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도 고 1 겨울방학을 앞두고 딱히 지낼 곳이 없었던 소년은 괜찮은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교과서 대금 중 일부를 착복했던 비리가 발각되어 납부한 대금 일부가 학생들에게 환불되었다.
환불된 돈은 당시 단과학원 한 달 비용 정도였다.
한 친구가 3명의 환불금으로 자기 아버지 화원이 있는 부천에서 풀빵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여행을 가자고 했다.
장사 준비를 위해 동업자 3명이 영등포시장에 가서 호떡 장사하는 아저씨에게 하루 수입액과 장사 준비에 얼마나 드는지를 물어봤다.
3명이 환불받은 총액으로 준비가 가능했고 하루 수입도 생각보다 많아 소년은 돈을 벌어서 여행을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고
동참하게 되었다.
영업장소는 그 친구 아버지가 운영했던 부천의 화원 부근이었다.
셋은 풀빵 만드는 장비를 구입하여 그곳으로 가서 화원 관리실에서 일하는 직원과 함께 기거하며 장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막상 풀빵에 들어갈 밀가루 반죽과 팥을 만드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아 며칠간 실패를 반복하다가
우선 되는대로 만들어 장사를 나가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식량이 며칠 분밖에 없었기 때문에 풀빵을 팔아 번 돈으로 식자재를 구입하여 해결하기로 했던 것이다.
처음 장사를 나갔던 곳은 부천의 소사극장 앞이었다. 지금은 번화가가 되었지만, 당시는 허허벌판에 극장 건물만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영화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기본 매출은 되리라 기대했었다.
저녁 5시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3시간이 지나서야 손님 2명이 와서는 풀빵 한 개씩만 사 먹고 가버렸고,
이후 2시간이 지나 2명이 왔는데 또 한 개씩만 사 먹고 가버렸다.
결국 그날 밤 11시까지 총매출액은 풀빵 4개 값 80원이었다.
그것은 영등포에서 호떡 장사 아저씨가 말한 하루 매출액의 0.2%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풀빵을 먹으러 와서 왜 한 개씩만 먹고 갔을까 의아해하다가 자신들이 먹어보고는
손님들이 그냥 가버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음날에는 반죽에 좀 더 신경을 써서 만들어 장사를 나갔다.
그랬더니 첫날보다는 나은 800원을 벌었으나 그것 가지고는 끼니조차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업장소를 관람객이 별로 없는 극장 앞보다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 입구로 옮기기로 했다.
그 와중에 동업자 중 한 명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소년은 갈 곳이 없었기에 계속 남아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
마을 입구로 옮기고 나니 매출액이 몇천 원대로 올랐으나 여행 갈 경비를 모을 수는 없었고 그저 끼니나 해결할 정도였다.
소년도 그만두려고 서울에 며칠간 다녀왔더니 그 친구는 호떡으로 메뉴를 바꿔서 그럭저럭 장사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동네 어귀의 괜찮은 목에 자리를 잡고서는 여성들에게 살갑게 대하여 단골손님이 어느 정도 생긴 상태여서 소년은 다시 장사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1 겨울방학 동안 애초 계획대로 풀빵 장사로 돈을 벌어 여행을 가지는 못했지만,
끼니는 해결했고 이따금 간식도 사 먹으며 지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년에게는 장사해본 유일한 경험이었고 장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세월이 지난 뒤 돌아보니 음식 장사에 성공하려면 지역에 매출을 올릴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선정하여 맛있게 만들어야 하고,
손님들에게 호감으로 대해야 또 오게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게 되며,
항상 정해진 시간에 가면 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영업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처음 장사를 하는 경우에는 단골이 생겨 기본 매출이 유지될 때까지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여유자금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집이 없어 제대로 지낼 곳이 없었던 시기에 좁은 비닐하우스에 기거하며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쌀을 사서 밥을 해 먹었던 그 시절은 소년에게 푸근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첫댓글 정말 독특한 학교에 특이한 학생들이었구만유...^^
특이한 기억들이 살아있네요.
언제나 꿈이란 실행을 통해서 또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