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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8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약점을 강점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 3. 죄책감이란 올무를 벗어나!
본문 : 마태복음 27장 3절(1~8절)
그 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새번역>
인류 역사상 돈 때문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많은 사람들 중에 단연코 1등이 있다면 바로, ‘가룟유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믿을만한 제자로 선택되었으면, 제자들 중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심지어 세리 출신의 마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11제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았으며, 함께 동고동락하며 복음서에 등장하는 모든 일을 동일하게 경험했던 제자였습니다. 분명히 제자로서 의미 있고 좋은 일들도 많이 행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나쁜 기록들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장 5~6절, 새번역>
이 구절로 인하여 가룟유다는 성경을 보는 독자들로부터 간교하고 사리사욕이 밝은 자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21절, 새번역>
그리고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빵조각을 적셔서 주셨던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어찌 보면 그 때가 예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가룟 유다는 태연하게 ‘내니이까?’ 라고 되물으면서 마치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듯 다른 제자들을 속이며 그 빵조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 기록을 통해 가룟 유다는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예수를 넘겨 줄 사람인 유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26장 25절, 새번역>
그리고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아넘긴 후 배반의 입맞춤으로 누가 예수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준 이도 역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시고 계실 때에, 한 무리가 나타났다. 열둘 가운데 하나인 유다라는 사람이 그들의 앞장을 서서 왔다. 그는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누가복음 22장 47~48절, 새번역>
고작 은 삼십이었습니다. 한 세겔은 4 데나리온입니다. 1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120데나리온으로 120일치의 품삯이고 현재 일당을 대략 10만원으로 계산하면 1200만원정도의 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작 은 삼십세겔이라니! 몇 만 달란트를 받은 것도 아니고, 고작 출애굽기 21장 32절에 등장하는 종 한 사람의 몸값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겼다니 더 안타깝고 한심하게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차라리 기왕 챙기는 거 좀 두둑이 챙기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예수를 팔아넘기고, 계신 위치도 알려 주고 나니 예수님이 잡혀 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대로 모든 제자들은 도망쳤으니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은 삼심 세겔을 들고 집으로 향했을 가룟 유다입니다. 그 순간에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난 3년에 대한 보상으로 은 삼심 세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메시아는 필요치 않으니 혹여 다른 메시아를 찾으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진짜 오랜만에 집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판 밤이 흘러갔습니다. 여기까지 보니 정말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이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24절, 새번역>
이 말은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한 계획으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말은 당시 랍비들이 자주 사용하던 안타까운 이를 향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행동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미 여러 번 알려 주셨고 경고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 물리치고 자신의 생각대로 걸어간 가룟 유다입니다. 3년을 따라 다녔지만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를 정도로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은 바로 재물이었습니다. 정말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너무도 안타까운 가룟 유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도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면 함께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 줄도 모릅니다. 껍데기만 제자일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죄 없이 못 박히게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가룟 유다에게 한 가지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두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결박한 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렸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맞지 않았을 뿐이지 죄가 있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자신이 3년을 옆에 따라 다니면서 분명히 알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예수를 팔아넘길 때도, 돈에 눈이 멀었던 것이지, 예수님이 어떤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에 가룟 유다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에게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은 삼십 세겔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달려가서 그 돈을 돌려주며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마태복음 27장 4절A, 새번역>
그런데 새번역은 번역이 조금 부족합니다. 공동번역에 좀 더 자세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다. <마태복음 27장 4절A, 공동번역>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죄책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까지는 다행입니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로 가면 됩니다. 그 마음 그대로 예수님께로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죄책감’이란 올무는 가룟 유다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데리고 가 버립니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마태복음 27장 5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혹시 마음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충분히 가룟 유다가 얼마나 나쁜 인물이었는지 다양하게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얼마나 파렴치한 사람이고, 뻔뻔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지금 여기 계신 분 중에 가룟 유다에게 손가락질 하실 수 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최소한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저 가룟 유다가 저라고 해도, 저 역시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11제자의 모습이 그나마 나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팔아 넘겼으니 더 나쁘고, 스승을 두고 무서워 도망친 건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서워서 저주한 것은 괜찮은 것입니까? 각 자 최악에 대한 판단은 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룟 유다에게 마음껏 욕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혹시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옆에서 돌을 들고 서 있던 많은 이들에게 직접 하셨던 이 말이 자꾸만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장 7절B, 새번역>
최소한 저는 가룟 유다를 욕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 역시 솔직히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예수를 판 적이 있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예수를 판 적이 있고, 예수님의 관심사와는 전혀 다른 관심사에 관심을 두고 살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제 이익에 따라 껍데기만 제자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안에도 여전히 ‘죄책감’이라는 녀석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도저히 가룟 유다를 향해 손가락질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실 수 있지 우리는 결코 판단이나 정죄를 할 수 없는 동일한 인간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같은 마음으로, 죄책감이란 올무에 갇혀 있는 상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이란 녀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죄책감은 우리를 자꾸만 멈추어 서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려다가도 난 그럴 자격이 없다고 멈추게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는 목소리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만들어 멈추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 같은 사람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모든 신앙생활을 멈추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예수님이 열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어 서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녀석입니다. 가룟 유다도 이 죄책감에 한 번 빠지고 나니 헤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안타까운 결과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통하여 꼭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말해 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바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가룟 유다에게는 2번의 아주 중요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은혜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날려 버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통하여 지금 우리만은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3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마태복음 27장 3절, 새번역>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친 그 순간입니다. 깨닫게 되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치는 마음이 생겼을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로 가야 했습니다. 그 죄책감을 이길 방법은 결코 다시 돈을 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받았기에 돌려주고 나면 후련해 질 것이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미 돈과 함께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죄책감은 돈을 돌려주더라도 여전히 그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뉘우쳤다면, 깨닫고, 가책을 느꼈다면, 그 마음 그대로 예수님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바로 예수님께로 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분명히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면 어땠을까요? 자신을 저주한 수제자 베드로도 용서하신 주님이십니다. 자신의 죽음의 계획을 실행한 이가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 하셨기에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다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돈을 돌려준다고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과 함께 또 한 가지를 알 수 있는데, 사람을 찾아간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돈을 돌려받고 없던 일로 해 준다고 한들 지금 빌라도에게 잡히셔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예수님의 입장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가서 죄책감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기회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바로 5절입니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마태복음 27장 5절, 새번역>
두 번째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만난 후 은돈을 성전에 내 던지고 예수께로 가야 했습니다. 물러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선택을 할 정도면, 그 정도로 괴로우면, 그 정도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힌다면, 더더욱 예수님께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자신의 선택으로 행동하는 가룟 유다입니다. 돈에 대한 미련은 버렸는데, 자신의 죄책감이 나은 자신의 책임에 대한 미련, 자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미련한 마음은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죄책감은 자꾸 자기 자신의 나쁜 모습만 들여다보게 함으로 희망을 앗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죄가 있어도, 아무리 죽을죄를 저질렀어도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기회마저 자신의 죄책감이 준 미련으로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죄책감은 하나님이 만드신 감정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찾아온 인간 스스로 만든 가장 슬픈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그 감정을 허락지 않으시고, 언제나 자신 앞으로 나와 죄를 고하는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으라고 일찍부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 감정을 해소시켜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란 녀석이 우리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더욱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이라는 녀석이 우리를 우리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을 내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로 가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가룟유다의 마지막 삶의 이야기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의 최대 약점이 되어 버린 ‘죄책감’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라는 강점으로 바꾸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계십니다. 깨달았다면, 뉘우쳤다면,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면, 그게 ‘죄책감’이란 녀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면, 그 때가 바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러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제자리로 돌리려는 스스로의 노력이 우선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찾아가 해결하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자비와 긍휼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두렵더라도, 걱정되더라도, 부끄럽더라도,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이사야 1장 18절, 새번역>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분의 모든 은혜를 잊지 마라. 주는 나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시며, 나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시편 103편 2~3절, 쉬운성경>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새번역>
죄책감이라는 올무를 벗어나야 합니다. 죄책감을 벗고 은혜의 옷을 입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책감이라는 녀석, 그 약점을 느낀 순간, 그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기 위하여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에 반드시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자신의 방법, 사람의 방법으로는 결코 죄책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저 약점이 더 큰 약점이 되게 할 따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두려움에 빠지게 만드는 죄책감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하는 마음을 굳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장 15절, 새번역>
죄책감을 통하여, 오히려 믿음으로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죄책감이라는 것이, 그 약점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인지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자유와 해방을 만날 수 있는 강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 새번역>
마지막으로 요나서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구약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을 뽑으라고 한다면 조금의 지체 없이 ‘니느웨’ 백성을 뽑고 싶습니다. 왜인줄 아십니까? 바로,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들이 행한 지혜로운 태도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이 소문이 니느웨의 왕에게 전해지니, 그도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 왕은 니느웨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여 알렸다."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요나 3장 1~10절, 새번역>
가룟 유다도 이 이야기를 알고 이 지혜로운 태도를 따라했었다면 참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차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죄책감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면, 오늘 니느웨 사람들의 지혜로운 행동이 여러분이 행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기도의 자리로 가십시오.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럼으로 죄책감이란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더 깊은 은혜의 시간을 경험하게 되시길 마음 다해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새로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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