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253
(소설삼국지)
제2권 군웅쟁패
제25장 원소의 하북 제패
6) 공손찬의 패망
건안4년(199년) 원소가 전 군을 동원해 역경을 맹렬히 포위 공격했다. 공손찬이 그의 아들 공손속(公孫續)을 흑산적(黑山賊)에게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했다. 공손찬의 마지막 카드였다. 그러나 기다리던 원군은 빨리 도착하지 않았다.
공손찬은 다시 자신이 직접 오환돌기를 거느리고 즉시 출격할 계획을 세웠다. 공손찬을 성을 빠져나가 서남산(西南山)으로 가 흑산적의 무리와 합세한 후 기주를 가로질러 진격함으로써 원소의 군대와 배후 근거지의 연결을 차단하고자 했다. 장사 관정이 공손찬에게 말했다.
“지금 장군의 장사들은 다 이미 토붕와해(土崩瓦解) 되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수비할 수 있게 하는 힘은 그 거처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고 또 주인인 장군이 뒤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군이 오래토록 견고하게 수비만 한다면 원소는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원소라 할지라도 한 번 후퇴하면 사방에서 병력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장군께서 지금 이 곳을 버리고 떠나신다면 군대 내에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역경에 바로 위기가 들이닥칠 것입니다. 장군이 본거지를 잃게 되면 초야에서 외롭게 떠돌면서 무었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공손찬은 관정의 만류에 출성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이 관정이라는 자는 참으로 무능한 자였다. 성을 나가 흑산적과 연합하고 원소의 배후를 친다는 것은 공손찬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최후의 대안이었다. 관정은 이 안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면서도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했다. 관정은 단지 공손찬이 출성했을 때 성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될 것을 걱정했다.
여포도 하비에서 포위되었을 때 이와 비슷한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수하 장수들 간에 알력이 있어서 안심하고 성을 맡길 수가 없었다. 공손찬의 경우에는 아예 자신의 거성을 믿고 맡길만한 능력 있는 부하가 없었다. 관정처럼 용렬한 자가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공손찬의 의논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바로 그의 비극이었다.
원소의 공격은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성을 하나씩 부숴가면서 점점 더 공손찬의 거성 가까이 공격해 들어갔다. 공손찬의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마침내 삼중의 성벽만이 남았다.
건안4년(199년) 봄, 드디어 흑산적 수령 장연(張燕)이 공손찬을 구원하러 나섰다. 장연은 공손속과 함께 병사 십만 명을 이끌고 세 길로 나누어 진격했다. 공손찬은 장연의 원군이 도착하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렸다.
공손찬은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공손찬은 매일 거성의 높은 누각 위에 앉아서 수성전을 지휘했다. 원소의 군사들은 개미떼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포위망는 점점 좁혀졌다. 성루 위에서 원소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공손찬은 깜박 잠이 들었다. 수성전을 지휘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성에 화광이 충천했다. 공손찬은 불을 끄느라 이리저리 뛰며 소리쳤다. 속수무책이었다. 불은 점점 더 강하게 타올랐다. 불이 붙은 기둥과 서까래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악! 아악!”
깜짝 놀란 공손찬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잠결에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공손찬은 그제야 잠이 깨었다. 꿈이었다. 뭔가 불길하고 찜찜했다.
공손찬은 서둘러 아들인 공손속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지난 주말 병사들이 적과 싸우다 많이 죽어 시체가 땅을 덮고 있다. 너는 지금 나의 상황이 어떤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이미 다른 방도가 없다. 원씨의 공격이 귀신과 같아 땅속에서 북과 피리 소리가 울리고 충차와 운제가 나의 누각 위아래에서 춤을 춘다 하루하루가 다급한 상황이다. 어디 다른 곳에 의지할 곳이 없다.
너는 마땅히 장연 앞에 머리를 찧어서라도 속히 경기(輕騎)를 이끌고 와라. 도착하면 성 북쪽에서 봉화를 들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출격하겠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격해 원소와 목숨을 걸고 결판을 낼 작정이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죽은 후에 천하가 비록 넓다지만 네가 편안히 살 수 있는 땅을 구하고자해도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느냐!”
공손찬은 공손속에게 보낼 편지를 가지고 갈 사람을 하나 가려 뽑았다. 몰래 성 밖으로 내보냈다. 공손찬이 보낸 밀사는 성을 나가는 일에는 성공했다. 공손찬의 밀사는 공손속과 장연을 만나 공손찬의 계획을 알렸다. 공손속은 원군이 도착하는 시간과 불을 신호로 일제 공격하자는 약조를 담은 답장을 써서 밀사 편에 보냈다.
이 밀사는 역경 인근에 도착해 포위를 뚫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방도를 탐색하다 그만 원소의 척후병에게 들키고 말았다. 척후병은 밀사가 가져온 공손속의 편지를 원소에게 가지고 갔다. 공손찬의 편지를 입수한 원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소의 머리에는 공손찬과 장연의 원군을 동시에 격파할 계획이 떠올랐다. 원소는 먼저 진림을 시켜 공손속의 편지를 고쳐 쓴 후에 공손찬에게 보냈다. 원군이 도착하는 시간과 약정된 공격시간을 수정했다.
원소는 군대의 일부를 장연의 원군으로 위장시켰다. 공손찬이 세운 작전대로 성 북쪽에서 봉화를 올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원군이 도착했다고 생각한 공손찬은 성 안에 남아있는 병사를 모두 동원해 일제히 성 밖으로 출격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것은 모두 원소의 군사들이었다. 공손찬은 간신히 몸을 빼어 다시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참패였다. 뒤이어 장연과 공손속이 이끌고 오던 구원병 또한 원소의 복병에 걸려 대패했다.
공손찬은 가뜩이나 부족한 병사를 대부분 잃어 성을 지킬 병사조차 부족해졌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없어지자 원소군의 공성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원소군은 남은 외곽의 성벽들을 다 부수고 드디어 공손찬의 거성 바로 밑까지 진격했다.
원소는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공격하는 병사들을 나누어 땅을 파고 들어가 땅굴을 만들었다. 공손찬이 거주하는 높은 누각 바로 밑에 구멍을 뚫고 기초를 다지기 위해 박은 나무기둥들이 드러나게 파헤쳤다. 나무기둥들이 절반 정도 노출되었을 때 그곳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기초가 무너지자 높은 누각이 갑자기 기울어지며 쓰러지려 했다.
공손찬은 이제 빠져나갈 방법이 없음을 자각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처자식들을 다 목매어 죽인 후 누각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원소의 병사들이 서둘러 누각위로 올라가 공손찬의 목을 베었다.
이 처참한 결과를 본 관정이 홀로 말했다.
“전에 내가 장군이 밖으로 출정하려는 것을 막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실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 군자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면 반드시 그 어려움을 함께 해야 한다고 들었다 어찌 나 홀로 살 수 있겠는가!”
관정을 말을 달려 원소군을 향해 돌격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공손찬의 부장 전해(田揩)도 이 마지막 싸움에서 공손찬과 함께 죽었다. 원소는 공손찬을 비롯한 이들의 머리를 베어 다 허도로 보냈다.
장연은 원소의 복병에 걸려 대패했다. 이 패배의 여파는 매우 컸다. 이 후로 장연의 병력은 점차 흩어져 달아났으며 세력이 급속히 약해진 장연은 결국 자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조조가 기주를 막 평정하려 할 때 장연은 사자를 보내어 조정에 투항의사를 표시했다. 조정에서 장연을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임명하자 그는 병력을 이끌고 직접 업(鄴) 성에 와 항복했다. 장연은 안국정후(安國亭侯)에 봉해지고 식읍 오백호를 받았다. 공손속은 이 싸움에서 패해 도망하다가 도각호(屠各胡)에게 죽임을 당했다.
선우보(鮮于輔)는 원소와 연합해 공손찬을 공격했으나 공손찬이 죽은 후에는 원소를 따르지 않았다. 선우보는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왕명을 받들었다. 조조는 선우보를 건충장군(建忠將軍)에 임명하고 유주의 여섯 개 군에 대한 감독권을 주었다. 일년 후 조조가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서로 대치할 때 선우보는 직접 조조를 찾아와 종군했다. 이때 염유(閻柔)도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 국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염유는 조정에서 관직을 받아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가 되었다.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를 격파해 도주하게 하자 조조는 매우 기뻤다. 선우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년에 원본초가 공손찬의 머리를 보내왔을 때, 내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했소. 그러나 지금 내가 이렇게 이겼소. 이것은 이미 하늘의 뜻이지만 또한 두세 사람의 힘 덕분이기도 하오.”
관도에서 승전하고 난 후 조조는 선우보를 좌도요장군(左度遼將軍)에 임명하고 정후(亭侯)에 봉했다. 다시 선우보에게 유주를 진정시키고 어루만지도록 돌려보냈다. 염유는 조조가 남피(南皮)에서 원담을 공격할 때 자신의 부곡병들과 선비(鮮卑)족이 바친 명마를 이끌고 와서 군무에 봉사했다. 그 후 조조가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정벌할 때에도 종군했으며 그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조조는 염유를 몹시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항상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경을 나의 아들처럼 생각하니 경도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게.”
염유는 이로 인해 오관중랑장 조비와 형제처럼 지냈다.
원소는 드디어 공손찬을 완파하고 그의 병력과 땅을 다 합쳤다. 바야흐로 기주, 청주, 병주, 유주의 네개 주를 병합해 황하 이북지역을 다 통일했다. 이제 남쪽을 향해 진격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