하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이라는 복음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이 인정하도록 살아간다면 그것이 교회다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은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집스럽게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서 말하고 행하고 추구하는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교회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교회는 오늘 바울에게서 보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드러난 모습을 보면
1. 바울은 자기의 감정과 이권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억울하게 붙들려 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자신을 심문하는 왕이나 총독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바울이 왕이나 총독에게 억울하다는 입장에서 감정적인 대립을 보였다면 그들은 바울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현재 처지와 상황에 대해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모든 것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바울은 최선을 다하는 것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와 상황에서 모든 기회를 동원하여 그리스도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교회다움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추구하고 주장해서 나아간다면 돈 문제 때문에 분란이 생기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분쟁하는 모습이 보여지겠습니까? 오히려 양보해 버리고 지는 자로 살아가는 모습만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로서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 이라기 보다는 교회다움에서 벗어난 채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탐욕에 머무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 힘쓰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다움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교회로서 교회다움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교회가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은 잘된 조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지런한 열심도 아니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다수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웅장한 예배당 건물을 건축해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고집하고 주장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집하고 주장한다는 것은 그 예수에게 의미를 두고 가치를 부여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그분을 사랑해서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이러한 말을 합니다. 디모데가 다 버리고 착념 즉 집착 해야할 것이 있는데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딤전1:4-5)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는 허황된 이설에 집착해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그릇된 교훈으로 진리가 아닌 거짓을 참 복음으로 위장하지 못하게 교회가 집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즉 버려야 할 것과 집착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데 버려야 할 것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의 이야기이고 집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집착해야 할 것은 예수의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사랑은 인간의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즉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만이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되어지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좋고 예수님이 믿어지고 사랑해져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이 일에 집착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만을 주장해서 살아간다면 교회의 성장이나 자신의 감정 자기에게 돌아올 이권 때문에 억울해하고 분하여 시비하지 않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가리워 진다는 것 때문에 억울해하고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가 교회다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습니까?
있다면 교회다움이겠지만 없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에 집착해 있습니까? 예수말고 지켜야할 새로운 법이 또 있습니까?
예수말고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이 또 있습니까? 우리의 고민거리가 무엇입니까
교회서 가르치고 주장해서 고집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헌금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부서를 만들어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충성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두러워 하고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나의 열심이 그리스도를 가리우지 않는지 우리 교회 자랑거리가 그리스도를 가리우지 않는지 목사의 훌륭한 인격이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가리우지 않는지 냉정히 살피고 확인해 봐야 합니다. 교인들이 교회제도는 알고 목사의 요구는 아는데 그리스도는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종교라는 막연한 삶은 사는 것 같은데 예수를 사랑함은 없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아무리 많이 모이고 사회적인 호평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찾아오는 모든 심령들이 바라보는 시야 앞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하여 버리고 언제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쉽게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목사가 해야할 일이고 먼저 믿는 자가 해야할 사명입니다.
한 심령이 그리스도를 찾아 왔으면 그에게 필요 한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런데 왜 목사가 끼어 들고 교회라는 잡다한 제도가 끼어 들어 어둡게 만들고 무겁게 만들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심령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그 누구도 관계할 수가 없습니다.
찾아 나온 심령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그리스도에게만 마음 뺏기어 살아가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목사의 사명이고 교회가 해야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제도를 가르치고 자기 교회 길들이기를 가르치고 목사가 이끄는 공동체에 충성하도록 종교 꾼으로 양성하고 있습니다.
교인하나 얻기 위해서 산과 들로 다니지만 교인하나 얻으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은 빼버리고 교회제도에 매여 지도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소경 되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너무나도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희미한 이름만 들려 올뿐 십자가에 피 흘리는 그리스도는 구경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인간들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열심, 단합, 성공을 자축하며 거기서 야기되는 흥분과 감정을 마치 신앙으로 착각하고 잔치 집으로 만들어 사람들은 좋아하고 있지만 이는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이 아닌 것은 가치를 부여하지 말고 모두다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만 주장되어지게 예수님이 내게 계시는 것으로 감사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를 말고 예수 그리스도 외는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정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그들이 진정한 교회다움이라고 생각됩니다.
2.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환으로 알았습니다.
26: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고 합니다.
사환이란 하나의 종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은 우리의 모두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면 됩니다. 사환이란 주인 앞에서 자신의 이득을 구하고 감정을 따라 행동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환의 위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환의 위치를 잘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득보다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행동한 것입니다.
사환이란 주인의 속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주인이 어떤 분이시고 주인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주인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주인에게 참된 종이 될 수가 있고 오직 그 주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귀뚫린 종입니다. (신15:12-18)
신명기 15장에서 말하는 종의 제도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자지만 자유 자로서 목숨까지 바쳐서 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종이고 이러한 종의 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같은 동족이 어려워서 종으로 팔려와서 7년이 되면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종이라는 것은 그 주인의 재산입니다.
이러한 종을 놓아 보낸다는 것은 재산을 포기하는 것인데 누가 이러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보다 더 큰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데 그것이 애굽에서부터 받은 구원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리며 힘으로 지배하고 억압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의 역사로 애굽이라는 힘으로부터 압제와 고통으로부터 비참한 종의 자리에서 해방이 되고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때에 모든 것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벗어 낫다는 말보다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욕심 많은 야곱이라는 조상의 혈통에 의해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 거룩한 피에 의해서 태어난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제는 애굽 적인 사고방식을 모두 벗어버리고 해방된 진정한 자유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매여있는 종에게 자유 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의 한 부부인 것을 기쁘게 포기하고 있습니다. 본래 나는 애굽에 종이었고 아무런 희망이 없던 노예였는데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 때문에 그 죽음에서 벗어나 지금도 그 은혜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매인 자유자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7년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재산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종을 놓아 보내지 않는다면 이자는 애굽에서는 벗어났어도 자기에게 매인 자요 돈이라는 자신의 재산권에 매여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종노릇을 하고있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안식년이 되면 주인이 종을 불러서 자신의 재산중의 한 부분인 종을 종의 자리에서 놓아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종이 주인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그 사랑에 감동되어 영원토록 주인의 사랑에 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주인의 종이 되고자 할 때에 주인은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주인의 종이 되었다는 표시로 송곳으로 귀를 뚫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때부터는 그는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됩니다. 하지만 과거의 종과는 다릅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드리고 주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받아드린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온 한이 쌓인 종이었지만
이제는 주인과 종의 사이가 돈이 개입된 주인과 종이 아니라 사랑이 개입된 관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말로서는 표현이 안 되는 사랑이기에 그냥 그분에게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쳐서 그 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자랑 되게 살고자 하는 것이 귀뚫려진 종의 심정이고 자세입니다.
과거에는 자기를 위해서 주인을 섬겼지만 이제는 주인을 위해서 주인을 섬기는 종이며
과거에는 내가 살기 위해서 주인을 섬겼지만 이제는 주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놓은 그러한 종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까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권한까지를 주인에게 되돌려 드린 그러한 종입니다.
이제는 종인 것 같으나 실상은 자유 자이고 주인의 사랑을 먹고 누리며 주인을 사랑해서 사는 그러한 종입니다. 그래서 귀뚫린 종에게는 자유와 사랑만 있습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사는 자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랑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는 새로운 것도 없고 귀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면 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말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흥과 발전을 말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도를 말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헌금을 말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말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법을 말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말할 때에 그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일을 위해서 종으로 사환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돈도 다 가고 인간의 이권도 인간의 감정도 교회라는 전통도 예배당의 화려함도 목사의 훌륭한 인격도 다 물러가고 그리스도만 달랑 남아서 자랑되어지고 그분께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그가 바울입니다.
(빌3:5-9)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합니다.
이러한 정신과 모습을 가지고 그리스도만 고집하고 존귀히 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집착해서 사는 그들이 진정한 교회다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는 종교성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를 말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