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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er Maria Rilke, 『Briefe an einen jungen Dichter』, 1929(1903-1908)
※ 문예출판사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송영택 역, 2018
하나의 예술 작품을 대하는 데 비평적인 언사로 대하는 것만큼 부당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많든 적든 그럴싸한 오해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 15p
대개의 일은 말로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 따위는 전혀 뛰어든 적이 없는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도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것이 예술 작품입니다. 그것은 비밀로 가득 찬 존재로서, 그 생명은 하루하루 소멸해가는 우리의 생명 곁에서 영속하는 것입니다. - 16p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십시오. 당신에게 글을 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찾아내십시오. 그것이 당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펴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글쓰기를 거부당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를 스스로에게 고백해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이 맞는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마음속을 파헤쳐 들어가서 깊은 대답을 찾으십시오.
만약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만약 당신이 이 진지한 물음에 굳세고도 단순하게 '나는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대답할 수가 있다면, 그때에는 당신의 생활을 이 필연성에 따라 구축하십시오. - 17p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잃는 것을 마치 인류 최초의 사람처럼 표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 17p
…당신의 일상이 가난하게 여겨진다면, 그 일상을 비난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비난하십시오. 아직은 참다운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의 풍요를 불러일으킬 수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가난이라는 것도, 가난하고 하잘것없는 생활의 장소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 18p
…가령 당신이 감옥에 갇혀 그 벽이 세상의 소리를 조금도 당신의 감각에 전해주지 않는다 해도, 당신에게는 아직 당신의 어린 시절이라는 저 귀중하고 훌륭한 재산이, 저 추억의 보고가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관심을 돌리십시오. 먼 과거의 가라앉아버린 감동을 되살리도록 노력하십시오. 당신의 개성은 확고해지고, 당신의 고독은 폭을 더해 차츰 밝아가는 하나의 주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소음은 멀리 관계도 없이 그저 스쳐 가게 될 것입니다. - 19p
예술 작품은 그것이 필연에서 생겨났다면 좋은 것입니다. - 19p
…창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여야 하며,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또 자신이 연관된 자연 속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 19p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시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 20p
당신이 바깥으로 눈을 돌려, 아마도 당신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당신의 가장 내면적인 감정만이 대답할 수 있을 물음에 대하여 바깥에서 대답을 기대하는 것만큼, 당신의 발전을 크게 해치는 것도 없습니다. - 20p
아이러니에 너무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면, 아이러니와의 친밀도가 깊어지는 것이 두려워진다면, 그때에는 아이러니가 그 앞에 서면 보잘것없고 듬직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릴 그런 위대하고 진지한 대상으로 눈을 돌리십시오. 사물의 깊이를 추구하십시오. 아이러니는 결코 거기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 23p
…운명 자체는 불가사의한 넓은 직물 같아서, 그 속에서는 한 올 한 올의 실이 한없이 상냥한 손에 의해 짜이고, 다른 실 옆에 나란히 놓이며, 다른 수백의 실에 의해 지탱되어 있습니다. - 27p
예술 작품은 무한히 고독한 것으로서, 비평으로 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서 공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논쟁이나 비평이나 해설에 대해서는 언제나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의 감정을 옳다고 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당신의 내적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장이 서서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신을 전과는 다른 인식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판단이 조용하고 안정되게 발전하도록 두십시오. 그것은 모든 진보와 마찬가지로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해서도 강제당하거나 촉진되는 것이 아닙니다. - 28p
모든 인상, 모든 감정의 싹을 완전히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어두운 곳에서, 말할 수 없는 곳에서,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오성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완성하여 깊은 겸손와 인내로 새로운 분만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이것만이 예술가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해에서도,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29p
예술가란 계산하거나 세는 것이 아니고, 수목처럼 성숙하는 것입니다. …여름은 마치 눈앞에 영원이 있는 듯 아무 근심도 없이 조용히 드넓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인내심 강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옵니다. - 29p
창작하는 삶이 자기 최선의 장점에서 그 천진난만함이나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언제나 그 장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 예감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30p
…완전히 성숙하고 순수한 성의 세계가 아니고, 충분히 인간적이 아니라 단지 남성적인 데 지나지 않는 세계, 욕정과 도취와 흥분의 세계, 남성이 그것으로 사랑을 왜곡하고 사랑에 무거운 짐을 지워온, 예부터의 편견과 교만을 짊어지고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는 단지 남성으로서만 사랑할 뿐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성적 감정에는 무언가 좁은 것, 보기에 거칠거칠한 것, 추한 것, 일시적인 것, 영구적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 31p
…제 책은 한번 출판되어버리면 이미 제 것이 아닙니다. - 32p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라도 극히 미미한 것, 말로는 거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해명해야 할 때에는 말을 제대로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34p
당신은 아직 매우 젊고,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당신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당신 마음 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를 가져주십시오. 그리고 물음 그 자체를 닫혀 있는 방처럼, 아주 낯선 말로 쓰인 책처럼 사랑해주십시오. 지금 당장 해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당신이 해답에 맞추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당신에게 그 해답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35p
지금은 물음을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마도 당신은 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먼 미래의 어느 날, 해답 속으로 들어가서 해답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35p
…당신은 자신 속에 조형하고 형성하는 가능성을, 특히 행복하고 순수한 삶의 본래적인 자세로서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향하여 자신이 뻗어가게 하십시오, 그러나 오는 것은 깊은 신뢰감으로 받아들이십시오. - 35p
우리에게 과해진 것은 어렵습니다. 진지한 것은 거의 모두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진지합니다. - 36p
육체적인 쾌락은 감각적인 체험으로서, 순수한 시각이나 혀를 가득 채워주는 맛있는 과일의 순수한 감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크고 무한한 경험이며,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며, 모든 지식의 충일이며 광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맛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은 대부분 사람이 이 경험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데 있으며, 그것을 인생의 정점을 향한 집중으로 삼지 않고 인생에 지쳤을 때의 오락으로, 자극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 36p
…생명을 갱신하는 깊고 단순한 모든 필요가 마찬가지로 흐려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개개의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정하게 닦고, 맑은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다른 것에 너무 의지하고 있는 독립성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고독한 사람에게는 가능합니다). - 37p
…세계의 커다란 혁신은 아마도 남성과 처녀가 모든 그릇된 감정이나 혐오감에서 해방되어, 서로 대립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오누이로서, 이웃으로서 서로를 찾아 인간으로서 결합하여 소박하고 진지하고 끈기 있게 그들에게 주어진 어려운 성을 함께 감당하는 데에서 성립될 것입니다. - 39p
…아마도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할 모든 것을 고독한 사람은 지금 벌써 준비할 수가 있고, 조금 덜 망설이는 그의 손으로 쌓아 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다운 비탄의 소리를 내며 당신에게 주는 고통을 견디십시오. 왜냐하면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멀게 여겨진다고 당신은 말합니다만, 그것은 당신의 주변이 넓어지기 시작한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 39p
부모에게 조언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해받으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당신을 위해서 유산처럼 축적되는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사랑에는 하나의 힘과 또한 아무리 멀리 가기 위해서라도 벗어나서는 안 될 하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 40p
당신이 우선 하나의 직업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독립시키고, 어떠한 의미에서도 당신을 완전히 당신 자신에게 의지케 하기 때문입니다. - 41p
…당신의 고독은 당신이 아주 소원한 처지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당신의 지주가 되고 고향이 될 것입니다. 그 고독에서야말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 41p
…편지를 쓰는 데 있어서 저는 꼭 필요한 도구 이상의 것, 즉 약간의 고요와 고독, 그리고 과히 서먹서먹하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 42p
고독은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은 크고, 쉽게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에게, 이 고독을 무엇인가 아주 평범하고 값싼 결합과 교환하고 싶은 때가 오는 법입니다. 누구든 상관없이 가까이에 있는 사람, 아무리 시시한 사람과의 하잘것없는 외양적 일치하고라도 교환하고 싶은 때가 오는 법입니다…….
그러나 대개 그때야말로 고독이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의 성장은 마치 소년의 성장과 같아서 고통이 따르고, 봄이 시작될 때처럼 서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고독, 커다란 내면적 고독뿐입니다. 자신에게로 침잠하여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 46p
왜 어린아이의 현명한 몰이해를 방어나 경멸로 맞바꾸고자 합니까. 몰이해란 바로 혼자 있는 것입니다. - 47p
저는 다만 직업이란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닌가, 개개인에 대해서 강압적인 요구와 적의로 가득 차 있고, 말하자면 묵묵히 무뚝뚝하게 따분한 의무에 종사해온 사람들의 증오를 가득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잘 생각해보도록 권할 따름입니다. - 48p
…언뜻 보기에 가장 큰 자유를 가진 듯한 신분은 있지만, 내부가 크고 넓어서 참다운 인생을 성립시키는 위대한 사물과 관계가 있는 신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독한 개개의 인간만이 사물처럼 깊은 법칙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 48p
[출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작성자 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