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심리를 이용한 신상필벌의 논리 : 법가 이야기
金 敎 斌
성천아카데미 고전강좌/호서대 철학과 교수
"수레 만드는 기술자는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관 만드는 기술자는 사람
들이 빨리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것은 수레 만드는 사람이 더 착하고 관 만드는 사람
이 더 악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부유해지지 않으면 수레가 안 팔리고 사람들이 죽
지 않으면 관이 안 팔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는 일에 따라 이해 타산이 서로 다르
며,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한비자』 [비내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법가 사상가로 유명한 한비
자는 인간을 악한 존재로 보았던 순자의 제자였으며 이같은 인간 이해 위에서 상賞
을 좋아하고 벌罰을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상벌을 통해 엄격하게 통제하
자는 주장을 하였다.
인간의 이기적 본질
법가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부모 자식 관계까지도 이해타산에 근거한다
고 보았다. 그래서 "부모 자식 사이에 사랑 말고 무엇인가가 있다. 아들이 태어나면
부모는 서로 반가워하고 딸이 태어나면 죽일지도 모른다. 아들이나 딸이나 다같이 어
머니의 자궁에서 나왔는데도 아들일 때는 기쁨이 따르고 딸일 때는 죽음이 따르는 것
은 어째서인가. 부모는 나중에 편할 것을 생각하고 장기적 이익을 계산한다"고 하였
다. 이 이야기는 가부장권이 확립된 당시 상황을 빗댄 것이지만 남아선호 현상이 뿌
리 깊게 남아 있는 오늘 우리사회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지적이다.
이런 관점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한비자는 하인이 열심히 일하는 것
은 충실해서가 아니라 보수를 받기 때문이며, 주인이 하인을 잘 대해주는 것 또한 친
절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기잡이가 징그
러운 뱀장어를 손으로 주무르고 여자들이 송충이 같은 누에를 손으로 만지는 것도
다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맞으면 낯선 사이라도 화목
하게 살고, 이해가 충돌한다면 아비와 자식 사이라도 서로 충돌하며, 이득만 생기면
사람은 누구나 최고의 용사가 된다"고 하였다.
법가는 이같은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법가의 이론은 오늘날의 법학
法學과 같은 것이 아니라 조직론組織論이나 경영론經營論에 가까웠다.
다음의 이야기는 법가의 그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고을의 수령이 시장 관리 책임자에게 순찰을 돌게 하였다. 그런데 그 수령은 책
임자를 내보내자 마자 다른 관리를 시켜 다시 불러들인 다음, 아무 말 없이 잠시 같
이 서있다가 다시 순찰하러 가도록 하였다. 그 책임자는 수령이 다른 관리에게 자기
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감히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예로 위나라 태수 이회는 "재판에서 판결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활쏘기로 결
정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밤낮 없이 활을 배웠고, 얼마 뒤 진나
라와 전쟁이 일어나자 평소에 활쏘기 연습을 잘 해둔 덕에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이러한 일화들은 모두 법가사상이 얼마나 사람들의 심리를 조직적으로 통치에 이용하
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래지향적 역사관
이같은 법가사상에는 강한 현실지향의 역사관이 담겨 있었다. 유명한 '수주대토守株
待兎' 고사가 그 좋은 예이다.
옛날에 송나라의 한 농부가 밭일을 나갔다가 우연히 토끼 한 마리가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뜻밖의 횡재를 한 농부는 혹시나 하
는 마음에 아예 농사를 팽개치고 매일 그 나무 그루터기에 또 토끼가 와서 부딪기만
을 기다렸다. 물론 그는 더 이상 토끼를 잡을 수 없었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
다.
사실 이 이야기 속에는 유가처럼 옛날 방법으로만 백성을 다스리려는 것은 이같이 우
스꽝스러운 일일뿐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다. "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
어야 하고 정치는 현재의 긴박한 사정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 '수주대토'의 고사
에 담겨있는 교훈인 셈이다.
당시 유가에서는 귀족은 예로 다스리고 민중은 법으로 다스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법
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 다 옳을 수는 없
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이같은 생각은 '창과 방패' 즉 '모순' 고사에 잘
나타나 있다.
초나라 시장에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먼저 방패를 자랑하면서 "어
떤 것도 이 방패를 뚫을 수 없다"고 한 다음, 다시 창을 자랑해서 말하기를 "이 창
은 어떤 물건이든 뚫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찌되느냐"고 물었다. 그 장사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다.
법가의 이같은 주장은 상황 변화에 따른 대응 방식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이
론이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때 이미 의미를 잃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법가사상의 연원과 한비자
법가사상은 기원전 7세기 제나라 재상을 지낸 관중에게서 시작하였다. 관중은 '관포
지교管鮑之交' 고사로 잘 알려진 인물로서 제도를 완비하여 제나라를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 뒤 신도라는 학자가 임금의 권세를 중요시 하였다. 그에 따르
면 백성이 임금을 따르는 까닭은 임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임금의 권세가 두렵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덕이 있는 사람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유가사상을 정면으
로 반박한 것이다.
다음으로 신불해는 아무도 임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도록 하는 통치술을 강조하였
다. 그러한 예는 다음 이야기가 잘 보여준다.
정나라 임금이 오랑캐를 정벌하려 했다. 그러나 임금은 먼저 자기 딸을 오랑캐 임금
에게 시집 보내어 오랑캐들을 안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내가 누구
와 전쟁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물었다. 그 때 한 신하가 오랑캐를 치자고 하자 임금
은 성을 내며 "오랑캐는 형제 나라인데 그게 무슨 말이오" 하고는 그 신하를 처형하
였다. 이 말을 들은 오랑캐가 완전히 정나라를 믿고 방비를 하지 않은 틈을 타서 오
랑캐를 습격하여 이겼다. 이처럼 법가사상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상앙은 법가의 핵심 개념인 법이론을 중시하였다. 그는 '벌줄 일은 반드
시 벌주고 상줄 일은 반드시 상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태자가 잘못을 저지르
자 태자 대신 그 선생을 벌하였다. 나중에 태자가 왕이 되자 상앙은 보복이 두려워
멀리 도망가서 숨으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상앙이 만든 법 때문에 낮선 사람을 집
에 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앙은 붙잡혀 자신이 만든 법에 따라 수레에 묶여
몸이 찢기는 형벌을 당했다.
이같은 흐름을 종합한 사람이 한비자이다. 한나라의 귀족이었던 한비자는 강대국의
침입을 자주 받는 약소국 한나라를 위해 부국강병 방안을 저술하였다. 그런데 우연
히 그 글을 얻어 본 진시황이 "이 사람을 얻어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
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진시황은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도록 하
였다. 하지만 한비자는 순자에게 같이 배웠으며 당시 진시황의 신하로 있던 이사의
시기를 받아 감옥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이사는 한비자의 이론을 가지고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농업, 의학 같은 기술 분야 책과 점치는데 쓰이는 책을 빼고
는 모든 책들을 불태웠으며, 400여명의 학자를 흙 속에 묻어 죽였다. 그 까닭은 현실
적인 실용성 이외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법가의 태도
는 효율적인 관리제를 확립한 장점은 있으나 자유와 자발성이 아니라 복종과 강제에
기초했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엄격한 법으로 다스린 통일제국 진나라는 겨우 15
년 지나 무너지고 말았다. 훗날 사마천은 {사기}에서 법가를 평하여 "잘잘못을 분명
히 가리자는 것은 좋으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따뜻한 아름다움을 잃었다"고 하였다.
법가는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성이 강한 이론을 냈
다. 특히 한비자는 현실적인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심리와 약점을 교묘히 이
용하여 선험적인 도덕원리나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통치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려고 하였다. 한비자는 비록 진나라에서 죽었지만 그의 법가 이론은 이 진나라
의 통치제도에 이론적으로 기여하고 이후 중국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 동아
시아 나라들은 모두 겉으로는 유가의 도덕규범을 내세우면서도 안으로는 법가를 뼈대
로 삼은 통치를 해왔던 것이다.*
"법가는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성이 강한 이론을 냈
다. 특히 한비자는 현실적인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통치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
우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