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름(막 7:27)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그 제자들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역사들을 가능하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의 무리라는 사실과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사두개인들과 상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사도들을 모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7절)고 추궁했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이적은 이미 많은 무리들이 알고 있었기에 놀라운 일들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가능케 되어진 배경을 캐묻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기적은 종교 지도자로서 권위와 질서를 무시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사건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심문에 담대하게 답했습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하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뜰 안에 있던 베드로와 종교 지도자들의 심문을 받는 베드로의 차이는 성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날 것이고 대신에 성령님(Counselor)을 오실 것을 약속(요 16:7)했습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을 도울 것이고 능력이 되실 분이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결단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부닥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우리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성령 충만함으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성령님에 의해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병자를 고친 일을 기억하며 이런 일을 행한 이는 내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님으로 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지내며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했습니다. 잔인한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혹독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십자가의 사형을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현대의 유대인들조차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잔인하게 영상화한 이 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한 유대인들을 고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쓸모없이 고통스럽게 죽었던 예수님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대인들,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상 사람들, 마침내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대적자 원수, 사탄을 극복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십자가의 부활로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주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허락(12절)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롬 10:13).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배타적이라고 비판을 받습니다.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상의 이치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려 하지만 실상은 구원에 관심이 없다는 주장이 숨어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것과 삶에 대한 연민과 긍휼함을 갖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명확하게 전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연민과 긍휼을 갖는 관대함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은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하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고 예수님으로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곤고하고 위축되어진다 할지라도 우리로 하나님은 그의 큰일을 행하실 것을 기도합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구원자의 이름을 부르는 복된 삶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