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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반골(反骨)의 길
오늘날 족보(族譜) 하면 케케묵은 냄새가 나지만, 더러 어떤 사람의 정서나 기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재오 전 의원은 소설가 이문열씨와 같은 재령(載寧) 이씨다. 재령 이씨 가문에는 반골의 피가 흐른다. 그 상징적 인물은 모은공(茅隱公) 이오다. 고려 중기 상장군을 지낸 재령 이씨 중시조 소봉(小鳳)의 손자인 이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망하자 충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쫓겨나와 정착한 곳이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다. 그는 집 주변에 담을 쌓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손들에게 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엄명했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담안마을, 혹은 고려동으로 불렀다. 밖은 조선왕조 영토지만 안은 고려의 유민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에서다.
조선조에서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대표적 인물이다.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성리학을 계승한 인물로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정쟁에 휘말려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 사망했다.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후예가 우리 재령 이가(李家)지요. 영남에서는 재리(載李)라고 하지요. 재령 이가에는 벼슬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내가 재야를 오래 한 것도….”
이 전 의원의 말에는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뭔가 통한다”는 내 말에 그가 “뼈다귀는 못 속인다, 이거지” 하고 웃었다.
“DNA는 못 속인다고, 그래서 경우 바른 소리 잘하고 적당히 살지는 않지, 우리 집안 내력이.”
그의 호 남산(南山)도 그런 뜻을 담고 있다. 1980년대 초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옆방에 있던 홍남순 변호사가 ‘남인의 맥을 잇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이다.
그는 해방둥이다. 1945년 1월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전기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강원도 탄광지대에 정착해 전기기사로 일했다. 1948년 탄광이 문을 닫자 그의 가족은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돌아왔다. 3형제 중 둘째인 그의 부친은 땅이 없어서 소작을 했다.
교장 전근반대 시위 주동
가난한 시절이었다. 소년 이재오는 친구들과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속피를 긁어내 나무에 배인 물을 빨아먹었다. 껍질은 집에 가져가 물에 우려내 밀가루와 섞어 떡을 해먹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그의 동네친구 한 명이 흙가루로 만든 떡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숨지기도 했다.
4남1녀 중 3남인 그와 부친의 나이 차이는 38세.
“나도 그런 성향이 있는데,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얘기를 잘 안 하셨다. 무슨 일을 가족과 상의해서 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두 분이 두 살 차이인데, 하여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으니까.”
한양 조씨인 그의 어머니는 문학적 소양이 깊었다. 소설을 많이 읽고 자식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걸 즐겼다. 그가 중학생 때 소설에 심취하고 뒷날 국어교사를 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 그의 꿈은 농촌지도자였다. 이광수의 ‘흙’에 나오는 허숭과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박동혁이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없었다. 당시 농촌에는 청소년사회교육운동인 4H구락부(클럽)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중학생 때 면의 4H구락부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고등학생 때는 경북 4H연합회장을 맡을 정도로 이 운동에 열성적이었다.
그의 투사적 기질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60년 영양고등학교 1학년 때다. 교내 독서클럽을 이끌던 그는 그해 4·19가 일어나자 교장 전근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영양고 교장이 경북 교육감에게 밉보여 시골 중학교로 발령 난 것에 분개해서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영양경찰서 유치장에서 20여 일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영양군청 서기로 특채됐다. 농작물 재배기술 보급과 관리가 주된 업무였다. 그해 여름 외지에 나갔던 친구들이 놀러왔는데, 그들과 얘기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영 물이 다른 거라. 나는 만날 촌 이야기만 하는데 얘들은 서울이 어떻고 부산이 어떻고 공장이 어떻고. 그래서 농촌운동을 하더라도 좀 더 배우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해 10월 군청서기를 그만두고 대학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때마침 중앙대 경상대에 농촌사회개발학과가 생겼다. 5·16군사정부가 농촌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국책사업으로 신설한 학과였다. 3개월간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우며 공부한 끝에 그는 1964년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에 합격했다. 입학성적이 좋아 4년 장학생 대우였다.
4H구락부 활동 경력을 인정받은 그는 과대표를 맡았다. 입학 후 열흘 만에 대학가에서 한일굴욕수교회담 반대시위가 시작됐다. 그는 과대표 및 경상대 대의원으로서 시위의 선두에 섰다. 6월3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른바 6·3사태다. 군인들이 대학에 진주했고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듬해 한일회담 국회 비준을 앞두고 또다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2학년이던 그는 중앙대 구국투쟁위원장으로서 다른 대학과 연계하면서 중앙대 시위를 주동했다. 8월에 위수령이 떨어졌고 계엄당국은 시위주동 학생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그는 수배자 신분이 돼 도피생활을 했다. 그가 체포된 것은 한일수교 비준이 이뤄진 후였다. 수습 국면이라 ‘구류 29일’이라는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고문경관’ 이근안과의 만남
1966년 4월 그는 군에 입대했다. 강제 징집이었다. 1969년 만기제대를 한 후 복교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학생처장은 당국의 지시라며 거부했다. 이 일이 반독재민주화투쟁에 나선 계기가 됐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군대 3년 갔다 오면 당연히 복교시켜줄 줄 알았다. 졸업하면 농촌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복교를 안 시켜주니 참담했다. 그때 느꼈다. 개인이 아무리 행복하게 살려 해도 사회적 조건이 안 맞으면 안 되는구나. 개인의 희망이라는 것이 정치적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구나. 내가 뭘 하려면 먼저 군사독재정권부터 무너뜨려야겠구나.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한 거다.”
그는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유신치하에서 네 번, 6공 때 한 번 모두 5차례 구속됐다. 그가 처음 구속된 것은 1973년 서울대생 유신반대 시위와 관련해서다. 당시 서울 영등포 장훈고등학교 교사이던 그는 자신이 이끌던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거리에 유인물을 뿌리며 서울대생 시위를 지원했다. 경찰은 그를 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했다. 이때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그를 조사한 사람이 뒷날 고문경관으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씨였다.
“그때만 해도 이근안이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다. 잡혀간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재야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고문을 당한 셈이지. 웃기는 것은 담당검사가 이한동이었다는 거야. 나중에 내가 우리 당의 대표로 모시기도 했으니까.”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남산 1호 터널 앞에 있는 붉은 벽돌집이었다. 거기서 그는 알몸으로 양손과 양발이 묶인 채 얼굴에 덮인 물수건에 고춧가루가 쏟아지는 고문을 당했다. 숨이 막혀 기절했다 깨어나면 다시 고춧가루를 쏟아부었다. ‘북한에서 돈 얼마 받아왔느냐’는 게 주 신문내용이었다. 서울대 유신반대 시위의 배후를 북한으로 몰고 가려는 각본이었다. 검찰로 넘겨진 그는 이한동 검사 앞에서 혐의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사실대로 말하라기에 조서내용을 부인했지. 그러자 이한동 검사가 ‘이 사람은 다시 좀 갔다와야겠네’ 하더라고.(웃음) 다시 대공분실에 가서 맞고 오라는 얘기지. 겁주는 거였지.”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 2년형이 선고됐다. 그가 두 번째로 구속된 것은 1977년 2월 서울 갈현동 대성고 교사로 재직할 때였다. 당시 그는 극단 ‘상황’을 만들어 대표 겸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민’이라는 가명을 썼다. 이민은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매달 연극평론을 쓰기도 했다. 검열이 엄격했기 때문에 우회적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주로 일제 강점기 민족의 수난을 소재로 한 창작물을 공연했다.
어느 날 단원들끼리 MT를 가서 유신치하 인권탄압을 풍자한 10분짜리 단막극을 즉석에서 연출했다. 그 얘기가 중앙정보부 귀에 들어갔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고 극단은 해체됐다. 설립된 지 3년 만이었다.
세 번째 구속된 것은 1979년 8월. 이른바 오원춘 사건(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에 연루돼서다. 이 사건은 불량감자종자 피해보상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농민 오원춘씨를 정보부가 납치·폭행한 데 대해 가톨릭교회가 대규모 기도회와 가두촛불시위를 벌이면서 불거졌다.
“10분이면 된다”
“국제앰네스티(국제인권위원회) 한국지부 사무국장을 할 때였다. 김수환 추기경한테 전화가 왔는데, ‘안동에서 오원춘 사건 기도회를 하는데 같이 내려가자’는 거야. 추기경 말이니 무조건 따랐지. 김승훈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내려갔다.”
안동에 내려가 기도회에 참석한 그는 추기경 강론이 끝난 다음 한국의 인권탄압 실상에 대해 강연했다. 행사가 끝난 후 700여 명의 참석자가 성당 밖으로 나가 야간촛불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출근했는데, 정보부 요원이 찾아와 ‘갑시다’ 하더라고. 10분이면 된다면서. 잠깐 확인할 게 있다고. 우리는 그 소릴 하도 많이 들어서…(웃음). 내가 ‘10분이 10년이 되겠지’ 하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는 남산 정보부 감찰실로 끌려가 20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맹장이 터졌다. 급성이었다. 정보부는 꾀병이라며 수술을 해주지 않다가 복막염으로 번지자 서대문경찰서로 이송시켰다. 경찰서 앞 한 개인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사관의 재촉에 의사가 서두르다가 가제, 솜, 실 따위를 뱃속에 남긴 채 봉합해버렸다.
“서대문구치소에 갇혔는데, 일주일 만에 곪아서 터져 나왔다. 12번이나 재수술을 했다. 마취도 없이, 구치소 안에서. 그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옷을 헤쳐 흉터를 보여줬다. 깊게 파인 고랑 같은 흉터 몇 개가 뒤엉켜 있었다.
10·26 직후인 1979년 11월 그는 구치소 안에서 한 차례 더 구속됐다. 애초 그의 구속사유는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10·26으로 긴급조치가 소멸되면서 석방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출소도 못한 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죄로 재구속됐다. 그가 이끌던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가 남민전 산하 단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국은 남민전을 광복 이후 최대의 자생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발표했지만 뒷날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졌다. 2006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남민전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때 재판에 관여했던 검사가 박철언 전 의원이라는 것.
“다른 건 기억 안 나고 이 말은 생각난다. 유신체제에 반대한 피고인은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고. 징역 15년을 구형하더라고. 악독하기보다는 좀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
그는 이 사건으로 4년간 옥살이했다. 두 사람은 1996년 15대 국회에서 만났다. 박씨는 자민련 의원이었다.
“의원회관 로비에서 마주쳤는데 내 눈길을 피하더라고. 그래서 쫓아가 ‘박 의원님, 제가 이재오입니다. 처음 들어왔으니 잘봐주십시오. 나는 지난 일은 다 잊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지. 그러자 ‘재야활동 오래 하셔서 국회의원이 잘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더라고.(웃음)”
1982년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그는 재소자 인권투쟁을 하면서 23일간 단식했다. 그해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 사실을 알려주려 면회를 왔던 큰형은 동생이 단식투쟁하는 걸 보고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 출소할 때까지 이미 세상을 뜬 부친에게 간간이 편지를 써 보냈다. 모친은 199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부모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두 분 다 임종을 못 지켰으니 큰 불효를 한 거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면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네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감옥생활이 편할 테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고될 것이다.’ 또 어머니는 ‘여기도 사람 사는 데 아니냐. 마음 크게 먹어라’고 나를 위로했다. 부모님은 한 번도 내가 한 일에 대해 ‘왜 그런 짓 하냐’고 나무란 적이 없었다.”
그가 다섯 번째로 구속된 것은 1989년 4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장으로서 범민족대회를 추진하는 과정에 문익환 목사의 방북 배후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그는 범민족대회 실무회담을 하러 판문점으로 가다가 체포됐다. 당시 이 사건을 지휘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 최병국 한나라당 의원이다.
그가 5차례 구속되면서 선고받은 형량을 다 합하면 징역 12년6개월이다. 하지만 실제로 복역한 기간은 6년10개월이다. 감형이나 사면 등으로 형기가 줄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잡으러 갈게”
이쯤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얘기가 궁금해진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결혼식부터 파행이었다. 박정희가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을 누르고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던 해인 1971년 10월의 일이다.
원래 그가 잡아놓았던 예식시간은 10월9일 낮 12시. 장소는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였다. 그런데 전날 김지하 시인한테서 연락이 왔다. 원주천주교구에서 원주MBC 문제로 철야농성을 하는데 내려와서 농성을 이끌어달라는 거였다. 자기네는 3일간 해서 인력이 바닥났다면서. 그는 낮에 내려가 밤새 농성하고 다음날 낮 12시쯤 원주에서 출발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3시쯤 됐다. 그런데 주례가 보이지 않았다.
“한 달 전에 부탁해놓고 온 건데 데모하러 돌아다니느라 확인하는 걸 잊어먹었던 거야. 이 양반이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니 그날 등산을 가버렸어.(웃음) 그 양반 등산코스를 알기에 산 밑에 가서 기다렸지. 만나서 ‘주례가 등산 가면 어떡하느냐’고 따지니까, ‘나도 오늘인가 내일인가 싶었는데 연락이 없기에 자네한테 또 사정이 생겨 못하는 줄 알았지’ 하더라고.(웃음)”
예복도 문제였다. 집에 붙어있을 때가 없어 양복을 맞춰놓기만 하고 가봉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양쪽 팔 길이가 다른 양복을 걸쳤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친구 것을 빌렸다. 식장에 나타난 정보부 이모 대령이 축하금을 건네면서 속닥였다. “오늘은 축하하고. 수배가 떨어졌으니 내일부터 잡으러 갈게.”
신혼여행은 경주로 떠났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넘쳐 방을 구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돌아다닌 끝에 개천가에서 여인숙 하나를 찾아내 신혼 첫날밤을 보냈다. 여인숙에서 심부름 하는 여자가 자는 문간방이었다. 다음날 그는 부산으로 튀었고 부인 혼자 서울 불광동에 마련한 신혼집으로 올라왔다.
“아내가 문을 여니 신혼방에서 종로서 정보과 형사들이 우리가 아직 덮어보지도 못한 이불을 깔아놓고 앉아 있더라는 거야. 아내가 그 자리에서 기절해 서대문병원에 입원했지.”
그가 수감생활 하는 동안 집안생계는 부인의 몫이었다. 부인은 쇠락한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어릴 때 어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바느질이 돈벌이가 됐다. 한복 바느질방을 내고 몇 가지 장사를 하면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2녀1남을 뒀다. 딸 둘은 결혼했고 아들은 군복무를 마친 후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정보과 형사들을 아버지 친구로 여겼다. 형사들은 허구한 날 집에 없는 그를 대신해 동사무소에서 영세민에게 나눠주는 라면과 쌀을 타서 집에 갖다주곤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일 리가 없었다.
“거리감이 꽤 있었지. 어릴 때 하도 떨어져 살아서. 데면데면했지 뭐. 내가 무슨 말해도 잘 먹히지 않고. 커서는 그런 게 없어졌지만.”
그는 “민주화투쟁 하면서 가족한테 안겨준 건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심어줬다”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옳게 살아야 한다는 것, 부정부패하면 안 된다는 것. 이 정신은 온 가족이 공유하고 있다. 가끔 내가 없을 때 누가 집에 찾아와 뭘 놓고 갈 때가 있다. 그럼 다음날 반드시 돌려준다. 자식들이 그거 하나는 확실히 배웠다. 추석 때 과일상자가 들어오면 딸들이 ‘이거, 뇌물 아니야’ 했을 정도니까.”
그는 3선 하는 동안 세비를 받으면 지구당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지구당에서 그의 부인에게 300만원씩 월급을 보내줬다는 것이다.
“‘4선이 되면 무조건 세비 봉투를 당신 앞으로 보내주겠다’ 약속했다. 그런데 떨어졌지 않나.(웃음) 집사람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중앙대 초빙교수 월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 달에 250만원 나오는데 세금 떼고 220만원이 집사람 통장에 입금된다. 집사람은 국회의원 할 필요 없이 교수나 계속하라고 한다.”
“식사 때마다 서글펐다”
▼ 돈에 대해 결벽증이 있나.
“돈이 생기면 쉽게 일을 하려 한다. 정치를 돈으로 하려면 안 된다.”
▼ 그래도 정치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나. 더욱이 무리를 이끌려면.
“있으면 좋겠지. 나하고 친한 의원들은 무슨 일 있으면 다들 자기 돈 낸다. 미국 갈 때도 의원들이 돈 모아서 비행기표도 끊어주고….”
▼ 몇몇 기업체에서 돈 대줬다고 하던데.
“기업체는 무슨? 내가 그걸 받기나 하겠나.”
▼ 깨끗하게 사는 건 좋은데 가장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사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 이 생활이 몸에 배어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 이 대통령과 친한 기업인이 건넨 돈 봉투를 거절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2007년 경선 때다. 누군가를 보내 돈봉투를 건네기에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이런 건 (기사로) 쓰지 않으면 좋겠다.”
측근에 따르면 정치권 인사들 중에도 그에게 돈 가져왔다가 퇴짜 맞은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한다. 후원금도 50만원 이상이면 ‘뇌물 성격이 있다’며 돌려보낸다고 한다.
▼ 가까운 친구 중에 기업인이나 재력가가 없나.
“유유상종이라고 어떤 기업인이 내 주변에 얼씬거리겠나. 자칫 빨갱이 도와준다고 망하기 십상이지. 이번에 미국에 가서 앨라배마의 현대공장과 텍사스의 삼성공장을 가보고 남미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을 둘러보면서 기업이 애국자라고 느꼈다. 기업이 돈 안 벌면 나라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인들과 얘기를 나눠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국에 가 있을 때 그는 버지니아주에서 살았다. 그가 연수를 했던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인 주용식씨의 집이었다. 두 남자가 자취를 했다고 한다. 그는 “식사 때만 되면 서글펐다”고 털어놓았다.
“밥도 가끔 했지만 주로 라면이나 국수, 감자, 고구마를 많이 먹었다. 밥을 하면 반찬도 해야 하니.”
존스홉킨스대는, 학부는 몬트리올에 있지만 국제대학원은 워싱턴에 있다. 그는 자전거로 통학했다. 1시간20분 거리였다. 어느 날 내리막길에서 과속하다가 5m쯤 날아가 거꾸로 처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보도블록 턱을 들이받아 땅바닥에 머리가 부딪혔는데 헬멧이 박살났다. 그는 2주간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그의 집 거실엔 ‘不勞無榮(불로무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영광이 없다’는 뜻이다. 가훈을 묻자 “가난하더라도 정의롭게 살자”라는 ‘고전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내심 공감하면서도 짐짓 이렇게 물어봤다.
▼ ‘정의’ 이런 말은 지난 시대의 단어 아닌가.
“그렇지만 그게 핵심이지. 나라가 발전하려면 그게 있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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