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융중 초입에 이르러서 말고삐를 늦췄다. 가을이었다. 들판에서는 곡식들이 낫질을 기다리듯 영글어 있었다. 문득 그들의 귓전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가락이 한 소절 흘러들어왔다.
너른 들판에 핀 곡식은 황금빛 물들었고
그 향기는 햇빛 받아 어디든 진동한다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지금 지나고 일할 수 없는 밤이 오면은
눈물 흘려도 소용없으리니…….
아이들이 부르기에는 무언가 뜻이 깊었다. 드러내놓고 서두를 것을 말하는 노래였다. 유비는 가까이 있던 아이를 하나 불러 물어보았다.
"얘야. 그 노래는 누가 가르쳐준 것이냐?"
"백화랑님이 지으시고, 와룡 선생님께서 곡을 붙이신 거예요."
"……와룡선생의 댁을 혹 알고 있느냐?"
"네에, 저기 언덕이 보이시죠? 이름을 와룡강(臥龍岡)이라고 하죠. 저곳을 지나 송림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작은 초려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와룡 선생님의 거처이십니다."
"고맙구나."
언덕을 넘어가면서, 관우가 물었다.
"백화랑께서 지으신 노래에 곡을 붙일 정도라면……, 두 분이 친우 관계이실까요?"
백화랑이란 아직까지도 백성들 사이에서 애칭으로 불려지는 유성의 별명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공명에 대해 크게 언급한 적이 없는 유성이었다. 마치 줄거리가 다 짜여진 극본에 이끌리는 듯, 풀숲에 감춰 놓은 보물을 찾는 듯했던 그의 모습이 세 사람의 뇌리에 종용히 떠오르고 있었다.
"글쎄, 그럴지도."
"지금 집에 있기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공명은 지금 집에 없네."
그 말에 놀란 것은 관우와 장비였다.
"예? 아니, 그런데 어째서……?"
"상대는 와룡이라 불리는 사람이네. 사는 곳도 미리 알아놓을 겸, 예의라고나 할까?"
"예의?"
두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그들의 말은 공명의 초려 앞에 다가서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유비는 직접 사립문을 두드렸다. 한 젊은 부인이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안고 나왔다.
황용이었다.
"나는 유비라는 사람이올시다. 공명 선생을 뵈러 왔습니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주인은 지금 여행을 떠나고 안 계십니다."
여행이라는 말에 유비의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초야의 은거 선비와 여행이란 것이 도통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없는 것을 몰랐다면 마치 계획적으로 피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불안감이 더해질 만도 했다.
"자주 여행을 떠나십니까?"
"아닙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알고 계신지요?"
"죄송합니다만, 그것까진……."
"하긴 그렇겠지요. 그럼 일간 다시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유비는 총총히 떠나갔다. 황용은 유비 일행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사립문께에 서 있었다. 그 때 집 앞의 높은 소나무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십니까?"
"오랜만이에요. 언니."
"아, 연매(戀妹)!"
화정연(華淨戀)이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추면독수(醜面毒手)라는 별명을 우기면서(다른 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음) 항상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다니는 여인. 황용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
"웬일이지? 이렇게 갑자기."
"호호호, 비둘기를 가져왔죠. 청색과 백색이에요."
"비둘기?"
"네에, 지금부터 정을 붙여 두면 말을 잘 들을 거예요."
"고마워. 저어, 그런데……."
"네? 왜요, 언니?"
"정말로……. 태제 전하께서는 전쟁을 불사하실 건가?"
순간 그녀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다행히 베일에 감춰져 있는 얼굴인지라 표정을 황용이 못 본 것이 다행이었다.
'아, 아무리 성별이 바뀌었다지만 그렇다고 목소리까지 다르진 않을텐데…….'
그랬다. 여자 혼자 있는 집에 사내 몸으로 찾아가기는 찜찜한 기분이 없지 않으니 여자가 되어서 가보겠다는 것이 유.성.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패밀리어이자 보조마법이 141가지나 되어 완전 보조마법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간 하운은 차라리 비둘기를 보내라고 했지만, 문제는 공명의 집에 비둘기는 없었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는 비둘기를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뒤 여자 몸으로 놀러온 것이었다. 인간이 바뀐 것이 아닌 만큼 지각은 엄연한 유성이다.
"그건 그분이 결정하실 일이죠 뭐. 하늘사랑 - 워낙에 무서운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까요. 그럼 언니, 저 갈께요."
"아니, 앉지도 않고 가려는 거야? 연매.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지 그래?"
"아니에요. 일이 조금 밀려 있어서요♡ 후훗, 언니. 그보다 언니는 준비 다 되었어요?"
"……짐작은 했어. 그가 떠날 때부터."
"그렇군요……."
"글쎄, 하지만 이렇게 빠르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다음 번 방문은 아마도 겨울이 될 거예요. 혹한(酷寒)에 눈보라 속을 뚫고 오는 길이죠. 물론 그런 날씨라고 선비의 풍류가 그치지는 않겠지만요."
화정연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순간 황용은 깜짝 놀랐다. 저 미소, 거기다 지금 생각하니 낯설지 않은 말투에 언젠가 분명 들어본 목소리. 하지만 목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는 데다 가슴도 봉긋하고 허리도 가느다랗고 목소리도 더 가냘픈데……. 설마, 아니겠지.
그녀는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분들께 더 송구해질 텐데 어쩌나……."
"걱정 말아요. 공명님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도 부족할 텐데요 뭐. 사람 하나 얻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거라구요. 자, 언니 그럼 저 진짜 가요. 안녕!"
"잘가, 연매. 다음에는 좀 한가하게 쉬어 가도록 하고!"
"네, 언니!"
순식간에 나무 위를 건너다니며 공명의 초려에서 멀어지자, 정연은 슬그머니 베일을 벗었다.
폐월수화(閉月睡花)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요, 저 강남의 제일 미인이라는 이교(二喬)를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게 하였으며, 어느 곳에 있던지 시선을 끌지 않을 수 없다는 천하제일미의 밝은 얼굴이 드러났다.
동시에 무림의 여인들이 즐겨 입는 치마를 순식간에 벗어던지고 대신 흰구름이 무색하도록 하얀 백의무복을 걸치고, 손에는 백봉우(白鳳羽)와 백옥(白玉) 구슬로 만든 백익옥선(白翊玉扇)을 든 한의 왕제, 유성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훗, 어느 새 왕자병에 걸려 버렸군."
나직이 혼잣말을 뱉는 유성이었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번성으로 향했다.
세월은 흘렀다. 공명이 여행을 떠난 지도 벌써 반 년. 그 동안에 신기하게도 남침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조와 손권 쪽에서 트러블이 보고되었으면 되었지…….
유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가벼운 투로 하운과 정세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손책은 호전적인 데가 있었는데."
"소패왕이라 불려서 그런지 그런 마음이 더욱 일었던 듯합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역시 현재의 강동 군주, 손권은 인물일세. 3대의 이름을 물려받아 지켜오고 그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낸 것만으로도 하성대공(河星大公)의 이름이 충분하지 않는가?"
"……왜 하필이면 하성(河星)이신지요?"
단 세 개 뿐인, 앞으로 세워질 한나라의 대후(大侯) 자리를 삼성대공(三星大公)으로 칭하는 것은 그리 비밀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하운의 궁금함은 그리 타당하지 못한 것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적어도 유성이 보기에는 말이다.
"그는 물과 인연이 깊잖아. 조조가 돌아오면 지성대공(地星大公), 숙부님은 휘성대공(輝星大公). 이름 다 지어 놨으니 호칭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미리 방지한 셈이지 뭐. 안 그런가? 그런 문제 때문에 몇 날 몇 일을 끈다는 건 시간 낭비라고. 낭비."
"손권은 물 - 남쪽에 살면서, 강한 수군력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하시겠지만, 조조는 왜 지성대공입니까?"
"그야 중원 땅을 5분의 3 가까이 차지한 전적을 대폭 인정해줘야지 않겠나? 그리고 그 능력에 알맞게 기.용.될. 것.이.고. 숙부님이야 그 인덕과 신의의 이름이 워낙 빛나시니 그리 한 것이고."
"예……."
"하 - 그건 그렇고, 공명 이 친구는 언제쯤 돌아오는 것이라던가?"
"지금 강릉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럼, 며칠 안 남았군……. 좋아. 운?"
"예. 주군."
"아두 보러 가자. 지금쯤 많이 컸겠지."
아두는 유비의 친아들이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유성이 단언한 이후 매일 밤마다 북두칠성의 빛을 삼키던 감부인은 옥동자를 낳았고, 유성은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진기한 것이란 것은 모두 가져다가 산후조리 겸 신생아 양육에 쏟아 부었다.
운조와 표국을 휘어잡은 유성인 만큼 전국각지의 진기명기한 물품들을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 유성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명령만 하면 중원에서 가장 부유하게 생활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중원 땅이 얼마나 넓은지 생각해 보라. 그 땅의 귀한 것이란 것은 모조리 얻을 수 있는 위치가 그렇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주군."
"아참, 내 동생들 말인데. 요즘 수행들 열심히 했으니까 한 일주일 정도 휴식도 줄 겸해서 세 사람도 데려가지. 지금 무슨 시간인가?"
"병법을 익히고 있을 시간입니다."
"그 시간 끝나면 일 각 휴식이지? 그 때 가서 말하게. 날도 후덥지근한데 신야성으로 일주일쯤 쉬러 가자고."
'신야성이 피서지인가요……. 전하.'
그러나 말은 못 꺼낸다. 보조마법이 역작용을 해버릴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하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손 끝으로 입술을 만져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하운은, 정말 사랑에 빠져 눈이 멀어버린 한 사내의 별다를 것 없는 케이스였다.
하운의 보조마법은 - 여기서 소개하자면 - 무려 141가지나 된다. 그러나 그 중 중요한 것 20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타격강화(Stroke strengthen) - 말 그대로 때리는 힘을 10배쯤 올려준다.
2. 퀵 무브(Quick move) - 행동거지가 신속해진다.
3. 파워 컨트롤(Power control) - 상대방의 힘을 자기 것처럼 조절.
4. 캐치 스티알러 - 빛을 발하거나 흡수한다. 광학병기에 유용.
5. 지진일광관섬(地震一光貫閃) - 보통 검에 어스퀘이크 피어스(Earthquake pierce) 기능이 인첸트된 것. 검으로 땅을 찌르기만 하면 원하는 만큼의 일정 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는 마법.
6. 마인드 컴포트(Mind comfort) - 편안한 마음. 영구적으로 걸려 있다.
7. 스피릿 실드(Spirit shield) - 강력한 정신 방어 결계. 강시나 뱀파이어를 상대할 때 유용하다.
8. 스킬 스워드(Skill sword) - 검의 숙련도를 향상시키는 것.
9. 서치 아이즈(Search eyes) - 찾고자 하는 것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눈.
10. 블레스(Bless) - 축복의 신성마법.
11. 드래곤 랭귀지 퍼미트 - 용언허락(Dragon language permit).
12. 차밍 페이스 패시네이션(Charming face fascination) - 유혹의 기능을 더한 매력적인 얼굴(위급해지면 상대방을 꼬시기 위해).
13. 프레임 하트(Flame heart) - 타오르는 마음. 책임감과 충정, 열정이 식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충신을 만드는 마법으로 현재 유성은 이것을 조조에게 쓸까 말까 엄청난 고민 중에 있다고 함.
14. 노팅데스(Nothing death) - 신성마법의 최고봉으로 죽음을 막는 마법. 현재 유성의 신성력으로는 100번까지 가능하다.
15. 샤인 핸드(Shine hand) - 손에서 강렬한 태양 빛을 발할 수 있다. 약 1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적의 눈을 멀게 해서 시야를 차단하는 데는 즉효 중의 즉효.
16. 샤인 레일러 - 공중에 떠도는 빛의 입자를 모아 유형화시켜 공격하게 해주는 마법.
17. 사일런스 브레이크 - 창문이나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할 때가 있을 경우 소리 없이 장애물을 부수도록 해주는 마법
18. 브라이트 브레인 - 영리한 두뇌. 언제든지 정확한 판단을 하게 한다.
19. 다크 클라우디 - 검은 안개나 구름을 피워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기술.
20. 도트 리딩 - 마법 좌표 읽어내기. 정령 마법을 쓸 때 더블스펠로 사용하면 정령의 힘을 극대화시켜 정령에게 마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말이 쉽지 무진장 어려운 기술로 보조마법으로 걸어지면 정령마법의 대가가 될 수 있는 것.
이 외에도 광분자 방출, 화(火)속성의 무형마검 만들기, 광막결계, 정신결계, 마인드 인피전드(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공간이동)을 비롯하여 여덟 가지 속성의 자동적인 실드나 결계 방출,
스스로 필요할 때마다 시동어만 외우면 사용 가능한 회복마법 50가지, 사이클 초월의 마법 50가지, 마법 화살 자동발사, 프레아 애로우, 더블 스펠러 등등(언급한 것만 136가지임) 무지막지할 정도의 보조마법을 걸어놓은 하운은 최고의 영재(英才)요 최강의 전투모드를 항상 유지하고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용언 마법을 영구히 허락한다고 한다면 정말이지 엄청난 것이었다. 아무리 천계의 강아지 능력이라고는 해도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그 능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성은 유봉과 유기, 유종을 데리고 하운, 이란, 백송을 대동한 채 눈보라를 뚫고 신야성으로 향했다. 반 년 사이 세 사람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전하, 눈보라가 거셉니다. 이것으로 몸을 감싸시지요."
"괜찮네. 자네가 더 추울 텐데 뭘."
그러나 여기서 가장 추워 보이는 사람은 유성이었다. 춘하추동 사계절을 오로지 백의무복 하나로 살아가는 그였다. 여름에는 어떨지 몰라도 겨울에는 극약처럼 위험한 것이었다. 게다가 흰색이 검은색보다 춥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의 안색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붉은 뺨과 맑은 눈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하운은 귀찮은 듯한 음성을 들었다.
[컨트롤 웨더]
그리고 9서클의 마력. 그 정도라면 눈보라쯤은 가볍게 자연적으로 그친 것처럼 페이크(fake)할 수도 있다. 5서클 정도라면 그냥 뚝 그치게 만들지만, 9서클의 마력은 자연스레 멎은 듯이, 즉 마법을 사용한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날씨를 바꾼다. 그리고 잠시 후 바람은 깨끗이 멎고, 솜털같은 눈만 부드럽게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그쳤습니다."
"조금 서두를 수 있겠군. 어서 가세."
"예!"
그들이 신야성에 도착하자마자 유비는 깜짝 놀랐다. 반 년 만에 너무나 크게 변한 세 사람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너무 놀라 물었다.
"이보게 조카님, 대체 조카님은 이들을 어떻게 훈련시켰길래 이 정도로 잘 벼리어진 검처럼 되었단 말인가?"
"하하하. 매일같이 체력 단련하고, 무술연습시키고, 글 읽히고……. 뭐 그 정도지요.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조카님의 훈련을 받는 것이 무인들의 꿈이라는 말뜻을 알 것 같네. 허허 참, 신기하군."
"모두 사부님의 덕이옵니다."
"사부?"
유성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훈련과정은 엄합니다. 훈련기간 동안에는 사부라고 부르기로 했었지요. 지금은 휴식기간이니까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돼."
"넵! 형님∼∼."
가장 어린 유종이 잽싸게 애교있는 목소리로 부르며 유성에게 답싹 안겨들었다. 유성은 싱긋 웃으며 제법 뼈대가 굵어진 유종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후훗……. 저, 그럼 이제 아두를 좀 보고 싶습니다. 숙부님."
"아, 물론이지. 이리로 들게."
유성 일행은 침을 꿀꺽 삼키며 뒤따라갔다.
'어떻게 컸을까? 삼칠일 동안 내가 비밀리에 보내준 것들은 잘 먹였는지 모르겠네? 예술의 물엿, 지혜의 열매, 영광의 과일, 질서의 씨앗, 매혹의 향유, 요정의 꿀, 무신의 드링크 등등 안 보내 준 게 없는데. 당연히 그 정도의 센스, 지력, 프라이드, 도덕심, 매력, 기력, 무술들은 타고 났겠지? 우후후! 얼마나 귀여울까…….'
"와아∼∼. 너무 귀여워∼∼."
"……."
왕제로서의 체면은 어디다 내던졌는지 미소를 남발하며 아두를 부드럽게 껴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유성이었다.
"후훗! 아두야, 형 해봐. 형!"
"옹알……."
"앗! 운, 봤나? 입을 움직였어. 다시다시. 형!"
"헝?"
"와아! 말했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인 유비도 당연히 아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 마디 안 할 수 없다.
"아두야, 아 -버 - 지."
"아……. 압버……. 이."
"하하하! 역시! 내 아들!"
"아앗, 숙부님. 아두 숨막혀요!"
하운은 등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실감나는 팔불출 듀엣이 되어버린 그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좋아라고 왔던 유봉들은 돋아나는 닭살을 견디지 못하고 나간 지 삼 각이었다……. 후훗.
[패시즈]
'음? 아니 이건! 전하……? 이제 백일도 안 된 아이를……. 어떻게 키우시려고? 다른 것도 아니고 패시즈라니…….'
패시즈. 언어와 문화 등을 가르치는 마법이다. 즉, 시전자의 지식을 전해주는 것으로 교육에는 만빵의 효과다. 간단하면서도 시간도 안 걸리지만 상당한 마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치천사의 대군주 메타트론이나 마왕 루시페르에 지지 않을 마력을 지닌 유성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그것도 기본은 완전 백마법으로 깔린 지금은 더했다.
당연히, 말도 조금씩 잘 하게 되고, 유성의 백봉환에 새겨진 글씨를 읽는 어린 아두를 보며 팔불출 듀엣은 어쩔 수 없이 팔불출이 되어갔다.
사실 유성이 아두를 귀여워하는데는 원래의 여성적 본능도 있지만, 그 많은 신력을 쏟아 붓다시피 한 각종 식물들은 물론 출산 때는 별빛을 받으며 밤이슬과 새벽이슬을 모은 물에 첫잎을 딴 차까지 유성이 직접 준비했던 것들이다.
그러니 유성은 자신의 작은(?) 정성을 생각해도 아두가 귀엽지 않을 수 없었다.
팔불출 숙질들이 아두의 곁에서 떠날 줄 모르며 지낸 지도 벌써 엿새째! 하운이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들어왔다.
"돌아왔답니다."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지만(그는 계속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누가?'
유비는 하마터면 그렇게 물을 뻔했다. 잠시 후 서서도 들어왔다.
"돌아왔다고 합니다."
"와룡 말이구려. 천천히 가보십시다."
"예?"
"천천히라면, 언제 가시려고 하십니까? 숙부님."
"오랜 여행이 아니었나? 쉴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겠나."
"돌아온 지 나흘째인데요."
"엿새쯤 뒤에 가 보세. 그즈음이면 집에 있겠지."
유성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지금도 바깥에는 눈이 꽤나 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 잠든 아두 곁에서 두 사람은 날씨 이야기를 했었고, 그는 자기 입으로 엿새 뒤엔 또 한 차례 지독한 눈보라가 올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유비는 유성의 예견을 하늘처럼 믿는 만큼 그 날이라면 틀림없이 헛걸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곤란한데...... 뭐, 군사대에 연락을 했으니 석도랑 최주평이 당분간 잘 해주겠지. 그 날 자존심은 살릴 수 있을 테지만 서서가 수고 좀 해야 할 거고.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삼고초려가 만들어질 거 아냐? 일석삼조네……? 응? 왜?'
'나와 보게!'
'…….'
유성은 약간은 의아해하며 서서를 따라 나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서서가 곧장 물었다.
"돌아온 지 나흘이라는 게 사실인가?"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가 다시 물었다.
"어째서 정보령을 거두었나? 보다시피 나흘이나 소식이 늦어졌네."
"허허, 언제까지 내가 정보령을 내려야 하겠는가?"
서서는 순간 말이 막혔다. 유성은 도저히 이제 20대 초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재능과 심성의 소유자였다. 어느 때는 육십이 넘은 노 장수처럼 생각이 깊고 노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한 일일세. 숙부님은 장차 폐하와 나를 도와 제국을 다스리실 분이네. 스스로의 정보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해."
"아직은 무리가 아닌가."
"다른 것은 필요 없어. 무리도 아니야. 형주 하나면 되네. 형주만 얻으면 10년을 앞당길 수 있네."
"10년……."
"지금 얼마나 때가 늦어 있는지 모르는가? 숙부님께선 이제부터가 시작이셔. 하지만 춘추가 드신 만큼 의욕을 잃어가고 계시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네. 그것은 자네 책임일세. 자네가 그것을 잘 도와드리지 않으면 이번 고비는 끝장일세. 어찌되었든 그 날 찾아가시도록 두세. 공명은 없겠지만 대신 두 사람을 얻어 오실 테니 걱정하지 말게."
서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일찍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몇 번이나 파야 샘물이 솟아나리라고 보는가?"
"그야 내가 장담 못 하지. 하지만 옛 사기에도 삼고지례(三顧之禮)는 지극한 정성이라네. 사람은 어렵게 얻은 것일수록 중용하는 법일세. 본능적인 인간 심리이지."
"……그렇군. 그리고 그 정보망 문제 좀 도와 주겠나? 인편으로는 아무래도 딸리지 않나."
유성은 씩 웃었다.
"자네 만한 사람이 몰라서 그런 말을 하나?"
"제발 부탁일세."
"허허, 난 친구의 부탁에는 약한데……. 하하하. 좋아! 말을 이용하게."
"말?"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고, 그 계책이 놀라워서 되묻는 것도 아니다. 거기엔 황당하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말이라니, 누가 말을 이용할 줄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그렇다네. 본래 장강의 북쪽 지역은 교통 수단으로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가. 겸사겸사 이렇게 하면 좋겠군. 민가에 종마를 주어 기르게 하고, 우리가 발행한 패를 지닌 자들이 그 말의 사용권을 가지게 하는 것일세.
곳곳에 그런 것을 장치해 두면 말이 지쳐도 갈아타면 되니 쉽지. 그리고 민가의 소유를 군사들이 사용하니 세금을 조금 내려서 받거나 노임을 지불하는 식으로 하면, 전쟁이 나더라도 소유물이 징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대가를 받고 빌려 주는 형식이 되는 것일세. 어떤가?"
서서는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봐도 즉석에서 지어낸 계책 같은데, 한 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백성들 중심에서 생각하고 그 생각이 결코 얕지 않으니…….
'도대체 이 사람의 지략은 어디까지인가?'
"한번 해 보게. 원직. 패는 내가 만들어서……. 한 50개면 충분할 걸세. 누구도 위조 못 하는 것이니까 안심해도 되고.
아, 그리고 군비 마련에도 상당한 예산이 들어가니까, 백성들에게 줄 노임까지 만들려면 부담이 클 것일세.
하지만 그렇게 해서 주민 소득이 증가하면 그에 맞춰서 세금도 알맞게 걷으면 될 것이니 우선 이것으로 충당하도록 하게. 충분할 걸."
서서가 받아 보니, 최고급 질의 금강석 다섯 개였다. 그것도 노을처럼 아름다운 붉은빛을 띈 보기 드문 것으로, 하나만 사용해도 10만 냥은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는 또다시 놀랐다. 붉은 금강석이라고 하면 보석 중의 보석이었다. 황실에서나 겨우 하나 둘 만한 것을 다섯 개나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 이건! 자네!"
"진정하고 받아쓰게. 운조에 내놓으면 봉행해서 지원해 줄 거야. 이자도 원금도 안 받을 테니까 걱정말고 그냥 써. 자, 그럼 잘해보게."
막 돌아가려던 유성을, 서서의 목소리가 다시 잡았다. 깜빡 했다는 듯.
"자, 잠깐만, 태평! 여, 엿새 뒤에는……."
유성은 갑자기 긴장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쉿! 조용히. 그냥 가만히 있게. 그것도 천명이야. 공명은 깊은 물일세. 한두 번으로 솟아 나올 샘물이 아니야. 그의 가치는 강자아나 장자방에 비하고도 남네. 자자, 이제 수련 시간이니 가 봐야 하네. 아우들이 기다리거든."
서서는 좀더 유성을 붙들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를 잡을 명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를 보내 놓고 금강석을 손에 쥔 채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있는데, 뒤뜰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너무 들어서 귀에 익어 버린 소리였다.
"우아아아아악!"
그의 등줄기로 식은 땀 한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누가 들으면 사람 잡는 줄 알겠군. 지금껏 버텨 온 것이 신기하다니까.'
"기합은 짧고 정확하게 끊어라. 2점 감점."
"우악! 앗! 끄악! 악! 헉!"
"……산만하다. 3점 감점."
어느 새 아두가 자는 방에 실드를 쳐 둔 하운이 말했다.
"여전하십니다. 도련님들도 충분한 실력을 갖춰가고 계시지만 그럴수록 전하의 하한점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거든요."
스쳐듣는다면 몰라도 약간은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서서로서는) 섞여 있었다. 서서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본 하운이 재빨리 설명했다.
"아, 그러니까 그게 통계나 어떤 수치 같은 것을 나타내고 정할 때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10년간의 수확량을 도표라는 것으로 나타낸다고 하면……."
하운은 보통 도식(graph)과 막대 도식, 꺾은선 도식, 도수분포표, 평균 구하는 방법, 상한선과 하한선, 최소한계와 최대허가의 예시, 점수와 등수 매기는 것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다 듣고 난 서서가 놀라 물었다.
"그걸 다 어떻게 만들어 낸 건가?"
그러나 하운의 대답은 서서를 더욱 놀라게 했다.
"전하께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군. 기가 막히지 않은가! 자료들을 정리하고 나타낼 때 이것만한 것이 없겠어."
"아하하, 마음에 드는가? 꽤 오래 걸려서 정리해낸 것이지."
어느 새 왔는지 유성이 그들 뒤에서 하운이 땅바닥에 그려 가면서 설명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젠 나보다 나은 것 같군. 대단한걸?"
"아니옵니다. 전하."
"하하하. 아니야. 정말 굉장히 진보했네. 나는 그것 배울 때 굉장히 고생했는데……. 난 사실 수학(數學) 쪽에는 그리 머리가 잘 트이지 않았거든? 하하하……."
서서가 물었다.
"누구에게 배웠나?"
"응, 스승님께."
"……스승의 성함 말일세."
"아하하. 비밀일세. 나야 나중에 이 지식들을 써먹으면 그만이지만 그 때 이미 선생님들은 나이가 많이 드셨을 텐데 그 때 불러내서 고생시켜 드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서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다음 날 유성은 유기와 유종을 형주성으로 돌려보냈다. 철저하게 짜준 생활계획표를 딸려보낸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엄청난 진보를 해서 돌아온 그들은 모두의 칭찬을 받았지만, 유기는 여전히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유성을 걱정시켰다. 심약한 것은 많이 고쳐졌지만 아직 담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날, 유비는 또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융중으로 향했다. 유성은 한숨을 쉬었다.
"나를 믿어주시는 것은 좋지만, 저러다가는 건강이 너무 상하시겠어."
"안심하시옵소서. 전하. 괜찮으실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시간 맞춰서 따뜻하게 차라도 준비해 두라고 하게."
"예."
한편, 혹한 속에 융중으로 향하는 세 사람은 눈길에 간신히 와룡강을 넘었다. 길가에 술집이 하나 보였다.
"형님. 몸이 얼어붙어 한 발도 더 가기 힘듭니다. 저 곳에서 몸이라도 녹이고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비로서는 급한 마음이었기에 그럴 생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귀에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장사 공명을 이루지 못함이여.
슬프다. 오래 봄을 만나지 못한 탓이네.
그대는 동해의 늙은이가 잡목 숲 떠남을 보지 못했는가.
뒷날 문왕과 수레를 나란히 모셨다네.
들어보니,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이룩한 강태공의 삶을 읊은 노래가 아닌가(유성이 태공운이라고 제목을 붙인 노래.). 예사 사람이라면 이런 노래를 부를 이유가 없다 - 유비는 퍼뜩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익덕 말대로 잠시 들어가서 쉬었다 가자."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또 한 곡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약간 더 맑고 톤이 높은 목소리였다. 맑기는 매한가지였다(아까 것이 바리톤이면, 지금은 테너 정도랄까).
기약 없었으나 8백 제후 모이고
상서로운 조짐 속에 맹진을 건넜네.
그대는 또 보지 못했나. 고양 땅의 술주정뱅이가 풀숲에서 몸 일으킴을.
길게 읍하니 망탕산의 융준공일세.
왕패의 고담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여
몸씻기도 잊고 마주앉아 영걸스런 풍모를 흠모하네.
동으로 제나라 72성을 얻으니
천하의 어떤 사람이 그를 뒤따를 수 있겠나.
유비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선비가 탁자에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둘 다 맑고 깨끗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눈에는 총기가 넘쳐흘렀다.
갈건 야복이었으며 한 사람은 수염이 조금 길고 다른 한 사람은 짧은 것만이 달랐다. 긴 쪽이 석도였고 짧은 쪽이 최주평이었다. 물론 유비는 알 수 없었다.
관우와 장비가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유비는 곧장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두 분 중 어느 분이 공명 선생이십니까?"
석도가 흘낏 그를 보았다. 순간 유비는 그의 소매 속에서 낯익은 백봉환을 보았다. 그것은 유성이 자신과 마음을 나누던 지우들에게만 선물로 준다는 것 - 당금 선비들의 영예로 꼽히고 있는 물품이었다. 그의 눈에 반가움이 서렸다. 확신이 굳어지고 있었다.
"공은 뉘신데 이곳에 와서 공명을 찾으십니까?"
"저는 유비라는 사람입니다. 공명 선생을 찾아 왔는데, 예사롭지 않은 노랫소리를 듣고 필시 노래를 부른 분이 공명 선생이시라 생각하여 이렇게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최주평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들은 공명이 아니고 그의 벗들입니다. 저는 최주평이라 하는 사람이고 저 친구는 석도라고 합니다. 헌데, 모처럼 오셨는데 아니 되셨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희들도 공명의 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만 그는 지금 집에 없습니다. 아침 일찍 강동의 가형을 보러 갔다더군요."
"예?"
유비의 얼굴이 약간 기묘하게 변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폭설이 쏟아지는 날인지라 틀림없이 있을까 했더니…….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곧장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공명 선생의 벗들이시라니, 제게는 곧 공명 선생과 다름없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이 사람에게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거절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최주평은 난감함과 신기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석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한 날이 오늘이 맞나?"
"맞네. 하하하……. 정말 태평이 그 사람 대단하군."
"이것도 운명인가 보이."
유비는 이들의 대화 속의 태평이 유성임을 알 수 있었다. 태평은 황제가 그를 왕제로 봉하던 날에 친히 내려준 자(子)였던 것이다. 그 때 앉아서 관망하던 중에 들었는지 관우와 장비가 놀란 얼굴로 다가섰다.
"말씀 중에 실례가 큽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요? 태평이라면 태제전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그제서야 석도와 최주평은 세 사람을 돌아보며 자리를 권하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예에? 오늘 저희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공명은 집에 없을 것이라고도 하셨고, 강동으로 갈 것도 짐작하고 계셨지요. 그러나 공명의 집에는 다녀오시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의를 표한다고나 할까요?"
"세상에……. 이거, 완전히 그분 손 안에서 놀아난 꼴이구먼. 허허허……."
"저희들은 군사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본래는 산야에 평생 묻히려 했었습니다만, 군사대에 속했으니 주군의 영을 따라 사군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말씀이십니다."
"난세가 가라앉으면 저희들은 다시 군사대로 돌아갑니다. 백학, 백송 두 분 장군님께서도 전하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시겠지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그 때까지 사군께 충성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군신의 예를 갖추고, 유비는 공명의 집에 들러 글을 남긴 뒤 다녀갔다고 전해주도록 황용에게 일러둔 뒤에야 신야성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유성은 달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새 눈이 그치고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창가에 평상을 놓아두고서. 그들 두 사람이 왔다는 말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설 만큼 놀란 서서가(전혀 의외의 일이었으니까) 달려와도 곤하게 잠든 그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하운이 깨우려는 서서를 말렸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주무시게 해 드리십시오. 요 며칠 동안 계속 피곤해하셨습니다."
"휴 - 할 수 없지. 그래, 깨시거든 말해 주게나."
"예."
그러나 유성은 다음날 새벽에야 일어났다. 거의 열두시간을 잔 셈이었다. 운기조식의 일주천과 마나의 대주천을 끝내고 아침 기도를 마친 유성은 철목검을 들고 눈 쌓인 뒤뜰로 나갔다.
아직 닭이 울지 않은 때여서인지 유봉의 방에도 인기척이 나지 않고 있었다. 유성은 조용히 칠성보(七星步)를 밟아 가며 냉(冷) 결에 맞추어 매화검법을 펼쳤다. 후일 황실무술의 세 간판무술 중 하나인 빙설마화검법이 되는 것이었다.
그 때, 언제 다가와 있었는지 서서가 유성에게 물었다.
"왜 그 친구들을 끌어낸 건가?"
유성은 계속 검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 두 사람을 얻지 못했다면 숙부님은 다시 융중을 찾지 않으셨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군사대 소속인 사람들을……."
"때가 되면 돌아갈 거야. 지금은 사람이 필요해. 시간은 부족하고."
"하긴……."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할 일이 많을 거야. 원직."
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의 검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이 쌓인 눈을 흩날리게 했다. 평소와는 달리 검은 기운이 덧씌워진 그의 검은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펄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송이송이 얼음꽃이 되어 공중을 수놓았다.
서서는 가만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마기(魔氣)도 아닌 검은 기운이 회색의 얼음꽃을 뿌리는 것은 보기 흔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해가 지고 지상을 덮는 고요한 어둠처럼 - 그러한 어둠이 유성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절대적인 잠을 사람에게 수여하기라도 할 듯……. 살수(殺手)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생명으로 하여금 눈 속에 잠겨 봄을 기다리는 잠을 자게 할 만한, 그런 검이었다.
어둠은 영광을 위한 휘장
평화라고는 없는 듯 했던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지는
검은 숲의 물결은 빛나고
두 팔을 벌리고 방랑자를
꿈꾸며 눈을 감도록 한다
유성은 짧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계속 검을 휘둘러 얼음꽃을 사방에 뿌렸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어떤 빛이 빛나고 있었다.
첫댓글 1편부터 다읽느라 죽는줄 알엇음 눈 충혈됏어여
감사해요~ 읽을만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
근데 세류가 넘 불쌍해요.. 살려낼 수 없나요? 제갈량이랑 잘 어울릴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