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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담일기 (石潭日記)』 중 <조정 중신들에 대한 인물평가>
[해제]
『석담일기』는 율곡 이이(1536~1584)가 30세인 명종 20년 1565년부터 46세인 선조 14년 1582년까지 17년 동안 그 당시의 정사(政事)를 중심으로 국왕의 행례(行禮), 신하들의 진퇴 등 제반 시정을 일기체로 기록하고, 다시 자신의 의견을 첨술(添術)하여 놓은 책이다.
이 『석담일기』는 율곡에 대한 연구는 물론 그 당시 국왕의 정치, 백관(百官)들의 치적 등에 대한 단편적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당신의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비롯한 여러 중신(重臣)들의 정사 집행을 소상하게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율곡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면서 겪은 생생한 기록이므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번에 여기 편집한 내용은, 고전국역총서 52 『대동야승』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전종합DB] 중에서 『석담일기』에 들어있는 수많은 가치 있는 자료 중에서 당시를 살아간 많은 인물들에 대한 율곡의 ‘인물평가’가 든 첨술(添術)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율곡은 매우 예리한 관찰력을 갖고 각 인물들의 다양한 면을 포착하여 서술하고 있다. 물론 율곡의 개인적인 관점이고 호불호이지만 ‘인물평가’을 통해 그 시대의 성격과 특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율곡은 영민하면서도 날카로운 성격의 인물이었다.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이었다. 호평한 인물들보다는 추평 내지 악평을 한 인물들이 훨씬 더 많다. 율곡 자신이 자부심과 긍지가 강했기 때문인지 이황, 박순, 정철, 성혼 등 학문으로 존경하거나 사교가 친근한 인물들은 문장 전부가 호평이지만 엔간한 인물들은 장점과 단점이 반반이다.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인물들에 대한 비판과 혹평이 신랄하다.
특히 선조 임금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반반으로 나타나며 심적 갈등과 좌절을 느낀 글이 많다. 선조가 하는 말을 살펴보면 우유부단하고 어두운 성품이었다. 율곡이 경연에서 열변을 토하며 국왕의 도리를 말하는 데도 선조는 물음도, 대답도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선조는 학문에 대한 진정성이 미흡하여 부담스러워한다. 잘 가르치고 계도하여 성군지치를 이루는 게 사대부들이 출사하는 궁극의 목적이요 보람이지만, 임금의 자질과 성품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헛공사이기 십상이다.
[인물평가]
○ 8월. 윤원형의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방축하였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나 사람됨이 음흉ㆍ독살스럽고 재리를 탐했다. 11월. 윤원형이 죽었다. 윤원형이 실직하자 백성들은 거리에 모여 욕질하며 돌과 기와조각을 던지는 등 심지어 쏘아 죽이려 하는 자까지 있었다.
○ 윤춘년은 윤원형의 족제(族弟)로 원형에게 아부하여, 윤원로를 벌하자고 청하여 이 일을 계기로 출세하여 급속히 여러 청환현직(淸宦顯職)을 거쳐 올라, 함부로 방자히 놀고 자신을 가졌었다. 부박한 무리들이 그를 따라 학문을 배우려 하는 자가 많아지자, 윤춘년은 망령스럽게 부로 잘난 체하여 사도(師道)로 자처하고, 득도(得道)하였다고 자칭했으나, 그 논설이란 것이 모두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를 주어 모은 것이요, 실은 아무런 주견이 없는 것이어서 식자들이 그 망령됨을 비웃었다. 그러나 관직 생활만은 다소 청렴하였으므로 원한을 적게 사서, 그 직위만 파면한 데 그친 것이다.
○ 심통원은 본시 명망(名望)이 없고 외척(外戚)으로 입신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니, 오로지 뇌물만을 일삼았으며, 사실 윤원형과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 이황(李滉)은 어릴 때부터 도(道)를 즐기어, 만년에는 더욱 힘써서 학문이 심히 정밀했으며,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예안(禮安)에 물러나 있으며 나오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쉬이하니, 당시 사람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러보았다.
○ 정월. 개성부(開城府) 유생들이 송악산(松獄山)의 음사(陰祀 무당이 귀신을 모신 집)를 불질렀다. 왕대비(王大妃)가 내관(內官)을 시켜 중지시켰으나, 유생들이 듣지 않았다. 임금이 금부(禁府)에 명령하여 유생들을 잡아와 그 죄를 다스리려 하니, 조정 신하들이 간하고 심지어는 학관(學舘)의 유생들까지 상소하여 간쟁(諫爭)하게 되자 할 수 없이 명령하여 풀어 주었다. 당초에 민속(民俗)이 귀신을 좋아하여 송악산에다 음사를 만들고 대왕사(大王祠)라 이름하자, 이 풍조가 온 나라에 세차게 번져 정성껏 하고, 심지어 쓸데없는 지출로 낭비하고, 남녀가 혼처(混處)하여 주문이 많았다. 그래서 유생들이 분하게 여겨 음사를 불지르고 그 상(像)을 부순 것이었는데 통쾌하게 여겼다.
○ 한윤명은 젊은 나이로 학문에 뜻을 두고, 행동은 규범을 준수하여 매우 훌륭한 명예가 있었다. 나중에 벼슬길에 나아가 비록 덕(德)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천성이 순미(純美)하고 매사에 경근(敬謹)하여 근세에는 드문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림(士林)이 그의 조사(早死)를 애석하게 여겼다.
○ 이준경은 시세의 변천에 맞추어 세상에 용납되는 처세 태도를 취했으나, 마음속으로 그래도 선한 사람들을 두호할 마음이 있었기에 당시의 여론이 그를 소중히 여긴 것이다.
○ 임금께서는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아름답고 외모가 청수하였다. 대행왕(大行王 국왕(國王)이 승하하고 아직 시호(諡號)가 정해지기 전의 호칭. 여기선 명종을 가리킴)은 사자(嗣子)가 없어, 속으로 가만히 정해놓고 불러서 볼 때마다, “복있다 덕흥(德興)은.” 하고, 찬탄하여 마지않으셨다. 을축년 가을, 대행왕의 병환이 매우 위독하자, 대신(大臣)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니, 왕비께서 왕명(王命)으로 봉서(封書) 한 통을 대신들에게 내려 비밀리 왕위 계승자를 내정하니, 곧 금상(今上)이었다. 머지않아 대행왕의 병환이 나으시니, 세자 세우자는 의논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 쏟기를 마지않으시고 자주 불러서 학업을 시험하시고 은사(恩賜)가 연이어 끊이지 않았으니 다만 세자라는 명호(名號)만 없을 뿐이었다. 별도로 사부(師傅)를 뽑아 가르치니, 한윤명(韓胤明)ㆍ정지연(鄭芝衍)이 뽑혔었다. 임금께서는 독서가 심히 정밀하시어 의외의 질문으로 사부들이 미처 답하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이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다.
○ 백인걸(白仁傑)을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삼았다. 백인걸이 오래 버려져 있다가 다시 등용되니 논의를 강개(慷慨)히 하고 늙었다고 해서 스스로 후퇴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중히 여기었다.
○ 심통원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나약하며 행실이 방정하지 못해 처사가 흐리멍텅한데다 탐욕이 한이 없어 뇌물이 폭주(輻輳)하여 집이 마치 저자와 같았다. 큰아들 유(鑐)와 막내아들 화(鏵)가 이익만을 일삼아 남의 종과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이 도적과 다름이 없었다. 동복(童僕)들도 이것을 본받아 백성들을 해롭게 하였다.
○ 노수신은 문학과 행신으로 일찍부터 명성이 두터웠고, 장원(壯元)에 뽑혀 청환요직(淸宦要職)을 역임하였다. 을사년의 간당(奸黨)들이 그 명망을 시기하여 먼 곳으로 귀양보내었다. 수신은 귀양살이하면서 학문이 더욱 정심하게 되었다.
○ 유희춘은 널리 책을 읽고 잘 기억했으며 역시 당시에 명예가 있었다.
○ 윤춘년(尹春年)이 죽었다. 춘년은 사람됨이 경망하며 그 학문이 심히 잡박하여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들을 주어 모아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도(道)를 얻었다 말하고 또 음률(音律)에 매우 밝다 하였다. 학생(學生)들을 모아 강학하면서 망령되게 사도(師道)로 자처하니 부박(浮薄)하고 명예를 구하는 자들이 그를 따라 놀았다. 논의(論議)가 활발하고 걸핏하면 성현(聖賢)을 끌어다 말하였는데 그의 말인즉, “성인이란 별것 인가. 단지 천심(天心)과 합하는 사람일 뿐이다.” 하였다. 시(是)와 비(非), 의(義)와 이(利)는 따지지 않고 다만 일을 성취시키는 것만 가지고 천심과 합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김시습(金時習)은 동방의 공자(孔子)다. 공자를 못 보면 열경(悅卿 김시습(金時習)의 자(字))을 보면 되는 것이다.” 했다. 그가 김시습에게서 취하는 것은 모두 속설로 전하는 괴상한 사적(事跡)들로서 사실은 김시습의 일도 아니었다. 승(僧) 보우(普雨)가 자신이 도(道)를 깨달았다고 말하더니 춘년을 보고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니 춘년이 대단히 칭찬하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우는 선학(禪學)으로 들어가서 마음을 깨달아 그칠 데를 알기는[知止] 하였으나, 공정(功程)이 아직 정(定)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했다. 그의 허황하고 망령됨이 모두 이런 따위였다. 춘년이 주색(酒色)을 좋아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그 문도들이 술만 먹고 방탕한 짓을 하는 자들도 춘년을 보며는 반드시 술을 끊고 색(色)을 물리쳤노라고 스스로 말하곤 해서 서로들 속이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다만 춘년이 좀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간혹 그를 취하는 이도 있었다. 지위가 육경(六卿)에 이르러 개혁한 것이 많아 스스로 도를 행한다 했다. 윤원형이 패하자 춘년이 면직당하고 고향으로 방축되어 있다가 울화가 난 중에 찬 것을 마시다 병이 나서 죽었다.
○ 심전(沈銓)이 죄를 지어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심전은 심통원(沈通源)의 조카로 탐욕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으며, 외척의 세력으로 영화롭고 중요한 직을 지내고 큰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 이익을 긁어 모으기를 일삼았다. 팔을 걷고 욕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 민기는 젊어서 유자(儒者)로서의 명성이 있더니, 벼슬한 뒤에는 사세에 따라 부침(浮沈)하여 세상에 용납되기만을 취하여 별로 밝게 정사를 한 것이 없고 다만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써 당대에 존중을 받았을 뿐이다.
○ 김명윤(金明胤)이 죄를 지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명윤은 젊을 때에 선행으로 이름이 났으므로 현량과(賢良科)로 발탁되었다. 천거과(薦擧科 현량과를 가리킴)가 폐지되어버리자 다시 명윤은 유건(儒巾)을 쓰고 과장(科場)에 들어가 급제했으니, 시비곡직은 돌아보지 않고 단지 출세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을사사화 때에는, 권간(權奸)들의 뜻을 받들어, 봉성군(鳳城君) 완(玩)이 윤임(尹任)에 의해 추대되었다는 등 무고하고, 계림군(桂林君) 유(瑠)는 왕위를 엿본다는 등 무고하였다. 이리하여 온 천하에 큰 화가 일어나고 사림(士林)이 일망타진된 것이다. 명종 말년에 공정한 의논이 다시 일고 뭇 간악한 자들의 세력이 쇠퇴되자, 명윤은 경연(經筵)에서, “을사의 여당(餘黨)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사오니 조금이나마 설원(雪冤)해 주어 인심을 위로하십시오.” 하고 아뢰는가 하면, 또 조식(曹植)ㆍ이항(李恒) 등이 소명(召命)을 받았을 때에 김명윤은 바르고 좋은 사람들[善類]에게 아첨하려 하여 명종께 아뢰기를, “이런 사람들에게는 의당 대간(臺諫)으로 임금님을 시종(侍從)하는 직임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는 잔 농단(壠斷 이익을 제 혼자만 차지함)의 기술이 늙어갈수록 더욱 교묘하였다. 사림이 분개하고 미워하더니, 이에 이르러 관작을 삭탈해 버렸으니 오히려 그 목숨을 보전하게 된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 조광조의 자(字)는 효직(孝直)이니, 젊을 때에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다. 자질이 매우 아름답고 지조가 견고 확실하였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道)가 미미해지는 것을 보고 분발하여 도(道)를 행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하고 행동을 법도에 맞도록 하며 팔짱 끼고 꿇어앉아 말도 꼭 하여야 할 때만 하였다. 속류(俗流)들이 웃고 손가락질하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 이언적(李彦迪)은 박학하며 글을 잘했고,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성리학서(性理學書)를 즐겨 보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몸가짐을 장중히 하고 입에서는 못 쓸 말이 없었다. 저술을 많이 하였으며 깊이 정미한 경지에까지 나아갔으니 역시 도학군자(道學君子)로 추존하였다. 다만 경세제민의 큰 재질과 입조(立朝)의 큰 절개는 없었다.
○ 강사필은 본래 재주도 덕망도 없었는데, 그릇되게 시속 무리들의 추앙을 받아 사헌부 사간원을 모두 거쳐서, 벼슬길에 나온 지 10년도 못 되어 이미 승지(承旨)로 승진하였다. 사람됨이 우매하고 지조가 없으며, 술만 좋아할 뿐인데, 망령되게 당로(當路) 요직을 바라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크게 실망하고는 앙앙(怏怏)히 불만을 털어 놓으며 직사(職事)는 다스리지 않고 술에 방종하여 체면을 못 차리니 공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 우의정 민기(閔箕)가 죽었다. 민기는 비록 당시의 공론(公論)이 그를 칭허(稱許)하였으나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며, 볼 만한 행위는 없었다. 정승 자리에 오르자 외면으로는 올바른 사람들을 도우는 듯하였으나 내면으로는 사실 남의 눈치만 보았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현명한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 4월. 홍섬(洪暹)이 우의정이 되었다. 홍섬은 문학으로는 이름이 났으나 지조는 없으며 몸을 사려 녹봉이나 보전할 따름이다.
○ 5월. 평안도 절도사 김수문(金秀文)이 서해평(西海坪)의 호인(胡人)을 습격하여 그 부락을 불살라버렸다. 서해평은 원래 우리 땅인데 너무 멀어서 지킬 수 없었으나 호인들이 와서 살아, 점점 불어날까 우려하여 가끔 군사를 이끌고 가 몰아내었으며 순종하지 않으면 격퇴시켰다. 토지가 비옥하여 채소와 곡식이 잘되므로 호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살아, 몰아내면 다시 들어오곤 하여 그들을 끊을 수가 없었다. 강계(江界)에서 들어가는 길이 매우 좁아서 겨우 한 발[足]밖에 못 붙일 정도이고, 위로는 절벽이 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으니, 이름을 허공교(虛空橋)라 한다. 을축년에 김덕룡(金德龍)이 절도사가 되어, 우후(虞侯)ㆍ봉흔(奉昕) 등을 보내어 호인의 유무를 엿보아 기회를 타서 쫓아 잡도록 하였더니, 호인들이 미리 낌새를 눈치 채고 허공교에서 기다리다 돌을 내리던지고 북을 치며 떠들어대니, 아군이 놀라 흩어져 자못 국위를 손상시켰다. 그래서 김덕룡은 이 죄로 파면되고, 조정에선 그 치욕을 씻으려고 김수문을 절도사로 보낸 것이다. 수문은 노련한 장수로 위망(威望)이 있었다. 수문은 적을 격멸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차려 여러 장수로 분담을 시켜 밤에 가만히 와서 호인들을 불의에 엄습하기로 하였다. 새벽이 채 못 되어 서해평에 도착하여 장차 사면으로 합공(合攻)하여 아주 섬멸해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위장(衛將) 강계 부사(江界府使) 장필무(張弼武)가 성질이 조급하여 미처 에워싸기 전에 느닷없이 나팔을 불고 진군하였다. 호인이 알고는 고려적(高麗賊)이 왔다고 고함을 질러 장정들은 어둠을 타고 많이 도망해 버렸다. 아군이 그 촌락을 모두 불지르니 노유(老幼)와 여자들은 다 죽었다. 수문이 크게 좋아하며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그 공을 가상하여 수문의 위계(位階)를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려주었다. 그 뒤에 수문은 호인의 장정들이 모두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는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등창이 나서 죽었다.
○ 백인걸(白仁傑)은 지기(志氣)는 뛰어났으나 학술은 엉성하였으며 과감한 직언을 하기 좋아하였으나 역시 일에 합당하지는 못하였다.
○ 임금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는 매우 영명(英明)하시어 온 나라가 성덕(聖德)의 성취를 바랐더니 얼마 되지 않아 유속(流俗)의 언설이 날로 그 앞에서 떠들어져 임금님의 생각도 이미 유속에 젖었던 것이다. 이황이 소명(召命)으로 서울에 오자, 총애하고 공경하기는 하였으나 허심탄회하게 학문에 종사하려는 뜻은 없으셨다. 임금께서는 답만 좋게 하실 뿐, 실행하지 않으셨다. 임금님께서 이미 고도(古道)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대신 역시 식견과 도량이 없으니 현자(賢者)가 조정에 서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 이준경은 수상(首相) 자리에 있으면서도 임금을 도(道)에 인도하지 못하고 널리 준걸(俊傑)들을 불러들이지도 못하고서 빳빳하게 자기만 잘난체하여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다. 다만 근세의 규칙만 준수하려 하여 유자의 논의를 막아 버렸으니 구신(具臣 자리만 차지하여 머릿수만 채우고 있는 신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 기대승으로 말하면 재주는 호매(豪邁)하나 기질은 엉성하여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자신(自信)은 아주 높아 선비들을 경시하며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미워하고 같은 사람은 좋아하니, 만약 임금의 뜻을 얻게 된다면 그 집요(執拗)의 병통으로 인하여 나라를 그르칠 것이다. 이 문순(李文純) 같은 현명함을 가지고서도 그 추천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김개(金鎧)가 죄를 지어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쫓아냈다. 김개는 구신(舊臣)으로서 몸가짐과 벼슬살이에는 다소 청렴 간정(簡貞)하다는 평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강팍스럽고 자신만 믿고서는 도학자(道學者)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유속(流俗)과 다른 사람만 보면 아주 미워하였다. 이황(李滉)이 물러가니 김개가 불평이 있어 누구에게 말하기를, “경호(景浩 이황의 자)는 이번 길에 소득이 적지 않았다. 잠깐 서울에 왔다가 일품직첩(一品職牒)을 가지게 되었고, 돌아가선 향리에 대한 영광이 되니 어찌 만족하지 아니하랴.” 하였다.
○ 윤월(閏月). 이조 판서 홍담(洪曇)이 면직되었다. 홍담은 조정에 나와 청백하고 간정(簡靜)하다는 칭찬은 있었으나 다만 학문있는 선비를 미워하였다. 그는 누구에게 말하기를, “진유(眞儒)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오겠는가. 지금 학문을 한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가짜다. 만일 진유가 있다면 내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하지 어찌 감히 흠을 잡겠는가.” 하였다.
○ 7월. 이조 판서 박충원(朴忠元)이 사임하다. 박충원은 원래 재주와 행실이 없고 그럭저럭 처세하여 육경(六卿)에까지 이르렀다. 전장(銓長)을 배수하자 공론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정철(鄭澈)ㆍ신응시(辛應時)ㆍ오건(吳健)이 모여 이야기하다가 조보(朝報)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전장에 합당한가.” 하였다. 어떤 객군이 이 말을 듣고 대사헌 백인걸(白仁傑)에게 말하였다. 백인걸이 그의 조카 백유온(白惟溫)에게 말하기를, “정철ㆍ신응시가 나더러 충원을 논박하라 하나, 내가 아직 참는다.” 하였다. 유온이 이 말을 충원에게 누설시키니 충원이 스스로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함을 알고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 박순은 청렴개결하며 지조가 있었다. 소시에 서경덕(徐敬德)을 스승으로 섬겨 그를 매우 존앙(尊仰)하였으며, 조정에 서서는 항상 나랏일을 근심하였다. 이때 올바른 사람들의 종주(宗主)가 되어 항상 명사(名士)를 끌어 올리는 것으로 일을 삼았고, 유속(流俗)에 대해서는 본 체도 하지 않았으니 대신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 홍문관 교리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사직을 원하니, 후하게 답하고 허락하시지 않았다. 이이가 스스로 학문이 아직 나아가지 못해서 정치에 종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에도 여러 번 요직을 사퇴하기를 원했다. 이때에 와선 외조모(外祖母)가 양육(養育)해 준 은혜가 있는데, 강릉(江陵)에 살며 늙고 병들었으나 아들이 없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가서 봉양할 것과 그리고 학문이 향상된 뒤에 조정에 돌아올 것을 진정했으나 임금께서는, “몸이 조정에 있더라도, 또한 내왕하며 보살펴 드릴 수 있을 터인데, 하필 해직(解職)하여야만 하는가?” 하시고는, 이조(吏曹)에 명령하시기를, “조모를 내왕하며 살펴보는 것이 법례에는 없으나 교리(校理) 이이가 특별히 내왕하며 보살피게 함이 좋겠다.” 하였다. 이이가 특은(特恩)에 감복하여 나와 일을 보았다.
○ 임금께서는 신하들의 말에 일체 답하지 않으셨다.
○ 9월. 이이가 진강(進講)할 때마다 학문하는 것과 정치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렸으나 임금께서는 한마디의 답도 없으셨다. 임금께서 답하시기를, “수양을 쌓아 덕행(德行)이 된 뒤에라야 이것을 사업에 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덕행이 없이 사업(事業)을 하겠는가. 그리고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정치도 점차적으로 행할 것이니 갑자기 회복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니냐?” 하였다.
○ 임금께서 즉위한 지 3년이 되어도 정치를 잘할 성의가 없으시고, 신하들은 모두 인습(因習)에 젖어 도학(道學)은 땅에 떨어지고, 인심은 이익을 추구하고 간사한 사람들은 틈만 엿보고 조정에는 직언(直言)이 드물어 기강은 떨어지고, 사치는 도를 넘어 국용이 고갈되고, 현사(賢士)는 퇴축(退縮)하고 민폐(民弊)는 날로 깊어지며 배필을 정(定)할 곳이 반드시 어진 집안이 될지 알 수 없으므로, 옥당(玉堂)의 상소가 이러하였던 것이다.
○ 3년, 봄 정월. 이조 판서 박순(朴淳)이 병으로 사직하고 이탁(李鐸)이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탁의 명망이 박순보다 부족하나 선비를 사랑하고 국량(局量)이 있어서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으로 있게 되자 공도(公道)를 펴는 것을 힘썼고, 정사하는 것이 박순보다 나았다.
○ 권철과 홍섬은 본래 용렬한 재질로 직계(職階)의 순서로 정승 자리에 이르렀고, 이준경만은 인망이 다소 있었으나 다만 재질과 견식이 부족하고 성질이 거만하여 선비들에게 몸을 굽히고 말을 들어줄 아량이 없었는데도 재해가 절박하고 인심이 뒤숭숭한 때를 당하여도 건의하고 아뢰는 말이 별로 없으니 선비들의 여론이 그를 그르게 여기자 이준경 역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신진(新進) 선비들과 화협(和協)하지 못하였다.
○ 기대승(奇大升)은 재기(才氣)가 남음이 있고 일을 의논하는 데 과감하고도 빨라, 이준경과 여러 가지 면에서 의견이 맞지 않았다. 기대승이 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선비들이 애석해 하는 이가 많았다.
○ 박점은 집에 있으면서 효도와 우애로 이름났었다. 박점은 재지가 부족하고 학술도 없으면서, 항상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하며, 착한 선비가 요직에 오르지 못하는 말을 들으면 꼭 당로자(當路者)에게 천거하려 하였으니, 식자들은 그 어리석음을 민망하게 생각하였다.
○ 12월 신축(辛丑)일. 숭정대부 판 중추부사 이황(李滉)이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자(字)는 경호(景浩)요,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 옥과 같았다. 젊을 적에 과거로 발신(發身)하였으나 나중에는 성리학에 뜻을 두어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그 명성를 꺼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 이황이 권간(權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조정에 설 마음이 없어 벼슬을 시킬 때마다 사직하고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명종(明宗)은 그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벼슬을 사양함을 가상하게 여겨 작계(爵階)를 여러 급 올려 자헌(資憲 정2품)까지 되었다. 이황은 예안(禮安)의 퇴계촌(退溪村)에 살면서 퇴계(退溪)라 호(號)하고 의식을 겨우 이어갔으며 담박한 것을 즐겼고, 세리와 화려한 것은 뜬구름같이 보았다. 말련에 도산(陶山)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정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탄식[招賢不至歎]’으로 시제(詩題)를 내어 근신(近臣)을 시켜 시를 짓게 하고 화공(畫工)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그것을 볼 만큼 그 경모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이황의 학문은 문(文)으로 인하여 도(道)로 들어갔고,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훈(訓)을 준수하고 여러 가지 학설의 이동(異同)을 이리저리 통하였으나 모두 주자의 학설에 절충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가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경전 밖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끔 수석(水石) 사이에 산책하며, 성정(性情)대로 시(詩)를 읊으며 한가한 흥을 풀었다. 배우는 이들이 물으면 아는 대로 다 말해 주었으나 제자(弟子)를 모아 선생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평소에 긍지를 가지려 애쓰지 않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으나 세상에 나섬과 들어감, 나아옴과 물러남, 사양함과 받음, 취함과 줌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남들이 선사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면 받지 아니하였다. 한성(漢城)에 우거해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어 두어 가지가 담을 넘어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니,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하여 손수 주워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그 청렴하고 깨끗한 점에는 더할 것이 없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아주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바라, 사론(士論)이 한결같이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임금도 이황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이황은 스스로 자기 재지(才智)가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말세에 유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는 터이라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도산(陶山)으로 간 뒤에는 당시 정사를 말하지 않았으나, 여론이 다시 나오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조야가 애통해 하고 부고가 대궐에 이르자 임금도 매우 슬퍼하고서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1등의 예(例)로 장사하라 명하였다. 이황의 아들 준(寯)이 유언에 따라 예장(禮葬)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태학(太學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이 제전(祭奠)과 제문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이황은 특별한 저서는 없으나, 그 논의에 있어서 성현의 교훈을 발휘ㆍ선양한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한다. 중종 말년에 화담 처사(花潭處士) 서경덕(徐敬德)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 이론에 기(氣)를 이(理)라고 인정한 것이 많았다. 이황이 이것을 병통이라 생각하여 글을 지어 변박(辨駁)하니, 그 논지가 밝고 통달하여 배우는 자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이황은 당세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趙光祖)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局量)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또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 이준경은 정승이 되어 일을 진정시키기만 힘쓰고 큰 일을 하지는 못하여 사림이 흔히 부족하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청덕(淸德)이 있어 문에는 뇌물 들어온 적이 없었으므로 현명한 정승이라 하는 이도 있었다.
○ 오겸은 조정에 있으면서 밖으로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듯하였으나 안으로는 순실(淳實)함이 부족하였다. 오래도록 찬성(贊成)으로 있었으나 정승이 되지 못했다. 사류(士類)가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알고 벼슬을 내어놓고 나주(羅州)로 돌아가 있다가 이때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인망이 없다고 논박하여, 이 때문에 사면하였다.
○ 이탁(李鐸)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탁은 학술이 부족하였으나 순후(淳厚)하며, 기국(器局)과 풍도가 있었고, 또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도량이 있었기 때문에 물망이 그에게 돌아갔다. 단지 높이 뛰어난 위풍과 절개가 없어 어려울 때를 당하면 동요됨을 면치 못하였다. 정승 자리에 올라서 몸을 근신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 6월. 박충원(朴忠元)을 우찬성(右贊成)으로 삼았으나 곧 파면되었다. 박충원은 범용하고 비루한 자질로 요리조리 작위를 취하여 청반(淸班)ㆍ현직(顯職)을 모두 지나니 사람들이 비웃는 이가 많았다. 젊어서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허항(許沆)이 대사간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에게 붙어서 세력이 불꽃 같고 사류(士類)를 잔학하게 해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박충원은 본시 구수담(具壽聃)과 친하였다. 어느 날 그를 찾아가 보니, 수담이 말하기를, “근일에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박과 공격이 너무 과격하니, 어찌 화기를 손상시키지 않겠는가.” 하니, 박충원이 이 말을 옳다 생각하고 다른 날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근일 논박하는 장소(章疏)가 너무 과격하여 식자들이 옳지 않다 하더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허항(許沆)이, “식자가 누군가.” 하고 물었다. 박충원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니, 허항이 말하기를, “정언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역시 악인들을 편드는 것이다.” 하니, 박충원이 겁을 먹고 구수담의 말이라 해버렸다. 허항이 말하기를, “수담은 죄인이다. 따라서 정언이 그를 가서 본 것도 죄가 된다. 대궐에 나아가 자수하지 않으면 탄핵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니, 박충원이 더욱 겁에 질려 대궐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스스로 탄핵하니 구수담은 이 일 때문에 멀리 귀양가고 사림은 충원이 친구를 저버렸다고 떠들썩하여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찬성이 되니 양사에서 상소하여 논박한 지 여러 날 만에 파면시키고 말았다.
○ 금상(今上) 5년 정월에 처사(處士) 조식(曹植)이 세상을 떠났다는데 조식의 자(字)는 건중(健仲)이다. 그 성품이 청렴하고 꿋꿋하였으며 젊었을 적에 과거에 힘썼으나 그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그가 한성(漢城)에서 성수침(成守琛)을 찾으니 수침은 백악봉(白岳峯) 아래에 집을 짓고 세상일을 사절하고 살았다. 그는 이것을 보고 즐겨하여 마침내 시골로 돌아가 벼슬하지 아니하고 지리산 아래에 살면서 스스로 남명(南溟)이라 호했다. 그는 주고받는 것을 반드시 의(義)로써 하여 구차히 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대하여 허여함이 적었다. 늘 방에 꿇어앉아서 사색하였는데 졸음이 오면 칼을 어루만지며 졸음을 깨웠다. 칼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명(銘)을 써 두었다. “안으로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끊는 것은 의(義)이다.” 한가로이 거처함이 오래되니, 욕심이 모두 씻어지고 깎아세운 듯한 기상이 있게 되었다. 남이 잘한 것을 들으면 좋아하고, 악한 것을 보면 미워하여 불선한 마을 사람들은 본 체도 아니하니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뵙자고 들지 못하고 다만 학도(學徒)들만이 그를 따랐는데 모두 심복하였다. 명종 때에 성수침과 함께 불리어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됐다. 이때 권간(權奸 윤원형(尹元衡)을 가리킴)이 권세를 잡고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미혹시켜 사림(士林)들의 의기를 꺾었으므로 공론을 칭탁하여 유일(遺逸 산림처사)을 천거해 쓴다고 하였으나 허명무실한 뿐이었다. 그래서 조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폐단을 말하였는데, 그 글에는 “자전(慈殿)께서 사리깊고 착실하시나 단지 심궁(深宮)의 한 과부에 불과하시고 전하(殿下)께서는 나이가 어리시매 선왕의 한 아들에 불과하시다.”라든가 하고, 또, “노래는 처량하고 의복은 희니 망할 징조가 드러났다.”라든가 하는 말이 있었다. 명종은 욕이 대비께 미쳤다 하여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래도 산림처사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명종 말년에 경서에 밝고 몸이 수양된 선비를 천거하라 하여 조식은 이항(李恒)ㆍ성운(成運)ㆍ한수(韓脩) 등과 같이 천거받아, 육품관에 임명되어, 임금이 불러보며 정치할 방침을 물었으나 조식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항이 임천 군수(林川郡守)가 되어 부임하는 것을 보고, 조식이 조롱하기를 이조대(李措大 조대는 청빈한 선비를 가리킴)가 하루아침에 군수가 되니, 장차 화(禍)의 발단이 아니된다고 할 수 있으랴.” 하였다.
조식이 시골로 돌아오니 청명한 명성이 더욱 퍼졌다. 금상(今上 선조를 가리킴) 때에도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아니하고 다만 정치의 잘잘못만 상소할 뿐이었다.
죽을 때에 그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처사(處士)라 하면 옳지만 만일 유자(儒者)로 지목한다면 실상이 아니다.” 하였다. 문하생이 유익한 말을 청하니, 식은 “경(敬)ㆍ의(義)ㆍ두 자(字)는 해ㆍ달과 같아서 그 중 하나도 폐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그의 첩이 울면서 들어와 영결하기를 청하나 허락을 아니하고 졸하였다. 조정에 부음이 들리니 대간(臺諫)과 조신(朝臣)들이 시호(諡號)를 내려 포장(褒獎)하자 하였으나 임금이 전례가 없다고 허락을 아니하고 부의(賻儀)만 하사하였다. 문인 가운데 개결한 선비가 많았는데, 김우옹(金宇顒)ㆍ정인홍(鄭仁弘)ㆍ정구(鄭逑)가 가장 드러난 사람이었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일대(一代)의 일민(逸民 산림처사)이다. 다만 그의 논저(論著)를 보면 학문에 실제로 체득한 주견이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경세제민의 방책은 못 되었다. 이로 보아 비록 그가 세상에 나와 일을 했다 하더라도 능히 치도(治道)를 성취시켰으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그를 추앙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근대(近代)의 처사라고 하는 이들로서 시종 절개를 보전하여 천길 벼랑 같은 기상(氣象)을 가진 이는 조식에 비견할 만한 이가 얼마 없었다. 성관(星官 점성가(占星家)를 말함)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누구에게 준 글에, “금년에는 처사성(處士星)이 광채가 없다.” 하더니, 오래지 않아 조식이 과연 사망하였다. 조식은 시세(時世)에 응한 비상한 선비라고 하겠다.
○ 오건은 젊을 때에 학문을 좋아하여 조식을 따라 놀다가 늦게 과거로 출세하였으나 벌족(閥族)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직(顯職)을 맡지 못했다. 많은 명사(名士)들이 그의 어짐을 알아 사관(史官)에 천거하였다. 사관의 등용에는 시험을 보이는 것이 규례였는데 오건이 응시하지 아니하므로 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오건은 “내가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천고(千古)의 시비(是非) 속에 들어갈까 보냐.”고 답하였다. 이조 낭관이 되어 공도(公道)를 펴는 데 힘을 썼다. 사람됨이 순실하고 과감하여 일을 당하면 곧바로 나아가서 굽어 들거나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 유희춘은 고서를 많이 읽어 잘 외었으나 실상 참지식은 없었고 또 세상일에 망연하여 식견이 없었다. 임금께 올린 《부록(附錄)》도 역시 절요한 말은 아니고 다만 참고의 자료나 될 뿐이었다.
○ 이탁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별로 건의한 것은 없으나, 늘 사림(士林)을 보호할 뜻이 있었으므로 인망이 두터웠다.
○ 정대년이 비록 청백하고 검소한 행실이 좀 있으나 학문이 없어 무식하니 생각이 범속하고 또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망을 얻지 못하였다.
○ 이준경의 자(字)는 원길(原吉)인데, 어려서부터 인품이 탁월하고 풍채가 걸출하여 선비 사이에 유명했었다. 조정에 서자 청렴하고 엄정하게 몸을 가지니, 그의 형 윤경(潤慶)과 같이 인망이 있었다. 다만 윤경은 겉으로는 온화하나 속으로는 꿋꿋하고, 준경은 겉으로는 굳세나 속으로는 겁이 있었다.
○ 기대승은 기(氣)가 일세(一世)에 높고 안중에 강하게 보이는 자가 없어, 마음속으로 온 세상을 흔들어 움직이면 다 자기의 지휘를 받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가 한 말은 실제와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임금도 총애하는 뜻이 없으며, 대신도 또한 중히 여기지 아니하므로 이에 결단을 내리고 시골로 갔다.
○ 궁성(宮城) 밑에 있는 민가를 헐었다. 임금이 《대전(大典)》대로 준행하려 했는데 《대전》에, “궁성 밑 1천 척의 한계 내에서는 민가 짓기를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법전(法典)에는 이러했으나 실제에는 행하지 못하고 역대 이래로 금하지 아니하여 궁성의 지척에 민가가 즐비하여 백여 년의 오랜 집들도 많이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이 궁성에 바짝 붙여 집을 짓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여 법전을 상고하여 1백 척 안에 있는 집을 헐어라 하였다. 이로써 서울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뒤숭숭해지자 많은 군신들이 아뢰고, 또 중국 사신이 국경에 다다를 즈음에 민심을 동요시킴은 옳지 않으니 다른 해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말했으나 임금이 더욱 노하여 곧 헐되 거리는 30척으로 줄이도록 명했다. 대간(臺諫)이 중지하도록 번갈아 글을 올려 청하였으나, 임금은 더욱 더 노하여 독촉이 더욱 심하니, 백성 중에 울부짖는 자들이 많았다.
○ 평안도 절도사(節度使) 이대신(李大伸)이 우후(虞侯) 이붕(李鵬)을 시켜서 서해평(西海坪 자성강구(慈城江口) 부근의 호인(胡人) 부락)에 가서 곡식을 뺏어 오도록 했는데 돌아올 때 군사가 어지러이 흩어진 까닭으로 이대신과 이붕이 모두 벌을 받았다. 이붕이 오위군(五衛軍)을 거느리고 서해평에 가서 곡식을 뺏고 집을 불사르고 돌아올 때에 아군(我軍) 중에 호인의 화살에 맞은 자가 놀라 소리를 지르니 일군(一軍)이 경동(驚動)하여 호병의 다소를 헤아리지도 못하고 모두 무기를 버리고 어지러이 달아났던 것이다. 이붕이 앞서 가다가 군사의 요란함을 듣고 돌아와서 후군(後軍)을 단속하는데, 후위장(後衛將)인 강계(江界) 이선원(李善源)이 말을 달리다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자, 아군이 더욱 놀라 거의 대패한 뻔하였다. 자세히 보니 호병은 실상 보잘것없는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고 아군이 호병을 쏘자 호병은 살에 맞고 숨어버렸다. 이붕이 군사를 거두어 본부로 달려오는 중에 날이 저물었다. 이붕이 군중(軍中)에 명하여 진을 치고 노숙하다가 아침이 되거든 돌아가자 하니, 이선원은 밤에 가자고 고집하여 두 사람이 다투었다. 일군이 좇을 바를 몰라 혹은 가기도 하고 혹은 머물러 있기도 하여 제어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소리지르기를, “이선원은 목을 베어야 한다.” 하였다. 이붕이 선원을 잡고 목을 베려고 할 때, 선원이 그제서야 명에 복종하여 군사를 주둔시켰다가 다음날에 돌아왔다. 서울에서 패군(敗軍)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대신ㆍ이붕ㆍ이선원을 잡아다가 그 성군(成軍)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어, 모두 관작을 뺏고 하졸(下卒)로 삼았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이때 군령(軍令)이 해이하고 상하가 서로 통일되지 못하여 많은 군대로 소수의 적을 치는 데도 뭇 군사의 마음이 오히려 공포심을 품고 한 호병(胡兵)의 화살에 삼군(三軍)이 놀라 패하고 한 사람이 크게 부르짖음에 군령을 비로소 시행하니, 이러한 군사로 적의 기마병 백여 명을 만난다면 의심 없이 꼭 패할 것이니, 굳센 대적(大敵)을 만났으면 어찌 될 것인가. 아! 위태롭다.
○ 박응남은 둔하고 고지식하여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 여러 번 대사헌이 되어 기탄없이 논박하니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착한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착한 무리가 존경하여 따르고 또 왕비의 숙부이므로 임금이 총애하여 사림(士林)이 힘입더니 그가 죽으니 사류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 전 사간원 대사간 기대승(奇大升)이 사망하였다. 대승의 자(字)는 명언(明彦)인데 어렸을 때에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널리 읽고 잘 기억하였으며, 기개가 장하여 담론하면 일좌(一座)를 굴복시켰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 청명(淸名)이 크게 드러나니 이양(李樑)이 세력을 쓸 때 그를 꺼리어 벼슬을 뺏었다. 이양이 패한 후 그가 더욱 높은 직에 오르게 되었고 선비의 무리가 존중히 여기어 영수(領袖)로 삼았다. 대승도 일세를 경륜(經倫)할 것을 자부하였으나 그의 학문이 많이 늘어놓기만 했을 뿐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는 공부는 없었다. 또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남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지조있는 선비와는 화합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사람이 많이 그를 따랐다. 그의 지론(持論)도 상례(常例)를 따르기를 힘쓰고 개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니 식자(識者)가 더욱 취하지 아니하였다. 젊을 적에 조식(曹植)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시사(時事)를 그르치리라.” 하였고, 대승도 역시 조식을 유자(儒者)가 아니라 하여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기대승이 조식의 허물을 말하였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미워하였다.
그가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 유생(儒生)들에 대한 공급(供給)을 박하게 하고, 또 ‘식무구포(食無求飽 《논어》에 나오는 말로서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말라는 뜻)’라는 글제를 내어 유생들로 하여금 잠(箴)을 짓게 하여 유생을 풍유(諷諭)하게 하니, 유생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많이 성균관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경오년에 바야흐로 위훈(僞勳)을 논의할 때에, 대승이 듣고 말하기를, “을사년의 훈(勳)은 거짓이 아니요, 또 선왕(先王)이 정한 것이니, 지금에 깎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간사한 무리들이 대승의 이 말을 내세우니 식자(識者)들이 자못 옳지 않게 여기었다. 대승이 유속(流俗)들과 이미 화합하지 않았고, 또 식자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임금 역시 대수롭지 않게 대우하였으므로 답답하게 뜻을 얻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가다가 중도에서 볼기에 종기가 나서 고부(古阜)땅 촌사(村舍)에 이르러 영영 일어나지 못하니, 사람들이 그 재주를 아까워하는 이가 많았다. 대승이 비록 실질(實質)이 있는 재주는 아니었으나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가 이황(李滉)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동이(同異)를 변론함이 수천 언(言)이었는데 논의가 뛰어나 학자가 옳게 여기었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선비에게는 행(幸)과 불행이 있으니, 누구나 때를 만남을 행으로 알고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그러나 혹 때를 만나되 불행하고, 불우하되 다행한 이도 있으니 일률로 말할 것이 아니다. 옛날 당(唐) 나라의 유자후(柳子厚)는 먼 지방으로 귀양가 죽었으나 문학과 문장이 빛나게 후세에 전하니, 이것은 불우한 중에서의 다행이요, 왕개보(王介甫)는 정권을 잡아 일을 하였으나 뭇 소인들이 아부하여 마침내 나라일을 그르쳤으니, 이것은 때를 만난 중에서의 불행이다. 대승은 영재(英才)와 박학(博學)으로 기운이 일세를 덮을 만하였으되, 스스로 믿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였고 바른 말하는 벗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뜻을 얻어 그 배운 바를 행했다면 그의 때를 만남이 행이 되었을지 불행이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일찍이 들으니, 누가 최영경(崔永慶)의 처소에서 대승과 친한 사람에게 대승의 상(喪)을 조위하는 말로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이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하니, 영경은 불끈 낯빛을 변하고 말하기를, “기명언(奇明彦)은 재학(才學)은 조금 있으나 큰 병통이 있었으니, 을사년의 뭇 간인(姦人)을 공이 있다 하였고, 조남명(曹南溟)은 조정을 요란하게 하였다 했으니,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만일 일을 했다면 반드시 정치에 해를 끼쳤을 터이니, 이 사람의 죽음이 사문에 불행될 것이 무언가?” 하였다. 영경의 말이 비록 과하나 식자(識者)가 혹 전연 그르다고는 아니하였다.
○ 노수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정사가 볼 것이 없고 간혹 사사로운 부탁을 따르더니 정승이 되어서도 역시 건의하는 것이 없으니, 식자(識者)들이 부족하게 여기었다.
○ 오상은 유속배(流俗輩) 중에서는 좀 지조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식견이 부족하여 지위가 육경(六卿)에 이르렀어도 상규(常規)만 따르고 자리나 보전할 뿐이었다.
○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범인과 다르고 효도와 우애가 남보다 뛰어났다.
○ 최영경은 전에 조식을 좇아 배웠고 청렴개결하기로 세상에 뛰어나 의(義)가 아니면 일호(一毫)라도 취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더니 부모가 돌아가자 가산을 모두 기울여 장사지내어 마침내 곤궁하여졌다. 집을 성안에 두었으나 친구를 사귀지 아니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 있는 선비라 할 뿐이었다.
○ 박영준은 잔약하고 귀영은 탐욕ㆍ비루하며, 사상은 말을 아니하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만 가는 사람이라 모두 이조 판서 되기에 합당하지 못하니, 그 중에서 좀 나은 사람이라고 해서 바꾸어 가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니 식자들이 비웃었다.
○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둘이 아니다. 다만 발한 후에 도(道)와 의(義)에 맞으면 이는 도심(道心)이라 이르고, 식(食)과 색(色)에 맞았다면 인심이라 말하는데, 식과 색도 절차에 맞게 되면 이것도 역시 도심인 것이다.” 이이(李珥)가 대답하기를, “참으로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의리에는 이렇게 분명히 보시면서 어찌 이것을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적용하시지 않사옵니까. 요사이 보매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점점 어긋나서 천변(天變)이 자주 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기장이 풀리고 인심이 흩어져서 장차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 같사오니, 전하께서 만일 큰 뜻을 분발하시어 퇴폐된 것을 정돈하지 아니하시면, 나라의 체제가 붕괴되고 와해될 기세가 날을 받은 듯 닥쳐올 것입니다.” 하였다.
○ 노진은 명망이 있었는데, 퇴거하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니 사람들이 어진 이로 지목하나 경세제민의 포부가 없고 노수신(盧守愼)이 맑고 바르다는 명망을 띠고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럭저럭 눈치만 보고 지내는 데도 노진은 그래도 모난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니, 식자들이 부족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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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귀영은 변변히 못한 자질로 지위가 경상(卿相)에 이르러 총재(冢宰)의 자리에 있으며 뇌물을 많이 받아서 청론(淸論)이 허락하지 아니하니, 물의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사직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임금이 종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임금의 뜻이 청탁(淸濁)을 분별하지 아니하려는 까닭이다.
○ 정유일(鄭惟一)ㆍ정탁(鄭琢)ㆍ김취려(金就礪)가 비록 이황의 문하에 다녔다 하나, 사실은 도학(道學)의 제자가 아니다. 정유일은 조잡하여 행동을 삼가지 않았고, 정탁은 어둡고 나약하여 굳게 지키는 바가 없으며, 더구나 김취려는 아첨이나 하고 따라다니며 수고나 할 따름이니, 이 세 사람을 제자라 이름할 것 같으면 이황에게 심한 욕이 될 것이 아닌가. 유희춘(柳希春)은 단지 옛 글을 읽었을 뿐 식견이 없어서 시비를 분간하는 데 어둡기가 이와 같으니 정말 한탄할 일이다.
○ 다시 성혼(成渾)을 부르라고 명하였으나 성혼이 또 사양하고 오지 아니하니, 이에 체직하도록 명하고 일기가 따뜻하기를 기다려 올라오라고 하였다.
○ 향약(鄕約)의 일로 대신들과 의논하니, 혹은 정지하자고도 하고, 혹은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임금이 정지하라 명하였다. 허엽(許曄)이 이이에게, “어찌 하여 향약을 정지하라고 권하였소?” 물으니, 이이가 말하기를, “의식이 넉넉한 뒤에라야 예의를 아는 것이오. 기한(飢寒)에 빠진 백성들에게 억지로 예를 행하게 할 수 없는 것이오.” 하였다. 허엽이 탄식하기를, “세상의 도(道)가 오르고 내림이 명수(命數)가 있으니, 어떻게 하랴.”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생각에는 민생의 곤난이 아무리 심하여도 향약만 행하면 과연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어 정치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오?” 하니, 허엽은, “그렇소.” 했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은 능히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있소?” 하니, 허엽이 말하기를, “주상의 명령이 없음으로 못하였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집안 다스리는데 주상의 명령을 기다릴게 뭐 있소?” 하고, 또 말하기를, “예전부터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도 예속을 이루는 일이 있소. 지금 부자간이 비록 지친(至親)이라 하지만 만일 아들의 춥고 배고픔을 생각해 주지 않고, 날마다 매질이나 하면 학문을 권한다면 반드시 서로 이반하기에 이를 텐데, 하물며 백성은 어찌하겠소.” 하였다. 허엽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 사람이 착한 이는 많고 착하지 않는 이는 적으므로 향약을 행할 수 있소.” 하니, 이이가 웃으며 말하기를, “공은 마음이 착하여 다만 사람의 착한 것만 보았으나, 이이는 착하지 못한 사람이 많게 보이니, 이것은 필시 내 마음이 착하지 못하여 그러할 거요. 다만 전하는 말에, ‘몸소 가르치면 좇고, 말로만 가르치면 시비만 한다.’ 하였으니, 지금 향약은 마침내 시비가 일어나지 않겠소.” 하였다. 허엽이 말하기를, “공은 굳이 고집하지 말고 대죄(待罪)하오. 양사로 하여금 다시 논하게 하는 것이 옳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는 스스로 잘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대죄하지 못하겠소.” 하니, 허엽이 개탄하여 마지않았다.
허엽(許曄) 같은 어둡고 허망한 선비는 한갓 옛것을 앙모할 줄만 알고, 시의(時宜)를 헤아리지 못하며, 다스림의 도(道)에 본말(本末)과 완급(緩急)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이에 향약으로 말속(末俗)을 만회하여 태평을 이루려하고 있으니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 박영준은 여러 번 이 직위(이조판서)에 있으면서 매양 남의 안색이나 쳐다보고 풍지(風旨)를 따르기에 애쓸 뿐 무언가 해 놓은 것이 없었다. 안자유(安自裕)가 누구에게 말하기를, “박 이판(朴吏判)은 남의 종이다.” 하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안자유가 대답하기를, “제가 제 마음을 쓰고 못하고 남의 마음을 가져다 자기 마음으로 삼으니 남의 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다.
○ 송인이 말하기를, “만일 이전 정승이 갈리게 되면 누가 대신 될 것인가?” 하니, 이이가 답하기를, “시망(時望)이 있는 사람을 듣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직차(職次)대로 하리라.” 하니, 송인이 다시 묻기를, “계진(季眞) 같은 이가 전에 정승의 물망에 오르더니 지금 어찌 아무 말이 없는가?” 하니, 이이가 답하기를, “계진(季眞 이후백(李後白))ㆍ자응(子膺 노진(盧禛))이 선비들의 명망은 약간 있으나 정승 자리에는 합당한지 알 수 없고, 중회(重晦) 김계휘(金繼煇))는 정승의 명망은 없으나, 계진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이 묻기를, “세 사람이 정승이 되면 무슨 사업을 있을까?” 하니, 이이가 답하기를, “계진은 좁고, 자응은 둔하고, 중회는 익살스러우니 모두 유능하지는 못하나 다만 사림을 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심의겸이 묻기를, “강상지(姜尙之 사상(士尙))가 아마 먼저 정승이 되지 않을까?” 하니, 이이가 웃으며 말하기를, “상지는 순묵(循黙)하여 아무 시비가 없으니 정작 지금 정승에 합당하다.” 하였다. 그 뒤에 이후백ㆍ노진이 계속하여 죽고, 김계휘는 선비들과 틀어지고, 강사상은 과연 정승이 되었다.
○ 김여부ㆍ김진ㆍ이명은 병진ㆍ정사년간에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김홍도(金弘度)ㆍ김규(金虬)를 공격하고, 이 화를 장차 사림에 전가시켜려던 자들이요, 임복은 을사 이후에 권간(權奸)의 당에 붙어서 사림을 해치고 출세하려던 자이다.
○ 7월. 이발(李潑)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이발은 소시부터 학문에 뜻이 있고 마음이 구차하지 않아 자못 깨끗하고 좋은 명성이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자 이이가 당로자(當路者)에게 힘껏 추천하였더니 출신(出身)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요지에 있게 되어 인망이 매우 중하였다.
○ 청송 부사(靑松府使) 박신원(朴愼元)은 이조 참판 박근원(朴謹元)의 아우였는데 박씨 집안이 몹시 성하여 자못 세력이 있었다. 박신원은 전에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있었는데 세력을 빙자하고 한없이 탐욕을 부려 소문이 낭자하여 서울에까지 들려왔다. 청송 부사가 되자 그 고을이 빈약한 것을 싫어하여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죄를 당할까 염려하여 물래 간관에게 부탁하여 아뢰게 했다. “박신원은 병이 중하여 갈 수 없으니 체직하십시오.” 하니, 지연 등이 전에 박신원이 무병한 것을 보았으므로 간관이 그에게 속았음을 분명히 알고는 의분을 견디지 못해 아뢰기를, “간관은 비록 박신원이 병이 있다 하나 신원은 사실 무병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양사자 들썩하며 정지연 등을 공격하기를, “승지가 어찌 대간의 말을 억누르는가.” 하였다. 다만 대사간 이후백만은 말하기를, “아무리 간관의 말이라 하더라도 만일 잘못 그릇친 바가 있으면 어찌 바로잡지 못할 것인가.” 하였다. 양사가 의논이 맞지 않는다고 인혐(引嫌)하여 물러났다. 홍문관에서 처리하려 할 때 부제학 허엽(許曄) 등이, “대간의 말은 옳건 그르건 간에 꺾는 것이 불가하다.” 하여, 마침내 이후백을 체직할 것을 아룄다. 조금 있다가 새 지평(持平) 민순(閔純)과 정언 최황(崔滉)이 아뢰기를, “박신원의 탐욕 방종함은 뭇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며, 그가 무병한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그 탐욕ㆍ방종함을 논박하지 않고 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위로 임금을 속이고 남의 비위만을 맞추는 것이니, 간관을 파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8월. 포천 현감(抱川縣監) 이지함(李之菡)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지함은 포천에 곡식이 적어서 민생을 구제할 수 없음을 걱정하고, 어량(魚梁)을 떼어 받아, 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꾸어 고을 비용에 보태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듣지 않았다. 이지함은 본시 고을 원으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고 다만 유희로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자 곧 관을 버리고 돌아간 것이다.
○ 8월. 이조 판서 정유길(鄭惟吉)이 논핵당하고 갈리었다. 정유길은 옛 정승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였다. 명가(名家) 자제로 어릴 때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풍도(風度) 또한 장자(長者)의 기상이 있어 박영준(朴永俊)ㆍ김귀영(金貴榮) 등과 비하면 동떨어지게 달랐으나, 단지 임술(壬戌)년간에 이양(李樑)이 세력을 빙자하고 날뛸 때 정유길이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품이 부드러워 자립하지 못하고, 자못 이양의 뜻에 맞추었으며 이양을 대제학으로 천거하려 하였기 때문에, 선비들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천시하다가, 양사(兩司)가 논박하여 갈아버린 것이다.
○ 김귀영은 탐욕스럽고 비루하기 날로 심하였으나 여러 번 이조 판서가 되니 청의(淸議)가 괴상하게 생각하였다.
○ 황림이 비록 고을 하나 잘 다스리는 적은 재주는 있으나, 다만 용렬한 사람으로 인망이 없었는데 졸지에 헌장(憲長)이 되니 여론이 만족케 여기지 아니하여 필경은 논박을 당하여 갈리었다.
○ 헌부에서 이조 판서 정종영은 명망이 부족하여 전장(銓長)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논박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종영은 비속(鄙俗)하며 도량이 좁고 사류를 미워하였으므로 김계휘(金繼輝)가 대사헌이 되어 논박하였다. 임금은 비록 허락하지 않았으나, 머지않아 종영이 병이 있다고 사면하였다.
○ 김계휘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계휘가 헌부에 있으면서 허엽을 지목하여 사정(私情)에 따라 제 소견만 편벽되게 주장한다고 하였다. 엽의 아들 허봉(許篈)이 이조 좌랑으로 있었는데 경박하고 견식과 사려가 없었다. 그는 계휘가 그 부친의 과실을 드러낸 것에 노하여 계휘를 외직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조 참판 박근원(朴謹元)이 김효원과 체결하니 세상 사람들이 소년의 당이라고 지목하였다. 근원이 명류(名流)의 비위를 맞추려고 이에 계휘를 외방으로 내보내니 더욱 중망(衆望)에 만족치 못하였다.
○ 10월. 김효원을 부령(富寧) 부사로 삼고, 심의겸을 개성(開城) 유수(留守)로 삼았다. 이때에 의겸과 효원의 각립(角立)한 의론이 분분하기를 마지 아니하니, 이이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보고 말하기를, “두 사람이 다 사류로 흑ㆍ백ㆍ사(邪)ㆍ정(正)을 구분할 것도 아니며, 또 진정으로 혐극(嫌隙)이 생기어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니요, 다만 말속(末俗)이 시끄러워 사소한 틈으로 말미암아 허황한 말들이 소란하고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니 마땅히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내보냄으로써 들뜬 의론을 진정시킬 것이니 대신이 마땅히 경석에서 그 사유를 아뢰십시오.” 하니, 수신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만일 경석에서 아뢰면 더욱 소란이 생길는 지 알 수 없지 않소?” 하였다. 마침내 간원에서 이조를 논핵하게 되자 수신이 의겸의 형세가 너무 성대해 질까 의심하고 드디어 경석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근일에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결점을 말하여 이로 인해 말썽이 분분하여 사림(士林)이 화평치 못할 조짐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이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보내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두 사람이 서로 무슨 일을 가지고 말하오?” 물었다. 수신이 대답하기를, “서로 평일의 과실을 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씀하기를, “조정에 같이 있는 선비가 마땅히 뜻을 함께 할 것인데 서로 비방하니 심히 옳지 않다. 두 사람을 다 보외(補外)시켜라.”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이 두 사람이 깊은 혐극까지는 이루지 아니한 것이나, 우리 나라의 인심이 경조(輕躁)하고 말속이 시끄럽기 더욱 심하여 두 사람의 친척과 친구가 각각 소문을 전하여 마침내 어지럽게 되었으니 대신이 마땅히 진정하려고 하여 두 사람을 지방으로 내보내어 언근(言根)을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 또 주상께서도 이 일을 아셔야 할 것이니, 지금 조정에는 비록 간인(奸人)으로 뚜렷이 나타난 이는 없으나, 또한 어찌 반드시 소인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소인이 이들을 붕당(朋黨)이라 지목하고 두 편을 다 제거하려는 계략을 쓴다면 사림의 화가 반드시 생길 것이니, 이것을 모르셔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대신은 마땅히 진정할 생각을 가질 것이오.” 하였다. 홍문관 정자 김수(金晬)가 아뢰기를, “주상께서 그러한 줄을 이미 아셨으면 두 사람의 재주가 다 쓸 만하니 꼭 보외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들이 스스로 풀고 화합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그것도 그러하다. 다만 두 사람이 실상 원수 같은 혐의가 있어 서로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효박한 풍속이 조용하지 아니하여 허황한 말의 근본이 된 것이다.”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헌국(李憲國)이 말하기를, “지금은 위로 성상(聖上)이 계시고 아래로 현상(賢相)이 있으므로 사림이 염려가 없지만 만일 권간(權奸)이 조정에 있었으면 이 일이 또한 사림의 화를 양성할 것입니다. 그 전 정사년에 김여부(金汝孚)와 김홍도(金弘度)가 서로 비방하였는데, 홍도가 윤원형이 첩으로 처를 삼은 것을 항상 분하게 여기어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부가 원형에게 고하여 원형이 감정을 품었으나, 만일 홍도의 이 말로 죄를 만들면 명종(明宗)께서 반드시 듣지 아니하실 것이므로 다른 죄로 얽어매어 귀양까지 보내고, 사류가 많이 폄척(貶斥)되었으니 이것은 원형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분분한 말이 많으나 어찌 일이 생기게 되겠습니까. 두 사람이 다 버릴 인재가 아니오니 주상께서 두 사람을 부르시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걸리던 것을 다 풀게 하면 서로 용납하여 입조(立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친정을 하시는데 특지로 효원으로 경흥(慶興) 부사를 시키며 말씀하기를,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조정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먼 고을로 보낼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대년(鄭大年)과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아뢰기를, “경흥은 주변으로 호인과 접근되어 있으니 서생(書生)이 진무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고, 여러번 아뢰어서야 부령(富寧)으로 바꾸라는 명이 내렸다. 심의겸은 개성 유수로 임명하였다. 이에 연소한 사류가 의구하기 더욱 심하였다. 이이가 중간에 서서 이편 저편을 진정시키려 하니 사람이 의지하였다. 수신이 이미 효원을 내어보낸 뒤에 허엽(許曄)은 그가 경솔하게 처리했다고 허물하였다. 그러자 수신이 사류에게 의심을 받을까 염려하여 허엽에게 자신은 편당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노라고 맹세를 여러번 하니 식자가 웃었다. 임금이 석강(夕講)에 임하였다. 이이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다가 안자(顔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대목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인성(人性)이 본시 선하여 순전히 천리(天理)이나 다만 자기의 사욕에 가려 천리가 회복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사욕을 이기면 그 성(性)은 온전하게 됩니다. 안자는 궁리(窮理)함이 본시 밝아서 천리와 인욕(人欲)이 흑ㆍ백 보는 것과 같이 분명했기 때문에 곧 ‘극기복례’에 종사하여 털끝만큼도 분명치 아니한 의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사람은 전부터 궁리하는 공부도 없이 곧 극기(克己)만 하려 하니 어떠한 것이 기(己)이며, 어떠한 것이 예(禮)인 것을 알지 못하여 혹은 사욕을 오히려 천리라고 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러므로 ‘격물치지(格物致知)’로써 《대학》의 시초 공부를 삼은 것입니다. 또 예전에는 공부하는 데 말이 많지 아니하고 ‘극기복례’를 곧 실천하였기 때문에 다만 이 네 글자만으로써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에는 언어만은 많으나 원래 실재의 공부가 없기 때문에 실효도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안자의 말에 ‘나를 문(文)으로써 넓게 한다.[博我以文]’ 하였으니 이때에는 어떤 문(文)이 있었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이 때에 이미 육경(六經)이 있었으며, 또 초(楚)의 좌사(左使) 의상(倚相)이 삼분(三墳)ㆍ오전(五典)ㆍ팔색(八索)ㆍ구구(九丘)를 읽었다 하였으니, 의상이 공자보다 먼저이므로 이때에도 읽을 글은 있었으나, 후세 같이 많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안자는 한갓 명지(明智)뿐이 아니라 진실로 용(勇)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전진하여 마지아니 한 것이다. 안자가 말하기를, ‘순(舜)은 누구며 나는 누구냐?’ 한 것이 안자의 용(勇)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심히 지당합니다. 후세의 사람이 그 학문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다 그 뜻이 독실치 못한 까닭입니다. 주상께서 이미 이러한 것을 아시니 뜻을 독실히 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시면 어디엔들 이르지 못하시겠습니까. 근일 주상께서 항상 애민(愛民)하는 말씀을 하시니 신하가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만, 다만 그 마음은 있으시나 그 정사(政事)가 없으면 백성이 혜택을 입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지금 민생이 전에 비하면 어떠한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권간(權奸)이 당국(當國)할 때와 비하면 백성을 착취하는 것은 좀 감해진 듯합니다. 다만 공부(貢賦)ㆍ요역(徭役)의 규정이 심히 사리에 어긋나서 날로 점점 잘못되어 백성이 그 해를 받으니 만일 고치지 아니하면 비록 날마다 애민하는 말씀을 내리셔도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묵연하였다.
○ 김효원이 부령으로 가게 되니 사류가 두려워하여 안정치 못하고, 또 효원이 병이 중하여 북방에 부임할 수 없었다. 이이가 휴가를 얻어 장차 성묘(省墓)하러 가려고 하직하는 날에 홀로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던 것이 있으나 면대(面對)치 못하였으니 지금 배사(拜辭)함에 있어 감히 아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김효원을 보외하는 것은 다만 대신의 뜻이 신과 합할뿐 아니라 실상 사림간의 공론이오며, 주상께서 육진(六鎭)을 무부(武夫)의 손에만 두기를 근심하시어 문사(文士)의 명망있는 사람으로 앉아 진압하게 하려 하시었으니, 주상의 뜻도 실상 우연이 아닌 것을 압니다. 만일 효원이 병이 없다면 이로 인하여 극은(國恩)을 갚는 것이 진실로 때를 만났다 하겠으나, 다만 효원이 신기(身氣)가 심히 허(虛)하여 질병이 심중하니 이 근력을 가지고 북방에 가게 되어 상설(霜雪) 중에서 지나다 더디 죽는 것만이 다행이오니, 어떻게 능히 주획(籌劃)함이 있어 국경을 굳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대신의 뜻도 말썽들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두 사람을 보외하여 진정시키려는 계책뿐이며, 효원이 죄가 있다고 방축(放逐)하자는 것은 아니오니 내지(內地)의 벽읍(僻邑)을 효원에게 주시어 안으로는 군신의 의(義)가 보전되게 하고 밖으로는 변방의 수비를 굳게 하십시오.” 하였더니, 임금이 이이가 효원을 편드는가 의심하고 노하여 답하는 말이 사정(私情)을 좇는다고 극히 나무랐다. 뒤에는 그렇지 아니한 것을 알았다.
○ 대광보국승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이탁(李鐸)이 졸하였다. 탁이 비록 굳센 풍모와 절개는 부족하나 관후(寬厚)한 덕량이 있고 선비를 사랑하며 능히 그 정직한 것을 용납하였다. 이조 장관이 되어서는 힘써 공도(公道)를 넓히어 사망(士望)이 심히 중하였다. 가?”
○ 홍담(洪曇)이 졸하였다. 담이 입조(立朝)하여서는 청검(淸儉)한 지조가 있고 또 가행(家行)이 있어 계모를 효성으로 섬기며, 상중(喪中)에 집례(執禮)를 독실히 하였으나, 다만 학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지론(持論)이 비속한 때문에 사론이 허여치 아니하여 육경의 열(列)에 오래 있었으나 병용(柄用 집권)을 받지 못하여 울울히 뜻을 얻지 못하였다.
○ 이후백(李後白)으로 이조 판서를 삼았다. 이후백이 함경도에 있을 때에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의 혜택을 주더니 이에 이르러 이조 판서가 되었다.
○ 12월. 위훈을 삭제할 것을 중외(中外)에 포고하라 하니,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이 교서(敎書)를 지어서 바쳤으나 글이 졸렬하여 뜻이 분명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막대한 일이니, 글이 분명하고 뜻이 구비되게 하여 중외에 효유(曉喩)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 이렇게 거친가?” 하였다. 그리고는 이후백(李後白)을 시켜 다시 짓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김귀영의 미천함을 조소하였다.
○
○ 김천일의 위인은 정상(精詳)하고 근간(勤懇)하였다. 하루는 들어가 시종(侍從)하면서 시폐(時弊)를 극진히 말하고 또 현재(賢才)를 등용시켜 세도(世道)를 구하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수천 수백 마디의 말을 묘시에서 사시까지 아룄으나 임금이 한 말도 답하지 않으니 김천일이 뜻이 저상되어 병을 핑계하고 사면한 것이다.
○ 다시 홍섬(洪暹)으로 좌의정을 삼았다. 임금이 선비를 싫어하고 속류(俗流)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중이므로 홍섬을 다시 정승을 시키니, 병이 있다고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나와서 일을 보았다.
○ 정철(鄭澈)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삼았다. 정철이 직제학은 배명(拜命)하고 머물며 사림을 평화하게 하려 하더니 승지가 된 뒤로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출사(出仕)하였다. 그후 정원에 있으면서 바른 것으로 복역(復逆 임금의 잘못된 하교가 있으면 정원에서 도로 올리어 바로잡게 하는 것)하여 심히 사기(士氣)를 폈다. 이때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당파설(黨派說)이 더욱 성하여 심의겸의 무리를 서(西)라 하고 김효원의 무리를 동(東)이라 하니, 조정 신하 가운데 독립하여 뛰어나게 행하는 사람이나 용렬하여 이름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모두 동이나 서로 지목을 받게 되었다. 정철은 남들이 서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므로 이이가 정철에게 연소한 선비들과 통정하여 동ㆍ서라는 말을 타파하라고 권하였다. 홍가신(洪可臣)으로 사헌부 지평을 삼았다. 홍가신은 자못 남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조원(趙瑗)과 젊었을 때부터의 벗이었는데, 조원이 이조 좌랑이 되어 사정(私情)을 따르는 허물이 있고 또 조원이 경솔하여 인망이 없었으므로 홍가신이 먼저 조원에게 말하기를, “공(公)을 섬기려면 사(私)를 돌볼 수가 없는 것이다. 군이 실수가 많으니 내가 사정을 따르노라고 탄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조원을 논박하여 체직(遞職)하게 하니 공론이 쾌하다 하였다. 홍가신은 사람들이 동인이라 지목하고, 조원은 사람들이 서인이라 지목하였기 때문에 말을 만드는 사람들이, “동인이 서인과 화합하지 못하고 공격하여 이런 꼴이 되었다.” 하였다. 정철 역시 평정시키지 못했다.
○ 이조 판서 이후백(李後白)이 병으로 사면하였다. 이후백이 전장(詮長)이 된 뒤로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아 정사가 볼 만하였다. 비록 친구라 할지라도 자주 찾아가보면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는 족인(族人)이 찾아가 보면서 말끝에 관직을 구하는 의사를 보이니 이후백이 얼굴빛을 고치며 사람들의 성명이 많이 기록된 종이 한 장을 내어보이는데 모두 장차 벼슬을 시킬 사람들이었고 그 족인의 이름도 기록 안에 들어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 이름을 기록하여 장차 천거하려 하였더니, 지금 자네가 관직을 구하는 말을 하니 그것을 구하게 된다면 공도(公道)가 아니다. 애석하다. 자네가 만일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벼슬을 할 뻔하였는데.” 하였다. 그 사람이 그만 부끄러워서 돌아가버렸다.
○ 7월. 전 호조 판서 윤현(尹鉉)이 죽었다. 윤현은 재산 관리를 잘하고 성품이 인색하여 집에서는 털끝만큼도 낭비하지 않고 부자가 되거나 남의 급한 사정을 돌보아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 전곡(錢穀)의 계산을 푼(分)ㆍ촌(寸)도 틀리지 않게 하니 사람들이 그 재주를 탄복하였다. 다만 민폐는 구제하지 않고 국가 수익만 근심하여 백성의 원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식자들이 취렴(聚斂)하는 신하라고 지목하였다.
○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지함(李之菡)이 죽었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적어 외물(外物)에 인색하지 않았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 더위 주림 갈증을 능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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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년은 집에서는 청렴하였고, 또 재기(才氣)가 있어 사무가 번다한 고을을 잘 다스렸다. 이조에 있게 되니 정사는 혼란하지 않았으나, 다만 선한 이를 좋아하는 도량이 없고, 의논이 조속(粗俗)하였기 때문에 식자들이 취하지 않았다.
○ 자헌대부 호조 판서 이후백(李後白)이 죽었다. 이후백의 자(字)는 계진(季眞)이다. 벼슬에서는 직무를 다하였고, 몸 단속을 청간(淸簡)하게 하였다. 지위가 육경(六卿)에까지 이르렀으나 빈한하고 소박하기 유생(儒生)과 같았다.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았으며, 손이 오면 배반(杯盤)이 냉담(冷淡)하니 사람들이 그 결백함을 탄복하였다. 다만 국량이 좁아서 묘당(廟堂)에 적합한 그릇은 아니었다.
○ 강사상은 조정에 선 지 10년에 한 말도 시사(時事)를 의논하지 않고 매양 말하기를, “국가의 치란(治亂)은 하늘에 있는 것이요, 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직에 있어서는 공론을 펴지 않고 사정(私情)도 듣지 않으며, 자연에 맡길 따름이었다. 술을 좋아하였으나 취한 뒤에는 더욱 말이 없고, 매양 사람을 대할 때면 손으로 코만 만질 뿐이었다.
○12월. 연말의 은례(恩例)에 윤두수(尹斗壽) 삼 부자(父子)가 다 서용(敍用)된 명령을 받았다. 간관(諫官)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이수(李銖)의 옥사가 끝나지 않고 아직도 뇌물을 준 사람은 국문을 당하는데, 받은 사람을 복직시키는 것은 정사(政事)의 체통이 아니다.” 하였다. 대사간 정철(鄭澈)이 혼자 이수의 옥사가 억울하다 하여 논계(論啓)하지 않다가 논박을 당하여 갈리고 말았다. 이에 동인(東人)들이 정철을 사당(邪黨)이라고 배척하였다.
○ 이희검은 졸박하고 정직하여 재간을 부리지 않고 일을 당하면 피하지 아니하였다. 허엽(許曄)이 이희검에게 독서하기를 권하니 이희검이 말하기를, “내가 술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어느 겨를에 독서하겠는가.” 하였다. 이희검은 명예도 구하지 않고 권호(權豪)도 섬기지 않으므로 비록 인망(人望)은 없었으나 취할 점도 있었다.
○ 유전(柳㙉)을 예조 판서로 삼고 박대립(朴大立)을 형조 판서로 삼고 이식(李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모두들 용류(庸流)로 인망이 없었으나 특명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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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엽(許曄)을 가선(嘉善 종이품)으로 올려 경상 감사를 시켰다. 허엽은 사실 백성을 무마하고 중민을 인도할 재주가 없어서 문서가 산더미 같이 쌓였으나 처리를 못할 뿐더러 백성의 송사가 생기면 이것을 분별하여 답하지 못하고 오로지 아전들만 신임하니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였다.
○ 성운은 산림(山林)에 고요히 살며 분요한 세상을 사절한 지 40여 년이었다. 집에서 두어 마장 떨어진 곳에 산수(山水)가 좋은 곳이 있어서 작은 집을 그 사이에 짓고 한가한 날이면 소를 타고 가서 쓸쓸히 홀로 앉아 가끔 거문고를 두어 곡타며 자적(自適)할 뿐이었다. 거문고를 들고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는 오히려 타지 않았다. 선(善)을 즐기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살림살이에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으며 간혹 끼니를 굶는 일이 있어도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 부제학(副提學) 김첨경(金添慶)을 특지(特旨)로 사헌부 대사헌에 올렸다. 김첨경이 시사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발탁하게 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국가에서 관(官)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것은 장차 시사(時事)를 정리하려는 것이다. 일을 정리하려면 어찌 말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임금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미워하여 사람이 아뢰는 것을 보면 문득 교격(矯激)하다고 배척하고, 반드시 묵묵히 순종하고 말이 없어야 발탁하니, 이 도를 준행한다면 비록 조참(曺參 한 나라의 어진 재상)이 소하(蕭何)의 뒤를 잇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인데, 하물며 권간이 어지럽힌 뒤에 허점과 폐단이 많은 국사(國事)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체 이러하기 때문에 용렬하고 무능한 사람은 등용되고 뜻이 있는 사람은 물러가기를 결심하는 것이다. 앉아서 말하기를 기다리고 끝내 깨닫지 못하니, 아!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 하원군(河原君)이 역관(譯官)의 딸이 예쁜 사람이 있다고 천거하니, 임금이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햇빛이 광채가 없는 것이 여러 날이었다.
○ 정종영은 선비를 좋아하지 않았고, 김귀영은 행동에 검속(檢束)이 없어서 세상에서 천하게 여겼으나, 육경(六卿) 중에 이 두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식자는 나라에 인재가 없음을 탄식하였다.
○ 성천부(成川府) 훈도(訓導)가 유생(儒生)에게 원망을 사더니, 원망하는 자가 대성(大聖 공자)의 위판(位版)을 땅 구멍에 넣었다. 이 일이 보고되자 서울 관리가 내려가서 살펴보고 위판을 개조하도록 명하였다. 인심이 패란(悖亂)하기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지중추부사 박계현(朴啓賢)이 죽었다. 박계현은 행동에 검속이 없고 단지 술이나 마시고 방랑할 뿐이었다. 임금이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놀랍고 슬프다.” 하였다.
○ 유성룡(柳成龍)을 상주(尙州) 목사로 삼았다. 유성룡은 재주와 식견이 있고 경연에서 계사(啓辭)하면 잘 설명하여 아룄으니, 사람들이 모두 찬미하였다. 다만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를 돌아보는 뜻이 있으니, 군자는 부족하게 여겼다.
○정구(鄭逑)를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삼았다. 정구는 예학(禮學)에 힘써 몸단속을 몹시 엄하게 하며 의논이 영발(英發)하고 청명(淸名)이 날로 드러났다. 여러번 벼슬을 시켰으나 나오지 않더니, 이번에 상경하여 배명(拜命)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배운 것을 물어보는 말씀이 온순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정구가 부임하였다.
○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문신(文臣) 통정(通政) 이하의 제술(製述 글을 지음)을 시험하니 승지 윤탁연(尹卓然)이 시(詩)에 장원을 하여 가선(嘉善)으로 올렸다. 윤탁연은 인망이 없었는데 시문(詩文)으로 승진하니, 간원에서 개정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이문형과 박대립은 모두 연소한 선비들에게 붙어서 전형(銓衡)하는 요지에 앉게 되고 유속이 두 사람과 합하여 한편이 되니 식자들이 근심하였다.
○10월. 이산해(李山海)로 형조 판서를 삼으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사은한 뒤에 3번이나 사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산해는 젊었을 때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벼슬길에 나온 후로 청관요직(淸官要職)을 지냈으며 육경(六卿)의 지위까지 올랐다. 위인이 청신(淸愼)하였으나 기절(氣節)이 적고 부드러워서 남의 말썽을 피하였기 때문에 위 아래로 미움을 받지 않아 물망(物望)을 잃지 않았다. 동ㆍ서로 당이 갈린 뒤에 의논이 한결 같이 동인을 따라 능히 주견을 세우지 못하고, 이이(李珥)ㆍ정철(鄭澈)이 모두 그의 친구였으나 서로 저버리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니, 식자가 웃었다. 이이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친구 여수(汝受 이산해의 자)는 오래지 않아 정승이 될 것이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까닭을 물었다. 이이가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정승은 순직하고 삼가며 재기(才氣)도 없고 하는 것은 없으나 청명(淸名)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니, 여수가 바로 그렇다.” 하였다.
○ 전 영돈녕부사 번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이 죽었다. 박응순은 왕비의 부친으로 조금도 정사(政事)에 참여하려는 버릇이 없으니 사람들이 국구(國舅 임금 장인)가 있는 줄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의 고요함을 좋아하는 것을 장하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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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에 박순(朴淳)과 노수신(盧守愼)은 청명(淸名 깨끗한 명망)으로 재상의 자리에 있었으나 강사상(姜士尙)은 본래 인망있는 자가 아니었다. 박순만은 홀로 나라를 걱정하고 선비를 사랑하였으나, 수신은 날마다 술이나 마시고 하는 일 없이 뇌물이나 받아들여서 도리어 청렴과 검소를 스스로 지키는 사상(士尙)보다도 못하였으므로 사림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 정인홍(鄭仁弘)이 장령(掌令)으로서 서울로 올라왔다. 인홍은 청명으로 세상에서 중히 여겼었는데, 이때 장령이 되어 오니, 사람들이 그 풍채를 바라보려 생각하였다.
○특별히 대사헌 이양원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양원은 느른하여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아니하고 본래부터 국사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가산을 경영하여 크게 치부하였고, 동작강(銅雀江) 가에다 정자를 짓고는 강에다 명주실 어망(魚網)을 가로질러 둔 것이 두어 벌이나 되었으니 모두 여러 군읍(郡邑)에서 구하였던 것이다. 임금은 그의 과묵하고 무거운 태도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자헌대부로 올렸는데 형조 판서가 되어서는 청탁만을 구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 전 판서 박충원(朴忠元)이 죽었다. 충원은 용렬(庸劣)하여 단지 몸이나 용납받고 지위나 보전할 뿐이었는데, 말년에는 정신이 혼미하여 흑백을 분별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죽었다.
○ 헌부(憲府)에서 이조 좌랑 이경중(李敬中)을 파면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경중은 본래 학식이 없었고 또 성질이 탐닉하고 막히어 착한 것 따르기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전랑으로 매우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스스로 천단하는 습성이 있었다.
○ 간원(諫院)에서 대사헌 이식(李栻)을 탄핵하여 갈았다. 식은 청환현직(淸宦顯職)에 있으면서도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자제하고 단속함이 없어 남들이 천하게 여겼다. 또 그 서족(庶族) 붙이의 딸이 궁중에 들어가 숙원(淑媛)이 되어 바야흐로 총애를 받으므로, 식이 자못 그와 서로 내통하고 뇌물을 바쳐 그 행적이 심히 추하였다. 이를 듣고 분하게 여기고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더니, 이에 이르러 대사헌이 되었다.
○ 도승지 이우직(李友直)을 특배(特拜)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우직은 인망(人望)은 아니었으나, 청백한 지조와 질직(質直)한 행실이 있었기 때문에 물의가 일어나지 않았다.
○ 대사헌 이우직(李友直)이 병으로 사면하였다. 우직은 스스로 인망이 아닌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또 성혼의 소에 특명에 의한 관직 임명은 으레 용렬한 무리에게 가하여진다고 비방한 말이 있음을 듣고는 병이라 하고 사면하였다.
○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위풍으로 제재하여 백료들이 진작(振作)되고 숙정(肅正)되었고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다 내놓지 못하였다. 한 무부(武夫)가 시골에서 입경하여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장령 정인홍은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 위엄이 먼 외방(外方)까지 뻗치어 병사ㆍ수사나 수령 무리까지도 두려워하고 삼가 경계하니, 진실로 장부다.” 하였다.
○ 장령(掌令) 정인홍이 휴가를 얻어 귀향하였다. 인홍은 곧은 기개가 있었으나 포용하는 도량이 없어 처사하는 것이 두루 소상(昭祥)치 못하므로 사론이 혹 추허(推許)하지 아니하자, 불안하여 돌아갔다.
○ 영중추부사 강사상(姜士尙)이 죽었다. 사상은 집에 있으나 관(官)에 있으나 하는 것 없이 다만 술마시기나 좋아하였고,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공사(公事)ㆍ사사(私事)가 다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청검(凊儉)으로 스스로를 지켜 대문간에 추잡한 소리가 없었다. 다만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취(取)하지 않았다.
2025년 2월 14일 안동에서
개산팔경 박 희 용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