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었다. 조선 500년의 역사가 서구 열강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섬나라 일본의 조선을 향한 발걸음도 과거와는 다르게 더욱 도전적이었다. 단순히 이웃나라 조선이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러시아보다 먼저 차지해야 하는 위기하에 일본도 적극적으로 조선에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땅에도 이러한 기운으로 인해 조금씩 변화된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모악산 자락에서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살던 이내수씨도 이러한 역사의 물결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이웃나라라고는 왜놈이다, 명·청이다라고만 알고 자라던 어릴적과는 다른 세상을 맞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선 넓은 세계를 향하여 나가고 싶은 마음을 실행해야 했었다. 결심이 서자 길고 긴 항해의 뱃길에 몸을 맡기고 이국땅을 향한 기대를 안고 이내수씨는 이 땅을 떠나게 된다. 1907년경의 일이다.
전라도 전주군 귀동면 학천리(현재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하학)에 살던 이내수씨는 그렇게 도미하여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국땅의 맛은 향수정도로 달래면서 우선 자리를 잡아야 했다. 부지런히 일하면서 하나씩 적응해 갈 무렵,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예수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잘하면 부처님을 찾고, 조상의 기일이 되면 제사만을 알고 살아온 그에게 예수에 대한 말들은 생소하기만 했다. 조선을 떠나오면서 그의 몸은 또 다른 세상을 맞고 있는 사이 그의 마음은 더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어떤 강한 신앙의 맛에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배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인생에 돌입한 그는 떠나온 조선보다 고향에 남은 일가친척이 먼저 생각났다.
이해하지 못할 말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면서 도대체 바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만했던 그에게 고향에 있는 일가친척에게 자신이 믿는 예수를 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장 펜을 들었다. 이 편지는 고향을 지키고 있던 이흥원씨에게 전달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향을 떠나 이국으로 간 삼촌의 소식이 궁금했던 이흥원씨는 바다를 건너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여러 말속에서 예수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 이미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어 왔었지만 이 지방에서는 익숙하지 못했던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전주 서문밖교회에 선교사로 와 계시던 전위렴과 만나게 되면서 쉽게 풀리게 되었다. 복음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전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따랐던 삼촌이 바로 이 예수를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흥원씨는 곧 전위렴 선교사와 힘을 합쳐 우선 자택의 사랑에 교회를 설립하고 동네이름을 따 학천교회라 이름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회에 쉽게 사람이 모이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말을 타고 이 교회까지 매주 예배를 드리러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 무렵 같이 복음을 들었던 임권증씨와 안경윤씨는 같이 뜻을 모아 전주에 있는 서문밖교회에 나가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배우기로 작정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1910년경의 일이다. 이때는 이미 우리나라에도 평양을 중심으로 교회, 예수, 믿음, 구원이라는 말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어 처음 복음을 접하던 때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도 그 동안 이내수씨의 편지의 결실은 맺어진셈이고 이제 서로 새롭게 안 예수이야기를 쓰기에 두사람은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사내들끼리의 편지가 이렇게 정깊고 진지할 수 있을까. 비장함과 사랑의 끈끈함이 넘치는 편지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이제 시간은 흘러 교회생활이 이흥원씨를 비롯한 세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스스로 예배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도 복음을 처음 접하는 선교지에서는 선교사가 매번 직접 예배를 인도할 수 없음으로 지도자를 세워 우선 예배케 하고 선교사가 순회하며 신앙을 지도하는 경우를 우리는 듣는다. 이때도 우리가 복음을 처음 접하던 때인지라, 누군가 이 자리를 맡아 주어야 했다. 이들은 선교사와 논의하고 기도하기로 작정하게 된다.
복음이 학천리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학천교회가 정기적 예배와 말씀의 가르침이 있는 교회여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선교사의 허락을 얻어 임권증씨를 영수로 삼았다. 1913년경의 일이다. 이때부터 학천교회는 모름지기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나 하나 감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서로 힘을 합쳐 더욱 열심히 복음이 이 땅에 확장되기를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게 되었다. 농사철이나 농한기때나 이들이 만나는 곳엔 예수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이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이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그들은 몸으로 체험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한서린 노래만을 불러온 이 땅에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고, 그저 부자로 사는 게 인생의 전부이고 우선 배고픔을 면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었던 이 땅에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알려주는 곧 생에 신바람을 넣어주는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교인수는 날로 늘어나고 이흥원씨가 내놓아 세운 예배당은 자리가 비좁아 예배시간이면 북새통을 이루기 일쑤였다. 교회의 새로운 도약기에 이른 것을 판단한 이들은 결국 1917년경 보이열 선교사의 전도와 이흥원씨의 열심 전도의 결실을 확인하고, 교인수의 증가에 걸맞게 학천리(현 원기리) 752번지의 초가 삼간을 구입하여 교회에 봉헌하고 이를 개조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 세사람이 모여 시작한 교회는 많은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때 그러니까 1917년경 전영철씨가 하학리로 이사하여 살면서 본교회 영수로 시무하게 되었고, 그간 힘써 전도한 열매로 이흥원씨는 이흥옥씨를 믿게 하였다. 1920년경의 일이다. 신앙생활을 힘차게 해오던 1922년경 이흥옥씨는 학천교회에서 집사가 된다. 이제 예수를 안지 10여년만에 신앙에 있어 장년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어 1924년경부터 이흥옥씨는 영수의 일을 맡아 오다가, 1954년 가을 장로 임직을 받고 본 학천교회를 인도하기에 이른다.
시대는 바야흐로 모든 아픔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간 교회의 초창기에 불어닥친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교회의 성장엔 아픔이 거듭되었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새시대를 맞은 이들에게 민족동란인 6.25는 또다른 상처를 주게 된다. 교회의 아픔은 시대마다 다르다 하나 초대교회로부터 교회가 세워지는 곳엔 사탄의 무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안다. 학천교회도 이러한 것엔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자라나고 있었다.
1955년경 이흥옥장로의 장남 이주일씨가 노회의 시취를 받아 전도사가 되어 본 교회에 시무하게 되었다. 교인수가 증가하여 삼간 예배당을 20여평 건물의 예배당으로 증축했다. 그간 배고픔의 고통과 배반의 아픔을 겪었던 이흥옥씨로서는 자신의 자식을 주의 일을 하도록 가르치기로 작정하고 서문밖교회에서 개설하고 있는 성경학교에 보낸 것이다. 성경과 신학을 공부한 자식을 본교회의 전도사로 사역케 함으로써 한 가정이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꿈많던 이주일씨의 만주행, 일본행은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접하면서 하나씩 주의 길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 것이다. 전도사의 일을 감당하기로 하던 날 아침은 남은 일생을 주의 일에 헌신하기로 조용히 아내와 같이 다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리 교회가 있는 마을은 산골이다. 지금도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지만 당시엔 더욱 그랬다. 이러한 곳에서 하나 둘 씩 주를 고백한 여성들은 신여성이 되어 갔다. 조선의 풍이 오히려 많았던 이들 장년 여성들에게 교회에서의 가르침은 다른 세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도전을 주었다. 이미 많은 여성들로 채워진 학천교회에서도 1958년경 김순례씨가 권사로 취임하게된다. 권사로 세움받은이가 있으면서부터 교회의 심방과 기도의 열은 더욱 타올랐다. 우선 먹기 힘든 세상이라고 비관하고 좌절하고 이것만을 탈피하기 위한 삶에서 조용히 마음에서 일고 있는 신앙의 열기들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교회엔 이미 여집사님들이 많이 세워졌고 이들은 교회에서 가정에서 마을에서 신앙인의 당당하고 겸손한 일을 잘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민주정치의 소용돌이후라 모든 것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경제 성장만을 목표로한 정치형태와 일단 의식주해결이 각 가정마다 해결해야 할 첫문제가 되고, 이에 부응하여 일자리가 하나씩 늘어가고 있었다. 복음에 관한한 움츠리고 집안생활이 주로였던 아주머니들이 신앙을 접해가기 시작하자 달이 다르게 여성도가 늘어가고 있었다. 가정에서 신앙적 배경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부모들을 교육하면 그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자녀들은 자연 교회에 발걸음이 쉬었던 것이다. 교회에서는 유년주일학교가 활성되기 시작했다.
선교초기 주일학교의 영향이 씨뿌리기 였다면 가정에서 어머니가 교회에 나오고 그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을마다 유교적이고, 불교적이었던 가정들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하고 쉽게 수용되기 어려워 배타시 되었던 이러한 가정문화도 이들의 삶이 실제적으로 경건하고 검소하게 나타나자 바라보던 이웃들도 누굴 보아 믿어보자라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우리 교회에서도 이주일씨가 전도사직을 사면하고 장로 임직을 받게 되었다. 1962년 2월이었다. 이때 같이 집사안수받은 이는 이의용씨였다. 장년에 이르러 신앙을 접했던 이의용씨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극도로 엄격했었다. 교회는 이제 하나씩 그 위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른들로 시작한 교회는 그 자녀들에겐 더없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신세대 교육이 가정에서 적용되기는 아직 이른 시대였으므로 이것이 교회와 더불어 적용된 것은 이들의 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적어도 교회에서의 신세대식 사고와 판단은 부모와 같이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더없는 발전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는 정규중고등학교의 진학이 경제적 형편 등으로 어려웠던 때인지라, 경제적 부담도 크지 않고 신세대 교육의 장이기도 해서 서문밖교회에서 계속되던 계절성경학교나 야간 성경학교로 진학하는 이들이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간속에서도 교회에선 젊은이들의 건강한 만남과 교제가 있었다. 세상에서의 만남과 확실히 구별된 교제였었다. 젊은이들은 당시 타향은 서울로만 알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주변나들이에 나서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관광이라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견학이었으리라. 세상의 넓음을 몸소 느껴보는 것이었다. 군산앞바다, 섬진강 댐, 내장산, 칠보수력발전소, 위봉산성, 부안앞바다 등등이었다. 집에서 떠나 다른 곳을 구경한다는 것은 거의 일가친척에 의해 나가보는 것이 고작이었던 당시로서는 이러한 여행이 저들의 삶에 준 영향이란 막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전후세대의 발전은 이러한 바탕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1969년 8월 학천교회로 시작한 교회에 초대 당회장으로 정희찬 목사가 부임했다. 이때부터 20여년을 섬기게 된 정희찬목사는 교회의 제2의 성장기를 맞게 하였다. 신문화를 충분히 접했던 목사님은 교인들이 배워야 한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전통적으로 보고 배운 배경이 좁음을 알고 이때부터 교회는 봄, 가을이면 바깥 나들이를 하고 새로운 합리적 사고로 신앙을 접해가는 계기들을 제공하신 것이다. 온교회 교인들이 같이 나들이 할 때면 그때까지 처음해보는 일들이라 흥도 있었고, 전통적으로 배워 지켜온 윤리적 의식들이 기독신앙으로 새로운 양상의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학천교회를 인도하시던 정희찬목사는 면소재지로 교회를 옮겨갈 것을 결정하고, 1970년 3월 교회당을 항가리 209-1번지로 이축하고 노회의 허락을 얻어 구이중앙교회로 이름을 변경하게 이르렀다. 학천교회로 시작한 교회의 새로운 장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교회당 건축에 박차를 가하여, 드디어 1970년 5월 교회당 신축을 결정하고 정초식을 거행하고, 같은해 약 150만원을 들여 50여평의 건물을 완축하게 되었다. 온 교회 교인들이 힘을 합쳐 지은 이 교회는 낮에는 농사일에 빠쁜 사람들이 밤으로 모여 짓는 등 교회당 건축을 위한 몸드림에 최선을 다해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을 통하여 우리 자식들이 신앙을 배우고 실천해 간다는 자부심과 뿌듯함을 가지고 힘든줄도 모르고 열심히 땀흘린 대가로 교회당은 큰 어려움 없이 주안에서 완공에 이른 것이다. 당시만해도 신식 건물이 많이 없었던 시대였는지라 깨끗한 하얗게 지어진 브렄식 교회의 건물은 당연 돋보이기도 했다. 이 교회는 이후 30여년에 이르도록 수많은 신앙인의 산실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된다.
새로운 교회당에서의 교회의 위치는 이제 구이중앙교회만이 아니라 구이지역을 대표하는 교회이기에 충분했고 또 이를 감당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971년 4월 이의용씨가 장로로, 이상희, 김상옥씨가 집사로, 신복덕씨가 권사로 세움 받게 된다. 교회는 주의 군사로서의 한 진영을 이룬 듯 했다. 이미 오랜 연륜의 신자가 포진해 있었던 교회에서의 신앙의 자람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이때부턴 해마다 정초가 되면 부흥사경회가 열렸다. 교회에 들어왔으나 미처 복음을 구체적으로 접하지 못하고 교리에 묶여 있는 자들이나 새로운 교인을 받아들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사경회는 또 다른 면에서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우리라는 개념을 구이중앙교회에서 우리 나라로 세계로 넓혀갔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지금까지 스스로에 의해 매였던 것들에서 성경이 어떻게 살라하는가 고민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곤 했다. 부흥사경회는 한마디로 교회의 축제였다. 이때가 되면 벌써 달전부터 준비기도회에 들어가는가 하면 전도의 대상자에게 그때는 시간을 비워둘 것을 청하고 사귀어 가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기도회로 시작하는 부흥사경회는 말씀과 사귐과 나눔의 충실함이 돋보이는 기간이 되었다. 마치는 날이면 항상 아쉬움에 발걸음들이 흔들리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교회의 사택은 여전히 교회 교육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의 한켠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당 뒤편에 20여평의 양옥 사택을 건축하기로 하고 사택을 완공하니 이때가 1977년 9월의 일이었다. 지금이야 서양식 건물이 대부분이지만 당시만 해도 깨끗하게 지어진 사택은 그나마 좁게 사용하던 사택에서 옮겨졌다는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는 이미 새마을운동이 한차례 지나고 새마을운동이 왕성기에 이르렀다고 할까 시설에 있어서는 전통적 모습이 시멘트가 많이 사용되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사택은 이후 3대에 이르는 목사관으로 사용되게 된다.
사택이 완공되어 목사관이 옮겨지자 이 건물은 교육관으로서는 부족한 공간이었다. 교회에선 교육관과 전도관을 건축하기로 하고 역시 방향을 달리하여 건축에 들어갔다. 1979년 7월이었다. 이때는 교육관 시설이 주일학교마다 고충을 겪어온 각반교실에 초점을 두고 그간 유치부 주일학교와 유초등부 주일하교가 같이 예배드리던 것을 분리하여 예배드릴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여러 공간을 만들어 각반의 공부나 교제가 이루어졌고, 유치부 주일학교가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찬양대의 모임이 따로 가능하기에 이르렀다. 온교회 교우들의 땀의 수고였다.
1980년대의 국내 상황은 민주화 물결 그 자체였다. 그간의 나라 모습하고는 여러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모든 면에 있어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교회에서도 교인수가 늘어가면서 교회의 직분자가 새롭게 세워졌다. 1980년 7월엔 이상희씨가 장로로 장립되고, 이장희, 정인덕씨가 집사 안수, 서요지, 김점례, 임순례씨가 권사로 취임하고, 1981년 11월엔 정인덕씨가 장로로 장립되고, 이경승씨가 집사 안수, 최병준씨가 권사로 취임했으며, 1983년 1월엔 이얌순씨가 권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전반에는 이런 직분의 세움이 있었고, 1988년 5월엔 이장희, 이경승씨가 장로로 장립하고, 이병길, 이용군씨가 집사 안수, 황이순, 주성녀, 고차남, 장복금씨가 권사로 취임했다.
세움받은 이가 많았던 만큼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의 모습도 그만큼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교회의 모습은 젊음 그 자체였다. 교회의 새로운 직분자를 비롯 각 기관과 속회의 모습이 50년대생의 30대가 되던 시대인지라, 전후세대의 모습은 이전과 또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이 시대는 70년대 말부터 불어온 선교와 교육의 관심이 고조되었던 시대라 우리 교회에서도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갖고 많은 청년들이 합류하기도 했으며, 선교의 관심은 북한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가 주축이 되어 있던 북한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수련회가 강원도 정선에서 있었는데 전주에서부터 기차로 강원도땅에 까지 다녀오는 대역사가 이뤄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렇게 먼 거리로의 이동이 쉽지 않던 때였다. 이러한 불길은 이 땅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던 교회의 풍경들이었다.
교회의 수련회는 학생위주로 이루어졌으나 장년수련회 역시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학생수련회의 형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도원에서 하던 부흥회 같은 곳을 찾던 시기를 지나 독자적으로 학생들의 실생활에 적용이 가능한 수련회로의 변화였다. 소위 지교회 단독으로 수련회를 기획하고 시행하는 형태를 지니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모습과 집회형식의 모습이 각자 자기 모습 속에서 발전되어 갔지만 당시만해도 규모가 작은 교회에서의 이러한 계획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갔던 전라남도 압록에서의 수련회는 당시의 학생회원들 사이에는 가끔씩 회자되기도 하는 수련회였다. 장년수련회 역시 교회에서의 해마다 반복되는 사경회가 거의 전부였던 시기에 한주간을 택해 외부로 나가게 된 것도 역시 발전의 다른 면이라 할 것이다.
나들이(?)를 겸한 듯한 여름의 수련회는 장년들에게 있어 농한기에 말씀과 신앙의 다른 체험을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역시 농한기를 맞는 농촌에서 축제와 같은 사경회의 모습도 당시엔 가슴 벅찬 일이었다.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듯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던 사경회는 그 특성상 한 주제를 가지고 한주간동안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진행되는 것이어서 신앙에 있어 많은 체험과 유익을 주었던 것이다.
유초등부 주일학교의 여름성경학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름성경학교의 기억은 성탄절에 버금갈 정도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해마다 강사를 모시고 이뤄지는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남음직한 한 주간이 되었다. 대부분 어린이 교육에 관심이 있는 전도사나 신학생을 중심으로 한 강사와 한 주간의 시간을 기꺼이 드리고 아이들과 같이하는 교사들의 모습은 당시 문화적 발달이 미흡했던 상황에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신앙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체계적으로 배우는 시간들이었다.
교회의 연합은 엑스폴로 74 서울 여의도 대회이후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게 사실이다. 구이지역에서도 지역교회간 연합의 모습이 있었다. 1970년대의 모습이었다. 학생회에서는 매년 3월1일 공휴일을 꾀꼬리 찬송가 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구이지역의 교회 학생회를 중심으로 찬송가 경연대회를 열었다. 청소년기의 학생들에게는 많은 제약을 벗어나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억된다. 지금에야 여러 문화매체들이 개발되고 문명의 이기들이 있어 쉽게 이러한 문화를 접할 수 있지만 당시의 이러한 찬양대회는 학생들간 호기심과 어떤 용기의 매체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만해도 교회에서의 학생들의 만남이 쉽고 자주 있었다. 수험에 대한 시각차이였을까. 이후 몇 년간 이어오던 이 대회는 현재 수면중이다. 또한 교회간의 체육대회도 있었는데 이때만해도 우리지역에서 교회다니네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였었다. 여러 가지 종목을 두어 실시한 체육대회는 당시에 성황했던 학교의 운동회를 부럽게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지역교회간의 연합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교회의 신식화장실이 건축 된 것은 1983년 7월이었다. 화장실이 깨끗지 못했던 상태에서 각 가정마다 화장실이 개량되면서 교회에서도 수세식은 아니지만 변기가 있는 화장실을 짓게된 것이었다. 참으로 깨끗한 화장실이었다. 이때엔 주말이면 화장실을 깨끗이 해주는 봉사의 손길이 많이 있었다. 섬김의 도가 풍성했었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육기관의 변화는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인덕 장로에 의해 한국어린이전도협회가 전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을 때 교회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이 훈련에 참여함으로써 유초등부 주일학교에서부터 각 주일학교 교사가 이 훈련을 받음으로써 교사의 사명에 정면으로 도전받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시까지 해오던 주일학교의 형태가 한때나마 훈련과 교육중심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매주 어린이전도협회 프로그램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도 1985년에 일년을 결산하면서 '방주'라는 회지를 창간하여 학생회 활동에 대한 족적이 남기 시작하였고, 청년부에서는 뜻있는 젊은이들이 매주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에서의 교리적 부분을 공부하는 열의가 가득찼던 시기였다.
제자훈련 등으로 교회에서 성경공부와 훈련이 활발했던 당시의 교회상도 있었지만 어쨌든 1980년대 우리 교회의 모습도 교육과 훈련부분에 있어서 작은 돌풍으로 가득찬 시기였었다. 교회적으로도 열성적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선교나 교육단체를 통해 활발한 훈련과 교육에 임한 시기였다.
1990년에 들어오면서는 교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3월엔 그간 초대 당회장으로 오셔서 애써주셨던 정희찬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정희찬목사와 김정순전도사 사임하게 되었다. 초대 당회장이 사임함에 따라 다음 담임목사를 모시게 되었고, 2대 담임목사는 당시 전주팔복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시던 이승기 목사였다. 1990년 4월 이었다. 초대때와는 달리 40대이셨던 이승기목사는 교회에 젊음의 활기를 불어 넣고자 하였다. 이후 3년여 시무하시던 이승기 목사는 전주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면서 본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1993년 6월이었다.
초대때와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담임목사를 다시 청빙해야 하는 교회의 모습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의견들에 의해 청빙공고를 하고 공고에 따라 지원해주신 목사님에 대한 현지답사를 하기도 했던 3대 담임목사는 1993년 7월에 부안에서 목회하고 계시던 최병석 목사가 부임함으로써 이뤄졌다. 이때부터 교회의 모습은 21세기를 준비하는 체제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미 바깥세상도 21세기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먼저 새교회당을 건축할 것을 작정했다. 교회당 건축이 이때 처음 거론된 것은 아니었지만 구체적으로 교회당 건축에 대한 준비들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조직과 일군을 세우시고자 하시는 주의 뜻을 쫓아 1993년 11월엔 이석정, 최일웅, 장우철씨가 집사 안수를 최점례씨가 권사로 취임받기에 이른다. 몇 차례의 투표를 거쳐 새로운 체제로의 진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년에 이른 이석정 집사는 이후 1994년 12월에 집사직 은퇴하고, 1996년 1월엔 이주일장로가 원로장로로 추대되고 시무장로직을 은퇴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준비해오던 교회당 건축은 1996년 4월에 교회설립 90주년 기념으로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부지를 매입하게 된다.(항가리21-2, 240. 원기리 670-4) 이후 1997년 5월에 새교회당 총 470평 건축허가 받아 건축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쯤에도 교회의 사역자들의 변화는 있었다. 1996년 6월엔 백은정 전도사가 부임하고, 역시 정년실시에 따라 1997년 12월에 이상희 장로, 김점례권사가 은퇴하게 되고, 이듬해인 1998년 12월엔 이장희 장로가 은퇴하게 된다.
교회당은 건축이 시작된 후 사정에 의해 1998년 5월에 새로운 교회당 건축 접지에 있던 부지 510평(항가리214-3)을 추가 매입하고 건축은 계속되었고, 교회당 건축 완공때에 하고자 미뤄왔던 최병석목사위임, 장우철 장로장립, 이병우, 장시우 집사안수, 최남례, 이연순권사취임이 1999년 3월에 있었다. 이제 새로운 교회당도 완공이 눈앞에 있다. 1999년 11월에 입당을 예정하고 있다. 이렇게 한교회의 자라남을 보면서 이전의 역사보다 더 크게 쓰여지고 이전의 역사속의 신앙의 선배들에 이어 한교회의 또 다른 맡은이로서 이 시대를 짊어지고 나가는 우리 교회가 될 것이다.
첫댓글 옛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잘 정리하시길 기대하며 오래전의 것을 올려드립니다 혹이 문제가 있다면 싸이월드/gasan1 연락 주시면 수정해 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