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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 와 연관이 있는 중국 현지 여행을 되돌아 보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어려웠는데 펜데믹이 엔데믹으로 바뀌면서 3월 22일부터 귀국시 자가
격리 7일이 폐지되었고 4월 1일 부터는 대중교통 이용금지도 해제된지라, 4월 20일 부터 23박
24일간 영국등 유럽 9개국 여행을 다녀왔으니 중국도 언젠가는 다시 갈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간 중국은 여행사 호텔 패키지 2번과 개인 배낭여행 8번등 열번을 다녀왔는데, 중국
도 가을 전대를 마치면..... 내년 봄이면 엔데믹으로 돌아서고 여행이 가능하리라는
기대 속에 지난 중국 여행에서 4자성어와 관련되었던 도시를 다시한번 되돌아 봅니다.
4자 성어는 고사성어(故事成語)니 신화·전설·역사·고전·문학작품등 옛 이야기에서 유래되어 생긴 말로
비유적인 내용을 함축하는데 “경국지색” 처럼 4자 성어가 대부분이지만... 벼슬에서 물러나는 “계관”,
도둑을 뜻하는 “녹림” 도 있고 흔히 쓰는 “등용문” 과 “미망인” 등 2자 성어나 3자 성어도 해당합니다.
1.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인이라는 고사성어로 이연년(李延年)의 시에서 비롯된 단어인데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만한 절세의 미인을 가리키는 고사성어이니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나 팜파탈의 동양버전이지만 똑 같지는 않습니다.
중국 한무제(漢武帝) 때 음악을 관장하는 벼슬인 협률도위(協律都尉) 로 있던
이연년(李延年) 이 지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북쪽에 어여쁜 사람 있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서있네. 한번 돌아보면 성을 위태롭게 하고 두번 돌아
보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어찌 성이 위태로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모르리요만 어여쁜
사람은 다시 얻기 어렵도다." 이 시는 장예모 감독의 영화 “연인” 에서 장쯔이가 노래로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이연년이 무제 앞에서 절세미인 자기 누이동생을 자랑하여 부른 것으로 무제는 50고개
를 넘어 쓸쓸한 처지였으므로 그녀를 불러들였으니 아름다운 자태와 날아갈 듯 춤추는 솜씨에
매혹되었는데, 총애를 독차지한 이부인(李夫人)으로 그녀가 병들었을 때 무제가 문병을
와서 얼굴 보기를 청하였으나 초췌한 얼굴을 보이기 싫다고 끝내 얼굴을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국지색의 또 다른 사례들은 말희, 달기, 포사, 서시, 초선, 왕소군, 식부인, 양귀비,
진원원, 하희 등의 스토리가 있는데.... 세부적인 디테일만 제외하면 하나같이 판에
박힌듯 똑같다는 것이니 심지어 실존여부를 의심받는 말희나 아예 가공 인물인
초선의 스토리 까지도 똑같다는 것은 당시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봅니다.
말희등 여인들은 군주를 주색에 빠뜨리기 위해 적이 동원한 '매개체' 로만 등장하지 당사자 본인의
인간적 의지가 투영된 장면은 적은데, 기껏해야 일이 다 끝난 후 자살했다는 정도이지만 헬레네,
클레오파트라와 마타 하리등 팜 파탈 캐릭터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중국의 "4대 미인" 으로 당나라 때의 학자들이 경국지색(傾國之色) 에 대해 이야기하니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4명 인데.... “침어낙안(浸魚落雁)” 에 “폐월수화(閉月羞花)” 란 말이 생겼으니....
침어(浸魚) 는 춘추시대 월나라 미인으로 사오싱(소흥) 출신 서시(西施) 를 지칭한 것이니 서시가
호수에 얼굴을 비추니 물고기들이 넋을 잃고 헤엄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았다고 하여 붙여졌다 합니다.
낙안(落雁) 은 한나라 왕소군 (王昭君)을 지칭하니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가다 왕소군을 보고
날갯짓 하는것을 잊어 추락해 붙여졌다는데, 왕소군 은 한나라 선제때 후궁으로 흉노 선우
호한사 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이후 60년간 두나라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여인 이라고 합니다.
폐월(閉月) 은“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인 초선(貂蟬) 을 말하니 ”달이 부끄러워 구름뒤로
숨는다.“ 는 뜻이니, 초선은 한나라 충신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양부의 뜻을 받들어
한나라를 부흥하고자 동탁(董卓) 과 여포(吕布) 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화(羞花)" 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의 주인공이기도 한 당나라의 미인 양귀비
(楊貴妃) 의 별칭으로 “꽃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백(李白) 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 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 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으로 하여 “장한가 長恨歌”로 노래 했습니다.
1) 서시 :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으로 양귀비와 더불어 동양에서 미인의 대명사로 일컬어
지며, 특히 병약미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데 월나라 저라산(소흥) 출신으로
오나라에 패망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가 서시를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쳐,
결국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집니다.
이때 범려는 서시와 함께 정단이라는 미녀도 바쳤으나, 부차는 정단보다 서시를 더 총애
했으니 그 일로 인해 정단은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여러모로 말희, 달기, 포사 등과 함께, 고대 중국인들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는 인물입니다.
2017년 10월 18일 저장성 소흥 绍兴에서 문호 루쉰(노신) 고향 루쉰꾸리 魯迅故里(노신고리)
에 도착해 심원까지 보고는 근처에 있는 콰이지산 (會稽山 회계산)을 올라 越王臺
( 월왕대) 에 들러니 월왕 구천의 보검과 함께 그 옆에 "西施(서시) 의 초상화"를 보았습니다.
서시(西施)는 중국의 4대 미녀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물
이라고 하며 동서로 나뉜 마을의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이름을 서시라고
했다는데 아버지는 농촌의 나무꾼이었고 어머니는 빨래를 직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오나라 왕 합려를 죽이고 기세등등했던 월왕(越王) 구천 은 그 아들인 오왕(吳王) 부차를
선제 공격했다가 패해 회계산까지 쫃겨와서는 항복한후 오나라에 끌려가 3년동안
치욕적인 부차의 시중을 들다가 귀국해 와신상담 (臥薪嘗膽) 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읍니다.
이때 월나라 중신 범려와 문종 이 "미인계" 를 권하고는 나라를 뒤져 서시 를 발견한
후에 춤과 노래 등을 가르쳐서 오왕 부차에게 보내니 부차는 서시의 미색 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랏일을 게을리하며 충신 "오자서의 충고를 무시" 하다가 망합니다.
서시는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한후 연인 범려와 함께 도망쳐서 장쑤성 우시시 태호에 있는 호수
여호(蠡湖) 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오나라 사람들이 나라를 망친 요물이라
하여 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에, 부차를 사랑하게 되어 따라 죽었다는 3가지 설이 전합니다.
서시는 어릴때부터 미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니 마을 처녀들이 서시의 행동을 따라 하곤
했는데 서시가 배가 아파 찡그리는 것 까지 따라 했으니 여기서 ‘효빈(效顰)’ 이란
단어가 생겼으며 또한 ‘빈축(嚬蹙)’ 이란 단어도 파생되었는데 찡그린다는 뜻 이라 합니다.
이로써 훗날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행을 비유할 때 ‘빈축을 산다’ 고
표현하게 되었는데, 동쪽 마을에 살았던 동시는 서시가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
했는데 여기서 ‘동시빈축(東施嚬蹙)’, '동시효빈(東施效顰)’ 이란 사자성어가 파생됩니다.
서시가 시내에 빨래하면 시냇물에서 헤엄치던 물고기 들이 그녀에 미모에 넋을 잃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니... 여기서 물고기도 가라앉히는 서시의 미모 를 가리키는
‘침어(沈魚)’ 라는 별명이 나왔다는데 고향인 사오싱(소흥)시 주지시에 서시 마을을 비롯해
서시의 사당, 완사계 등 꽤 많은 유적이 남아 있으며 매년 기념 축제도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2) 양귀비 : 당나라 현종의 후궁으로 양귀비는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라는 직함이 붙은
것으로 도호(道號)를 사용했기에 양태진(楊太眞)이라고 아명도 전하지는 않으나
일설에 옥환(玉環) 이라고 했으므로 중국에서 대중들 은 '양옥환'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녀는 719년에 용주(容州)에서 출생했는데 속설에 옥 고리(옥환玉環)를 손에 쥐고
태어나서 부모가 아명을 옥환(玉環)이라고 지었다고 하며 은둔해 살던 선비가
어린 태진을 보고서 "이 아이가 성장하면 황후와도 같은 자리에 오리르라."
하고 예언했다는 말도 있는데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735년 17살때 현종의 제18황자 수왕(壽王) 비(妃)가 되었는데 2년후 당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
가 죽자 현종은 수왕비가 아름답다고 진언하는 자가 있었으니 740년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들른
기회에 양태진을 만나보고 총애하니 수왕의 저택을 만나 도관(道觀: 도교사원)에 들어가 출가해 태진
이란 도호를 받아 여도사(女道士) 가 되고 745년 27살 때 현종이 양태진을 귀비(貴妃)로 책립하였습니다.
오랜 국정에 싫증난 황제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궁중에서는 황후나 다름없이 대우를 받았을뿐더러 3년
후에는 다른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으니 양귀비는 물론
자매와 친족에게까지 현종이 후대하였으므로 훗날 백거이는 이런 상황을 장한가에서 묘사했습니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 빼어난 미녀 3천이 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3천의 총애가 한 사람에 머무르고
姉妹弟兄皆列土 자매와 형제 모두가 봉토를 갖게 되니,
可憐光彩生門戶 아리따운 광채가 가문에 나는구나.
遂令天下父母心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겼네.
양귀비 자매가 누린 부귀영화로 친척 오빠 양국충(楊國忠) 등이 고관대작으로 발탁되었고 양귀비
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며 옷을 만드는 전문인력만 7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리 없으니 755년에 양국충과 반목하던 것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백, 청평조사(淸平調詞) :
一枝濃艶露凝香(일지농염로응향
한 줄기 나뭇가지 농염한 이슬에 향기가 배어
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산왕단장) 무산의 이슬비가 애를 끊네
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
묻노니, 한실의 누가 비길 수 있으랴
可憐飛燕倚新粧(가련비연의신장
아름다운 비연조차 다시 단장해야 하리라
양귀비 유적지를 보려면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천으로 피난 가던중 마외역에서
병사들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 곳에 양귀비묘를 세웠고 현재는 민속촌으로 개발
되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나는 중국을 10번이나 여행하고도 서안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해서 내가 양귀비 유적을 본 곳은 2011년 1월 14일 우시(無錫 무석) 호수변에 호텔을 나와 820번
버스를 타고 싼궈청 (三國城, 삼국성) 을 지나 탕청 ( 唐城, 당성 ) 에서 내리니 "마지막 황제"
의 촬영 장소인데 32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당나라 시대의 성과 상가며 궁궐을 보았습니다.
당나라 이백과 두보등의 시비를 지나 현종과 양귀비의 행차 모습 벽화를 보는데.... 그 선명한
색깔의 옷이며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매우 사실적으로 느껴진 것이 다시 생각이 납니다.
우리나라 "경국지색" 인 장녹수는 집이 매우 가난해 몸을 팔아서 생활하고 혼인도 여러번 하다가
제안대군이 부리는 가노(家奴)의 아내(家婢)가 되어서 아들을 낳고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
(娼妓)가 되었다는데 외모는 평범하여 미인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동안으로 30대에 16세
소녀로 보였으며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비위를 잘 맞추는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장희빈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모친인데 5년간 왕비로 있었지만 폐비였던
전임 왕비 인현왕후가 삼불거로 복위하게 되면서 중혼법에 따라 다시 후궁으로
돌아갔으며 경종때 옥산부대빈(府大嬪) 장씨로 불렸지만 영조 즉위년에 다시
희빈이라고 불렸기에 희빈 장씨, 장희빈, 혹은 장옥정(張玉貞) 으로 알려졌습니다.
현대에 이르서서는 조선 왕조가 없어지니 경국지색이란 말은 없어졌는데 그럼에도
"경군지색(傾軍之色)" 이 있었으니,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에게서 연애편지
를 받고 섬로비를 통해 백두 사업 등 군 로비스트로 활약한 미녀 린다김 이라???
2. 우공이산(愚公移山)
'우공이산' 은 열자 탕문편에서 나오는 고사성어로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 며 속뜻은 '열심히
노력하면 결국은 이룰 수 있다' 인데 북산에 어리석은 노인 우공이 살고 있었으니 집 앞에는
태항산과 왕옥산이라는 커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다른 고장으로 다니기가 무척 불편했습니다.
우공은 이미 나이 90세에 가까웠지만 이 두 산을 옮겨서 산을 돌아서 가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했으니 자식들과 손자들은 모두 찬성하였는데는 아내가 걱정이 되어 산을
파면서 나온 돌과 흙인 버력을 어디에 버리냐면서 반대했지만, 남편이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식들까지 찬성하면서 발해란 곳에 버리면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찬성합니다.
며칠 뒤 우공은 자식들과 함께 산의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에 담아 발해의 은토라는
곳으로 날랐고 마을 과부 경성씨와 그녀의 7살 난 아들 역시 우공을 도와주었다는데
그런데 은토는 거리가 먼 곳이라 흙을 한번 버리고 오는데 한 해가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우공의 친구 지수(智叟)가 걱정이 되어서 "우공, 제발 그러지 말게, 자넨 이미 90살이라 너무 늙었네. 산을
허물기도 전에 죽을 것일세." 라며 만류했지만 우공은 “이보게, 지수 나야 늙었지만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으니 죽으면 아들이,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손자가 죽으면 자식이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라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태항산과 왕옥산의 산신령과 발해의 바다신이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우는 인간의
노력이 끝없이 계속되면 자신들의 살 자리가 없어질까 봐 겁이 나서 옥황상제에게 좋은
방법을 알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에 감동함과 동시에 천계에
힘이 센 거인 과아씨의 아들을 시켜 두 산을 들어 옮기게 하여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합니다.
1) 중국 운남 용문: 2008년 1월 4일 운남성(雲南城) 쿤밍( 昆明 곤명)의 후안청난루(环城南楼)
에서 24로路(44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 장족과 백족등 소수민족들의 민쭈춘
(民族村 민족촌) 에 가서는 거기서 곤돌라를 타고 덴츠호 호수를 건너면 시산 선린궁
위안 西山森林公園 인데..... 리프트나 트롤리차를 타면 절벽인 룽먼(龍門 용문) 에 도착합니다.
삼청각 도교사원을 톡과하면 그 뒤로 절벽으로 난 가파른 계단길이 나오는데
뤄한산 벼랑 위에 3부자가 개인적으로 1781년 부터 굴을 파기 시작해
손자 대인 1853년에 완공을 보았다는 석굴인 룽먼 龍门 (龍門, 용문)입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는 좁은 석굴 을 따라 1,333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불상과
석대등 석각 예술품을 만날수 있으니 별칭으로는 조도(鳥道) 인가 본데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우공이산 愚公移山 ”의 설화중에 그 예의 하나를 봅니다?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밑을 보면 아찔 할만도 한데.... 개인이 절벽에 정으로 일일이
바위를 쪼아 칠십여년 세월에 걸쳐 이런 돌길을 만들었다는데, 하루에
바위를 판다한들 얼마나 팔수 있으리요? 그래도 73년을 쉬지 않고 계속했다니?
할아버지가 시작해 하다가 다 못하면 아들이 이어받아 계속하고 그래도 이루지 못하면
손자 가 이어 받아 완성한다! 인내심 하나는 대단한, 미련한(?) 중국인 이 아니면,
우리 빨리빨리 조급한 한국인 으로는 70여년 세월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2) 일본 오이타현 아오노도몬 : 유사한 사례로 2013년 11월 6일 일본규슈 오이타현 나카쓰에서
수실온천행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면 강변에 뚫은 터널 아오노도몬 靑の洞門
(청노동문)이 나오는데, 키쿠치칸의 소설 "은원의 저편" 恩雙の彼ちに 에 나오는 무대라 합니다.
젠카이 라는 승려가 강 때문에 왕래에 불편을 겪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30년에 걸쳐 혼자서 끌과
망치를 가지고 절벽을 파서 1764년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중국의 룽먼 龍门 (龍門, 용문) 은
뤄한산 절벽 벼랑 위에 3부자가 대를 이어가며 팠다지만 여긴 혼자서 30년동안 판 것이 다릅니다.
3.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그리고 시검석(试剑石)
중국인들의 화법에 “상유천당 하유소항”이라 했으니 소는 오나라 수도 소주이고 항은 월나라
수도 항주인데, 서로 견원지간이자 불구대천으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으니 전국시대에 오월동주, 와신상담 같은 고사성어를 남겼을 만큼 원수
같은 존재였는데 오왕 합려와 관련된 전설 속의 명검 막야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왕 합려는 자신의 무덤(호구검지) 속에 3,000자루의 보검을 함께 묻어 달라고 할 정도로
유난히 검을 좋아하는 제후였는데 쑤저우(蘇州 소주)는 옛 오나라의 수도로, 합려의 무덤
인 후커우(虎口 호구) 가 남아있는데 호구에는 합려의 무덤 뿐만 아니라 전설의 명검을
시험했다는 시검석( 试剑石, 試劍石)이라는 바위가 있으니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나라에는 간장(干將)과 막야(莫耶)라는 부부 도공(刀工)이 있었으니 합려의 명을 받든 부부는 음양
이 조화되고 신령이 강림한다는 시간을 기다려 최고의 조건 아래 칼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3년간
각고의 노력을 들여 드디어 자웅 한쌍인 보검을 만들어 냈고, 이 두 개의 칼은 부부의 이름을 따서
‘간장검’ 과 ‘막야검’ 이라 했으니 간장은 칼을 왕에게 바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막야에게 말합니다.
“웅검인 간장검은 숨겨두고 자검인 막야검만 왕에게 바치러 가오. 모르긴 해도 나는 집으로 돌아오기
어려울 거요. 당신은 임신 중이니 혹시 아들을 낳거든 웅검인 간장검을 찾아 반드시 복수하도록
일러주시오. 간장검은 문을 나서서 남산을 바라보는 돌 위 소나무가 서 있는 뒤쪽에 묻혀 있소.”
간장이 바친 자검을 받아 쥔 합려는 몹시 기뻐했으며, 그가 또 다른 명검을 만들지 못하도록 간장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정사로 여겨지는 사마천의 사기에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과의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간장의 아들이 복수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1) 소주 후커우(虎口 호구)의 시검석(詩劍石) : 2011년 11월 25일 소주에서 졸정원과 한산사를
보고는 택시로 후추(虎丘 호구) 에 도착해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김천을 지나면 바로 칼로
바위를 벴다는 시검석(詩劍石) 이고 조금 더 오르면 3천자루 칼이 묻혔다는 검지(檢池)입니다.
오왕 합려는 바위를 잘라 막야검을 시험해 보았다 하니 합려의 무덤 호구에 남아 있는 넓이 5cm
간격으로 일자로 갈라진 5m 정도 시검석은 너무나도 깨끗하게 잘려있는지라 엉터리라고
치부하기도 어려운가 합니다. 다른 속설에는 무덤에 묻힌 검을 탐낸 진시황이 무덤을 파는
중에 호랑이가 덮치는지라 엉겁결에 호랑이르 내리친 진시황의 검이 바위를 쪼갰다고도 합니다?
2) 전장 베이구산 감로사의 시검석 : 2015년 10월 25일 양자강 남쪽 전장(진강) 베이구산(북산)
에서 东吴古道(동오고도)를 걸어 오르니 试剑石(시검석) 이 나오는데 유비와 손권이 조조에
대항해 천하를 누가 차지할지 점쳤다는 바위이니 오(吳) 나라는 후한 말기 혼란기에 손견이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장남인 손책을 거쳐 차남인 손권의 대에 이르러 229년에 나라를 세웁니다.
손책은 임종을 맞을때 동생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군세를 이끌고 싸우는 것이라면
내가 더 낫다. 그러나 현자를 발탁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일은 네가 더 낫다”유언했으니
손권은 19세에 동오의 국왕이 되었는데 노숙 · 제갈근 · 감녕 · 서성 등의 인재를 발굴
했으며 208년 유비와 연합해 천하통일을 노리는 조조의 야망을 적벽 (赤壁)에서 분쇄합니다.
적벽대전후 유비가 손권의 누이동생에게 장가 들기 위해 전장(진강)을 찾았는데 손권과 주유가
누이동생을 유비의 배필로 준다고 미끼를 던져 유비가 장강을 건너오면 인질로 잡아서는
형주를 받아내려는 계책을 세웠지만 제갈량은 역이용했으니 유비는 계책대로 먼저 교국로
(喬國老) 를 배알해 그를 통해 오국태 (吳國太)를 구슬림으로써 혼인허락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오국태는 감로사에서 유비가 영웅임을 알아보고 딸의 결혼을 찬성하니 거짓으로 시작된 일이 진실로
바뀌어 유황숙은 화촉 동방에 아름다운 배우자를 맞이하는데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ㆍ
선주전” 에는 손권이 형주를 차지한 유비를 두려워하여 누이를 들여보내 우호를 다졌다고 기록합니다.
그 혼인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가 감로사(甘露寺) 인데 교국로는 이교(二喬)의 아버지로 대교
는 손책의 아내이고 소교는 주유의 아내 였다고 하며 오국태는 손견의 아내인 오부인의
여동생으로 그녀 역시 손견에게 시집갔으니 오부인이 손책, 손권을 비롯한 4명의 아들
을 낳았고, 동생 오국태는 손랑이란 아들 하나와 유비에게 시집가는 딸을 낳았던 것입니다.
3) 소흥 선위안(沈園 심원) 斷雲(단운) : 2017년 10월 18일 찾은 선위안은(심원)은 심씨원( 沈氏園) 이라
불리는데 남송시대에 건립된 중국 전통정원으로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로맨스 로 유명한데
입구에 쪼개지다만 돌 斷雲(단운) 이 있으니 육유와 당완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얘기한다고 전해집니다.
4) 칼의 문화 : 일본은 평생 칼을 수련해 검신의 경지에 이르는 사무라이 문화가 있고 중국에는 칼 한자루
등에 메고 강호를 주요하는 무협지가 있지만, 붓의 문화 선비들의 나라인 조선에는 무사들의 이야기가
없으니.... 이는 성리학의 조선에서 무과 시험은 병법과 말타기 및 활쏘기 3과목 뿐인지라 평생 칼
이나 창을 단 한번도 손에 잡아보지 못한 사람도 무과 장원급제해 장군이 될수 있었기 때문인가 합니다?
신조협려(神鳥俠侶) 로 유명한 중국 무협소설 작가인 김용(金鏞)의 글에 보면.... 상대가 없었다는
검마(劍魔) 독고구패(獨孤求敗)는 칼무덤(劍塚)을 남겼으니 첫째 이름 없는 날카로운 칼은
예리해 베지 못함이 없었으니 스무살 전에 황하 이북 군웅과 다퉜고 둘째 자미연검(紫薇軟劍)
은 서른 전에 썼으니 불길하게 의로운 무사를 실수로 해쳤는지라 후회하며 골짜기에 버렸습니다.
셋째 현철중검(玄鐵重劍)은 무거운 칼의 날이 무디듯 뛰어난 기교는 솜씨가 없어 보이지만 마흔 전에
이 칼로 천하를 주름잡았으며 마흔을 넘기자 무엇도 휴대하지 않았으니 풀과 나무, 대나무와
돌을 모두 검으로 삼았으며... “여기서 수양을 정진하면 점차 칼 없이도(無劍) 칼을 쥔 자(有劍)
를 이기는 경지에 들어섰다.” 칼 없이 칼을 이기는 무검승유검 (無劍勝有劍) 의 단계라고 합니다.
4.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 보다 낫다는 말인데 직접 체험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듣는 것 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A picture is worth 1000 words 또 러시아어로는
лучше один раз увидеть, чем сто раз услышать 니 세계적으로 통하는 보편적인 교훈인가 합니다.
중국 한나라 선제때 조충국의 고사인데 조선 초에 재상 맹사성은 저 뒤에 “백견이 불여일각 이며,
백각이 불여일행”을 덧붙였으니....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며, 백 번 보는 것
이 한 번 생각하는 것보다 못하고, 백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행함만보다 못하다." 라는 뜻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을 실감한 것은 2015년 10월 21일 안휘성
黃山(황산) 에 올랐을 때인데....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르면서 본 광경만 해도
본전은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신백아령에 내려 수금송과 시신봉에 몽필생화
를 보면서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또 名不虛傳(명불허전) 이라는 말이 실감 났었습니다.
백문이라는 말은 “한서(漢書)” 의 “조충국전” 에 나오는데 전한(前漢)의 제 9대 황제
선제( BC 74~ BC 49) 때에 서북 변방에 사는 티베트 계통의 강족(羌族) 이 쳐들어
와서 전한의 군사가 대패하자 선제는 고민 끝에 어사대부 병길에게 토벌군의
적임자를 누구로 하였으면 좋겠는지 후장군 조충국 에게 물어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조충국은 일찍이 흉노 토벌때 이광리 장군의 부하로 출전해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진
으로 과감하게 진격하여 전한의 군사를 무사히 구해내는 전공을 세운 용장인데 하지만
이때는 76세의 백전노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기가 왕성하였으니 바로 자신이
적임자라고 답하니... 선제는 그를 불러들여 강족의 토벌 방책에 대해서 고견을 물었습니다.
조충국은 "백 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보다 못합니다.“ 무릇 군사란 작전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전술을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므로 바라건대..... 신을
금성군으로 보내 주시면 현지를 살펴본 다음 방책을 아뢰겠습니다
“百聞不如一見 兵難險度 臣願馳至金城 圖上方略"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조충국은 현지에 도착해서는 지세와 적의 동태를 면밀히 살펴보고 또한
포로로 잡힌 전한 군사로 부터 정보를 캐낸뒤에 선제에게 보고하는데
"기병 보다는 둔전병 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아룄던 것입니다!
5. 남선북마(南船北馬) - 강남수향(江南水鄕)
중국의 남쪽은 강이 많아서 배를 이용하고 북쪽은 산과 사막이 많아서 말을 이용한다는
뜻으로, 늘 쉬지 않고 여기저기 여행을 하거나 돌아다님을 이르는 말이니 중국의
북쪽은 평원이 많아 육운이 발달하였는데 남쪽은 수로가 많아 수운이 발달하였습니다.
‘회남자'(淮南子)에“호인은 말을 타는 데 적합하고 월인은 배에 익숙하다.”(胡人便於馬
越人便於舟) 라는 구절에서 남선북마가 유래했다고 한느데 호인(胡人)은 북쪽
변방에 살던 흉노족을 말하고, 월인( 越人)은 강남에 있던 월(越)나라 사람을 말합니다.
실제로 ‘삼국지 ’의 적벽대전은 육지전(陸地戰)에 강하고 수전(水戰)에 약한 조조군을 촉의 제갈량
과 오나라의 주유가 수전으로 맞서 이긴 것으로 유명하며 383년 11월에도 전진의 부견은 백만
대군을 몰아 남하하니 동진의 사석과 사현은 18만 정도의 열세임에도 꾀를 내어 적을 물리칩니다.
중국 북쪽지방 여행은 만리장성을 한번 보고 만주에서 만포 건너편에 지안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이며 산성자 유적등을 보고 백하를 거쳐 백두산에 오른후 연길과 용정을 거쳐
삼합에서 북한땅 회령을 내려다 보았는데... 기차로 만주벌판을 달리면서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지라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말한대로 “크게 목놓아 한번 울어보고 싶었습니다”
중국 강남에 水乡古镇(수향고진) 은 운하 강 호수등 물과 어우러진 옛마을로 현재 주민이 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중국의 맛과 멋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으니 中国十大水乡古镇-梦里水乡(중국10대 수향고진- 몽리수향) 이라 부릅니다.
절강성에 4곳이 있으니 绍兴有名的四大古镇之一 이라는 安昌(안창)에 鱼米之乡, 丝绸之府
이라고 불리는 가흥의 우전 乌镇(오진) 과 영화 '미션임파셔블3' 의 촬영지로 越角人家
로 불리는 시탕 西塘(서당) 그리고 南浔历史上园林众多 이라고 하는 南浔(남심) 입니다.
강소성에는 중국 제1의 수향이라는 周庄(주장) 에 동방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同里(동리)에
文化底蕴深厚 라는 甪直(록직) 에 吴中第一镇 木渎(목독) 과 湖光山色의 光福(광복) 이
있고 상해시 북쪽 교외에 江南明珠 라고도 불리는 주지아지오 朱家角(주가각) 이 있습니다.
1) 安昌古镇(안창고진) : 2017년 10월 19일 사오싱(绍兴市 소흥) 에서 118로 버스를 타고 종점
安昌公交站 (안창공교참) 에 내려 삼륜차를 타고 안창구전 安昌古镇(안창고진) 에 도착하는데
마을을 관통하는 1,700m 운하에 늘어선 전통 거리를 “싼리라오제 (三里老街 삼리노가 )”
라고 부르니 주변에는 부인들이 향장을 만들어 대나무에 널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강남의 물고장 수향(水鄕)으로 수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게 우펑추안 (烏蓬船 오봉선) 인데
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검은색 나룻배인 오봉선 은 검은 천의 지붕과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해서 노를 젓는 소흥만의 전통적이고 특이한 배로 오랫동안 소흥의 교통수단인
데.... 수로에는 늘 배 한척이 떠있어 오물을 제거 하는 탓으로 깨끗한 편이며 이었습니다.
운하 양쪽을 따라가는 도로에는 또 골목길인 쓰판눙탕 (石板弄堂) 이 굴곡을 이루고 있어
옛날부터 “벽수관가천만거, 채홍과하십칠교(碧水貫街千萬居, 彩虹跨河十七橋” 풀이
하면 “푸른 물이 천만가옥 거리를 가로지르고 17개 무지개 다리가 강을 수놓다” 라 합니다.
2) 우전 乌镇(오진) : 2017년 10월 25일 이갱에서 기차로 자싱(가흥) 남역에 내려 시외
버스터미널로 이동해서 버스를 타고 한시간 거리에 우전 乌镇(오진) 이 있는데
서책 西柵 은 마을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키고 회사에서 개발한 다분히 인공적
인 마을 이고.... 동책 東柵 은 현재 마을에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강남 수향 마을입니다.
남문을 통해 들어가면 바로 운하 가 나타나는데 첫 부분은 元宝湖(원보호) 라고 불리는
호수 로 많은 배들이 정박중이고 한편으로는 관광객들이 탄 천장이 쳐진 나룻배
包程船(포정선) 가 들어오는걸 보니 부두인데 운하를 따라 서책대가를 올라가면
아름다운 다리도 많고 희명호 호수를 지나 인제교에서 서시하 운하를 구경 합니다.
3) 쭈지아지아오(朱家角 주가각) : 2005년 1월 12일 디테(지하철)을 타고 상하이 티위창(上海
體育場驛 상해체육관) 역에 내려서는‘상해여유집산중심’上海旅遊集散中心 에 도착해 따꾸안
위안(大觀園 대관원) 가는 시외 버스를 타면 1시간이 안되어 중간 지점인 주가각에 도착합니다.
주지아지오 골목길은 미로와 같은 곳이어서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을 잃고 헤메다가 운 좋게
'실크 박물관’ 에 들르니 베틀의 모습이며 실제로 베짜는 듯 모형 이며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데서 시작하여 일관과정을 상세히 볼수 있어서 본전을 뽑은 것도 같은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4) 소흥 环山河(환산하) 운하 : 2017년 4월 18일 영파에서 사오싱에 도착해 노신고리와 심원을 보고는
푸산쿵위엔 府山公园(부산공원)을 찾아 콰이지산(會稽山 회계산) 을 올라 월왕 구천의 유적지 월왕전
을 구경하고 내려오면 环山河(환산하) 운하인데 멋스런 배인 우펑선 (乌蓬船 오봉선)을 탈수도 있습니다.
운하 옆으로 가로수가 늘어선 차가 다니지 않는 고풍스러운 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옆
골목길은 꽤나 고풍스러운게 2003년 유네스코 문화 유산을 수상한 남북 1km 에
달한다는 챵차오즈제 仓桥直街(창교직가) 거리 인데 여기서 소흥주를 맛볼수 있습니다.
5) 영파 난탕라오지에 南塘老街(남당노가) : 저장성(浙江省) 영파시에는 운하에 옛날풍 건물이
줄지어 늘어섰는데 남당 민속문화 거리 인 난탕라오지에 南塘老街(남당노가)가 있으니
수로 를 따라 조성된 명청시대 고건축군 이 모여 있는 곳인데 옛날에는 닝보(영파)
남문 밖에 있었던 시가지였고 지금은 남당 민속문화 거리로 개발되어 쇼핑가로 변했습니다.
2017년 10월 17일 월호공원을 보고 찾은 난탕라오지에 南塘老街(남당노가)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데
쌍쌍이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으니... 어느 식당을 지나면서 코를 움켜쥐는데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인데.... 저게 바로 썩은 두부인 취두부(臭豆腐)인가 봅니다?
6.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산이 너무도 깊고 그윽하여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뜻인데..... 여산(廬山)은 강서성
(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삼면이 물로 싸여 있고 서쪽만이
만학천암(萬壑千巖)이 항상 안개에 휩싸여 있어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명산입니다.
산속에는 백록동(白鹿洞), 묵지(墨池), 옥연(玉淵) 등의 명승지가 있는데 주(周) 나라 무왕(武王) 때,
광유(匡裕)라는 선비가 초당을 짓고 살면서 신선술을 닦고 있었으니 무왕이 학식과 덕망이 높음
을 듣고 벼슬을 주어 나라 일을 함께 도모하려 하였으나 어디론지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다고 합니다.
2017년 10월 21일 남창에서 주장(구강)에 도착해 호수를 구경하고는 버스를 타고 구절양장 굽이굽이
산을 올라 루산 庐山(여산) 꾸링지엔 牯領镇(고령진) 마을에 호텔에 배낭을 풀고는 이틀간
여산풍경구(廬山風景區)를 구경했는데 특히 오로봉과 삼첩천(三疊泉) 폭포가 오래토록 기억에 남습니다.
소동파(蘇軾 소식)는 여산에 왔다가 그 오묘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다가
칠언절구의 시 한 수를 지었으니 廬山眞面目 이 이 시에서 유래합니다.
橫看成嶺側成峯 옆으로 보니 고갯마루요, 또 곁으로 보아도 봉우리로다.
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저마다 같지 않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 모습 알기 어려우니,
只緣身在此山中 이는 나만 내 몸이 이 산중에 묻혀 있음이로다.
이백(李白)도 이 폭포를 보고,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를 지었다.
日照香爐生紫煙 해가 향로를 비추니 붉은 빛 아름다운 안개가 일어난다.
遙看瀑布掛長川 멀리 폭포를 바라보니 기나긴 개울이 걸려 있구나.
飛流直下三千尺 나는 듯 곧바로 떨어져 삼천 척이니
疑是銀河落九天 은하수 한구비가 구천에서 떨어지는 듯 하여라
7. 지성감천(至誠感天)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장님‘감천(感天)’이 앉은뱅이‘지성(至誠)’이를 업고다니며 밥을 얻어
먹는등 우정에 하늘이 감동하여 복을 주었다는 설화로 산 밑의 옹달샘에서 물을 먹다가
금덩이를 발견해 부처님께 바치고 100일 기도를 하니 결국 눈을 뜨고 허리를 편다는 설화입니다.
2011년 11월 25일 소주에 도착해 졸정원과 한산사를 보고는 택시를 타고 후추(虎丘 호구)
에 도착해 공원에 입장해서는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5분도 안되어 한 우물이 나타나니
이른바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그 우물이라는데.... 옆에는 두꺼비처럼 보이는 돌도 있는
데... 내가 어릴 때 부터 귀에 닳도록 들어 왔던 그 말의 유래가 중국의 바로 이 우물이었네요?
땡땡이 중이 절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까지 가기 귀찮아서 절 가까이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동료 중이 그긴 물이 나올 땅이 아니니 포기하거라! 만일
물이 나오면 내가 두꺼비가 되어도 좋다고 극언을 하니...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오랜 세월 우물파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물이 나오고 그 중은 두꺼비가 됐다나요?
8.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말로 세상 일이 몰라보게 확 달라졌다는 뜻인 데....
어느 날 마고라는 선녀가 신선 왕방평에게 "곁에서 모신 이래 저는 동해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봉래에 갔더니 바다
가 다시 앝아져서 이전의 반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
2천년전 인도 아유타국공주 허황옥이 김수로오아에게 시집을 오는데 그녀기 배에서
내린 주포촌은 홍수때 토사가 떠내려와 현재는 김해평야가 되었고 러시아의
아랄해는 거대한 바다에서 목화재배를 하느라 물길을 돌리니 이제는 늪으로
변했는데 도시개발로 몰라보게 달라진 상하이나 선전시가 이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상하이는 2번 여행했으니 첫 번째는 2005년 1월 10일이었는데 인민광장 근처 양쯔판뎬
扬子饭店 에 배낭을 풀고는 차 없는 거리인 난징둥루(南京東路) 를 걸어서
슬지광챵(世纪广场)을 지나 황포강변에 옛 영국과 프랑스등 외국 조계지인
와이탄(外滩)에 이르러 건너편을 보니 둥팡밍주(东方明珠 동방명주) 등 휘황찬란 하더군요?
9. 불야성(不夜城)
등불이 많이 켜져 있어 대낮처럼 밝은 곳이라는 뜻인데 홍콩이나 상하이
며 광주등 대도시야 당연히 밤이 불로 낮처럼 밝은데.... 작은 시골
마을에 등불이 많아 낮처럼 밝은 곳으로는 운남성 리장이 떠오릅니다.
운남성 백족의 오래된 도시 따리구청 (大理古城 대리고성) 에서 2008년 1월 7일에 출발한 버스
는 얼하이 호수를 지나 산을 넘어서 달리기 3시간여.... 드디어 리지앙 丽江(麗江 리장, 여강)
이라는 도시가 나타나는데 구청(古城 고성) 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구시가지로 들어
가면 七日街(칠일가) 골목길은 미로와 같은데 작은 그러나 엄청 깨끗한 내가 흐릅니다.
도시의 중심부는 쓰팡제 四方街(사방가) 라고 부르는데 광장에는 광장에는 쓰팡커잔 (四方客棧
사방객잔) 등 게스트하우스가 많으며 나시족 여인들이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전통복장을
한 채 관광객들과 강강술래 처럼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데, 애니메이션의 거장 일본
의 미야자키 하야오 가 “센과 히치로의 행발불명”을 기획할 때 모티브가 된 마을 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