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에 민법을 한글로’
김소내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화면을 틀다 보니 화면 끝머리에 ‘60년만에 민법을 한글로’라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눈이 번쩍 띄었다. 촛불로 들어선 정부가 다르긴 조금 다른 모양이다. 반가움의 큰 손뼉을 치고 싶다. 민법의 한글화는 민법을 진정 국민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글로 쓰기’를 주장하는 것도 괜히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는 ‘친일’을 청산하자는 것이고, ‘사대’를 청산하자는 것이고 소수 기득권을 청산하자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민주주의가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였던가? 모든 것이 비공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저들끼리 쑥덕쑥덕 하다가 안 되면 내려놓거나 돌려주려 하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민을 위한다며 일꾼이 주인을 죽이지 않았나?
경제발전은 또 얼마나 빛 좋은 떡살구였나? 경제는 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없고, 기업은 돈을 버는데 국민은 가난하다. 농협은 흥성하는데 농민은 쇄락했다. 이런 것도 모든 것을 공개하지 않고 누구누구에게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큰손의 갑질, 중소기업 잡기, 골목상권의 몰락은 무엇을 뜻하는가?
갖가지 법령은 또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였나? 내용은 알고 보면 근사하나 다수 국민이 알지 못하는 용어로 인해 권리를 찾지 못하고 피해를 보아도 보상받지 못하지 않았나?
그 결과 친미보수기득권세력의 영원한 성공, 끈질긴 친일의 더 버젓하고 당당한 행보를 낳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좌절, 주권 훼손, 인권 침해, 국익 손상이 일어나도 막지 못한다. 나아가 일본의 반성을 촉구할 수 없고 미국이나 강대국의 오만을 막을 수도 없다.
요사이 자기네만 애국세력이라면서 태극기를 들고 데모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태극기부대라고 비아냥댄다. 자기네들만이 무슨 애국 세력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태극기가 데모를 한다? 심각하다. 태극기부대의 태극기까지는 그래도 봐 줄 수 있겠는데, 도대체 거기에 성조기가 나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미국이, 남이 우리를 영원히 지켜 주리라고 생각하는가.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리말도 저런 정신 속에서 영어 앞에 저렇게 나부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벽 앞에 선 느낌이다. 그들도 나를 벽이라고 하겠지 하고 생각하면 삶이 너무 허망하다.
국어교사로서 우리말을 외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씨알이 안 먹혔다. 아이들 개개인을 나무라거나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교실마다 이제는 썬데이, 먼데이를 알파벳 원문으로 써 붙이는 것은 보통이요, 헤피 버스데이 투유, 생큐 … 이제는 대화에서도 영어가 단순한 어휘 차원에서 나아간 긴 문장으로 나온다. 세종대왕이 살았다면 몇 번을 돌아가셨을 것이다.
영어가 아무리 국제용어로서 필요하다고는 하지마는 이렇게 갑자기 드넓게 깊게 파고들 줄은 몰랐다. 동사무소가 주민자치센터가 되고, 농협이 엔에이취뱅크가 되고, 토박이먹거리가 로얄푸드가 되고, 농민가게가 파머스마켓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모두 뉴욕이다. 모두가 영어 속으로 들어가서 안 나오는지, 못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 정신을 잃었다. 우리말은 자주성 그 자체인데 …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하는 솜씨를 뽐내지 않은 우리 대통령이 몇이나 되는가. 영어에 대한 막연한 바보 같은 짝사랑은 마리화나보다 독하다.
과거에는 그래도 국어사랑 나라 사랑!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런 구호도 있고 노래도 있고 순수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국어사랑, 통일노래가 없어졌다. 미래도 희망도 순수도 없는 야합, 야심, 야욕, 욕설, 욕망, 야망만이 득실대는 암흑기였다. 아니 아직도 암흑기다.
촛불이 켜지더니 평창에서 평화올림픽이 거행되고 어디선가 통일 노래도 흘러나온다. 오늘 아침 ‘민법의 한글화’ 소식이 내 귀를 때렸다. 이제 국어운동도 단순한 캠페인을 넘어서야 한다. 무슨 호소는 허공만 가를 뿐이다. 이제는 시민단체가 정부와 자치단체와 소통하고 설득하여 일제 때 잃어버린 토박이 마을 이름 찾기 운동 따위를 국민 청원으로 벌일 수도 있다. 정부와 소통해 ‘주민자치센터’를 우리말로 바꾸는 국민공모 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한글날에서 나아가 한글주간을 선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행동에서 한글운동도 힘을 받아야 한다. 이제 조심스럽게 희망을 말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자.
얼마 전인 2016년 필자가 태어난 면의 이름을 바꾼 적이 있다. 본디는 예천군 은풍면인데 일제가 은풍면을 ‘상리면’과 ‘하리면’으로 기계적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주민 서명을 받아 군의회로 하여금 조례를 제정케 해 ‘상리면’을 ‘효자면’으로, ‘하리면’을 ‘은풍면’으로 바꾸었다. 주민들이 모두 좋아하고 자신감도 생겼다. 일제의 잘못을 작게나마 바로잡은 것이 뿌듯했다.
그런데 서명을 추진하면서 이 두 면은 본디 한 면이었으므로 다시 한 면이 되는 것을 바라는 주민 다수의 뜻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행정구역의 통합이나 변경은 주민의 뜻을 모아 도의회의 조례 제정으로 가능하니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마을 이름도 주민이 원한다면 토박이이름을 찾아 시군 의회의 조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은풍면 우곡리의 경우 읍실마을, 우곡마을, 정자촌을 합하여 ‘우곡리’가 되었었는데 현재 우곡리를 다시 나누어 읍실마을을 ‘우곡1리’로 우곡마을을 ‘우곡2리’로 정자촌을 ‘우곡3리’로 부르며 이장을 각각 두고 있다. 이왕 이장을 따로 두고 있는데 본디 마을 이름을 되찾아 읍실, 우곡, 정자촌을 살려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온 나라의 마을 이름들이 작은 마을 통합 과정을 거쳐 이장을 하나만 두다가 지금은 다시 마을이 나뉘어 이장이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마을 이름은 아직도 통합의 흔적인 무슨 1리, 2리, 3리 등으로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또 큰 마을인 금당실의 경우도 동촌을 금곡1리, 서촌을 금곡2리, 남촌을 금곡3리, 북촌을 금곡4리로 하고 이장을 각각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금곡1리, 2리, 3리, 4리보다는 금당동촌, 금당서촌, 금당남촌, 금당북촌으로 하면 얼마나 듣기 좋고 정겹고 알기 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