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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주일 예배
본문<막>5;21~24
제목; 회당장의 병든 딸
지금은 사순절 기간인데 이 사순절은 기독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절기로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희생을 묵상하며
금식과 절제 기도와 회개의 시간을 가지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만큼
술과 함께 유희를 즐기는 일이나 문화적 행사의 출입을 자제하였으며
사순절 기간 동안은 하루 한 끼를 금식하며
그에 해당하는 밥값을 모아
구제등을 했었던 것이 초대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퇴색해졌고 묵상과 기도에 게을러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마음들이
돌덩어리처럼 굳어져 이 땅의 영적 기상도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흘려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을 종려 주일로 지켜지며
이 날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다고 해서 유례 되었는데
그 다음 주간은 고난 주간으로 지켜지며 그리고 고난 주간의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정하여 지내는데
이날을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날로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금요일을 지난 토요일의 안식일 다음날
주일을 주님이 오신 날
주님이 부활하신 날인 부활절로 지켜지고 있음을 알아 두기 바랍니다
그런데 부활절은 부활절의 날짜 계산법에 따라 유동성이 있는데
오늘날의 부활절은 니케아 공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춘분인 [3월21~26일 사이]이후
첫 보름달이 뜬 후 가장 가까운 날인 주일에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3월하순에서 4월초에 부활절의 절기가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에는
40이란 숫자가 공유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먼저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전에 40일을 금식하셨으며
모세가 40일 금식함으로
시내 산에서 십계명등 율법을 받은 일과
이스라엘 족속이 출애급후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는 등의
40이라는 숫자적 의미가 있는데
특히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간 세상에 머물다가
승천하셨는데..그 후 10일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셨다해서
오순절을 지키는 교단도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기간을 어찌 지낼 것이냐...입니다
눈물이 메말라 버린 시대입니다
십자가 찬송이나 보혈 찬송을 아무리 많이 불러도
우리 마음은 뜨거워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열정들이 식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은
제발 좀 말씀을 보라해도 지독하게들 안 봅니다
이 기간 동안만이라도 기도하자 해도 안 합니다
기도가 없으니
회개도 없고 회개도 없으니 삶의 변화도 없습니다
너무나도 미지근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갑게 식었고
마음들이 돌덩어리가 되었고 사랑도 식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덥혀져야 할 것입니다..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고관대작이나 세상의 왕들과 권력자나
가진자요
성공한 계층이 아니라..아 물론 이들에게는
무관심하셨다는 말아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요 소외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도 세상에 오실 때에
구중궁궐이 아닌
말 밥통인 구유였다는 점에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 인류를 향한
긍휼하심입니다
긍휼의 뜻은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은총과 자비요
근본은 사랑이십니다..
팔복의 5번 째 복이 긍휼인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이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내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겨야
예수님께서도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혹은 복을 받고 싶으면 긍휼함을 얻으라는 뜻도 되는데
긍휼히 여겨주심은 내 뜻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셔야만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긍휼을 포함한 주님의 은혜도 자비와 은총도 다
우리에게 흘려 보내주시는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눈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가진 것 없는 고아와 과부요 나그네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이니
예수 믿는 우리도 늘 나보다는 자녀에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소외당한 이웃을 향해 긍휼을 베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시고 복음의 아름다운 소식과 함께
첫사랑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 내적 치유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38년 된 환자에게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네가 살기를 원하느냐’
‘네 귀가 열리고’ ‘네 입이 열리고’
‘네 눈이 떠지기를 원하느냐’는 이 질문은 환자에게는 복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병든 자를 향해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어주십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건과 어떤 고난,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까?
해석 안 되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자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제목은
회당장의 딸에 대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21절부터 보도록 합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우리는 본문에서 주목해야할 은혜의 말씀은 ‘건너 가시니’
무리가 모였다는 말인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무리를 향해 오시는
그것도 일부러 나를 향해 찾아다니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기록된 말씀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한 적용을 하는 것도 묵상의 재미를 더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시선을 받으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호흡하며 묵상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이 무리들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따라 다니는
군중들을 말합니다
사람의 수가 많아 큰 무리라 표현하는데
주님의 이들에 대한 반응을
성경 한 구절 찾아봅시다 요6;37.39입니다
먼저 37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아멘
39절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멘
저와 여러분..이 말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저는 주님의 변치 않는 지독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하시며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이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도 보내신 분이신 하나님의 뜻은
다시 살리는 일
치유와 회복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긍휼하심과
예수 사랑 때문에
예수 사랑의 손길이 닿는 이마다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아니 깨달았다면
속히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고장 나 있습니까? 망가진 일상들과
병든 육신과
상한 마음을 들고 주 앞으로 나아와 위로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여전히 ‘무리’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큰 무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토록
큰 무리로 무리를 지으며
따라 다닐까요..그리고 그 이유는 이들이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도, 손 마른 자도
고치셨으며
심지어는 광풍도 잠재우시는 기적을 맛본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에게로 나아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따라만 다닙니다
그래서 이들은 여전히 무리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복음서에는 무리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오고
특히 이 무리들은 예수님 주변에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온 자들만이
치유와 회복과 구원을 체험하며 제자로 살았지만
자기 문제를 예수께 들고 나아오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무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신앙의 연식이 오래 되어도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그런 무리가 있다면
이제라도 주님 앞으로 나아와 나를 만나 달라고
나를 고쳐달라고..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달라고
밤에 잘 때에도
주여..꿈속에라도 와 주시옵소서..이렇게 갈급해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잠을 자면서 남편 꿈꾸기 보다는
예수님 꿈을 꾸게 되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지금 세상에도
교회 주변과 믿는 자들의 주변에 이런 무리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여전히 자기 일과 세상의 일이 걸려있어
자기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오지를 못하니까
그냥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의 구경꾼에 머물러
무리로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그가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22절입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오늘 본문은 회당장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때의 회당장은 기득권 계층입니다.
권력이 있는 자입니다.
금수저요..등 따시고 배부른 계층입니다.
이생의 자랑거리가 많은 계층입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예수님은
여전히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고
치유 사역과 베푸신 기적으로 요즘 막 뜨는 존경받는 랍비요
선생으로
많은 무리를 몰고 다니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무리 중에 회당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인 회당장에게
영적인 감각과 안목이 있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앞으로 자신의 문제를 들고 나아 온 것입니다.
이 회당장을 포함한 많은 무리들도
저마다 고민하며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 앞에 나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나와서
무릎까지 꿇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주님은 주께로 나아온 이 한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시선을 내게로 돌리기 위해서 주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 앞에 엎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권세가요 기득권 계층인 회당장이
그것도 목수의 아들로 소문난
예수 앞에 엎드린 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큰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목수는
천한 직업이었고
이 당시의 유대인에게는 직업천시 의식이 매우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자들이 모여 산다는 달동네
나사렛의 목수 출신
예수 앞에..그것도 다른 사람의 이목도 있는데 얼마나 처절했으면
얼마나 간절했으면 얼마나 갈급함이 있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체면불구하고 무릎을 꿇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태도는 긍휼함을 얻기 위한 겸손의 자세입니다
무릎 꿇는 행위는
항복의 의사 표시오 나를 당신께 맡기오니
당신이 나를 책임져 주소서라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행동했을까요
성경을 좀 더 읽어보면 그의 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을
곧 알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갈급한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무릎을 꿇는 사람이 있고 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리는 꿇지 못했고 회당장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갈급한 문제 앞에서 여전히 구경꾼인 무리입니까
아니면 회당장처럼 적용하여 결단하여 예수 앞으로 나아온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를 가지고 나아와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겸손을 뜻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믿음과 신뢰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 나와서 엎드리는 사람일까요?
자신의 문제를 오픈하는 사람입니다.
오픈이 능력입니다.
문제를 숨기면 문제 해결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오픈하면 해결이 가능합니다.
물론 누구에게 오픈하고
어떤 곳에서 오픈하느냐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십자가 앞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행이 일치가 되고
약속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같고 약속을 지키면 열매는 반드시 보장됩니다
23절입니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주시고
구원을 받아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간절하면서도 진솔한 오픈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문제를 다 드러내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치부를 다 드려 내놓고
낱낱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에 무릎의 영성, 기도의 영성이 사라진 이유는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애써 부르짖지 않아도 배부르고 등 따시기 때문입니다
새벽에도 기도하지 않는 이유도..평일에 교회를 찾아
기도하지 않는 이유도
구제도 헌신도 섬김도 다 사라진 이유가
도대체 갈급한 것이 사라졌고 절실하게 얻고 싶은 것이
이제는 거의 없는데
말하여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한 것이 지천인지라
마음들이 식었고 뜨거움도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긍휼을 소망해야 하고 민망히 여겨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구원을 달라고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을 위해 간구했다는 것은 당신이 메시야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과거에도 메시야만이..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다른 종교 다른 신은 구원이 없고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구해야 합니다
사업이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다거나
가출하고, 부도나고,
쫓겨나고..그래서 내 인생 내 삶이 위기라고
해, 달, 별이 떨어지는 사건과도 만났고
물과 불의 사건 속에서
숨조차 쉴 수 없는 사건을 만났고
또 시험에 떨어졌다거나 병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되었다거나
어떤 문제와 사건으로
위기의 상황에 놓여 있다거나 하는 것들을
죽게 되었다는 이 말에 적용하여 접목시키면 됩니다.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고쳐 달라고 해결해 주시되 순적함으로
풀리고 뚫리며 열리게 해 달라고 간절함으로
간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성경은 말합니다
그와 함께 가실 새라는 증거와 함께 주님의 동행을 접하게 됩니다
임마누엘로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이시고
응답해 주시는
예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당신이 하신 말씀의 책임을 지시기 위해
동행해 주셨고
회당장 아이로도 끝까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끝까지 따랐습니다..저와 여러분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응답해 달라고 소망을 이루어달라고 간청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키고 행할 순종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또 따라갑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따라 가는 무리가 아니라
함께 동행하며
중보하는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24절 중하반절에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의 말씀과 함께 25절~34절의 내용이
삽입됩니다.
새치기를 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행로에 방해꾼이 생긴 사건입니다
딸로 인해
초조해 있을 야이로에게는 새치기를 당한 황당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니다
이 다음 이야기는
새치가 안에 있는 사건을 묵상하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주간을 기억하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은 본문을
10번 정도 읽어 익숙해지기를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무조건 예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앞으로 나아와 매달리는 것이
하책이나 변수가 아니라 가장 탁원한 상책이요
상수임을 믿고
오늘 들려진 말씀으로 한 주간을 살아갈 때
저와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합시다..저와 여러분이 야이로가 되어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