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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습은 어디를 가나 비슷한가 보다. 우리 삶의 모습이 겉으로 보기에는 언뜻 윤택한 듯 보이나, 그 이면(裏面)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두운 모습들도 찾아볼 수 있듯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그와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삶의 시대를 돌이켜 보면, 우리보다 어려운 세계에서 만난 다른 세계의 삶의 현장도 그리 낯설지 만은 않다.
내가 슬라브의 땅 러시아 모스크바에 첫발을 내디뎠던 시기는 구소련이 붕괴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았던 혼란의 시기로서, 계절적으로는 서울에서 늦가을을 바라보며 김포 국제공항을 출발했으니, 그곳은 이미 초겨울에 들어선 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모스크바 쉐르메쳬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던 날 그곳의 날씨는 그곳이 마치 북구(北歐)의 나라임이 틀림없음을 유세(有勢)라도 하려는 듯이 매우 싸늘하고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날씨였다. 여기다가 낡고 칙칙하면서도 어둡기만 했던 공항 내부는 서유럽 다른 국가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깔끔하고 정리된 국제공항으로서의 인상이나 면모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더욱이 거의 한 세기 동안을 지구의 절반을 지배했던 거대한 패권국가로서의 위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접한 모스크바의 쉐르메쳬보 공항은 한마디로 우리의 60년대 시골 정거장이나 시외버스 터미널이 연상되는 것과도 같은 낡고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런데 모스크바 쉐르메쳬보 국제공항에서의 입출국 및 검역절차는 한 마디로 짜증날 듯이 답답하고 지루하리만큼 까다로워 자그마치 3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지독히 힘든 신고과정이었다. 여기서 참고로 러시아의 국제 교통체제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해외 출입국 전담 기능을 수행하는 러시아의 공항과 기차역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부터 패권 국가로서의 면모를 기본적인 국제 교통체계 면에서부터 갖추려고 노력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크레믈린을 중심으로 세계 주요 국가들이 위치한 전략적 방면으로 뻗어 나가는 군사.정치적인 전략 도로와 철로, 그리고 공항(비행장)들을 각 7개씩 구분·개설해 놓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7개의 전략 도로 이외에 모스크바 시내를 순환하는 내부 순환도로와 그 외곽을 순환하는 외곽 순환도로를 개설하여 각 7개 전략 방면의 주요 도로들과 내외부 순환도로가 교차하는 각 지점에 마치 우리의 왕거미 초소와 같은 군경 합동 검문소를 바둑판처럼 설치해 놓은 한편, 7개 전략 방면 도로와 철로를 연해서는 모스크바 시내에 7개 철도역을, 그리고 모스크바 근교에 7개 공항(비행장)을 각각 설치 및 운용하고 있다. 이러한 7개 전략 방면(방향)에는 극동·코카서스·벨라루시·발틱·폴란드·중앙아시아·크림 등이 바로 그것인데, 예컨대 벨라루시로 떠나는 기차역은 벨라루시역, 발틱 국가인 리투아니아 수도 리가로 출발하는 역은 리쥬역 등으로 명명되고 있어, 한국에서 서울에 위치한 서울역, 부산에 위치한 부산역 등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 전략적 지향점을 중심으로 명명되었다는 점에서 패권국으로서의 독특한 특징과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겉으로는 국제 교통체제의 원활함을 꽤하려 데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가 비상사태나 전쟁선포 시에 전력의 신속한 전략적 기동과 후방에서 전선으로의 효율적인 병참지원 및 전투근무지원이라는 중요한 전략적 측면이 고려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항공기에서 내려 입국심사 과정을 거치는 입국 심사대에 들어서게 되면, 러시아에 처음 입국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0개 이상이 되는 입국 심사대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심사에 임하는 입국 심사대의 수는 서너 군데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는 서구 유럽국가나 미국에서 러시아인들에 대한 까다로운 입국처리에 대한 호혜적 조치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하니, 앞사람이 수속절차를 마치고 빠져 나가기를 기다리며 서있는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을 수밖에..... 예컨대 항공기 탑승인원이 200 여명에 이를 경우, 개인당 입국수속 처리에 최소 3-4분 정도가 소요되어 서너 개의 입국 심사대에서 아무리 빠른 속도로 입국수속을 처리한다 하더라도, 최소 3시간 정도가 소요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여기에 동시간대에 또 다른 항공기의 착륙이 겹칠 경우, 그 지연이나 수속절차의 복잡성은 가히 사람이 참아낼 수 있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후에 무관 신분으로 입출국을 할 때는 이러한 입국수속 절차나 통관 절차 없이 외교관 전용 출입국 심사대를 매우 빠르게 거치는 특전을 누릴 수 있었으나, 처음 러시아에 입국하였을 때의 끔찍했던 상황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입국 심사과정에서 나의 경우는 출입국 직원의 제스쳐나 태도로 보아 이미 통보된 인원으로 입국 특별 리스트에 잡혀져 있었던지 얼굴 생김새부터 얼굴에 박힌 점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체크하고 기록하는 지루한 작업이 추가되는 듯했다. 거기다가 입국 시에는 소지하고 있는 외환 보유액을 모두 기재하도록 되어있는 필수항목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소지하고 있던 2만 달러라는 거액의 액수를 기재하고 말았다. 그 당시 러시아에는 한국에서 국제외환으로 송금할 수 있는 은행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터라 부득불 현금을 소지하고 입국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후에 입국수속 절차를 마친 후 입국장 입구에서 만난 우리 무관이 소지금액을 얼마로 기재하였는지 묻더니, 2만 달러를 적었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출입국 직원과 마피아가 서로 연계되어 거금 소지자가 입국장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 자리에서 납치되거나 피탈을 당하게 된다는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실이었으나, 어떻든 다행히 대사관 무관단과 러시아 국방부 측에서 입국장 입구까지 마중을 나오게 되어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설명과 정보를 듣고 보니, 수하물 짐을 찾고 있던 와중에 출입국 절차를 처리했던 직원이 나와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모습을 인상 깊게 발견하였는데,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공항 밖으로 나가는 입국자를 마피아들에게 인수하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편 생각해 보면, 러시아 당국이 이렇듯 출입국 과정에서 외환을 철저히 통제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사실상 '경제파탄에서 야기된 구소련의 붕괴가 외환 보유고 부족을 가져왔다.'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러시아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이하였지만, 그러한 경제파탄 상황 직전의 러시아는 외환 보유고가 적었으므로 자연 외환을 철저히 관리·통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든 이렇듯 어려웠던 시절의 학습효과에 영향을 받아 외환 보유에 대한 국가적 관심 증대로 러시아의 외환 보유고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2021년 7월 기준 러시아의 외환 보유고는 무려 6,201억 달러 규모(세계 5위)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철저한 외환관리 대책으로 입국 시에 소지한 외환 금액보다 출국 시에 소지한 외환 보유액이 많은 것을 절대로 허용치 않았고, 특히 출국 시에는 출국 검색대를 통해 무리할 정도로 철저한 검색작업을 실시함으로써 초과 소지한 외환을 압수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곤 하였다.
어떻든 이러한 지루한 출입국 과정과 검역과정을 마치고 입국장에 나오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영접 나온 우리 측 무관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반가움도 잠시,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변변한 카페조차 없는 공항에서 기쁜 만남의 회포를 풀수 있는 시간도 갖지 못하고 우리 측 무관들과 함께 나와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 국방부 측 인솔 장교들의 안내를 받으며 낡은 미니버스에 소하물을 싣기 바빳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마치고 가까스로 버스에 탑승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스크바에 도착했구나!” 하는 안도감과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묘한 것은 무려 반세기 동안을 사실상 적대관계로 살아오면서 생판 알지 못했던 러시아 군인들을 만나 “정해진 숙소로 출발한다.”는 통역장교의 짤막한 말을 듣고서 그러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 스스로도 도대체 믿기지 않았고, 또 실감도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낡은 미니버스를 타고 마치 하나의 미지의 세계에서 또 다른 하나의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달려 나가는 막연함처럼, 어둠이 깔린 모스크바의 밤거리를 천천히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그러다가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 지 채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차창 밖으로 흰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 놀라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갑자기 흰 눈이 그렇게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러시아 국방부 측 인솔 장교들은 만면에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 눈은 ‘빠끌롭스끼(Poklopsky)’라는 모스크바의 첫눈이며, 첫눈은 매우 좋은 징조이니, 아마도 여기 있는 동안 당신에게는 늘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축복의 말을 건네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러시아 장교들의 이러한 배려와 자세를 돌이켜 보면, 아마도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시시각각으로 돌아가는 숨 가쁜 상황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나의 표정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고자 하는 뜻 깊은 배려에서 나왔던 우호적 신호가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흰 눈을 맞으며 처음으로 마주친 모스크바의 밤거리와 낡고 침침한 건물들은 시골 아낙들이 낯선 도회지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러하듯이, 서먹하면서도 경계어린 눈초리로 나를 지긋이 내려 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야 나는 인솔 책임장교의 배려로 우리가 탄 버스가 모스크바 시내의 정중앙을 통과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러시아 국방부 측 인솔 책임 장교(대령)는 모스크바 시내를 통과하면서 통역장교를 통해 익숙하지 않은 영어 발음으로 모스크바 시내를 부지런하면서도 열심히 설명해 주는 열정과 성의를 보여 주었다. “저 건물은 크레믈린이고, 앞에 둘러져 있는 붉은 조명의 벽돌 담 벼락은 초소가 설치되어 있는 크레믈린 성곽이며, 그 앞의 넓은 아스팔트 광장은 붉은 광장입니다. 그리고 그 붉은 광장 끝 편에 있는 사원은 바실리 사원, 오른 쪽 빨간 8층 규모의 건물은 역사박물관, 맞은 편 3층 규모의 하얀 대리석 건물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국영 백화점 ‘굼’이라는 곳이고......” 그는 내가 듣든 말든 상관없이 뭐라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친절함에 귀기울이기 보다는, 오히려 모스크바의 야간 풍경이 주는 이국적 낯설음에 취하여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스크바의 밤풍경을 넋이 나간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 같이 30촉 백열등 전구가 품어대는 침침하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흩날리는 눈발에 파묻혀 도시 전체가 마치 베일에 싸인 마(魔)의 성(城)처럼 드러나 있었고, 그래서인지 어둡고 길게 늘여 떨어진 도시의 그림자는 마치 무엇인가에 억눌린 채 힘들어하는 무거운 짐마차 같은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모스크바의 그러한 밤풍경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이런 나라가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던 패권 국가였단 말인가?”라는 의구심을 끝내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모스크바에서의 나의 생활은 생각보다 매우 서툴면서도 힘들게 시작하였다. 내가 정착하게 된 숙소는 모스크바 서남쪽의 끝단에 위치하여 지하철역으로부터 버스 정류장 서너 구간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아파트로서, 외곽으로 빠지는 왕복 6차선 대로를 사이에 두고 민간 아파트 지역과는 격리되어 있는 군용 아파트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방 2개, 욕실 겸 화장실 1개, 주방 1개가 딸린 소형 아파트가 제공되었는데, 독신으로 거주한다는 이유로 원래 임대료의 절반 가격인 350달러가 월 임대료로 책정되었다. 다만 러시아 측은 가족이 러시아에 입국하여 한시적으로 체류하게 될 경우에는 체류 기간 동안만 700 달러의 임대료 책정 기준이 적용된다는 임대료 산정방식을 제시해 주었다. 다시 말해, 가족이 러시아에 입국하여 1주일 동안 아파트에 체류할 경우, 1주일 동안에는 700 달러 임대료 책정기준이 적용(700 x 7/30 = 165 달러)되고, 나머지 3주 동안에는 350 달러의 임대료 책정기준이 적용(350 x 23/30 = 285 달러)됨으로써, 총 450 달러의 임대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올 법한 일이지만, 그 당시 아파트 관리 행정 책임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추가 임대료를 받아 내겠다는 나름 야심차고 당차면서도 합리적인 방안을 고안해낸 듯하였다.
금요일 저녁에 도착하여 일단 정착하게 될 숙소를 배정받고,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간에 걸쳐 한국에서 가져간 짐들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월요일부터 강의가 시작된다는 통보를 받고 월요일 08시 20분에 아파트를 출발하여, 아파트에서 약 10 여분 거리의 군사대학원(원명 : 수보로프 총참모 군사대학원) 정문에 다다르니, 그곳의 안내장교가 대기하고 있다가 외국인 학부 부학부장(대령)실로 가서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부학부장이 직접 외국인 학부장(육군 소장)과 대학원 부원장 겸 교수부장(육군 소장)에게 안내하여 신고와 인사를 시키는 의례적 절차를 밟게 되었다. 그런 후 강의를 받게 될 강의실과 강의실 내 설치된 옷장 등을 포함한 편의시설들에 대한 설명을 받은 다음, 대학원 부속 병원에서 신체검사와 건강검진을 받았다. 학기 강의가 개시하기 전에 마땅히 거쳐야 할 절차를 만 하루 만에 철저히 치르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던 점은 그러한 시설이 지상 층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모두 지하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비록 교육기관의 시설이지만 교수 및 강의실을 제외한 모든 전투 지원 및 전투근무시설은 지하에 구축함으로써, 필요시설에 대한 적절한 보안 및 안전조치를 강구하는 운용의 묘를 발휘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지하시설 구축과 관련하여, 그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동 시설이 지하 통로를 통해 가까운 지하철 지하 핵 대피시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후일 친해지게 된 러시아 장교를 통해 얼핏 듯고 알게 되었다.
한편, 숙소와 교육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정상적인 교육 모드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의 교육 초기의 한동안의 생활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생활로서 무관부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 철저한 고립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생활이었다. 사관학교 졸업 후 외국어대학(노어과)에서 위탁교육을 받아 어휘력이나 언어 구사력 면에서는 어느 정도 소통할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자만에 불과했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Listening Comprehension에 엄청난 장애가 뒤따랐고, 당장 아파트 근처에 있는 우니베르 마그(Universial Magazine의 약어)에 가서 물건을 사려는데, 값이 얼마라는 말조차 쉽고 빠르게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값이 3천 5백 루블이라고 할 경우, 천 단위는 생략하고 ‘트리 파이브 헌드레드(Three Five Hundread)’ 식으로 발음하는 등 러시아 구어체에 대한 숙달 미흡에서 일어난 해프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대사관 무관부와도 연락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답답한 상황에서 모스크바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서울에 있는 가족들에게 알리긴 알려야 하겠는데, 숙소에는 아예 전화기가 설치되어있지 않은데다가 그곳 지리를 도통 잘 몰라 전화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으므로, 아무리해도 서울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수 없는 속수무책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군사대학원에서의 강의가 09:00시에 시작되어 중식까지 마칠려면 13:00시가 되어야 끝나게 되는데, 그곳의 날씨는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희끄므레하게 날이 밝아 오고, 오후 3시경만 되면 해가 짐으로써 금새 어둠 컴컴한 밤이 되어 버리니, 하루가 짧아도 너무 짧고 시간도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낯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저녁이나 밤에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학교 측에서도 마치 그러한 나의 심경을 꿰뚫고나 있는 것처럼, “저녁이나 밤에 밖에 함부로 나다니면 위험하니, 강의가 끝나면 곧장 숙소로 복귀하도록 하는 게 좋다.”는 반강제식 조언을 잔소리하듯 반복하곤 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정착한지 한 달이 되어가는 어느 토요일 아침, 나는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비장한 각오와 함께 두꺼운 방한복장으로 완전무장을 한 가운데 숙소 주변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면서 30여분을 걸어 나간 끝에, 30층 높이의 호텔에 도착하여 혹여 호텔 내부에 카페가 있는지 확인하던 차에 호텔 한 귀퉁이에 ‘텔레그라프(Telegraph)’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발견하고 그곳에 가보니, 놀랍게도 전신전화국이 분명하였다. 다행히 전화국은 토요일인데도 문을 열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외국인들이 묶는 호텔이라 필수 편의시설이어서 그러했든지 다행히 직원이 영업업무를 보고 있었다. 엉겁결에 반갑게 발견하여 들어간 전화국인지라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대뜸 “국제전화가 되느냐?”고 물었더니, 흥쾌히 “오끼이(OK)!”라고 답한데 이어, “어느 국가이냐?”고 묻길래, “유즈나야 까레야(South Korea)!”라고 답했더니, 전화할 도시의 전화코드 넘버와 전화번호를 적어 내라고 하였다. 도시코드 넘버와 전화번호를 적어낸 후 대충 10 여분 정도 기다렸는데, 그 여직원이 손짓을 하며 2번 전화방에서 전화를 받으라며 손끝으로 가리켜 주었다. 직원이 먼저 전화번호를 호출하여 확인하고 난 다음, 전화를 바꾸어주는 수동식이었으나, 어쨌든 그곳 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불행 중 다행스럽게 이러한 수동식이 오히려 더 나았던 것 같았다.
다행히 가족이 전화를 반갑게 받으며, 모두 잘 있고 큰 아이가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도 알려 주었다. 서울을 떠나오던 날은 공교롭게 큰 아이가 외국어고등학교 시험을 보는 날이어서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가족 대신에 내가 입시장(入試場)에 직접 데려다주게 되었는데, 그날 오후면 멀리 떠나 2년 후에나 보게 될 아빠에게 시험 치룰 생각에 제대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입실하는 큰 아이의 달려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것을 생각하면서, 큰 아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합격여부도 몹시 궁금하던 차였다. 그렇게 전화를 하게 되어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또 가족들의 목소리도 들었다는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데, 아파트 출입구를 열고 막 들어선 순간 대사관 무관 보좌관인 후배가 출입문 앞에서 낯익은 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 같이 동행한 사람들은 모스크바 민간대학에 유학을 온 사관학교 34기 후배들로서, 한 사람은 노동부 사무관,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문화관광부 사무관이었다. 집에 들어와 차 대접을 하면서, 이런 저런 여러 얘기를 나눈 끝에 이곳 군사대학원에서의 교육과 강의가 12시 경이면 대략 끝나므로 후배가 다니는 국립 모스크바 대학(MGU : 엠·게·우, Moscow Governmental University = Moscow State University)에 공부할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다니는 사회과학대학 부학장을 개인적으로 잘 아니, 찾아가 보면 석사과정에 입학이 가능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당장 오늘 저녁 부학장 숙소로 찾아가 인사를 한 다음, 월요일 오후에 입학 수속 절차를 밟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고마운 조언을 해주었다.
그렇게 하여, 그날 저녁 부학장 숙소를 방문하여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눈 후,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돌아오는데, 마음이 그렇게 훈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월요일 오후에 후배가 운전하는 러시아 시보레급 ‘지굴리’ 차를 타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도착하여, 준비한 졸업증명서와 성적 증명서 등 입학관련 서류에 대한 검토를 받고 제출한 후, 학기가 2-3주 정도 늦었지만, 학과장과 잘 얘기를 하여 1,2월 중에 있게 될 겨울 방학 중에 부족한 수강시간을 보충토록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매우 반가운 조언을 마친 뒤, 부학장이 직접 그 건물 4층에 위치하고 있는 학과장실로 안내하여 학과장을 면담하면서 말로만 들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의 수학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만난 학과장 ‘표도르킨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교수는 공군 전투기 조정사 출신으로 중위로 예편한 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만 무려 40년 이상 봉직해 온 종신 교수로서, 그 후 내가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어 비록 만시지차(晩時之次)이나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용기 있게 시작한 박사 과정에서도 나를 꼼꼼히 지도해 주시면서 여러 면에서 나를 아껴주시던 참으로 고마우신 은인 같은 분이셨다. 몇 해 전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록 지인을 통해 조그마한 조의금으로 성의를 표한다고 하였지만, 정작 유족을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의 과정에서 만난 여러 고마우신 인연들 가운데, 이처럼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극심한 아리아니즘(Arianism)적 인종 차별에 젖어 있던 대부분의 인텔리 러시아인들과 달리, 차별 없이 진실 되게 대해주고 늘 고마운 충고와 도움을 주셨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의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음이 참으로 애석하고 아쉽기만 하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모스크바에서 그러한 인연을 맺게 해준 후배가 얼마 전 간암으로 작고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늘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던 후배였는지라 마음이 참으로 착잡한 바 있었다.
(2021. 9. 12)
첫댓글 북극곰 잡으러 곰굴로 들어가셨군요.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법한 외국 유학 중의 우발적인 경험. 공감하는 바가 큽니다. 한국이라는 울타리, 그 속에서 또 외부와 단절되다시피했던 사관학교와 군시절의 경험만으로 사전 정보도 없이 거의 막무가내로 세계무대에 첫발을 내딛는 심정은 개척자의 사명감이 없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그런 어려움을 겪고 이겨낸 모든 분들을 존경합니다.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들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당시만 해도 철의 장막이었으니까요.
벽송이 아주 재미 있는 글을 시작하셨네요.
나에게는 가장 익숙하지 않은 나라들 중의 하나가 러시아인지라 모든 내용이 새롭고 흥미롭네요.
러시아 하면 내가 결혼하던 해에 개봉된 영화 <닥터지바고>가 생각나네요. 그해 겨울인가 아내와 같이 그 영화를 보며 몽환적인 러시아의 겨울 풍경과 삶을 상상해보곤 했었는데요.
1987년 88올림픽을 앞두고 노태우 정부가 추진하던 북방정책 대 소련 협상을 EPB 우리 대외협력실에서 준비하여 박철언 특사를 단장으로 비밀리에 파견하던 기억도 떠오르구요.
"빠끌롭스끼(Poklopsky", 첫눈을 이렇게 부르는군요. 아직도 베일 속에 있는 듯한 러시아의 문화와 그들의 삶이 흥미롭습니다. 러시아어가 무척이나 어렵다고 하던데, 벽송이 매우 특이한 이력의 러시아어 공부를 하고 아마도 제1호 러시아 국비 유학 케이스가 아니었을까도 생각하는데요.
앞으로의 이야기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박사학위
획득은 대단한것입니다.
나도 영어는 상당하다고 자부했는데
미 OAC가서 특히 hearing에 어려움이 많았지요. 지금도 해당
분야에 지식이 있지 않은 상태에
서 또는 사전연구없이는 hearing
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러시아 생활이 적응기를 실감나게 잘 읽었어요.저는
러시아를 두번 다녀왔는데,한번은 국장급과정 운영시
11명의 국장들을 인솔하여 다녀왔고,또 한번은 북유럽
여행길에 마지막 국가가 러시아 였어요.레닌의 무덤과
광장,종탑,굼백화점이 기억에 남고 공항에서 시내에 이
르는 길에 삼성과 LG간판이 많은걸 보고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지요.의미있는 글,감사해요..
어려운 시기에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 가운데서도 만학으로 성공했으니 참 좋은 결정으로 보람을 얻은 것이지요~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다수는 그런 노력조차 없이 현실에 안주하다가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시간을 보낸 경우도 많지요!
남당 선생의 衷心어린 말씀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남들은 그 나이에 모든 것을 완성하고 노숙의 경지에 들어섰는데, 그제사 석사과정을 밟겠다고 마음을 고추잡던 당시의 심경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참으로 게면쩍고 부끄러운 구석이었답니다~!
노어는 왜 끝말이 시키시키로만 들릴까 무식의 소치로 ㅎㅎ 추운 겨울이 길고 많이들 쓰고 다니는 방한모자에 털코트, 대문호의 배출 미지의 세계가 이제 시작으로 좋은 글 기다림이 즐겁습니다.
모두들 노어가 어렵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일전에도 글 중에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산스크리트어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사만 제외하고, 모든 품사가 6가지 격변화(주•생•여•대•조•전치격)를 하기 때문에, 격에 따라 단어를 격변화시켜야 하므로 처음에는 말을 허거나 글을 쑬때 문법 생각하다가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없는 숙달•노력과정과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때서야 겨우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불규칙 변화가 있어, 머리 아프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스끼는 원래 형용사 어미인데, 영어에서 정관사 The+형용사가 되면 명사가 되듯이 노어도 그런 용법으로 쓰입니다. 다만 명사 대신, 사람 이름과 같은 대명사로 사용된다는 차이가 있지요~~^^
예컨대, 심하게 농담하면 코스끼(한국식 노어) 로 잔린스끼(Zinlinsky;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가 바로 그것이죠~~^^ 첨고로, 코스끼는 제가 만들어낸 농담입니다~!
만학의 어려움을 이기신 벽송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도 38세에 대만에서 석사를 50세에 베이징에서 박사를 했지요. 벽송의 글이 ㅡ 나의 그때 일들이 주마등을 타고 지나가게 합니다.
동기생들의 지나간 시절 회고담을 들을라치면 모두가 젊은 시절 천신만고의 계절을 보낸 결과 오늘의 여유나 성취가 있음을 알 수 있네요. 특히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계발노력을 계속했던 벽송의 안목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 결과 아직까지도 70세 청년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 부러움까지 느끼게 되네요. 북유럽 패키지 여행시 들렸던 러시아의 모스코바와 레닌그라드를 다시금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