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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윤휴 白湖 尹휴
백호(白湖) 윤휴(윤휴)는 17세기의 천재적인 산림학자(山林學者)요,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이었다. 특히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 교조적(敎條的) 권위를 누렸던 조선 후기에 경학(經學)에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수립하였고, 이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되어 정치적, 사상적 숙청(肅淸)을 당하였다는 면에서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백호(白湖)의 사상은 항상 이단(異端)으로 취급되었고, 조선 말(末)까지 신원(伸寃)이 회복되지 못하여 문집(文集)조차 출간되지 못하였다. 백호(白湖)에 대한 평가도 당색(黨色)에 따라 달랐는데, 노론계(老論系)는 끝까지 정인홍(鄭仁弘)이나 이이첨(李爾瞻)과 같은 소인(小人)이자 주자학의 적(敵)인 이단(이단)으로 취급했지만, 남인(南人)들은 ' 백호(白湖)는 덕(德)을 이룬 정암(靜庵 .. 조광조의 호)이요, 정암(靜庵)은 덕(德)을 이루지 못한 백호(白湖)이다 '라고 평가하여 '윤휴'를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조광조(趙光祖)에 이유할 정도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상반(相反)된 평가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하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반 사대부(士大夫) 지배체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배층의 무능(無能)을 여실히 목격한 피지배층(被支配層)들은 체제 변화를 요구하였다. 체제(體制)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朱子學), 즉 성리학(性理學) 유일사상(唯一思想)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身分制)의 완화이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사대부(士大夫) 계급은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조선의 체제에 대한 갈등
서인(西人)의 영수(領袖),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한 세력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와 신분제(身分制)를 강화하는 복고적 노선을 주장하였다.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주류는 이들에 의해 예학(禮學)으로 바뀌게 된다. 예(禮)란 본질적으로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의무에 지나지 않는데, 행동 규범에불과한 예(禮)가 성리학의 주류(主流)가 된 것이다. 성리학은 이제 노골적으로 지배층의 계급이익(階級利益)에 충실한 학문이 되었다.
백호(白湖) '윤휴'로 대표되는 일단의 사대부들은 이런 경향에 반대하였다. 서인(西人)들이 편찬한 '효종실록' 사관(史官)의 윤휴에 대한 평(評)은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윤휴는 소싯적부터 글을 읽어 이름이 있었는데, 논변(論辨)이 있을 때며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옳게 여겼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대부분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견해와 배치되었으나, 재주가 조금 있어 늘 경륜(經綸)의 소유자로 자임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우려하였다 ... 효종실록 9년 12월 13일
윤휴에 대하여 우려하는 ' 식자(識者) ' 란 정통 성리학자를 뜻하는 것이다. 윤휴의 학문 대부분이 주자학(朱子學)의 주창자인 정자(程子)와 주희(朱熹)의 견해와 배치됨에도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다 '는 것은 주자학에서 탈피하려는 사대부들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 백호 윤휴 '는 왜 주희(朱熹)와 배치되는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의 가계(家系)와 학맥(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휴는 광해군(光海君) 10년인 1617년 윤효전(尹孝全)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해군 시절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북인(北人)으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이었다. 윤휴의 외조부 김덕민(金德敏)은 북인(北人)의 정신적 지주이었던 '남명 조식 (南冥 曺植)'의 친구 성운(成運)의 제자이었다. 성운(成運)은 성리학자들이 이단(異端)으로 보았던 노장(老壯)에 심취하였던 인물이다. 윤휴는 양명학(陽明學)을 소개한 이수광의 차자(次子 ..둘째 아들) 이민구(李敏求)에게도 사사하였다. 부친과 외조부, 이민구는 모두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에게 학문을 배운 '윤휴'는 주희(朱熹)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떠받들지 않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하였기 때문에 곧 두각을 나타내었다. 당시 유명한 학자이었던 윤증(尹拯)의 부친 윤선거(尹宣擧)는 윤휴를 이렇게 말하였다. 윤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데 고인(古人)에 집착하지 않고, 독서와 강의에서 주설(註說)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언론과 식견이 실로 사람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는 데는 속유(俗幼)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여 깊이 사귀었다. 그리고 윤휴와 숙명적 라이벌이 되는 송시열(宋時烈)도 한때는, ' 백호(白湖)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전인(前人)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낸다'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윤휴가 중용(中庸), 대학(大學) 등의 경전을 주희(朱熹)와는 달리 해석하면서 두 사람은 충돌하게 된다.
윤휴의 일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그가 20살이던 16363년에 겪었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 백호전서' 부록 행장(行壯)에 따르면 이듬해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자 윤휴는 속리사 복천사(福泉寺)에서 송시열을 만나 ' 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 라고 말했다. 오늘의 치욕(恥辱)을 잊지 말고 북벌(北伐)을 간행하자는 다짐이었다.
벼슬을 거부하다
이후 그는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문명(文名)이 높아가자 효종(孝宗) 6년인 1655년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추천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자의(咨議)에 제수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 스스로 포의(布衣)라 일컫고는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의 명성이 더욱 크게 떨치어서 먼 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나 모두 윤포의(尹布衣)로 일컬으면서 그 얼굴을 서로 알기를 원하였다 .. 숙종실록 3권 1년 4월 25일 '
그가 다시 벼슬에 나아갈 뜻을 가진 것은 38년 후인 1674년 7월에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기회라고 하여 대의소 (大義疎)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마침 현종이 죽고 숙종(肅宗)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4품 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大司憲)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에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에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윤휴의 본관은 남원,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자는 희중(希仲)이다. 부친 윤효전(尹孝全)은 광해군(光海君) 시절 벼슬을 지낸 인물로 학맥(學脈)상 서경덕(徐敬덕) 계열에 속한다. 윤휴는 부친 윤효전(尹孝全)이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태어났으나, 3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부친 윤효전(尹孝全)은 광해군 시절 임해군(臨海君) 제거에 공(功)을 세운 점이 문제가 되어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3살 때 윤휴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비록 사후(死後)이지만 관직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과 청년 윤휴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인조(仁祖)임금이 항복의식(降服儀式)을 거행하기 위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내려와 삼전도(三田渡)로 향하였다. 인조(仁祖)는 청(淸)나라 태종(太宗)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인조(仁祖)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 훗날의 효종)의 사부(師傅) 송시열(宋時烈)은 남한산성에 있다가 인조(仁祖)가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자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근처로 친척을 만나러 갔다.
보은(報恩) 삼산(三山)으로 피난가 있던 ' 백호 윤휴'는 복천사(福泉寺) 앞에서 송시열과 만났다. 송시열로부터 굴욕적인 항복(降服)에 관한 전말을 들은 '윤휴'는 통곡하며 다짐을 말했다. ' 지금 이후로 다시는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며, 좋은 때를 만나 벼슬길에 나가더라도 결코 오늘의 치욕(恥辱)을 잊지 않을 것이요' 라고 송시열에게 말하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은 송준길(宋浚吉)에게 보낸 편지에서 ' 윤휴와 만나 3일간 토론하고 나니, 내가 30년 동안 독서한 것이 참으로 가소롭게 느껴졌다 '고 말할 정도로 윤휴를 높게 평가하였다. 윤휴는 그날의 다짐대로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고 공주(公州)와 여주(驪州)에서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송시열은 물론 송준길, 이유태, 유계, 윤문거, 윤선거 등 주로 서인(西人) 계열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지만 특정 당파(黨派)에 치우치지는 않는다. 1655년 시강원(侍講院) 자의에 임명되었고, 1658년에는 시강원 진선에임명되었지만, 사의(辭意)를 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송시열과 윤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1636년, 병자호란이 끝나고 '윤휴'를 처음으로 만났다. 송시열이 30세이고, 윤휴는 20세 때의 일이다. 윤휴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를 만나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충청도 삼산(三山)에 있는 복천사(福泉寺)이었다.
송시열은 곧바로 친구인 송준길(宋浚吉)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삼산(三山)에 이르러 윤휴와 더불어 사흘간 학문을 토론해 보니 우리의 30년 독서는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는 내용이었다. 그 후 송시열은 윤휴와 많은 편지를 부고받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송시열이 40대에 접어들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백호(白湖)가 주자(朱子)와 견해를 달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주자(朱子) 지상주의자인데 비하여, 백호(白湖)는 주자(朱子) 상대주의자이었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사상(思想)의 절대성(絶對性)을 인정하지 않았다. 윤휴는 율곡(栗谷)이이(李珥),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설도 비판하였다. 그는 율곡(栗谷)의 ' 이선기후(理先氣後) '나 퇴계(退溪)의 ' 이통기국(理通氣局) '설 등을 모두 비판하는 ' 기일원론(氣一元論) '을 내세웠다.
반면 송시열은 이황(李滉)이나 이이(李珥)는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朱熹)는 비판할 수 없었다. 송시열에게 논어(論語)와 중용(中庸)보다는 주희(朱熹)가 주(註)를 달아놓은 논어집주(論語集註), 중용집주(中庸集註)가 더 중요한 경전이었다. 송시열에게 주자학(朱子學)은 종교(宗敎)의 교리(敎理)이었으나, 윤휴에게는 일개 학문(學門)에 불과하였다.
1659년 북벌(北伐) 군주(君主) 효종(孝宗)이 재위 10년 만에 만 40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효종은 승하 한 달 전쯤 송시열과 독대를 자청해 북벌(北伐)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효종은 혈기(血氣)와 지기(志氣)가 손상될 것이 두려워 내전(內殿)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 주색(酒色)을 끊고 경계하여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 '라며 북벌(北伐)에 대한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그는 급서(急逝)하였다. 효종의 죽음은 엉뚱하게 예송(禮訟) 논쟁을 낳았다. 예송(禮訟) 논쟁은 일제(日帝)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이 조선 역사를 당쟁망국론(黨爭亡國論)으로 규정지은 대표적인 소재이었다. 그러나 예송 논쟁은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정쟁(政爭)이었다. 바로 효종(孝宗)의 왕통(王統) 계승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배후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 .. 송시열과 대립하다
북벌(北伐)을 염원하던 효종(효종)이 1659년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로 형식상 효종(孝宗)의 어머니인 자의대비(慈義大妃)는 얼마동안 상복(喪服)을 입어야 할까 ?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부모는 장자상(長子喪)은 3년, 둘째 아들부터는 1년복(一年服)을 입어야 했다. 송시열과 서인(西人) 세력은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적장자(嫡長子)이고 효종(孝宗)은 차자(次子)이기 때문에 기년복(朞年服 .. 1년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윤휴와 남인(南人) 세력은 왕통을 이은 효종(孝宗)이 장자(長子)가 된 것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인(西人) 세력은 국왕과 왕실도 보편적 예법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의 원리를, 남인(南人) 세력은 국왕과 왕실은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다른 예법(예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왕자예부동사서 (王者禮不同士庶)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신권(臣權) 강화로 집권 지배층 중심의 질서를 다지려는 서인(西人) 세력과, 왕권(王權)을 강화하며 새로운 권력 기반을 다져나가려는 남인(南人) 세력의 정치적 충돌이기도 하였다. 논쟁의 결과는 장자(長子)와 차자(次子) 구분 없이 1년복으로 명시되어 있는 ' 경국대전 '을 내세운 송시열과 서인(西人)의 승리이었다.
사문난적 斯文亂賊
윤휴는 조선의 금기어(禁忌語)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의 벗이며 개혁가(改革家)인 윤휴는 ' 교산 허균 (皎山 許筠) ' 이후 나타난 국제정치가이며, 교조(敎祖)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가이었다. 윤휴는 송시열과 노론(老論) 추종세력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과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철저하게 금기시(禁忌視)된 인물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성현(聖賢)의 학문과 상반된 해괴한 논리를 펼쳐 정도(正道)를 해치는 도적(盜賊)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공격을 받았던 인물로는 윤휴와 박세당(朴世堂) 그리고 허균(許筠)을 들 수 있다. 사문(斯文)은 문장을 쪼갠다, 갈라놓는다는 의미이니까 당연히 학문을 어지럽히는 행동이고, 난적(亂賊)은 나라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이다.
윤휴는 송시열과 모든 면에서 라이벌이었다. 송시열이 주자학(朱子學) 유일주의(唯一主義)를 주장하고 기틀을 세웠다면, 윤휴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원전(原典)으로 돌아가 자유롭고 독창적인 학문을 모색하였다. 송시열이 송자(宋子)라고 불리기까지 한 거유(巨儒)라고 한다면, 윤휴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병법(兵法), 역사(歷史)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상가(思想家)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이 서인(西人),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서 세상을 주무른 권력자이었다면, 윤휴는 개혁적(改革的)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정치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선 중후반기에 기득권 세력이었던 송시열은 개혁가 윤휴의 사상을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였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은 원래 유교(儒敎) 반대자를 비난하는 말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당쟁(黨爭)이 격렬해지면서부터 그 뜻이 매우 배타적(排他的)이 되어 유교의 교리(敎理) 자체를 반대하지 않더라도,그 교리의 해석을 주자(朱子)의 방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육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 같은 것도 조선시대에는 용납이 되지 않았으며, 주자(朱子)의 경전을 해석한 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었다. 윤휴가 유교 경전을 주자(朱子)를 따라서 해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 주자(朱子)가 모든 학문의 이치를 이미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의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이다 ' 라고 평하였던 것이다.
마구간 논쟁
송시열과 윤휴의 논어(論語) 논쟁은 논어 ' 향당(鄕黨) '에 나오는 마구간 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 공자(공자)가 한 말을 윤휴가 달리 해석한 사실을 말한다. 조정에서 물러나온 공자(공자)가 마구간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 사람이 다쳤느냐 ? ' 라고만 묻고, 말(馬)에 대하여는 묻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윤휴는 공자(孔子)의 ' 사람이 다쳤느냐? "를 ' 말이 다쳤느냐 ? '로 바꾸어 해석하여 송시열의 분노를 산 것이다. 송시열은 공자(孔子)가 가축(家畜)보다 사람을 중요히 여기어 말에 대하여는 묻지 않았다는 주희(朱熹)의 해서을 그대로 따랐으나, 윤휴는 마구간에 불이 났으면 말이 다쳤는지를 묻는 것이 상식이지 왜 사람이 다쳤는지를 묻느냐면서 ' 人 "을 ' 馬 "로 바꾼 것이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朱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 주자(朱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孔子)가 살아온다면 나이 학설이 맞다고 할 것이다. 라면서 윤휴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윤휴는 그만큼 자신의 학설에 대하여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견해 차이는 학문의 발전을 위하여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적견해를 정쟁(政爭)의 도구로 사용하던 당시의 풍토 속에서 유럽중세 사회의 성서(聖書) 격인 논어(論語) 자체를 달리 해석한것은 반대파에게 정치 공세의 명분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윤휴의 죽음, 조선은 침묵(沈默)의 제국(帝國)이 된다. 윤휴가 이룩한 유학적(儒學的) 성과와 정치, 사회 개혁은 실학자(實學者)들과 같은 후배들에게 이어졌으나, 그의 죽음 이후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여 개혁을 주장하는 유학자와 정치가는 조정에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윤휴의 죽음으로 노론(老論)의 세계가 전개되었다.
윤휴는 송시열과 노론(老論) 세력에 의해 배척당하고 금기시(禁忌視)되었기에, 그 누구도 쉽게 그 이름과 업적에 대하여 말하지 못했다. 노론(老論) 치세(治世)에서 ' 윤휴 '라는 이름을 논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윤휴를 잘못 말하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 모르게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수옥문답(樹屋問答)이라는 책에서 윤휴의 행적과 사상을 전하고 있지만, 끝내 지은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였다. 1927년에 이르러서야 윤휴의 문집(文集)이 진주(晉州) 용강서당(龍綱書堂)에서 발간될 정도로 철저하게 금기시되고 숨겨진 인물로 남아야 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더 시대, 그리고 그렇게 실제 죽여왔던 시대 .. 그만큼 조선 후기의사회는 다른 생각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아주 경직된 사회이었던 것이다.
북벌론 北伐論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기존 조선사회의 질서를 바탕부터 무너뜨렸다. 특히 청(淸)나라의 침략, 곧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결정타이었다. 전쟁을 거치며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봤고, 외부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국방체제, 군사적 대응능력을 고스란히 노출하였다. 더군다나 종래 오랑케로 여기던 청(淸)나라에 굴복하여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사대(事大)해야 했다. 종래 유지되던 명(明)과 조선의 관계 또한 끊어졌다.
기막히기 그지없는 현실이 만들어졌다. 효종(孝宗)과 같은 국왕을 비롯한 수많은 위정자들은 분노와 치욕에 떨며 청나라에 복수하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최선의 방도는 청나라와 전면전을 벌여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일, 곧 ' 북벌 (北伐) '이었다. 이리하여 북벌(北伐)은 이 시기의 시대정신(時代情神)이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벌(北伐)의 속도, 방법, 내용을 둘러싸고 분분하게 의견 대립이 일었고, 그 중심에 송시열(宋時烈)과 '윤휴'가 서 있었다.
송시열과 윤휴의 생각은 서로 북벌(北伐)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외형상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를 준비하고 대응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달랐다. 송시열의 북벌 주장은 당장의 행동보다는 먼 미래의 결정타를 예비하자는 것이었다. 반면, 윤휴의 움직임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행동주의적이었다. 송시열의 방법은 사상적으로는 매우 강경하되 실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윤휴의 방식은 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이끌어내며 기존 질서를 크게 뒤흔들 가능성이 컸다. 군사적 행동을 중시하는 측면에서 이 생각은 당시 강력한 국가권력에 기초하여 정치, 사회 운영을 도모한다는 점을 필연적으로 드러내었다.
송시열의 북벌론
송시열의 극단적 주자학(朱子學) 강조는 국정운영의 전반적인 기조를 강력한 도덕주의(道德主義) 위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군주(君主)와 신료(臣僚) 등 국정을 이끄는 주체들은 주자학(朱子學)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주의를 실천하며, 강상(綱常) 윤리를 강화하여 사회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현재 상황에서 직접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긴 시간 동안 실력을 쌓아 오랑케의 국가로부터 당한 모욕을 갚을 것을 강조하였다. 현실적으로 오랑케의 지배를 받는 굴종(굴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만, 오랑케를 능가하는 절대의 정신력을 배양하고 문화역량(문화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청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중국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문명 (文明) '을 조선이 지켜내고 궁극에는 청나라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윤휴의 북벌론
윤휴 역시 조선에서 회복하고 실현해야 할 것은 강상(綱常)과 윤리(倫理)를 강화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 국정 운영의 방향을 송시열과는 다르게 생각하였다. 윤휴는 조선에 필요한 것은 빠른 속도로 부국강병(富國强兵)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판단했다. 동시에 청(淸)나라와는직접적인 군사 대결을 통해 그 원수를 갚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종래와는 달리 국가 권력이 토지(土地)와 백성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양반들의 특권을 어느 정도 제한하며, 군대 편제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한다면, 종래 조선의 제도와 체제는 매우 크게 변학 되어 있었다. 윤휴의 북벌(北伐) 주장은 실질적인 정책과 연관하여 추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휴(尹휴)의 독자적인 경서(經書) 해석은 이러한 현실 대책을 밑받침하는 근거를 경전을 통해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숙종(肅宗)은 물론이거니와 ' 윤휴 '가 조정에 진출할 수 있게 한 남인(南人) 세력도 윤휴의 강력한 북벌론(北伐論)에 반대하였다. 윤휴는 말로만 북벌(北伐)을 외친 것이 아니라 군비(軍備) 확충을 위해 세금 면제 토지를 없애고,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호포제(戶布制)는 양반과 상민(常民)을 불문하고 모든 호(戶)에 군포(軍布)를 부과하는 제도이어서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비록 집권(執權)했다고는 하지만 서인(西人)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던 남인(南人)세력으로서도 호포제 시행으로 양반층 전체의 반발을 살 이유가 없었다. 호포제는 단순한 세금(稅金) 제도 차원을 넘어서 당시 조선 사회 질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숙종실록 3년 12월 19일 .. 호포제(戶布制)로 말할 것 같으면, 백골(白骨 .. 죽은 사람)이나 아약(兒弱 .. 어린 아이)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골수(骨髓)를 부수는 가혹한 정치에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치는 근심과 괴로움과, 놀고 먹는 선비나 운 좋은 백성들이 부역(賦役)을 피하고 스스로 편하게 지내는 자의 원망 중 어느 것이 더 크겠습니까 ? 신(臣)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명분 없는 것입니까 ? 저것이 명분 없는 것입니까 ? 이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 저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 민심의 향배와 천명(天命)의 거취가 장차 백성들의 편안하고 편안하지 아니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운 좋은 백성이나 호우(豪右 .. 부유층)의 편안하고 불편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 ?
윤휴는 일종의 전차(戰車)라고 할 수있는 병거(兵車) 제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산악(山嶽)이 많은 우리 지형(地形)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에 부딪쳤고, 일부 지역에서 제작 사업이 시작되었다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대만(臺灣)에서 반청(反淸) 운동을 벌이던 정(鄭)씨 세력과 연합할 것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휴의 ' 북벌론 '은 왕으로부터 집권세력에 이르기까지 조정 내에서 비현실적(非現實的)이고 모험적인 주장으로 간주되고 말았다. 윤휴는 현실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큰소리만 쳐서 자기 명성만 높이고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였다.
송시열 북벌론의 승리
송시열과 윤휴의 선택을 좌우하게 한 요소는 일단 군사 강국인 청(淸)나라와 군사 대결을 벌일 것인가, 그 대결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판단이다. 송시열은 사상적, 문화적 방면으로의 체제 강화를 선택하였다. 조선은 중국의 문명(文明)을 이어받은 ' 소중화 (小中華) '의 국가이며, 이를 강력하게 실현하는 것을 통해 오랑케의 강국 청나라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 위에서였다.
반면, 윤휴의 경우, 청나라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조선(朝鮮)은 대적하여 원수를 갚을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빠른 속도로 부국강병(富國强兵)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시열과 윤휴의 판단과 선택에 대하여 조선의 정치, 사상계는 송시열을 지지하였다. 숙종(肅宗)이 즉위하고 나서 세워진 남인(南人)정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던 ' 윤휴 '는 숙종 6녀 정국의 주도권이 서인(西人)으로 넘어가자 유배(流配)의 벌 받았고 결국에는 사약(賜藥)을 받았다.
송시열의 승리, 윤휴의 패배(敗北)는 조선의 정치, 사상계(思想界)가 군사주의적 방향으로의 국정운영, 강력한 국가를 전망하는 흐름을 배제해 나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이 정치, 사상계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지만, 송시열이 강조한 방향으로 흐러갔다. 주자학(朱子學)의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으며, 주자학의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는 지속적으로 배척받았다.
윤휴의 개혁정책
윤휴의 최후
1680년 1월, 여러 개혁안의 실패에 좌절하여 허적, 권대운 등 같은 남인(南人) 인사들의 비판과 비협조에 실망한 그는 허목(許穆)에게 실망감을 토로하는 편지를 보낸 뒤 치사(致仕)를 청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경신환국(更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실각하고,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정계(政界)에서 배제되어 1680년 4월 함경북도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뒤, 허견(許堅)의 옥사(獄事)의 관련자로 몰려 소환 후 의금부에 투옥, 사형에 처해졌다.
의금부(義禁府)에 갇힌 윤휴는 여러번의 형문을 당하였다. 서인(西人) 위관(爲官)들은 그에게 혹독한 형문(刑問)을 가하며 '도체찰사부' 설치 건의를 반란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며 추궁하였지만, 윤휴는 절대 승복하지 않았다. 5월 초 유배(流配)에 처해져 함경북도 갑산(甲山)으로 가게 되었다. 유배지로 가던 도중 사사(賜死)의 명이 떨어졌고, 5월 20일 뒤따라오던 금부도사에 의해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그는 '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있느냐 '고 항변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63세이었다. 사약을 받기 직전 그는 종이와 먹, 붓으로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금부도사는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