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6절부터는 본론입니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참 이상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교 또는 기독교라고 말하면서 정작 예수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현재 교회를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너희를 부르신 그리스도를 이같이 속히 떠나’는
이사 가듯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목회자들이 세미나에 한 번 갔다 오면 설교패턴이 바뀌는 걸 교인들이 다 압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길과 진리를 알고 생명의 성령의 능력을 알고 나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의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부르셨다는
것은 교회에 출석한다는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그리고 승천과 성령의 임하심으로 부르셨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시고 그 자리로
부르신 것까지를 말합니다. 기독교가 이런 풍성함과 영광스러움을 가지고 있음에도
잡다한 종교와 비교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속이 상합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복음은 다를 수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단이라고 하는 신흥교단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미 기성교회가 변질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파하지
않으므로 인해 자신이 보혜사라고 사기를 치는 이단이 몇인지 모릅니다.
복음은 단 하나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만 교란하는 변질된 복음이 있습니다. 자극하고 선동하는 말잔치입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 시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교회가 정통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선동적인 말잔치인가? 성공적인 목회를 지향하는 사람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신조어를 만들어 특별한
의미를 달아 강단에서 자랑스럽게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단 사람을 선동해야
그 다음에 복음을 변질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을 선동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은 사자와 같습니다.
8절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한 복음을 벗어나거나 추가를 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고 말합니다.
‘저주를 받을 지어다’는 그 당시의 욕이라고 합니다. 고전16:22절에도 나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를 사랑하지 않고도 되나 안 되나 한 번 봐라 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막말입니다. 우리말로 이 망할 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달리 선택할 수 없는 바울다운 막말입니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복음에 대한 단호한 의지와 집착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고후2:17) 사랑도 거룩이 포함된 순수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음식도 섞으면
빨리 부패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아닌 인간의 선한 행동은 진정한 삶이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야고보의 삶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직진합니다. 좌고우면하고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것은
참 난감한 일입니다. 복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미혹의 영들입니다.
지금 목회자들이 복음에 대해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대해 분명한 사람은 반드시 스캔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육신을 공격하듯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조건을 쥐어뜯습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세요. 뱀은 흙을 먹기 때문에 육신의 조건을 공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은 자들은 복음을 순전하게 잘 간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성도들의 최후 승리의 방법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므로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산 순교(계2:10)가 진리의 복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필수선택입니다.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는 사람들을 의지하여 좇겠느냐는 뜻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할 의무가 있겠는가하고 반문합니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됩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안고 어깨 위에 얹고
하나님을 향해 항상 서 있고 선지자는 그 자리에서 뒤돌아서서 말씀을 대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창18:22)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사람을 설득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그들에게서 칭찬을 구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말장난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역자들이 많이 활동합니다.
이는 자신이 진리의 복음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고 나면 복음은 결코 말잔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그 복음만 자랑하기로 굳게 결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던 인간을 어떤 말재주로 그들을 하늘의
차원까지 이끌어 올리겠습니까? 구더기와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복음이야 말로 자랑스럽고 이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첫댓글
"바울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위 말씀을 묵상하던중에...
사도바울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무슨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했을까 궁금 합니다.
아마도 이런 고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안에 사시는 이는 그리스도니..
아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익힌 것은 하늘 아래에서 가장 큰 복입니다.
다윗이 간 길이며 바울이 걸어 간 길을 우리가 걷고 있음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