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백성호
㉑ 예수는 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했을까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첫 구절부터 당혹스럽다. ‘예수=평화’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예수 자신은 ‘예수≠평화’라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칼’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첫 물음이 올라온다. ‘예수가 말한 평화란 대체 뭘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르다. ‘나의 눈’에는 지켜야 할 평화로 보이지만, ‘예수의 눈’에는 부수어야 할 평화로 보이는 것. 그것이 대체 뭘까. 이런 물음의 오솔길을 따라가 본다.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했다. 칼에 담긴 깊은 의미는 뭘까. 백성호 기자
그런데 물음을 따라간다고 해서 바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내 안으로 던져놓은 물음을 ‘궁리(窮理)’해야 한다. 닭이 알을 품듯이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사유해야 한다. 사유를 통해 물음의 두레박은 더욱더 깊이 내려간다. 예수는 이어서 말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이제 좀 더 명확해진다. 예수가 칼을 내려치는 곳은 나와 아버지 사이다. 딸과 어머니 사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다. 그 사이로 예수는 칼을 내려친다.
왜일까. ‘예수의 눈’은 둘이 따로따로 떨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음이 좀 더 깊어진다. ‘나와 아버지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아버지는 나의 뿌리니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아버지로 인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 딸과 어머니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미 가족이 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도 그렇다. 부모는 내가 태어난 고향이자 근원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예수는 그런 상식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왜 이 관계들이 떨어져야 한다고 봤을까?’
예수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던 이스라엘 나자렛의 골목길. 어린 예수는 이 일대를 뛰어다녔을 터다. 백성호 기자
그리스어 성경에서 ‘칼’은 ‘마카이라(machaira)’이다. ‘칼(sword)’ 혹은 ‘싸움(fight)’을 뜻한다. 예수는 그것을 주려고 했다. 그것이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라고 했다.
나의 눈과 예수의 눈. 둘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우리에게 부모는 자기 자신의 근원이다. 부모로 인해 내가 태어났다. 부모는 내게 육신을 주고 생명을 주었다. 그래서 부자지간(父子之間), 모녀지간(母女之間)은 끈끈하다. 둘 사이를 칼로 자를 수가 없다. 그런 ‘불가침의 영역’을 향해 예수는 칼을 내려쳤다.
그것은 우리의 평화가 ‘진짜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뿌리가 ‘진짜 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자. 그 나무에는 잎사귀가 달려 있다. 그 잎사귀는 어디서 나왔을까. 우리는 답한다. “나뭇가지에서 나왔다.” 그러니 잎사귀의 아버지는 나뭇가지다. 가지가 없으면 잎사귀가 나올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렇게 본다. 그것이 우리의 눈이다.
예수의 눈은 다르다. 잎사귀의 근원은 나뭇가지가 아니다. 더 깊은 바닥이 있다. 그래서 예수는 칼을 내려친다. ‘잎사귀의 착각’을 향해 칼을 내려친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서로 싸우게 한다. 자신의 ‘진짜 근원’을 찾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뒤에 펼쳐진 산촌을 다니며 회당에서 하늘의 뜻을 전했다. 백성호 기자
잎사귀가 나뭇가지만 알면 시야가 막힌다. 나뭇가지도 마찬가지다. 잎사귀만 알면 시야가 좁아진다. 결국 둘은 뿌리를 보지 못한다. 자신의 진짜 근원을 모른다. 그것이 잎사귀의 평화, 가지의 평화다. 예수의 눈으로 보면 ‘가짜 평화’다. 착각의 눈으로 바라본 ‘착각의 평화’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순간의 평화’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렇게 예수는 가짜 평화를 부수고자 했다. 이유는 하나다. 잎사귀만 아는 잎사귀와 가지만 아는 나뭇가지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짧은 생각
동네 놀이터에
시소가 있습니다.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이 내려갑니다.
한쪽이 내려가면,
다른 쪽은 또 올라갑니다.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양쪽은
서로 반대되는 걸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가 돼서 움직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의 ‘반(反)이원론’을 봅니다.
기독교 미래학자인
레너드 스윗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전적으로 반이원론적이다.
나는 가장 큰 자요,
가장 작은 자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시소는 혼자서
탈 수가 없습니다.
양쪽 끝에 사람이 앉아야만
움직입니다.
쿵~덕, 쿵~덕!
이쪽 때문에
저쪽이 존재하고,
저쪽 때문에
이쪽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둘 중
어느 쪽에 계실까요.
그렇습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소 그 자체’로
계십니다.
그래서
이쪽인가, 아니면 저쪽인가
하는 이원론을
초월합니다.
칼과 평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그걸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시소 위에선
달라집니다.
높음과 낮음이
하나이듯,
시작과 끝이
하나이듯,
평화와 칼도
하나가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가족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이야.”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딴판입니다.
가족은
온갖 집착과 바람,
애절함과 원망,
사랑과 증오의 비빔밥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강고한 집착의 끈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칼을 꺼내신 게 아닐까요.
평화를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선 가족이란
가면을 벗겨야 합니다.
그리고
집착의 실체를 봐야 합니다.
그럼 깨닫게 됩니다.
아!
가족이 나의 원수구나.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는
예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집착의 끈을 향해
칼을 내려치는 게
아닐까요.
그 칼이
어디에 있느냐고요?
회개가
바로 칼입니다.
그걸 끊는 순간,
평화가 쏟아집니다.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사랑이
쏟아집니다.
이스라엘 갈릴리의 가파르나움에 있는 유대교 회당. 예수는 이곳에서도 설교를 했을 터이다. 백성호 기자
바로 그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이 먼저이지 않을까요.
시소의 양끝은
하나입니다.
칼이 평화이고,
평화가 곧 칼입니다.
그래서
따져봐야 합니다.
칼을 통하지 않은 평화가
진짜 평화인지,
집착을 끊지 않은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말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
저는
평화라는 말보다
칼이라는 말에서
더 깊은 평화를 봅니다.
에디터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