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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기도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 말을 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나는 배워야 했다. 불안과 취약함의 어둠, 의심과 환멸 속에서 기도하는 것 말이다. 나에게 불안과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해 주고, 나로 하여금 교회의 교리들을 고통의 산뜻하고 간편한 해독제가 아닌 어둠 속의 빛으로 좋은 소식으로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밤기도였다.
물에 가라앉고 있을 때는 구명 밧줄이 필요한데,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단순한 낙관주의는 비통함 속에서의 구명 밧줄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두려움이나 고통을 잠시 완화해 주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이 드러나는 호된 시련의 도가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실천들이 필요하다.
*지난한 그 한 해 동안 나는 인간의 끔찍한 취약함과 하나님이라는 실재 양쪽 모두를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견고해 보이는 다른 것이 거의 없을 때 하나님을 붙들 수 있도록 (혹은 하나님께 붙들릴 수 있도록) 해 주고, 만족스러운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을 때도 기독교의 이야기를 붙들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교회의 기도와 관습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열망과 고통, 소망을 담아냈던 이 특정한 기도문은 밤기도 예식이 끝나갈 무렵 나온다. 나는 이 기도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제는 어찌된 일인지 내 몸의 일부 같다. 우리 가족이 너무 자주 기도하다 보니 우리의 여덟 살짜리 아이도 말 그대로 줄줄 외우는 기도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주님, 이 밤에 일하는 이, 파수하는 이, 우는 이의 곁을 지켜 주시고, 잠자는 이를 위해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소서. 주 그리스도여, 병든 이를 돌보소서. 피곤한 이에게 쉼을 주시고,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는 이를 보호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기도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쓰지 않은 것이 거의 분명하다. 이 기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죽고 수 세기가 지난 뒤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도는 조용히 전통의 일부로 들어온 선물이고, 한 가족이 이 영광스럽고 통렬한 신앙의 신비를 적어도 조금 더 오래 견디게 해 주었다.
매일 밤 이 기도를 드리면서, 나는 얼굴들을 보았다.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면서는 내 아버지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혹은 나의 잃어버린 아들들을 떠올렸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을 주시고, 병원에서 나를 에워쌌던 분주한 간호사들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다. 기뻐하는 이를 보호하소서"를 기도하면서, 방에서 부엉이와 플라밍고 인형을 안고 안전하게 자고 있을 딸들을 생각했다. 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를 기도하면서는 최근 남편을 잃고 슬픔 속을 헤매는 나라 반대편에 계신 엄마를 보았다. "피곤한 이에게 쉼을 주시고"를 기도하면서는 잠든 남편의 얼굴에 패인 주름살을 눈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크고 작은 방식으로 감당하고 있는 세상의 집단적 슬픔에 대해, 즉 우리의 숨을 앗아 가는 공포와 모두의 삶에서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상실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실재를 늘 알았다. 그들은 백신이나 현대 의약품 없이 전쟁이나 전염병을 겪었고, 죽음이 문 앞에 있을 때, 고통이 기승을 부리고 불가피할 때, 밤이 끔찍하도록 어둡던 때를 살았다. 그러나 수백만의 신실한 사람들은 이 모순을 고집스럽게 오래 붙잡았다. 곧 하나님은 선하고 강하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끔찍한 일들이 으레 일어난다는 것을 말이다.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역설을 알았지만, 그 긴장을 해소하는 대신 지속되게 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이 코드가 불협화음을 내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마지막 조화로운 음을 내실 때만 그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언제나 믿으면서.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나의 가장 심오한 질문은 나의 갈망이 그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견딜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정의를 원한다. 나는 부활을 원한다. 나는 온전함을, 안녕을 회복을 원한다. 이러한 의문들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이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바로 잡으실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그 사이의 시간을 살아간다. 이 사이의 시간에 우리는 그러한 신비를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고통받고, 결혼 생활이 무너지고, 불의가 휘몰아치고 압제자들이 위세를 떨치고, 좌절과 공허를 마주하고, 병에 걸리고, 모두가 결국 죽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감히 그분에게 지켜 주시기를 구하는가?
*하나님이 진짜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혹은 하나님이 다정한 분이신지 무관심한 분이신지 아니면 나쁜 자식인지의 문제가 오로지 우리의 삶 혹은 세상의 기쁨과 슬픔의 균형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증거는 솔직히 결정적이지 못하다. 만약 내 짧은 인생과 감정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성품을 결정한다면, 그분은 지킬과 하이드일 것이다.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이런 방식은 끝나지 않는 포커 게임이 된다. 고래의 점프가 만들어 내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물보라마다. 나는 광활한 들판을 전소시키는 산불로 받아친다. 제왕나비 무리의 이동에는 진드기가 옮기는 라임병을 내민다. 아이의 첫번째 미소에 황홀해하는 엄마들이 있는가 하면, 마지막 숨을 힘들게 내쉬는 신생아의 또 다른 엄마들이 있다. 고무적인 인간의 모든 선한 행동에 대해서는, 약한 사람을 괴롭힐 계획을 세우는 또 다른 인간이 있다. 가장 행복한 삶으로부터 가장 비극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정황 증거는 둘로 나뉜다. 아름다움이 있고, 끔찍함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재중인 집주인이 아니시며, 혹 더 나쁘게는 괴물이 아니시라는 어떤 확실한 표지가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취약성과 하나님의 미쁘심을 동시에 붙들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표지를 우리의 삶이나 세상의 정황에서 점을 치듯 알아낼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우리가 믿는 바를 결정해야 한다. 누군가 우리와 함께 깨어서 지켜 주고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불가피하고 심지어 거슬리게도 그것은 교리에, 우리가 반복해서 돌아가는 기본 그것은 바로 이야기다.
원칙들에 우리의 삶을 정의하는 이야기에 기초한 결정이다. 프랜시스 스퍼포드는 이렇게 쓴다. “우리에게 잔인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논거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고 혹은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든, 가장 취약한 순간에 표면에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쌓아 올린 토대가 되는 이야기다.
기독교는 취약함, 상실, 고통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 곧 역사 속의 진짜 이야기를 제공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기독교 메시지의 어떤 측면도 부분적으로 악[과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닌 것이 없다. 어둠 속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우리의 의문들을 구체화하려면 구속사의 전체 이야기가 필요하다. 고통의 문제에 대한 깔끔한 해결책은 없지만, 그러한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거나 최종적 의미에서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신정론과 관련된 우리의 질문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접근하는 기독교적 답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야기다.
*의사들이 아들의 연한 피부에 칼을 대는 동안 줄리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수술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지 결정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기독교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주장하는 바를 믿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포커게임을 멈추고 자신의 카드들을 접은 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이나 자신의 아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임의로 한 결정이 아니었다. 즉, 어둠 속에서의 한 차례 도약이 아니었다. 줄리는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순히 고양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증거에 주의를 기울였으나, 그것은 자신의 삶의 증거도 세상의 모든 선의 총합과 모든 악의 총합을 비교한 집계도 아니었다. 그 대신 그녀는 예수님의 삶을 보았다.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 채로 하나님을 신뢰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줄리가 닻을 내린 곳은 바로 이 이야기였다.
교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으면 예수님을 보면 된다고 늘 선포해 왔다. 질고를 아는 자, 슬픔을 모르지 않는 사람, 영세 기능공, 크고 작은 고통을 알았고 대체로 홀로 죄인으로서 죽었던 사람을 말이다.
수수께끼와도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취약함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 안으로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둠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밤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떠나셨다. 물집과 소화불량, 어긋난 관계와 친구의 죽음. 폭압적 제국과 가난의 굴욕, 폭력의 공포와 만나셨다. 어느 밤, 그분은 극심한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아버지께 구하셨다. 친구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어둠 속에서 홀로 흐느끼셨다. 그분은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셨고, 곧이어 고문당하고 죽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예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가 고통을 느끼셨고 문제를 겪으셨고 질고를 아셨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 우리가 품는 소망은 그저 성경 안에 냉동 보존된 어느 고대인의 전기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이야기는 단순히 종교적 주문이 역사의 유물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살아 있으며 진행 중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도 계속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님은 단지 옛날 옛적 먼 과거에 지금 우리의 자리에 있어 본 누군가가 아니다.
우리는 그분이 현재 시제에서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발견한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신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충만함에 신비롭게 동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순전한 의지로 행하거나 인지력을 발동하여 기독교 이야기나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임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슬픔 가운데 갖는 소망은 엄연한 사실이나 더 나쁘게는 기계적 대답처럼 들고 다니는 뭔가가 아니다. 내가 기독교 이야기를 신뢰하는 방식은, 북미의 5대호 가운데 슈피리어호가 가장 크다거나, 빵이 밀가루와 이스트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 방식과 똑같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은 삶과 이야기를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의 더 큰 이야기 안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간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실천과 기도를 통해 이를 발견한다. 우리는 놀랍고 좌절하게 하며 거침없이 자비로우신 실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믿음의 기예를 이어받고 배운다. 현재 시제로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은 이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어둠과 의심, 두려움과 취약함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 곁을 떠나시지 않는다. 그분은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 밤이 오지 않을 것이라거나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혹은 우리가 즉시 해안으로 끌어올려질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혼자 남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밤에 우리와 함께 깨어 계실 것이다.
스퍼포드는 이렇게 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창조주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슬픔의 시간에 친구를 혼돈의 시간에 참된 심판자를 절망의 시간에 우리가 가까스로 붙드는 것보다 더 넓은 소망을 구한다. 그는 우리가 고통에 깊이 시달릴 때는 어떤 설명도 이유도 대답도 우리의 비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한다고 말한다. 약간이라도 효과가 있는 유일한 위안은 당신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아마도 그 최대한의 효과는 당신이 견딜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 만약 견딜 수 없다면 자신을 전적으로 증오하지 않으면서 실패하거나 포기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결국 나는 바로 이것을 알아야 했다.
*나는 모든 것이 가장 행복할 때조차 슬픔의 통증을 맛본다. 아침 일찍 아이들이 내 침대로 재잘거리며 기어올라 팔로 나를 감쌀 때면 찰나의 환희를 느낀다. 그러나 심지어 그때도 내 뇌의 어떤 부분에서는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것은 말한다. "잠깐만 이건 오직 짧은 시절 동안만 지속될 거야."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여전히 나는 이러한 순간들에 깊은 기쁨을 누린다. 취약함과 상실이 이것들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나는 정확하게 내가 슬퍼하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는 슬픔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평범한 하루를 이어 간다. 나는 잠에서 일어나 아이들이 학교 갈 준비를 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슬픔은 노쇠한 반려견처럼, 모든 방의 모서리에 조용히 드러누운 채로 언제나 거기 있다. 우리의 밝고 빛나는 삶, 폭발하는 기쁨, 좋은 직장, 사랑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윤곽을 드리우고 있다. 슬픔이 격렬하고 피할 수 없게 되살아나고 날카로워지는 때가 있고, 희미해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간 경험의 백색 소음으로 남아있다.
사제로서 나는 매주 이것을 본다. 우리 가운데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나를 비틀거리게 할 만큼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교회에서 사람들 앞에 서면, 내가 아는 그들의 이야기가 보인다. 여기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멋진 여성이 있다. 그녀의 사랑하는 아들은 중독자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으로도 아들을 구할 수 없음을 아는 채로 살아간다. 여기 완벽한 가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남성이 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결코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고통으로 여전히 비틀거린다. 여기 부러워할만한 직업을 가진 여성이 있다. 그녀는 아이를 너무도 갖고 싶어하지만, 얼마나 많은 유산을 경험했는지 세는 것도 멈췄다. 나의 회중은 아름답고 평범하지만, 일요일마다 우리가 모이는 이 한 공간에는 천국을 침묵시킬 만큼 충분한 슬픔이 있다.
*예수님이 친구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지만, 그것으로는 죽음의 권세를 소멸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나사로는 여전히 죽을 것이다. 나사로는 여전히 슬픔과 취약함, 실망의 매정한 세상에서 살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엄청난 어둠을 들여다 보셨고 분노하셨다. 그분은 죽음의 면전에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요 11:3)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우셨다. 성경은 여기서 말이 코를 씩씩거리는,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생소한 헬라어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님의 끓어 넘치는 애통은 거의 동물적일 정도로 강력하고 꾸밈없는 어떤 것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고 앉아 다시 우셨다. 그분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 23:37). 여기서 그분은 죽음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짝사랑의 슬픔 때문에 우신다. 이것은 심오한 모성의 이미지다. 예수님은 자녀들을 모아 자신의 안전하고 친밀한 품안에 감싸 안으시기를 열망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한다. 바쁘고 산만한 북적이는 도성은 뒤돌아선다. 자녀가 스스로를 망치는 모습을 앉아서 지켜보고, 사랑하는 아이가 파괴로 남용으로, 중독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자신이 노래를 불러 준 바로 그 존재가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가 되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어떤 어머니라도, 예수님이 어떤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을지 알 것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파수의 기예를, 즉 종말뿐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을 파수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로완 월리엄스는 이렇게 쓴다. 차분하고 기민한 채로 조용히 앉아 있되 긴장하거나 안달복달하지 않는 경험 많은 조류 관찰자는 이것이 뭔가 아주 특별한 것이 갑작스럽게 시야에 불쑥 들어오는 그런 종류의 장소임을 안다."그는 이것을 기도에 비유한다. 가만히 앉아 영광을, 은혜를,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 그러면서 이렇게 쓴다. 물론 때로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빗속에 앉아 있는 긴 하루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에게 기도의 경험 중 많은 부분이 정확하게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나는 이런 종류의 기대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 즉 그 일이 일어날 때 볼수 있을 만큼 눈이 충분히 뜨여 있고 정신은 느긋한 동시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깨어 있는 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이 제자도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제자도는 바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의 삶과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식하는 법을 평생 훈련하는 것이다. 오랜 실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 산만함과 두려움에 고정되어 있던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파수하기를 배운다. 침묵, 고요함, 주의력은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디지털화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공급 부족이다. 니콜라스 카는 그의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테크놀로지 사용으로 인해 우리의 뇌가 어떻게 물리적으로 재조직됨으로써, 더 작고 단편적인 정보를 낚아채듯 받아들이는 것은 잘하게 되었지만 어떤 한 사람이나 논의, 경험에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잘하지 못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주의력은 치명적 소멸 위험에 처해 있다.
교회의 임무는 우리의 눈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계속 열려 있기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장차 오실 왕을 깨어서 기다리며 매주 모인다. 그리고 오듀본 협회Audubon society (미국 야생동물보호협회-옮긴이)와 같은 성실함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있는 조용하고 간과된 영광을, 의외의 그러나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찾는다. 지금도 우리는 장차 올 구속을 엿보는 순간에 주의를 기울인다. 기도를 통해, 회중 예배를 통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인식하도록 우리의 눈을 훈련한다.
*올리버 오도노번은 시편 기자들과 구약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깨어나시기를 자주 요청했지만 신약에는 이 요청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이미 결정적으로 행동하셨고, 따라서 더 이상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를 요청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확실히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연약함과 취약함을 자기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게 아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 대신에 신약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계속 깨어 있도록,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민감하도록 요청한다. 오도노번은 이렇게 쓴다. "하나님은 이미 깨어나섰고, 이미 행동하셨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신실한 사람들이 깨어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 말하면서, [신약] 지속적인 기민함의 필요를 강조한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고전 16:13) 이는 특히 기도의 지속성에 적용되었다."
야고보, 요한, 베드로처럼,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도록 부름받았다. 심지어 어둠의 계절을 지날 때조차 그리고 아마도 그런 시기에는 특히 그렇다. 나는 어둠 속에서 더욱 보혜사를, 그리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목하시고 사랑하시는 방식들을 의도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함을 배웠다.
나는 기도를 통해 그렇게 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처음에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우리의 동공이 더 많은 빛을 받아들이려 확장되는 것처럼, 기도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보도록 우리의 눈을 조절해 준다.
*아름다움이 고통의 통증이나 취약함을 가져가지는 않는다. 매미 소리나 훌륭한 커피(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가 배우자나 친구의 상실을, 심지어 그저 힘든 하루를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만들어 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는 괴로움과 삭막함만 있으며 사랑스럽거나 견고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이야기에 죄와 고통,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영원한 찬란함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질문을 해결하거나 형이상학적 나비매듭으로 어떤 것이든 그럴싸하게 포장하기엔 충분하지 않겠지만, 때로는 그저 다음 한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신비를 견딜 때는, 단지 한 걸음 더 내딛기에 충분한 빛이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의존적이고 상호 연결된 인류로 우리를 함께 묶어 준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의 일에 의지한다. 우리는 종종 이름 없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기댄다. 밤에 드리는 어떤 성공회 기도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다른 이들이 잘 때 일하는 이들을 밤이나 낮이나 살펴 주시고, 우리의 공동생활이 서로의 수고에 의존하고 있음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서로의 수고에 의존한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다른 이들이 그들의 일을 잘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취약함이 주는 한가지 선물은 우리가 혼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지나온 어떤 하루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도록 지어졌으며, 항상 존재하는 우리의 필요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서로를 의지할 수 밖에 없게 한다. 우리 가운데 순전히 자립적인 사람은 누구도 없다. 자력 장치는 망할 수밖에 없다.
인류의 노래에서 처음으로 단조가 들려오기 전,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그대로이며 어떤 고통이나 아픔도 알지 못했던 그때도 우리는 자기 충족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가장 순수한 인간성 안에서, 우리는 상호 의존적이며 뭔가를 필요로 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의지했다. 그리고 우리는 일했다. 함께 일했다. 우리의 공동생활은 서로의 수고에 의존했다.
동산에서 벌거벗은 채로 더없는 지락을 누리는 아담과 이브를 그린 그림은 많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일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은 거의 없다. 고역 이외의 일은 상상할 수 없고, 천국에서는 직장 회의나 집안일이 반드시 제외되어야 마땅하다는 듯 말이다(아담과 이브가 빨래를 건너뛸 수 있었으리란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완벽함 속에서도 아담과 이브는 일했다.
우리는 일과 창조성의 공동생활을 공유하도록 지어졌다. 그리고 만물이 구속될 때도 우리가 갑자기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슈퍼맨과 슈퍼우먼이 되지는 않을것이다. 뭔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지 않을 일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텔로스 곧 궁극 목적은 공동체이지 자기 충족이 아니다. 향연이며 함께하는 삶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다. 이 세상의 고통을 가볍게 해 주셨다. 영구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병에 걸린다. 심지어 그분이 땅 위를 걸어 다니시던 그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병에 걸렸다. 프랜시스 스퍼포드는 예수님이 성취하신 모든 치유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고대 근동에서 나병 환자나 하혈하는 여성, 사망자 수치를 눈에 띄게 줄이지는 못하셨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분의 일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 나라에서 사람들은 치유되고 용서받고 회복되고 온전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은 물건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셨다. 그것도 수십 년을 예수님은 기능공이셨다. 손을 사용해 뭔가를 짓는 사람을 가리키는 '테크톤'이라고 불리셨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셨고, 나무나 돌, 금속을 가지고 뭔가를 만드는 것이 자신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 무엇을 만드셨을까? 우리는 전혀 모른다. 계속 보존하기에 충분할 만큼 경천동지할 뭔가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어 가고 가난한 사람이 고통당하고 거대하고 폭력적인 제국에서 불의가 들끓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육신이 되셔서 가구를 만드셨다. 물건을 만들며 보내신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분은 설교도 치유도 성전 청소도 하지 않으셨다. 운동을 조직하지도, 죽은 사람을 일으키지도 않으셨다. 세상에 오신 빛은 평범한 일을 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많은 이들을 먹이신 일, 산상수훈,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신 사건처럼 군중의 감탄을 자아낸 일뿐 아니라 조용히 행하셨던 기예의 일 역시 -구속을 가져왔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일과 공적 사역에 관여하시고 그다음 누가가 말하는 것처럼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시는 것의 리듬을 보여 준다. 기도의 일은 그분을 활동적인 일의 삶으로 보냈고, 다시 그러한 일의 삶은 기도의 일로 그분을 되돌려 보냈다.
예수님의 일은 궁극적으로, 우는 것과 파수하는 것과 일하는 것이 만나는 곳인 십자가로 그분을 이끌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산고를 통해 자신이 낳으신 장차 태어날 새로운 세상을 파수하시면서 어둠 속에서 우셨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 이후인 지금도 하나님은 신비 안에서 여전히 울고 파수하고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여기 땅에서 행하셨던 일과 지금 하늘(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몸보다 더 가까이 있는)에서 행하시는 일은 완전히 다르지 않다. 그분이 성육신 안에서 행하신 일과 승천 이후에 하고 계신 일은 다르지만, 서로 부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지상 위의 그분의 삶에서 우리는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을 엿본다.
바로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는 기도의 일을 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우는 것처럼 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이자 구속자로서 우리의 울음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파수하시지만, 우리가 파수하는 것과는 다르게 거룩하고 완벽한 주의력으로,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질 때도, 바다나리 하나가 대양저를 기어 다닐 때도, 미토콘드리아 하나가 우리의 세포 안에서 영양분을 모을 때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순전히 몰입하여 지켜보신다.
그리고 그분은 회복을 위해 일하신다. 은하계와 제국에서 우리의 거리와 집과 사무실에서, 밤에 우리가 자는 침대에서, 그분은 마지막 하나까지도 모두 새롭게 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
*기도는 실재의 본성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코스피는 이렇게 쓴다. "하나님 나라에 살려면, 혹은 마법이 풀려 버린 우리의 환경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습관과 헌신을 대대적으로 재배열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존재하는 전부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에서 발견된다고 믿는 문화의 거의 모든 충동에 의해 훈육된다. 물질세계 너머의 뭔가를 믿기 위해서 우리는 부활의 빛으로,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일깨워 주듯 "땅이 하늘로 그득하고, 평범한 모든 떨기나무가 하나님으로 불타오르는 가능성의 빛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또한 마음과 생각을 형성하는 연습을 받아들여야한다."
기도는 종종 믿음에 선행한다.
기도에 대한 대부분의 대중적 이해는 정반대다. 우리는 기도를 주로 자기표현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믿음과 느낌으로 시작하고, 그 때문에 기도를 배운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내면의 삶을 말로 표현한다.
그러나 사실 기도는 우리 내면의 삶을 형성한다. 그리고 전해 받은 기도로 기도할 때, 놀랍게도 우리는 때로 그 기도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을 발견한다. 그 당시에는 그 기도에 대해 혹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다.
고통과 슬픔의 시간에는 특히 그렇다.
극심한 상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종종 믿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지치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내가 삶의 깊은 고통의 시간 가운데 있을 때, 교회의 믿음은 나를 이끌어 주었다. 우리는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주간에는 믿지만, 또 다른 주간에는 그렇게 높이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우리말 사도신경은 "나는...믿사오며 "이지만, 영어로는 'We believe"로 시작한다) 믿음은 우리 안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 바깥의 실재이며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믿음이 휘청거리는 것을 발견할 때, 때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성인들의 신앙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믿는다. 믿음이 오롯이 나와 늘 오락가락하는 나의 신실함에만 달려 있지 않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질병이 주는 복된 굴욕은 육체적일 뿐 아니라 영적이기도 하다. 경건에 대한 우리의 환상은 단 한 번의 치통에도 사라질 수 있다. 몸이 꺾이면 우리의 의지도 꺾인다. 만약 자비, 친절, 온유 같은 덕의 습관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우리의 기질 자체 안으로 스며들지 않았다면, 질병은 우리가 얼마나 더 자라야 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몸이 둔하거나 피곤하거나 미열이 있으면, 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쉽게 절망에 빠지고 쓴 뿌리의 잔치를 벌이고 다른 사람들을 거의 배려하지 않는다. 내 삶에서 친절이나 인내나 거룩함으로 보이는 많은 것의 동력은 건강과 에너지 그리고 단순한 즐거움이다. 이런 것들이 사라질 때,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내가 그다지 친절하거나 인내심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허리 통증이 없었을 뿐이다.…
암 자체가 경축할 만한 뭔가는 아니다. 질병은 마땅히 그래야하는 상태가 아니며, 우리는 그 반대인 척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허락하기만 하면, 우리의 육체적 취약함은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 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법을 때로는 신음으로, 때로는 구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심을 발견한다.
역사적 교회는 질병을 회개와 덕이 자라는 기회로(아무리 환영하지 않는 기회라 해도) 불렀다. 이것이 한 늙은 수도사가 암이 생명을 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다. 이는 질병이 우리의 죄악됨의 결과라든지, 건강이 우리의 덕이 가져온 결과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특정한 종류의 체현된 고통을 통해 우리가 충분히 연약해짐으로써 새롭게 빚어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17세기의 성공회 사제 제러미 테일러는 "어떤 의미로든 질병을 견딜 만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고 썼다. 하나님은 암이나 구내염을 우리에게 보내기를 즐거워하시지 않지만 우리 몸이 망가질 때 우리를 만나 주시고 심지어 그 망가짐을 유익하
게 사용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질병이 정결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언제나 말해 왔다.
*나는 우리가 더 작은 위기에서도 이러한 동일한 은혜를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만약 암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접질린 발목과 장염 같은 보다 평범한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 하찮은 “저승사자의 경고장"이 단지 우리가 견뎌야 하는 지루함이나 우리의 성공과 자율성이라는 잘 닦인 길에 움푹 팬 구멍들이 되는 대신, 우리의 몸이 우리에게 현실을 교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폐와 발가락과 주름이 우리에게 인간성과 겸손을 지도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연약하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성취한 것의 총합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냄새나고 붓고 마모되며 또한 순전히 사랑받는 피조물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자유를 가져온다.
*인간의 몸은 영광스럽다. 우리의 관절이(대부분의 경우) 기름칠이 잘 되어 있고, 우리의 폐가 10년, 그다음 10년-우리 중 일부는 품질보증기간을 훨씬 더 넘겨서 동안 계속 숨을 쉬는 것은 경이며, 흔한 기적이다. 인간의 몸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욱 화려하며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거의 지각하지 못한다. 몸이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오직 몸이 작동하지 않을 때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평범한 한 주에서 발견되는 종류의 풍성한 자비를 엿본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전부는 아니지만) 우리의 몸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대로 제대로 작동하는 순간들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바다의 맛, 황홀할 정도로 완벽하게 익은 복숭아,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유쾌한 뻐근함 같은 것을 안다. 가볍든 심각하든 질병은 우리가 맛보도록 지어진 영광이 축소되는 것이다. 병실의 생기 없는 백열등이나 침대 위에서 거슴츠레한 눈으로 보내는 하루가 가져온 흐릿함이 삶의 싱싱한 맛을 대체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병든 이를 돌보아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인간이 축소되는 이 특정한 종류의 경험 안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부드러움과 심지어 풍성함을 가져오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가 당연히 맛보도록 지어진 영광을 기억한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이 선물임을 상기한다. 노력해서 얻을 수 없다. 변함없는 게 아니다. 우리가 보유한 어떤 안녕도 결국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우리의 몸을 감사함으로 받는다. 그 안에서 우리는 타락을, 모든 것이 깨어졌고 아직 새롭게 되지 않았음을 맛본다. 저승사자는 경고장을 주기 위해 우리를 갓길에 멈춰 세운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영원하도록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의 몸은 흙 속에서 육신의 견고함으로 일어날 것이며, 그 영광은 영원히 축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우리는 우리 몸의 선함 속에서 천국의 약속을 맛본다. 그사이에 우리의 살과 피는 좌절과 구출 사이에서, 타락과 부활 사이에서 유예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세포 안에서 그것을 엿본다. 그리고 이 긴장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신음하는 법을,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을 향해 떨리는 손을 드는 법을, 몸의 구멍과 살갗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리치 멀린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교회에 가는 것이 어째서 우리를 위선자로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완벽하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다면 갈 필요가 없다. 일요일 아침에 다른 완벽한 사람들과 조깅이나 하면 된다. 교회에 갈 때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가족에게 가는 길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당신과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해 내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다시금 고백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의 지도력이 필요하다. 어떤 책임감과 도움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것은 피곤한 사람들,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 사람들, 중독과 싸우는 사람들, 자신이 되기를 바라는 존재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부르시는 것은 피곤한 사람들,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 사람들, 중독과 싸우는 사람들, 자신이 되기를 바라는 존재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이 강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 몸부림치고 회개하는 사람들, 반복해서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교회고,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은 강하시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말하면,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멋스러운 연약함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온라인에서는 자질구레한 불완전함을 보여 주는 것이 유행이다. 엉망인 것이 우리 개인 상표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너무 정돈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인기가 별로 없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 보여 주기 위해 특별히 애를 쓰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너무 기획되었다. 우리의 가장 솔직한 약점들은 우리를 결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약점들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아는, 우리 편에서는 차라리 잊었으면 하거나 어쩌면 우리 자신조차 모르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취업 면접에서 절대로 밝히지 않을 것이며, (바라기로는) 우리의 추도문에서도 절대로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멍에를 고급 아파트나 휴가 상품으로 바꿔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다른 종류의 멍에, 즉 자신의 멍에를 제안하신다. 그리고 그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고 말씀하신다.
명에는 지배나 권위를 대표한다. 멍에를 지는 것은 누군가에 대한 굴복을 의미했다.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굴복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나한테 배워라"라고 말씀하신다. 피곤한 우리는 쉼으로 부름받지만, 또한 배우는 것으로, 권위를 가진 분에게서 배우는 것으로도 부름받는다. "온유하고 겸손[한]"분께 배운다면, 우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멍에가 빠진 선택지는 없다. 내가 보기엔 피곤한 사람은 아예 멍에를 풀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 대신 멍에가 빠진 선택지는 없다. 내가 보기엔 피곤한 사람은 이에 멍에를 풀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 대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멍에 아래 있으며, 누구에게도 혹은 무엇에도 멍에가 묶이지 않은 상태는 불가능하다고 암시하신다" 종교적 율법과 빈틈없는 명상의 멍에일 수도 있고, 신생아만큼 시끄럽고 진을 빼는 욕망과 열정의 멍에일 수도 있다. 물고기에게 헤엄치는 물과 같은 우리의 문화적 규준이나 당연시되는 전제의 멍에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지친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길을 따르지 말고(이는
정말로 무거운 명예일 수 있다). 그분에게 굴복하고 배우라고 그분의
명예를 지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멍에는 왜 가벼울까? 우리의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몸을 잘해 내고 착한 아이처럼 굴면 우리 꿈을 이루어 주시고 우리 인생이 잘 풀리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행복한 결혼 생활이 보장되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직업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에? 건강할 것이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기억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분은 우리를 쉬운 명예로 부르시는 동시에 우리의 십자가를 지도록 부르시기도 한다. 어떻게 동일한 분이 우리를 쉬운 멍에와 십자가 두 가지 모두로 부르실 수 있는가?
예수님의 멍에가 가벼운 것은 그분이 안락함이나 성공을 약속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함께 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짐을 자신의 어깨에 지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일때, 삶의 계획이 허물어졌을 때, 여전히 나는 예수님으로도 충분했는가? 아니면 예수님과 성공을 예수님과 행복을 예수님과 열매 맺는 사역을 구하고 있었는가? 인생에서 몇번이고 쓰라린 실망에 직면할 때, 곧 닥쳐올 일에 겁이 날때, 실패했을 때, 믿었던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을 때, 나는 그 질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 외에는 많은 것을 약속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스스로 우리에게 멍에를 묶으시고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를 사라지게 하시지는 않겠지만, 그분 자신이 그것을 함께 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으셨다. 어떤 행복도, 성공도, 이루어진 바람도 감사히 받아야 할 선물이다. 그것들은 모두 뜻밖의 횡재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그분 자신을 약속하신다. 다른 어떤 수단의 목적이 되는 것도 거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로 영원한 삶을 맛볼 수 있으며, 성경은 그러한 영원의 삶을 천국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나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 혹은 나쁜 일이 언제까지나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분을 아는 것으로 정의한다(요 17:3). 약속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다른 것은 없다. 받아들이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다.
당신은 예수님으로 충분한가?
*순전한 노력과 의지의 힘으로 기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면, 피곤함이 이에 대한 부풀려진 인식을 찔러 터트리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나에게 기도가 가장 힘든 시간은 지쳐 있을 때다. 영적 훈련에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탈진은 결심을 탕진시킨다.
우리의 힘이 증발해 버리고 기력이 소진되었을 때, 우리는 종종 열렬한 신앙의 감정을 큰 소리로 고백하거나 기도의 말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피곤함이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는 법을 배우기 위한 전제 조건이나 마찬가지인 이유다.
이는 또한 피곤함의 계절이 나에게 기도하는 새로운 다른 방법을 가르쳐 준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늘 말 자체를 좋아했고, 그래서 말이 많은 기도를 좋아했다.
20대 후반에 실망과 두통의 시기를 지나며 내 안에서 말이 고갈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기도에 내가 알던 것 이상이 있음을 천천히 배웠다. 지치고 신앙이 시들었을 때, 나는 교회의 기도를 나의 기도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나는 기도가 개인 교사이지, 임무 수행이 아님을 배웠다. 기도는 우리가 쓰러졌을 때 치유자에게로 우리를 실어다 주는 환자용 들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지쳐 아예 기도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음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아시는 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바울은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라고 쓴다. "내게로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의 영이 우리에게 오신다.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6-27) 우리가 약할 때, 성령은 우리를 완전히 유능하거나 모든 것이 충족되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으며, 인생의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말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 길고 어두운 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임을 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대를 거듭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리란 것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사람들이 마술을 다루는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는 주무시고 계신 하나님을 깨우는 주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소망의 행위로서 우리는 기도한다. 안전과 편안함을 약속하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보살피심을 믿기에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라는 큰 이야기의 일부이기에 우리는 기도한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맛보신 창조주에게 우리는 기도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랑한다. 라벤더 향, 스틸 기타 튕기는 소리, 비를 잔뜩 머금고 모여드는 구름, 우리의 영광스러운 몸은 이 모든 향유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 거룩한 그릇은 우리에게 소금의 짠맛을 알고 바삭한 치킨을 씹게 해 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차원에서 감각적 경험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괜찮다고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 있도록 만들어졌고, 몸 안에서 온전하게 이 경이롭고 감각적인 행성을 즐기도록 지어졌다. 죽음의 형이상학이 어떠하든, 우리 모두의 몸은 쇠약해지는 때가 온다. 더 이상 어떤 맛도 냄새도, 소리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그래야 하는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죽음을 감상적으로 다루고 그 잔혹함을 축소한다면, 결국 종종 우리도 모르게 부활의 소망을 하찮게 만드는 셈이다. 죄의 권세는 우리에게서 이 세상의 어여쁘고 밝은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위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연약함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셔서 모든 것이 고집스럽게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 사셨고, 죽음의 어둠을 내려다보셨다.
죽음은 원수다. 그러나 죽음은 이제 패배한 원수다.
*성경에서 '복되다'라는 단어는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주린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박해를 받은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마 5:3-12). 이러한 인간의 취약함의 깊이는 특정한 종류의 복됨을 낳는다.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복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엉망진창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 주는 바로 그것인 경우가 많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내 삶의 황폐한 장소들은 하나님이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시는 곳이다. 내가 가장 원하는 그리하여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꼭 쥐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이 아니라면 나를 축소시키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것일 경우가 많다. 내 생명을 구하는 길은 그것을 잃는 것이다.
*취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진정으로 복된 것에 우리를 맞추어 가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결코 그것을 찾지 않을 곳에서 얼마나 자주 발견되는지를 알아 가는 일생의 연습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복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마카리오스’ 인데, 성서학자 조너선 페닝턴은 이를 '번영하는으로 번역한다. 슬퍼하는 사람은 번영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번영한다. 온유한 사람은 번영한다. 수천 가지 광고와 유명인들의 보증을 통해 내게 태어나면서부터 각인된 인간의 번영에 대한 비전은 분명 슬퍼하는 것, 온유함, 가난, 혹은 핍박을 특징으로 삼지 않는다.
페닝턴은 이어서 예수님이 각각의 복을 어떻게 구현하셨는지 보여 준다. 인간의 번영이, 즉 인간의 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페닝턴은 이어서 예수님이 각각의 복을 어떻게 구현하셨는지 보여 준다. 인간의 번영이, 즉 인간의 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질고를 아는 자 예수님보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그분은 가난 속에서 불편한 삶을 사셨고, 결혼하시거나 성생활을 하신 적도 없으며, 친구들에게서 버려진 채 비교적 무명으로 고통 가운데서 죽으셨다. 여기에 복되신 분,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 주는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이 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번영과 풍성한 삶으로 이끄는 낯선 그분의 길을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성 베네딕투스의 규칙에서 베네딕투스는 "선한 일을 위한 도구"를 권한다.
매일, 네가 죽으리란 것을 스스로 상기하라.
매 시간,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네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시선이 네 위에 머무름을 인식하라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에 열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어둠을 경축하는 고스(goth) 문화로 부름받은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으리란 것을 매일 스스로 상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날, 관계를 바로잡는 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우리 주변의 세상을 축복하는 날이 바로 오늘임을, 그 이유가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일 수 있기 때문임을 인식하게 해 준다. 우리의 비불멸성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알고 그 이야기에 비추어 사는 법을 우리의 작은 기쁨과 비극을 영원의 영역 안에 위치시키는 법을 가르쳐 준다.
*페이스스북을 확인한다. 트윗을 한다. 현재의 정치 논쟁에 열중한다. 바쁘게 지낸다.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수천가지 다른 일로 내 삶을 채운다.
그러나 떨쳐 낼 수 없다. 나는 매일 크고 작은 방식으로 죽음과 맞닥뜨린다. 잠, 질병, 피곤함, 그리고 밤 자체는 일상적이고 초대받지 않은, 우리 이마 위에 그어진 재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네가 죽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런 뒤, 우리의 비불멸성을 확인하는 이러한 매일의 징표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선한 일을 위한 도구로 변화된다.
사제가 되자 갑자기 나는 사순절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표식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재의 수요일에 사제로 섬기는 일을 사랑한다. 그것은 순전히 반문화적이다.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반짝거리는 우리의 미국식 낙관주의에 대고 고대 교회가 말한다. 우리로 하여금 엄연한 사실에 직면하게 만든다. 비불멸성을 거부하는 진부한 부정의 유혹 한가운데서 나는 피할 수 없는 진리를 들고 교회의 몸 앞에 선다. "잊지 마십시오" 나는 말한다. "우리는 흙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살면서 구하는 것들은 잠깐입니다. 진짜를 붙드십시오. 이것은 내가 매년 행하는, 펑크록 정신에 가장 가까운 일이다.
*시몬 베유는 "기독교가 갖는 종극의 위대함은 고난을 위한 초자연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것의 초자연적 사용에 있다"고 썼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고난을 아픔의 장소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도 보았다. 고난은 단지 우리에게 일어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서 일한다.
시리아의 성 이삭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데서 비롯된다. 이 기도의 대화는 고요함을 통해 생성되고, 고요함은 자아를 벗겨내는 것을 통해 온다. 순서에 주목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은 기도에서 흘러나오고, 기도는 고요함에서 흘러나오고, 고요함은 “자아를 벗겨 내는 것”에서, 즉 자기 욕망과 계획의 매우 고통스러운 포기에서 흘러나온다
고난은 자아를 벗겨 낸다. 이것은 끔찍하게 아프게 들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와 목적은 아픔이 아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극심한 고난을 사용하기 좋아하시는 가학성애자가 아니다. 그러나 구속의 연금술 안에서 하나님은 오직 슬픔이기만 한 것을 취하셔서 그것을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께 사랑 받는 법을 배우는 길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 이는 부활이 오기 위해 죽음이 필요한 것처럼, 풍성한 삶으로 가는 낯선(그리고 보통은 원치 않는) 길이다. 스캇 케언즈는 이렇게 쓴다. "힘든 길은 우리 대부분이 겨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고난, 고통, 아픔은 놀랍도록 효과적이다. 그외에는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말이다.
*바울과 베드로 두 사람 모두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빌 3:10 벧전 4:13).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괴로움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길뿐만 아니라, 자주 천천히 그리고 언제나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진짜 생명으로 오르는 길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의 무덤이나 응급실의 긴급 환자 분류에서도 황송하게도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 역시 우리의 고난 속에서 겟세마네의 고뇌와 십자가의 극한 고통, 예수님 자신의 어두운 무덤을 공유한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이 당하는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고 있다고 말한다 (골 1:24). 이 말은 많은 신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또한 많은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신학자들의 영업이 계속되도록 도와주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충분히 고난을 받지 않으셨고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 남은 값을 우리의 불행으로 치러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아픔과 고난 속에서 그분을 아는 것을 언제나 수반한다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예수님의 고난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늘 계속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안락한 삶과 쉼 없는 행복으로 가는 승차권을 사 주신 게 아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분의 이야기 안에서 자라 간다. 예수님의 전기는 우리를 통해, 교회를 통해, 심지어 - 아마도 특히 우리의 역경을 통해 계속된다.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을 구분했다. 영광의 신학에서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주어진 고난을 쾌락, 번성, 자유로 화려하게 치장해 주심으로써 자신의 미쁘심을 보여 주신다. 반대로 십자가의 신학은 고난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한다. 영광의 신학은 제국의 논리를 똑같이 따른다. 권력, 돈, 쾌락이 위대함의 재료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가 위아래가 뒤집어진 곳이며, 하나님은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가까이 계신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안녕과 부, 성공을 하나님의 총애의 증거로 보고 고통은 하나님의 부재나 죄에 대한 처벌의 장소로 보려는 유혹을 받는다. 아픔과 실망에 직면할 때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지 의문이 든다면, 우리는 영광의 신학에 젖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실 하나님을 구하고 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증거가 종종 우리가 그것을 가장 발견하고 싶지 않은 장소 즉 연약함과 아픔, 십자가에 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견딜 때, 그것에 대해 무덤덤하거나 심지어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위에서 평온함의 표시를 보이시지 않았다. 그분은 눈물을 흘리셨고 탄식하셨고 고뇌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고 자신의 필요와 고통과 목마름을 인정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혹은 다른 누구의 아픔도 가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때도, 우리는 성경이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을 조심스레 파수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처음 몇 구절
에서는 '위로'와 '고난이라는 단어가 공생적으로 이동하다. 피츠 시몬스 앨리슨은 이 분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우리의 고난 그리고 성령 사이의 본질적 연관성이라고 말한다. 반복해서 말하기를 결코 꺼리지 않는 마음을 단 몇개의 짧은 문장에서 위로를 열 번, 고난을 일곱 번 언급한다. 앨리슨은 이 구절들을 요약하면서,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는 바람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진짜 생명, 평화, 교제, 인내, 성품 소망,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위로자를 잃게 한다고 말한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은 슬픔, 혼란, 좌절, 의심을 아는 것이지만,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영혼이 가장 갈망하며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위로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오직 위로자의 임재 안에서만 위로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낯선 종류의 위로다. 어렵게 얻는 것이다. 고급시트와 초콜릿 트러플, 또는 훌륭한 차 한 잔과 따뜻한 닭요 같은 위로가 아니다. 이런 것들도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발견하는 위로는 사치나 안락함의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은 시리아의 성 이삭이 영혼의 시력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난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 어둠 속에서 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 무엇을 보도록 배우는가? 빛,소망, 기쁨, 새롭고 심오한 방식으로 보게 되는 하나님 자신.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이 영혼의 시력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선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만큼이나 그 고난에 대해 하나님을 마음껏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직 어둠 속에만 피는 꽃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의 십자가에서 어떤 영광이라도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고통이 우리 안에 행하는 일에 협력해야만 한다.
정녕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부르심이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에 하나님께 협력하라니.
우리가 지도록 부름받은 십자가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기도의 실천은 우리가 가장 원하지 않는 길에서 오는 성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돕는다. 고난 즉 자아를 벗겨 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고귀하지 않다. 그것이 고요함으로 그런 뒤 기도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에게는 아플 때 위로받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음식과 물이 필요한 것처럼 위로받는 것 역시 분명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자 하나님 안에서 위안을 발견하지 못하면 불가피하게 다른 곳에서 그것을 구할 것이고, 자신이 위안을 구하며 습관적으로 향하는 그것을 결국 예배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른 위로들은 그 자체로 아무리 선할지라도, 그것을 우리 영혼의 피난처로 삼을 때 결국 우리를 죽이는 것이 되기 쉽다.…
고난에는 마취가 아닌 위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진짜 소망, 밤을 통과할 수 있게 해 주는 종류의 소망이 필요하다. 분명 하나님은 지상의 좋은 것들을 통해, 커피 향이나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러나 고난의 부유물이 더 깊고 더 높이 쌓여갈 때, 피조물 위안이 궁극적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심지어 좋은 선물조차, 우리가 통중 안에서 강박적으로 그것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는 우리를 축소시킨다.
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통증을 제거해 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한 위로자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통과하며 걷기 위해,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는 어둠을 직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기 싫어하는 슬픔, 상실감, 외로움 같은 것을 느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쓴 잔을 마셔야 한다. 지름길은 없다. 무료입장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위로로 가는 낯선 길이다. 우리 영혼의 무게를 견디기에 충분할 만큼 본질적인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은 통증을 마비시키기 원한다. 그래서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위로를 구한다. 마취제 같은 쾌락이나 오락거리로 달려갈 때, 우리는 오직 취약함 안에서만 받을 수 있는 지속되는 위로를 놓치기 때문이다. 고난에 대한 위로는 언제나 그리고 오직 선물로 온다.
*지금은 유명해진 '우리를 죽이지는 않는 것'에 관한 이 진부한 문구를 처음 말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이 표현은 그의 책 『우상의 황혼에 나온다. "삶의 사관학교로부터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힘들지만 나를 죽이지는 않는 크고 작은 일들에 나는 매일 직면한다. 그리고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 사실은 나를 더 약하게 만듦을 발견하고 있는데, 어쩌면 바로 그것이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영광의 길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그리고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 발견된다는 것 말이다. 인생의 사랑의 학교에서, 우리를 죽이지는 않는 고난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와 무력함에 더 살아 있게 만들고, 따라서 더욱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준다.
분명 고난은 회복 탄력성을 길러 준다. 부러진 뼈가 나으면서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아픔이나 분투를 전혀 모를 때 더 유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극심한 괴로움 저편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단단한 신실함과 투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회복 탄력성은 뚫리지 않는 강인함이라는 니체의 비전에 맞게 우리를 형성하지 않는다. 즉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는 존재임에 대해, 우리 자신의 취약함에 대해, 그리고 다른 이들의 취약함에 대해 더욱 열려 있게 만든다.
마르바 던은 "하나님을 성소에 모시기와 연약함의 신”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조차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대속을 성취하셨기에,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세상에 대한 증언을 성취하신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를 환난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환난에 직면하여 우리의 힘을 '교환'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C. S. 루이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종교로 가지 않았다. 나는 포트와인 한 병이 그렇게 해 주리란 것을 늘 알았다. 당신이 정말로 편안하게 느끼게 해 주는 종교를 원한다면 분명 나는 기독교를 추천하지 않겠다. 그 대신 그는 단기적으로 우리를 아주 행복하게 해 줄 자기 숭배를 추천한다고 말한다. 아니면 미국에서 시판되는 특허품 -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원하시는 것이기도 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영성-도 잘 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번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퀴나스를 인용하면, 그 번영은 언제나 고된 선이다. 독신을 서약한 론 벨가우는 이렇게 쓴다. 고된 선은 분투가 필요한 선이다. 싸울 가치가 있는 선이고, 역경 앞에서 두려움과 소망, 그리고 인내를 고취하는 선이다. 또한 '고된 선'은 할리우드에서 좀처럼 말하지 않는 문구고, 매디슨가(광고회사들이 모여 있는 뉴욕의 거리-편집자)에서는 아예 거의 들리지 않는다. 나는 교회에서도 이 문구는 잘 들리지 않는다고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그러나 벨가우는 구원 자체가 "고된 선이며, 우리가 모든 것을 기쁘게 희생하여 얻고자 할 밭에 숨겨진 보물이자 값비싼 진주'라고 쓴다!
기독교 신앙이 고난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신앙의 숨겨진 차원 혹은
혹은 신나고 영광스러운 삶을 약속하는 포장지 아래 감추어진 뭔가가 아니다. 미끼나 스위치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십자가로 부르신다. 죽으라고 그들의 목숨을 잃으라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얻으라고 하신다. 그분은 분명히 홍보에는 형편없으셨다. 그분은 판매원이 아니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스스로 독배를 드셨다. 그분은 제자도의 대가에 대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아픔에 대해 정직하셨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리고 그분 자신의 몸으로 그 모든 것을 껴안으셨다.
*나는 하나님이 고통을 왜 허락하시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안다. 그분은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가운데서 발견되신다.
사제로 일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이나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당하는 고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들의 삶을 형성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하루 대부분을 중증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돌보며 지내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전에는 한 번도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자기 삶에서 영적 형성의 실천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 그를 변화시켰다.
나는 매우 놀랐다. 그토록 심오하게 자신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긍휼과 그토록 영광스럽게 가까운 무언가를 어떻게 한 번도 영적 실천으로 보지 못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말했다. "한번도 그것을 선택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
우리는 영적 실천을 성경 읽기나 기도, 교회 출석처럼 우리가 택해서 받아들이는 뭔가로 생각한다. 이런 것들만 우리 인생에서 분명하게 영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나머지는 그저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고 시간, 기회, 일생의 생기 없는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형성력을 지닌 영적 실천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일 때가 많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가장 심오한 방법은 자주 고통 안에서다.
*테레사 수녀 Macher Teress는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변장한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고통에 시달리는 이에게 동정을 보여 주시고, 또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 주신다. 그분은 소비문화의, 정말로는 안락함. 번영, 건강. 현재적 성취가 진짜 부요함이라고 믿는 소비신앙의 공허한 약속을 드러내신다.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란 내 힘으로 인생에서 쥐어 짜내는 즐거움이라는 거짓말을 폭로한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예수님의 길은 고되다. 그분은 한 번도 다르게 약속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약속하시는 것은 풍성한 삶이며,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아 가는 기독교 신앙의 이 기예를 연마하는 일에는 평생이 걸린다. 그러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은 풍성한 삶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가르쳐 준다. 즉 그것은 완벽한 결혼 생활이나 줄기차게 성공하는 인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이다.
*기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서 오기 때문에 우리가 실망이나 슬픔을 만날 때조차 그 자리에 있다. 나우웬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슬플 때는 기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이 중심이 되신 사람의 삶에서는 슬픔과 기쁨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
기쁨을 연습하는 것은 낙관주의를 구축하고 유쾌함을 가장하고 아픔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수영 선수가 발차기를 연습하거나 요가 수행자가 아래를 향한 개 자세를 훈련하는 것처럼, 우리는 의도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우리를 열어 놓는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제시할 수 있는 어떤 필요보다 그분의 사랑이 더 깊고 더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실재 안에 살기를 연습한다.
모디스트마우스라는 밴드는 ‘나쁜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좋은 소식’이라는 제목이 달린 아주 훌륭한 앨범을 발표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을, 애통과 슬픔을 위한 공간은 전혀 없이 행복하게 박수만 치는 충일함으로 그리면서 의심과 낙심을 보기 좋게 포장한다. 그런데 나쁜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어둠을 즐기고, 불편한 진정성을 들먹이며 아무리 비의도적일지라도 빛을 무시할 수 있다. 우리는 소망을 무시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키우고 모든 후회를 곱씹고 통증을 가로막는다. 우리는 좋은 소식을(그것이 나쁜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조차) 껴안는 사람이 되는 법을 연습을 통해 배워야만 한다.
어둠 한복판에서 기쁨을 흉내 내거나 연기해서는 안 되지만, 선택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취약하고 용기 있는 선택이다. 기쁨을 선택하는 것은 모든 선물의 존재를 알아보는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기쁨의 연습은 감사의 연습과 분리될 수 없다. 감사는 기쁨을 낳는데,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 우리가 서 있는 그 순간의 삶을 선물로 받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는, 진정으로 회심한 삶이다"라고 나우엔은 말한다. 그러한 삶에서 감사는 기쁨이고 기쁨은 감사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놀라운 표지가 된다.“
*수천 년 전, 또 다른 초보 엄마도 태연함의 기도를 드렸다. 자신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 천사를 만났을 때, 마리아는 곧바로 기쁨에 겨워 춤추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 놀랐다." 어리고 아마도 무서웠을 마리아는 위험한 신비의 심연으로 곧바로 내던져졌다. 그녀는 순진하지 않았다. 기쁨이 값싸게 오지 않음을 알았다. 기쁨은 보호막이 필요함을 알았다. 마리아는 놀랐지만, 그리고 그녀의 놀란 마음은 나머지 우리보다 더욱 극심했을 가능성이 크지만(우리 중 많은 수는 천사를 본 적이 없다), 유보된 기쁨과 고통 사이에서 기다려 본 누구라도 경이와 공포, 소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마리아가 그날 알았던 바로 그것을 안다. 그러나 천사에게 보인 마리아의 반응에서, 우리는 그녀가 기쁨의 자리로 선회하는 것을 본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눅 1:38). 이 순간에서 우리는 기도의 표본을 본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열의와 함께든 한숨과 함께든, 그녀는 말한다. "좋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