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윤리 지원관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청와대 쪽으로 10분쯤 걸어가다 보면 길 왼쪽에 5층짜리 건물이 있다.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창성동 별관이다. 이 건물 4층엔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들어서 있다. 이름만으론 무엇을 하는 조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공무원들은 이 조직을 ‘관가의 저승사자’라고 부른다. 일명 ‘암행감찰반’이 바로 창성동 별관 4층의 주인이다. 과거 청와대 특명수사를 담당했던 ‘사직동팀’의 공식 명칭도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란 밋밋한 것이었다.
암행감찰반(공직윤리지원관실)은 지난해 2월 폐지됐다가 5개월 만에 지금 이름으로 부활했다. 부활 후 오히려 막강한 파워를 휘두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승수 국무총리가 고강도 ‘공직 사정’ 방침을 밝히면서 암행감찰 빈도가 늘어났고, 감찰 강도도 훨씬 세졌다. 연말연초 인사철과 설 연휴를 맞아 암행감찰반의 강력한 단속에 걸린 고위 공직자도 많다.
MB정권 폐지 다섯 달 만에 부활
한국농어촌공사 고위 간부 A씨는 모 금융회사 지점장 B씨가 공사의 자금 100억원을 예치할 수 있게 도와 줬다. A씨의 도움으로 큰 실적을 올린 B씨는 고급 양주 두 병과 선물상자를 들고 공사 근처 다방에서 A씨를 만났다. A씨가 물건을 건네받으려는 순간 암행감찰반이 들이닥쳤다. B씨는 양주는 팽개친 채 선물상자만 들고 도망쳤다. 암행감찰반은 B씨가 전달하려 한 선물상자에 현금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확인은 하지 못했다. A씨는 결국 연초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정의 중추기관인 검찰도 암행감찰반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암행감찰반은 서울고등검찰청 소속 C검사가 부인 명의로 강원도에 땅을 샀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암행감찰반은 C검사의 주변을 탐문하고, 토지대장 등을 떼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이를 대검 감찰실에 통보했다. 대검 감찰실은 C검사의 부인이 부동산 시행사를 운영하고 있고, C씨가 부동산 투기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해 크게 문제 삼지는 않겠다는 방침이다. 대검 관계자는 “암행감찰반이 관가의 저승사자라더니 검사 뒷조사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공직자 ‘평가’와 ‘사정’ 결합 땐 막강 파워
암행감찰반엔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다. 관가에서는 지난 19일 단행된 장·차관급 인사에서 ‘왕 비서관’으로 불리던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이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에 임명된 것을 주목한다.
총리실 직제상 암행감찰반은 박 차장 휘하는 아니다. 현재 국무총리실에는 두 명(국무차장과 사무차장)의 차장이 있는데, 암행감찰반은 정통 경제관료인 조원동 사무차장 산하다. 박영준 국무차장의 집권세력 내 위상을 감안할 때 암행감찰반에 그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 소장파 의원은 “박 차장의 역할이 단순히 행정사무 영역에만 머무르겠느냐”며 “암행감찰반의 뒷받침을 받아 각 부처 평가를 비롯해 공직자 사정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암행감찰반은 공직자 감찰 업무뿐 아니라 평가 업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총리실은 지난해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도로 한 달간 각 부처에 대한 직무평가를 했다. 당시 평가 내용은 ▶고위 공직자들의 노무현 정부 당시 역할 ▶국회 및 언론 관계 ▶대통령의 국정철학 수행도 등이었다. 청와대와의 상당한 교감 속에 진행된 당시 평가 결과는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박영준 차장이 고위 공직자에 대한 ‘평가’와 ‘사정’ 업무를 장악하면 ‘양날의 칼’을 쥔 셈이 된다. 공직사회 전반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장악력이 한층 강화되고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사정 라인에서 ‘포항 인맥’의 부상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박영준 차장은 포항 출신인 이상득 의원 계파의 핵심 인사로 분류된다. ‘암행감찰반장’ 격인 공직윤리지원관은 노동부 감사관 출신의 이인규(2급)씨다. 경북 영덕 출신의 이 지원관은 초·중·고등학교를 포항에서 나왔다. 청와대에서 공직자 사정 업무를 담당하는 민정 2비서관실엔 포항 출신 이강덕 경무관이 있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 등을 담당하는 장다사로 민정1비서관은 이상득 의원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과거 정부보다 조직은 커져
암행감찰반은 철저히 베일 속에 있는 조직이다. 민주당 김동철 의원실은 최근 국무총리실에 암행감찰반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다. 그러나 조직 편제는 물론 인원조차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료 요청을 한 강광식 보좌관은 “비밀리에 활동하는 조직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기초 자료조차 제출을 거부하는 것을 보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중앙SUNDAY 취재 결과 암행감찰반의 조직과 기능은 과거보다 확대되고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암행감찰반 내부 사정에 밝은 경찰 고위 인사는 “암행감찰반은 7개 팀으로 구성돼 있고, 각 팀장은 총경급 경찰이나 전직 경찰 가운데 특채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팀장 및 감찰요원들은 경찰·검찰·국세청 등 사정기관에서 뽑은 파견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이 인사는 덧붙였다. 팀별로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11명까지 구성되어 있고, 45명 정도가 암행감찰반원이라고 한다. 또 다른 경찰 고위 간부는 “김대중 정부 때의 사직동팀이 총리실에서 부활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고 전했다.
과거 청와대의 특명수사를 담당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해체된 사직동팀은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지휘하에 현직 경찰 27명이 활동했다. 지금의 암행감찰반이 사직동팀보다 오히려 규모가 큰 셈이다. 노무현 정부 때의 암행감찰반보다도 숫자가 늘어났다. ‘정부합동점검반’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노무현 정부의 암행감찰반은 경찰·검찰·국세청 파견 직원 35명으로 구성됐다.
‘권력기구화’ 경계해야
암행감찰반의 강화된 역할과 높아진 위상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민주당 서갑원 원내부대표는 “공직기강 확립이라는 명목으로 정권에 코드를 맞추는 방향으로 공직자 사정을 하거나 기구 자체가 음지화·권력화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실제 사직동팀은 청와대의 ‘하명’을 따르기 위한 강압적 수사나 권력남용으로 물의를 일으키면서 해체의 길을 걸었다. 1999년 최순영 당시 대한생명 회장 부인이 고위 공직자 부인에게 옷 상납을 강요당했다고 폭로하면서 불거진 옷 로비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사직동팀은 장관 부인들을 조사해 놓고도 4개월 동안 이를 비밀에 부쳤다가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1년엔 암행감찰반(당시 총리실 조사심의관실 소속)이 서울국세청 조사국장과 총무과장이 룸살롱에서 건설업자에게서 향응을 받는 현장을 덮쳐 놓고도 건설업자의 청탁을 받은 조사심의관실 조사과장 N씨가 사건을 무마해 준 적도 있었다.
(중앙선데이 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