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의 추구와 묵상
2024.8.25. 주일오전예배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군인이 연병장에서 땀을 많이 흘려야 실제 전투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고요. 주님을 위해서 군사처럼 일어선 몸 된 교회 식구님들이 지난 7월과 8월 오늘 25일에 이르기까지 무더위가 역대급인 이 시대에 한밤의 묵상으로 주님께 은혜를 받고 성전에서, 각자 빈들판에서 주님 향해 간구하며 주님을 묵상하며 주님을 시원스럽게 섬긴 시간들이 참 감사가 됩니다. 우리 몸 된 교회가 이 시간을 통해서 더 내실 있게 튼튼해진 것 같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이 연장선에서 참된 추구와 깊은 묵상을 했던 느헤미야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느헤미야의 추구와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간략하게 아홉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강한 추구
선한 양심과 바른 마음을 통해 살아 있는 기도는 흘러나옵니다. 느헤미야가 바벨론 궁에서 신임을 받는 자리에 있는데 하루는 고국에 다녀온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되고 성문은 불타고 그곳에 남아있는 자들은 큰 곤욕을 당하고 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느헤미야 1장 4절 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삶의 영역이 아닌 추구하여 솟아오른 보좌의 안목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여기서 내가 정신 차리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둘째, 깊은 묵상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할 말을 압니다. 이 말은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느헤미야가 왕에게 술을 따라주는 어느날 그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1세가 말했습니다. “네 얼굴이 평소와 달리 수심이 있구나 무슨 일이 있느냐?” 느헤미야는 자기 고국의 형편을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느헤미야 2장 4절의 말씀에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고국과 예루살렘의 형편이 자기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내 조상들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 주의 백성이 주의 언약에 돌아오면 주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사람, 왕에게서 은총을 받게 해주시옵소서” 느헤미야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이 익숙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1세, 그 왕 앞에서도 마땅히 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왕이여, 당신이 원하신다면 제가 고국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옵소서. 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어인이 찍힌 통행증을 주시고 그리고 성벽 건축에 제가 거할 집에 필요한 재목을 주십시오” 그랬을 때 왕은 그 모든 것을 허락하고 군대까지 보내서 느헤미야를 지원해주었습니다.
셋째, 깨어 있음
한밤의 묵상이 깨어 있는 사람은 날이 밝아오면 그 일을 신속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밤에 느헤미야 2장 12절 말씀이지요.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사람 앞에 드러내지 않고 주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무너진 성벽을 그 밤중에 살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봅니다. 한밤의 묵상 때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가족들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내 분량 안에서 섬겨볼 수 있을까?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내가 무엇을 할까?’ 사랑하는 목사님이 밤중에 기도만 했던 것이 아니라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그렇게 묵상하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밤이 되고 낮이 되니” 창세기 1장 말씀이지요. 밤이 살아 있으면 낮이 살아 있게 됩니다. 밤에 잠만 자고 있으면 낮에도 별 볼 일 없습니다. 지난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넷째, 형제 사랑
형제들의 마음이 하나 되어 일어서면 주님의 일은 아주 쉽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앞서서 마음 썼던 것은 무너졌던 형제들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도 예수님을 간절히 초청하고 기다렸던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님이 나사로가 살아 생전에 오시지 않고 죽은 지 나흘 만에 오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넘어져 있었고 녹아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앞서서 그 두 자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급하셨습니다. 두 자매의 마음을 믿음 가운데 일으키시고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이지요. 느헤미야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저희(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형제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이스라엘 백성은 자원해서 그들의 분량껏 한 구역씩 맡아 성을 건축했습니다. 착공한지 오십이 일 만에 예루살렘 성은 완공되었습니다. 우리 식구님들의 마음이 주님 안에서 추구하며 강한 묵상으로 일어설 때는 우리는 한 마음이 됩니다. 한 뜻이 됩니다. 주님의 일을 섬길 수 있는 강력한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지 마세요!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느헤미야는 그 왕궁의 총애 받는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고국의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바른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가진 느헤미야였기 때문에 그 소식은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주님을 위해서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다섯째, 행복한 긴장감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이 절실하기에 기도하면서도 또한 전투하는 자세를 풀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4장 17절에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짐꾼)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일하면서도 주님을 위한 군사라는 이 마음의 자세를 풀지 않는 것이지요.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은혜 속에 강해야 될 줄 압니다. 행복한 긴장감, 우리들의 마음의 자세가 이렇게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우리 주님 모시고 근신함으로 임했으면 합니다. 한밤의 묵상은 7월과 8월만 이어질 것이 아니라 9월에도 10월에도 천국 가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여섯째, 자기 부인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형제를 더 낫게 여기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주님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느헤미야 5장 14절에 보니까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이십 년부터 삼십 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전 총독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고 착취하고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일, 이 년도 아니고 십이 년 동안 마땅히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에게 녹을 받지 않고 자기의 삶을 꾸려간 느헤미야,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형제를 사랑했던 좋은 주님의 종입니다. 우리가 나를 부인하면 주님과 내 형제가 밝히 보입니다. 나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세상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십자가로 넘길 때 그곳이 부활의 영역이고 오늘의 천국입니다. 십자가로 나를 날마다 넘기지 아니하면 누구라도 세상에 묻히고 더러움에 묻히고 죄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일곱째, 이기는 자
주님을 강하게 추구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세상의 유혹이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결국 승리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이 자주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내고 봉인하지 않은 편지까지 보내면서 “너는 지금 바벨론을 반역하고 유다 왕으로 독립하려는 것이 아니냐” 고 거짓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아마 바벨론 왕에게도 들어갔을 거예요. 그러나 왕은 그런 허튼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6장 16절에 보니까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줄 앎이니라” 고 했습니다. 주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일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느헤미야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위로하신다’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위로의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부흥시켰습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 생활할 때에는 하나님과 형제들의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물론 위로는 끝까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보다 성숙한 성도라면 하나님 위로의 통로가 되어서 형제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위로받는 자리에만 있지 말고 하나님과 형제들의 위로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덟째, 우리의 힘은 주님
우리의 기쁨과 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십니다. 성이 완공되고 에스라 학사가 하나님의 율법을 읽을 때 그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또 너무나 감격해서 느헤미야 8장에는 주의 백성이 울고 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8장 10절 말씀에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고 말하면서 백성들의 그 감정에 복받친 울음을 절제시키고 주님께 조용하고도 뼈 있게 예배하는 중심으로 이끌어갔습니다. 느헤미야도 눈물의 사람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주님 때문에 힘을 얻는 시간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아홉째, 성도답게
거룩은 반드시 분리가 선행되어야 하고 주님께 속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제 위치를 지켜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백성답게 세우고자 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님 마음의 관심사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주의 백성의 거룩함입니다. 느헤미야가 성 완공 후에 바벨론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에게 분깃도 안 주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성전에다 자기 방을 만들어 놓고 제사장들은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줄을 서서 사돈이 되어 있고 엉망진창 난장판이었습니다. 주님께 새롭게 솟아오르지 않으면 얼마든지 세상은 교회를 세속화시키고자 합니다. 느헤미야 13장 30절에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세속과 분리되는 것이 성도가 정결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세상과는 구별되고 주님의 백성답게 우리 삶의 위치를 주님 모시고 잘 지켜갔으면 합니다. 올 여름에 이 한밤의 묵상으로 인해서 몸 된 교회가 내실 있게 부흥되는 것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자들로 우리도 굳게 서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몸 된 교회 가운데 계속 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보좌의 영향력이 한국 교회로, 열방에 섬기러 나가신 선교사님들께도 이 참된 추구와 한밤의 묵상이 확산되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