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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
김 성 한
1
삶과 죽음의 아기자기한 경계선에서 헤매인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읍니다. 그믐밤의 어둠 속에 잠긴 이 산골짜기에는 지금 끝없는 적막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따발총 소리는 이 적막에 더욱 심도를 가하는 듯합니다. 주음과의 무자비한 싸움을 치르고 난 뒤에 가끔 경험하는 이 깊은 적막 속에서 나는 온갖 치장을 벗어버린 내 영혼을 어루만지면서 죽음을 보고 삶을 깨달은 것만 같습니다. 모든 것이 단순하여졌읍니다. 물리적 법칙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가운데서 생사의 좁은 틈바구니를 헤매는 생명은 세상에서 이러니 지러니 하고 대진하게 떠들던 것을 모두 사상(捨象)하고 오직 진정한 자기만을 간직하고 있는 듯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참된 자기에 살고 술책과 이기적 타산을 지양하고 사랑으로 맺어지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것은 아마 꿈일 것입니다. 구러나 이 땅 위에 사는 어느 누구의 기원도 이에 귀결될 것입니다. 역사의 바퀴가 부서지는 듯한 이 파국도 꿈과 현실의 이 모순에 있는가 봅니다. 조직이라는 구루마를 타고 역사는 제맘대로 굴러가며 개인의 의사는 용납될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나는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기원을 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사의 시초에 시작된 가장 오래된 문제이면서 항상 새로운 문제인가 봅니다. 더구나 허무와 허무를 연결하는 운하가 인생이라면 이러한 현실은 더욱더 큰 비애가 아닐 수 없읍니다. 그러기에 이 기원은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부르짖음인가 합니다.
소문에 듣자니 부산에서는 어지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깨끗이 산다는 것은 어러운 일이겠지마는 부디 마음을 가다듬어서 흐린 물결에 횝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종 소식이나 전하여 주십시오. 옛날에 우리가 그리던 행복이란 지금 와서는 먼 나라의 별같이 아득하게 물러선 감이 있읍니다. 그럴수록 보내 주시는 편지는 자칫하면 껴지려는 희망에 한 줄기 힘을 주는 것입니다.
광복동 어떤 부호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는 S대학생 남천숙(南天淑)은 두 달 전에 전사한 애인 김상철(金相喆)이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제2국민병으로 나간 후로는 이따금 간단한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을 뿐,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던 차에 천숙은 상철의 전사통지를 받았다.
두 달 전의 그 쓰라리던 밤과 낮이 지나간 후로는 어려서부터 상철이가 보내 준 편지를 읽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를 생에 끌어매 놓은 한 오리 끈은 틈 있을 때마다 더듬는 이 추억뿐이었다. 그 중에도 상철의 마지막 편지는 지금 와서는 죽음을 예견하고 쓴 유연으로 생각되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같은 고아의 처지로 오랜 시일 서로 의지하고 정을 나눈 각근한 연분은 유다른 바가 있었다.
“미쓰 남, 계십니까?”
이 소리에 천숙은 잠을 깨듯이 벌떡 일어서면서 읽고 있던 편지를 책상 서랍에 주워 넣었다.
“미쓰 남, 안 계시오?”
밖에서는 또 한마디 부른다.
一 아아, 또 왔구나!
이 집 주인의 아우 차균(車均)이다. 없다 할 수도 없고 있노라는 말도 안 나와서 망설이고 있는 판에 차균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들어섰다. 기름 바른 머리는 전등빛에 유난히 빛나고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하우 두 유 두우? 오늘은 미쓰 남을 깜짝 놀래 주려구 왔답니다.”
윗목에 철썩 들어앉아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멍하니 서 있는 천숙을 쳐다본다.
“왜? 집이 무너진답디까? 천만에 우리 집은 이래뵈두 튼튼헌 벽돌집이거던요.
안심허구 어서 앉으시우.”
손목을 잡아 앉히려는 것을 천숙은 힘껏 잡아채었다. 입에서는 술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밤마다 통행금지 시간이 될 무렵이면 틀림없이 얼근히 취해서 찾아드는 그였다. 상철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지긋지긋이 굴지는 않았다. 단 한번 대문깐에서 마주쳤을 때 왼눈을 깜박깜박하는 것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간 일이 있을 뿐이다.
상천의 부보를 받은 지 일주일쯤 지난 날 밤이었다. 모진 심로 끝에 피곤한 천숙이 책상에 엎드려 어렴풋이 졸고 있는데 노크와 거의 동시에 차균이 막 들어서면서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과히 격정마십시오. 만사는 시간이 해결하는 법입니다. 사람마다 다 살 길이 있겠지요.”
슬픔과 외로움에 주저앉고 있던 때라 이만큼한 부드러운 말도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천애고아인 자기에게 더운 방과 좋은 음식을 제공하여 주는 이 집 주인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던 터이라 주인에 태한 예의로서도 웃음을 보이면서 정중히 맞아들여 공손히 대접하였다.
대문깐에서 무시당한 줄만 알았던 차균은 천숙의 이러한 태도에 힘을 얻었다.
――괜히 내 자격지심이었어. 그러믄 그렇지 여자란 별수 없는 거야. 뭐더라? 바람에 날리는 갈대랬지. 더구나 거지같을망정 있던 사내가 없어졌겠다. 날릴 뿐인가. 휩쓸려 올 테지. 내 맘먹은 계집 쳐놓구 내 손에 안 든 것이 일찌기 있더냐 말이다. 돈 있겠다 인물 잘 낫겠다 나무랄 데가 어디야? 요 계집만은 판이 딴판이라 생각했더니 그렇지두 않은가부지. 아닌게아니라 본관에게 약간 반했어.
천숙의 웃는 얼굴에 은근히 취한 차균은 기분이 좋았다. 천숙은 틀림없이 자기 것이었다. 발길로 차도 거머리같이 달라붙을 것이다.
―이때까지 건드린 계집은 많았어두 지금 생각하면 너지분했어. 요렇게 이쁘
장하구 먹물깨나 든 년은 하나두 없었거던. 그럴수록 작전계획이 절대 필요허지. 되지 못한 푸라이드라는 것이 있으니까. 첫째 무식한 티를 안 보일 것, 둘째 가끔 땐쓰 파티에 데리구 갈 것, 그런데 요 계집은 땐쓰와는 담을 쌓았다는 소리가 있더라, 이 점은 당분간 보류할 것, 셋째 돈을 물 쓰듯 써서 허영심을 만족시킬 것, 넷째는…… 그렇지 될 수 있는 대로 조속한 시일 내에 결정적 공격을 감행할 것.
“앞으로 일은 조금도 걱정 마십시오. 세상일이란 모르거던요. 화가 되려 복이 되는 수도 있으니깐요. 지두 힘은 없지마는 힘 닿는 데까지는 해드릴 용의가 있단 말씀입니다.”
차균은 첨잖은 태도로 위로하면서 천숙의 눈치를 살폈다. 천숙은 그 친절이 참말 고마워서 다시 웃음을 보이면서 머리를 숙였다.
“네, 고맙습니다.”
차균은 신이 났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흰 이빨을 보이는 것은 호의의 표시다. 연달아 보일 때는 그것은 절대적이다.
수많은 여성과의 오랜 경험에서 얻은 차균의 지론은 이러하였다. 지금 눈 앞에 앉아 있는 이쁘장한 여성은 이 명제의 요건을 구비하고 있다. 차균은 신바람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디디기로 하였다.
“제가 하는 무역회사두 앞으루 확장될 것입니다. 털어놓구 말이지 확장해야겠읍니다. 미쓰 남을 위해서두. 저의 비서루 활약해 주셨으면 하는데 의향이 어떠신지요?”
말을 맺고 나서 차균은 힐끗 천숙을 노려보았다. 천숙의 얼굴에서는 순간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었다. 매판(買辦) 도당에 지나지 않는 무역회사의 여비서라는 것이 어떠한 위치에 있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므로 차균의 이 제안은 최대의 모욕으로 들렸다. 그렇다고 당장 속에 있는 대르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럴 수 있나요……”
“아, 학교는 가끔 나가시우, 하기야 그 까짓 학교는 나가 뭣 합니까. 하여튼 그점은 편의를 봐드리죠.”
기분을 거슬리지 않고 거절하려던 천숙은 말문이 막혔다.
“글쎄요·…….”
“글쎄요라니?”
“생각해 보지요.”
“생각할 거 있나요? 솔직히 말해서 그만헌 자리두 쉽지는 않답니다.”
천정을 쳐다보면서 차균은 배를 퉁겼다. 천숙은 따귀를 갈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잠자코 있었다.
“어떻습니까?”
“잘 생각해 보지요. 오늘밤은 머리가 조금 아파서 드러누워야겠어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더 생각할 건 없읍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구 말 난 대루 하는 게 상책일 겁니다.”
차균은 일어섰다. 천숙도 따라 일어섰다. 문밖에 나서자 핑 돌아서면서 차균은 손을 내밀었다. 천숙은 어처구니 없어서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섰다.
“왜? 허어, 케케묵은 습관은 버립시다. 악수허는 미국 여잔 손목이 죄다 떨어졌답디까?”
차균은 옆을 향해 천숙의 손을 끌어다가 아래 위로 흔들면서 한 손가락을 까불까불 하였다.
천숙은 홱 뿌리치고 돌아섰다. 차균은 ‘굿 나이트’하면서 나가 버렸다. 이때부터 차균은 밤마다 찾아오는 것이었다.
손목읕 잡아채인 차균은 ‘하하……’하고 싱거운 너털웃음을 쳤다.
“미쓰 남은 역시 봉건적이야. 청춘 남녀가 손목이 좀 닿았다기로서니 머 그렇게까지야 힐 거 있오? 아―ㅁ, 그건 그렇구, 미쓰 남 이거 어때, 이래 뵈두 순금 서돈중이거던.”
차균이 케이스를 열고 방바닥에 놓으니 두 가락 금반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그래 어쩌란 말이에요?”
처음과 달라서 천숙도 차츰 대담해졌다.
“어쩌긴? 끼란 말씀이죠.”
“남이 애써 번 것을 아무 까닭없이 받는 법이 어딨어요?”
천숙은 톡 쐈다.
“남이라니? 그래 미쓰 남과 이 본관이 남이란 말이우?”
천숙은 뻔뻔스럽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두 정말 뻔뻔스러운 것은 처음 보는 것만 같았다.
“남이 아니믄 뭐란 말이에요?”
“허허…… 그건 두구보면 알 노릇이지.”
징글맞은 수작이 보기 싫어서 천숙은 책상에 돌아앉아 책장을 뒤척이면서 공부하는 척 하였다. 노려보고 있던 차균은 바싹 다가앉으면서 방바닥읕 치며 외쳤다.
“사람을 뭘루 아시우?”
돌아다보니 취해서 붉은 얼굴은 더욱 붉어지면서 두 눈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천숙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차균은 옷자락을 잡아채어 천숙을 주저앉힌다.
“사람을 뭘루 아느냐 말이우.”
“차 선생이야말루 사람을 뭘루 아시우? ”
“내가 어쨌단 말이우?”
“다 그만둡시다.”
천숙은 다시 책상에 돌아앉으려 하였으나 차균은 기어이 붙들고 따지고야 말 기세다. 천숙도 다시 부아가 치밀어서 정면으로 돌아앉았다.
“아 그래 사람이 호의루 푸레센트허는 걸 발길루 차는 법이 어딨단 말이우, 거지 밭싸개루 아시오?”
“발길루 차다니 누가 발길루 찼어요?”
“찬 거나 매한가지죠.”
“도대체 까닭없이 차 선생한테서 가락질 받는다는 게 우습지 않아요?”
“까닭없이? 그래 까닭이 없단 말이우? 난 그대의 맘 속을 빤히 디려다보구 있단 맡씀이오.”
천숙은 기가 막혔다. ‘그대’라는 말까지 튀어나온다. 더구나 술이 머리에까지 돌았는지 혀꼬부랑 소리도 섞여 나왔다.
“왜, 말이 말 같지 않아서 대꾸도 않는 거요?”
천숙은 자기가 누그러져서 이 자리만이라도 모면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딴 의미가 아니라 차 선생이 애써 번 걸 제가 무턱대구 받는 게 황송해서 하는 말이에요.”
“애써? 내가 그래 악착같이 애써야만 이런 걸 살 수 있는 그 따위 고리타분한 위인인 줄 아시우? 천만에. 이렇게 못생겼어두 대한민국에서는 첫째 아니면 둘째는 틀림 없는 부…… 에―또, 솔직이 말해서 부자죠. 현실 사회에서는 부라는 것은 모든 것을 의미하거던요. 이마에 땀을 흘리구 소위 애쓴다는 자는 큰 치부는 못허는 법입니다. 옛말에도 있잖소? 싸우지 않구 이기는 것이 상지상이라구. 세상살이두 마찬가지거던요. 우리 같은 사람은 이 사회에서는 아닌게아니라 상지우상입니다. 요따위 금붙이 하나 가지구? 처―ㄴ만에 말씀입니다……”
차균의 기세는 더욱 더 올랐다. 천숙은 지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 차 선생님두……”
차균은 천숙의 이 한마디를 굴복으로 알았다.
“하여튼 이건 거둬두시구…… 지, 전부터 얘기가 있던 그 비서건은 어떻게 됐읍니까? 몇 해씩 두구 생각해야 되겠우?”
“좀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아따, 대통령 결재두 한 주일이면 문제 없는데 벌써 몇 주일이우?”
“잘 생각해 보지요.”
“제―ㄴ장, 남은 취직힐라구 술을 멕여가면서 애걸복걸하는데 이건 또 세상이 거꾸루 돼두 이만지만이 아니군.”
“그렇게 귀찮은 걸 왜 그리 서두르세요?”
“하하……”
차균은 대답 대신 길다랗게 웃어댔다. 천숙은 멍 하니 차균의 입 만 쳐다보았다.
“싫으면 싫구, 좋으면 좋지, 사람이 어디 그렇게 미지근힐 수 있단 말이우?”
차균의 징글맞은 장단에 억눌려 있던 울화가 터지고야 말았다.
“싫어요!”
“싫어?”
“절대 싫어요.”
“왜?”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아직 세상 맛을 모르는군. 생각해 보시오. 미쓰 남은 지금 우리 형
님댁 가정교사죠? 가정교사란 건 필요한 동안 그 집 앨 가르치다가 필요 없어지면 나가는 걸루 나는 알구 있는뎁쇼. 한 달 후에 이 집 애가 중학교에 입학한 댐에두 그냥 있을라우? 입학은 틀림없거던요, 제 힘으루 못 들어가면 돈 힘으루 들어 가게 마련이니까. 내 조카놈이 벽창호라구 그걸 믿었다가는 큰코 다칩니다. 난 다 미쓰 남읕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싫은 걸 억지루 권허진 않습니다.”
이것은 천숙의 약점을 그대로 찌른 것이었다. 그도 전부터 걱정하고 있던 일이다. 그러나 네 목숨은 내게 달려 있다는 듯이 남의 약점을 기화로 협박하는 태도는 참을 수 없이 아니꼬왔다.
“남의 걱정 지나치게 하는 것도 실례죠!”
“허어 이거 무시두 정도가 있어야지.”
“건 누가 할 말이에요?”
“허어, 이거 참.”
천숙은 온몸이 떨렸다. 목구멍까지 나온 옥설을 꿀꺽 삼키고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차균은 쓴웃음을 지었다.
――굳센 척한다마는 두고보자. 배에서 거시가 쪼록쪼록 해봐야 땃을 알 모양이로구나.
“하여간 서루 잘 연구해 봅시다.”
차균은 한마디 남기고 나가 버렸다. 천숙은 가락지와 케이쓰를 집어 가래침을 뱉어서 불꺼진 화로에 파묻었다. 자리에 드러누우니 서러운 마음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왔다. 하늘과 땅 사이, 이리떼만 웅성대는 끝없는 사막에 맨주먹으로 팽개쳐진 자기의 신세를 똑바로 보았다. 그것은 무제한의 고독이었다.
천숙은 밤새도록 울었다.
2
이튿날 새벽. 천숙은 간다 온다 말없이 차가의 집을 나섰다.
덮어놓고 나와서 행길에 서기는 하였으나 갈 데가 없고 오라는 사람도 없었다. 수중에는 단돈 백원도 없다. 값진 옷을 휘감고 차를 달려 지나가던 한 쌍은 추운 새벽에 외투도 없이 떨고 있는 그를 보고 제끼리 속삭이며 웃어댄다. 천숙은 모멸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열패감을 느꼈다. 자기는 행운의 신이 가꾸던 밭에서 잡아빼어 쓰레기통에 팽개친 시들은 무우조각이었다. 싱싱하게 자라나는 무의 거름밖에 될 것이 없었다.
차가 십자로에서 꾸부러질 때까지 길가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찬바람이 씽하고 불어왔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다.
생각던 끝에 보수동 하꼬방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동창생 안민자(安敏子)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떡장수를 해 가면서 끼니를 이어간다는 그들을 찾아가도 별수는 없겠지마는 답답한 얘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안민자밖에 없었다.
민자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머나 천숙이가 웬일이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리집엘 다 오구. 엄마 천숙이 왔어요.”
민자논 진정으로 환영하였다. 천숙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들으면서 눈물까지 흘리며 동정 하였다.
“잘 나왔다, 잘 나왔어, 취직하믄 굶기야 할라구. 이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하구 같이 있자.”
천숙은 이 말이 한없이 고마웠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이 한마디는 오랜 세월을 두고 기다리던 울음만 같았다. 그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는 천숙이가 같이 있게 된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안색이 변했다.
“쌀 있나 나무 있나, 이 눔의 살림 집어쳐야지.”
안 올 데 왔다는 생각이 단박 들었으나 뿌리치고 나올 처지는 못 되었다. 부산시내에 집은 많아도 자기를 맞아줄 집은 하나도 없었다.
“엄만 은제든지 그 소리야, 그래두 살겠지 죽을라구.”
옆에 앉아 있던 민자가 어머니에게 눈짓을 하면서 가로막았다.
“얘, 너 다 철부지야, 살긴 어떻게 산단 말이냐?”
“엄반, 듣기 싫어요. 천숙아 너 염려 말구 같이 있자. 들들 볶는 게 엄마 습관이란다.”
어머니는 아니꼽다는 듯이 흘겨보고 부엌으로 나가 버렸다. 천숙은 말할 나위없이 앞길이 캄캄하였다.
저녁에 보리죽으로 요기하고 나서 천숙은 민자와 함께 대청동 거리로 내려갔다. 고향 사람인 H은행 과창 안병선(安秉善)을 찾아서 취직을 부탁하자는 것이었다. 삼십 남짓한 나이에 점잔만 빼고 은근히 돈냥 있는 자세만 하는 이 경박한 자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달갑지 않았으나 이런 판국에 가릴 여유는 없었다. 하숙집에 찾아드니 주인아주머니가 나와서 아직 안 돌아왔다고 한다. 말 같은 처녀가 해진 후에 혼자 사는 남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입을 삐쭉거리면서 지긋이 침을 한 대 놓는 것이었다.
“볼일이 급하시거던 낼 은행으루 찾아가시죠, 밤엔 언제든지 늦으니까요.”
아주머니는 문을 쿡 닫고 들어가 버렸다. 천숙과 민자는 마주보고 웃었다.
대문을 나와서 골목을 더듬는데 검은 그림자가 앞에 나타났다. 생긴 윤곽이 안병선 비슷하다.
“안 선생님 아니세요? ”
합창하듯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이렇게 물었다.
“네, 뉘시죠?”
“저이들이에요.”
“오으― 미쓰 앙까, 그리고 미쓰 남두…… 이거 웬일이야. 낼은 해가 서산에서 뜨겠군, 길에서 만나두 남 보듯 하더니만.”
“선생님께 특별한 청이 있어서 왔어요. 꼭 들어주셔야지 돼요.”
민자논 괘활하게 말을 건넸다.
“이거 신기헌 얘기로군, 이 안병선헌테 특별한 청이 있다…… 하여튼 다방에 가서 귀를 기울이구 삼가 들어야지.”
안병선의 농은 두 사람의 마음을 가쁜하게 하여 주었다. 앞장서서 걷는 그의 뒤를 따라 몇 집 건너 있는 다방에 들어가 앉았다.
“그래 미쓰 안, 특별헌 청이란 무에지?”
“다른 게 아니구요, 천숙이 말이에요, 취직 좀 시켜 달라구요.”
“취직? 취직은 해 뭘 해? 역시 학생시대엔 고이 학교에 다니는 게 젤이야.”
“그야 누가 모르나요? 제 배 부르믄 종놈의 배두 부른 줄 안다더니만 선생님두 그러신가 봐, 해야 될 형편이니까 그러잖아요.”
“미쓰 안은 언제부터 그렇게 말재주가 늘었어?”
안병선은 싱글싱글 웃었다.
“딴 얘기 마시구 취직이나 시켜 주세요.”
“허어, 말이 쉽지 어디 취직이 그리 쉬운가?”
“그지 말구 좀 힘써 주세요.”
“말은 해보지만…….”
병선은 천숙을 바라보면서 계속하였다.
“하여튼 낼 열두시에 이 다방에 오시우. 말해 볼 반한 데가 없지는 않거던. 그건 내게 맡기구 차나 합시다. 커피?”
“지금 막 저녁을 먹어서요……”
“그래두 기왕 들어왔으니 자리값이나 해야지.”
하면서 그는 커피 석 잔을 청하였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천숙은 잠자코 있었다.
민자는 웃으면서 농을 걸었다.
“안 선생님 경기 좋으신가부죠?”
“미스 안두 그런 말할 줄 알아?”
“왜요?”
“왜든지.”
“은행엔 사바사바가 많다죠? 은행 사람들은 모두 쪽쪽 빼구 댕기는 걸 보믄 틀림 없는가 봐.”
“어, 이거 큰일 날 소리, 하하……”
커피를 마시면서 안병 선은 연달아 싱글벙글 웃어댔다.
“돈이 중허긴 중한 모양이지. 미쓰들이 벌써 저렇게 애를 쓰니.”
안병선의 한마디 한마디는 천숙에게는 모두 언짢았다. 자기와는 딴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쌀만 먹지 말고 고기도 먹고 과일도 먹으라던 그런 자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족속이었다.
민자논 지지 않고 대꾸하였다.
“안 선생님두 소식불통이야, 돈을 벌랴는 게 아니라 굶어죽지 않으러구 바들바들 떠는 거예요.”
“허어 이거 심각한 얘기로군.”
“안 선생님 하여튼 잘 부탁해요.”
민자와 천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더 얘기허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가 봐야죠, 어머니가 기다리실 텐데.”
이튿날 새벽 잠을 깨니 마음이 설레였다. 간밤의 꿈이 상서롭지 못하다. 안병선한테서 따귀를 맞고 울다가 눈을 떴다. 꿈은 반대라니까 좋은 꿈이라고 마음먹어도 역시 불안하였다. 오늘의 취직은 과연 될까? 안 되면 어떡하나? 그것은 생사를 결정 하는 중대문제 같기도 하였다. 상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이도 없는 세상을 왜 살려고 내가 앙탈방탈 발버둥칠까? 이미 인생의 패자로 남의 거름밖에 못 될 내가 울부짖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죽음을 두려워하는 생물의 본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옆에 누운 민자의 어머니는 천숙이 잠든 줄만 알고 낮은 소리로 민자를 들볶고 있었다.
“너겉은 철부지가 어딨니? 이 판에 동무가 다 뭐냐?”
“엄만, 그먼둬요.”
“그만두다니, 닌 그래 밥은 끓이기만 하믄 되는 줄 아느냐?”
“아이, 오늘 취직이 된다잖아요.”
“취직? 누가 자릴 만들어 놓구 기다린다더냐? 장돌이네 삼촌은 지난 가을부터 취직 취직 해두 여태 그 모양 아냐? 되믄 손바닥에 장을 지져, 장을?
“듣기 싫어요.”
“기집애 두구봐라, 모두 못 살구 날 테니.”
어머니는 털고 일어나서 밥 지으러 나갔다.
천숙은 자기가 일찍 일어나 밥이라도 지으리라고 간밤부터 마음먹고 있었으나 지금 밤 짓겠노라 일어날 케는 못 되었다. 가슴이 싸늘해지고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천숙아 자니?”
민자가 불렀다. 천숙은 대답이 안 나와서 잠자코 있었다. 반신을 일으키고 들여다보던 민자가 그의 손을 불끈 쥐면서 다가 누웠다.
“너 우는구나, 미안해.”
“아, 아니야.”
“다 들었겠구나, 늙은이 소린 노망으루 알구 갑지 마라 응, 미안해.”
민자의 부드러운 말에 더욱 더 터져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웃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반을 드는 둥 만 둥 하고 집을 나서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열두시 정각에 다방에 찾아들었다.
“각처루 알아보았지마는 좀 시일을 요하겠는데요.”
이것이 첫 말이었다. 천숙은 가슴이 내러앉는 것만 같았다.
“며칠이나 걸릴까요?”
“며칠이라구…… 글쎄 내가 직접 하는 일이 아닌 이상 분명히 말할 수 있나요? 요새 이런 일은 몇 달 두구 끌다가도 안 되기가 일쑤거던요.”
천숙은 앞이 캄캄하였다. 저절로 애원하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요?”
안병선은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얘가 어린 땐 그런 줄 몰랐더니 막 피구 보니 괜찮다, 아니 미인이야.
“결국 어젯밤에두 얘기를 들었지만 생활이 문제죠? 혼자 생활이야 크게 걱정될 거 있우? 나두 혼자지만 뭣 허믄 우리 하숙에 와서 취직될 때까지 당분간 있지.”
“아이 어떻게……”
“말이 하숙이지 난 한 달에 닷새두 안 들어갑니다. 조금두 사양할 거 없어요.”
안병선은 온 낯이 웃음이 되었다. 그것은 차균의 얼굴에서 보던 것과 꼭 같은 능글맞고 간악한 웃음이었다.
“어떠세요, 나무 혼자서 적적한데.”
침묵읕 승낙으로 알고 병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덤벼들었다. 분에 못 이겨서 천숙은 전후를 가릴 것이 없이 냅다 쏘고야 말았다.
“전 취직 안할래요!”
병선은 당황하였다.
천숙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홱 나와 버렸다. 안병선은 황급히 따라나오며 중얼거렸다.
“난 정말 호의루 얘기헌 건데 혹 기분에 거슬렸다면 본의가 아니란 것만은 알아주시오.”
천숙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막 걸어갔다. 병선은 그냥 쫓아오면서 말을 건넸다.
“하여간 미안합니다. 집두 알구 직장두 아시니까 한번 꼭 찾아오시오.”
“안 가요!”
“이삼일 내루 취직이 될 가망두 다분히 있으니까 뭘 허면 전화라두 거시죠, 번호는 여기…….”
하면서 명함을 껴내 주었다.
천숙은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걸었다. 안병선은 그의 어깨를 잡으면서 외쳤다.
“미쓰 남, 정말 이러기우?”
“왜 이러세요, 천 바뻐요!”
뿌리지는 천숙의 눈초리는 매서웠다. 가던 길을 멈추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안병선은 마지못해 돌아서 가 버렸다. 천숙은 멀리 가는 그의 뒷모양을 보고 침을 뱉었다.
一더러운 놈들, 그지 그놈이 그놈이구나.
분노가 지나간 다음에는 걱정이 다시 솟았다. 발은 보수동을 향하고 있으나 차마 이대로 그 집에 돌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민자 어머니의 찌푸린 얼굴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골목에 서서 망설이다가 되돌아서서 힘없이 걷기 시작하였다. 발은 움직여도 갈 데는 정녕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이 돌아가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었다. 꽤 많이 걸은 모양이다. 머리를 드니 사십계단 밑이다. 맥없는 걸음으로 정거장 쪽을 향하여 나가노라니까 길가 담벼락에 붙어 있는 ‘女社員募集’이라는 광고가 번쩍 눈에 띄었다. 두 사람 이상의 추천서와 자필 이력서를 가지고 본인이 직접 찾아오라는 큰 국책회사의 광고였다. 바로 오늘이 마감이다. 살길이나 찾아낸 듯이 천숙은 흥분하였다.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막상 이력서를 쓰려고 하니 미농지도 골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노트를 한 장 찢어서 펜으로 써 가지고 부랴부랴 나섰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추천서 생각을 하였다. 이것은 소위 사회 유지나 안락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알아야만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가정교사를 하던 집 차씨와 안병선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가서 추천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는 할 수 없다. 대학선생님들은 알기는 알지마는 재학생 신분으로 취직추천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찍어준다 하더라도 네시가 가까웠는데 대신동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다. 생각던 끝에 이력서만 들고 가서 사정 얘기를 하기로 결심 하였다.
“그래 추천서는?”
늙은 충무과장이 돋보기 너머로 힐끔 노려보면서 묻는 것이었다.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기 때메 시간이 없어서 받지 못했어요.”
“받지 못했다? 이건 좀 곤란헌데.”
“아니 신분만 똑똑하믄 되잖아요?”
“똑똑허구 안헌 걸 어떻게 안담? 이건 규정위반이니까 안 됩니다.”
“후에 조사해 보셔두 단박 아실 텐데.”
“누가 이 바쁜 때에 귀찮게스리 그런 걸 조사헌단 말이오?”
딱 잡아떼고 의자를 핑 돌려 옆사람과 잡담을 시작한다.
“경리계장은 요새 안색이 매우 나쁜데.”
“그렇습니까? ”
옆엣 책상에 앉은 계장은 머리를 긁었다.
“신혼초라 그릴 수도 있지만 몸 생각두 해야지, 하하……”
계장도 따라 웃었다.
“집 샀다지? 얼마 줬어?”
“구천만원입니다. ”
“구천만원이면 괜찮겠군.”
“명색만이라두 양옥집입니다. 정원도 있구요.”
“재주가 비상한데.”
“다 덕분이죠.”
계장은 이빨을 보이면서 아첨을 떨었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천숙은 완전히 도외시되고 있었다. 바람벽같이 딱딱해서 다시 말을 건넬 여지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 나오는데 ‘社長室’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까닭없이 가슴이 뜨끔했다. 발을 멈췄다. 어머어마하게 보였다.
― 에라 죽을 심 치구 들어가 보자.
머리칼이 하얀 사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숙의 이력서를 훑어보면서 그의 하소연을 듣고 있었다. 얘기가 조금 길다고 짜증을 내면서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요컨대 추천서가 없는 걸 있는 것과 마찬가지루 쳐 달란 말씀이죠?”
천숙은 칼로 쑥 자르는 듯한 이 질문에 얼른 대답을 못하고 낯을 붉혔다.
“그런 뜻이죠?”
사장은 다구쳐 묻는다.
“결국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기두 합니다.”
“그건 어려운데요, 추천서는 첨부하기루 마련이니까. 더구나 사장 자리에 앉아서 말단 직원 하나 채용하는 데 왈가왈부할 수 있겠오? 또 이런 이력서는 난생 처음이오. 공책 쪼각에 적은 이력서란 건 아마 전국에서 이 한 장뿐일 걸…… 오래 살면 손주 늙어 죽는 것을 본다더니만.”
옆에 앉은 비서를 돌아보면서 주름진 입술을 삐쭉거렸다. 비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첨의 미소로써 응수하는 것이었다. 사장은 문간을 손가락질하면서 나가라는 표식을 하였다.
“댐부턴 비서실을 통해서 오시우.”
천숙은 말할 나위 없이 핀잔을 당하고 밖에 나오니 사지에서 맥이 쏘옥 풀려나가논 것을 느꼈다. 긴장과 생각에 치친 끝에 맞이하는 절망은 이미 쓰러진 몸을 내려갈기는 눈물 없는 방맹이였다. 증오심이 불붙듯이 일어났다.
―젊은 놈은 능글맞구 늙은 놈은 돌대가리구, 모조리 죽어 자빠지기라도 해라.
3
바늘 방석에 앉은 듯한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하투하루를 보낸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민자 어머니의 신경질은 날로 심하여 가고 천숙의 오뇌는 낮이나 밤이나 그칠 줄을 몰랐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 어두울 때까지 거리를 헤매였으나 취직의 실마리는 잡을 수 없었다. 희망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은 적어도 보리밥일망정 걱정 없이 뱃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잠꼬대로 뇌까리는 군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민자 어머니의 신경질도 생각하면 당연하였다. 사람이라기보다논 생물로서 생명을 이어갈 최소한도의 먹이를 이유없이 약탈당하는 것은 그 만큼 자기 생명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신경질은 오히려 동물의 생명에 대한 애착에서 솟아나오는 비통한 울부짖음이었다.
생의 짐은 죽음의 공포보다도 차츰 비중을 더하여 갔다. 생은 이미 감당할 수없는 고역이요 짐이었다. 죽음의 피안에서 자기를 부르는 영겁의 허무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취직――오늘 안 되면 틀림없이 하고 집을 나섰다가도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생의 애착의 마지막 불꽃에 발을 멈추고 암흑의 하꼬방으로 도루 찾아드는 일이 며칠을 두고 되풀이되었다.
부슬비가 나리는 날이었다. 간밤부터 굶고 아침 끼니도 없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섰다. 세 끼면 한 끼를 굶는 것은 보통이요, 두 끼를 굶는 것도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오늘만은 마지막 날인 것 같았다. 어머니와 민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눕는 것을 보고 나왔다.
길가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전히 활기가 있었다. 그곳에는 웃음이라는 것이 있었다! 백금 반지를 사서 손가락에 끼고 가게에서 막 나오는 여자와도 마주쳤다. 이 모든 광경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위압이었다.
헤매던 끝에 우연히 정미소 앞을 지났다. 부드러운 겨가 한쪽 구석에 산떼미같이 쌓여 있다. 천숙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미안하지만 지 겨를 좀 얻을 수 없을까요?”
“얼마든지 있조, 한 가마니에 오천원입니다.”
“몇 가마 드릴갑쇼?”
천숙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저 조금만 얻을 수 없을까 해서요.”
겨를 뒤집어쓴 직공은 두 눈을 흡뜨고 아래 위로 훑어본다.
“뭘 할라구요?”
“……지어, 약에 쓰 쓸라구요.”
직공은 다시 한번 힐끔 쳐다보고 나서 아무말 없이 바가지에 겨를 푹 떠 가지고 주머니를 내들라고 한다. 주머니가 있을 리 없었다.
“주머니두 안 가지구.”
직공은 중얼거리면서 돌아서서 찢어진 푸대에 뭉그려 주는 것이었다.
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천숙은 큰 성공이나 한 듯이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몇 결음 옮기니 시장끼가 한꺼번에 몰려서 눈앞이 어질어질하였다. 오후 세시가 지났으니 세 끼를 건너뛴 셈이다. 머리가 돈다. 눈을 감고 길가의 전봇대에 기대어 진정하고 나서 다시 발을 옮겼다.
길가에 사람들이 모여 서서 떠들썩한다. 무심히 돌아다보니 민자 어머니가 땅에 주저앉아서 목읕 놓아 울고 있다.
“어머니 웬일이세요?”
천숙은 어머니의 무릎에 쓰리졌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다듬어 다시 한번 외쳤다.
“웬일이세요?”
어머니는 대답이 없이 울기만 한다. 천숙이도 지절로 울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광경은 모든 것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엎드린 그의 머리 위에서는 수성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매치기란 건 모조리 잡아 없애 버려야지.”
“얼마 뺏겼대?”
“삼만원이래.”
“삼만원 뺏기구 이런단 말야?”
“없는 사람에겐 큰 돈이지.”
“아뇨, 아까 얘기 들으니 굶다 못해 이불 판 돈이래요.”
“그렇구먼.”
“해필 그런 돈을 홈치다니.”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이런 말들은 천숙에게는 사지를 잡아뽑는 듯한 쓰라림이었다.
“왜덜 이러는 거요?”
새로 나타난 목소리가 외친다.
“삼만원 쓰리맞았대요. ”
“허 허 허, 삼만원…… 이봐 일어나, 돈 삼만원에 무슨 꼴이야."
호통과 동시에 개화장으로 천숙의 옆구리를 꾹꾹 쑤셔대는 바람에 그는 버럭 정신이 들어 쳐다보았다.
안병선이다!
독기를 품은 천숙의 눈과 마주지자 안병선은 몹시 놀라고 당황하였다. 눈과 눈은 서로 겨누었다. 천숙의 눈에서는 불이 났다. 분노에 온몸이 떨리는 것이었다.
천숙은 불쑥 일어나 안병선과 마주섰다.
“그 따위 버르장머린 어디서 배운 거요?”
“미쓰 남 아니시우?”
“미쓰 남이 어쨌단 말이요?”
“미안하오, 난 몰랐구먼.”
“그래 모르면 그런 수작허는 거요?”
“알았으면 그럴 리 있나요.”
“알았으면? 당신만 사람이구 남은 버러지 새낀 줄 아시우?”
“사람두 많은데 챙피하게 이러지 마시오. 자동차루 모셔다 디리지요.”
“이 더―러운……”.
천숙은 그의 낯짝에 침을 뱉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안병선은 옆에 세웠던 자동차에 튀어들어 손수건으로 낯을 닦으면서 달아나 버렸다.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입을 빌리고 쳐다보는 민자 어머니를 떨리는 손으로 잡아 일으켰다.
“어머니, 갑시다.”
이를 악물고 어머니를 집까지 이끌고 왔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세 사람은 누더기를 휘감고 그냥 뒹굴었다.
극도로 피곤하였어도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르워진 천숙은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살아서 안병선이란 놈이 짓밟히고 거지가 되는 꼴을 보고야만 죽어도 눈을 감을 것만 같았다.
――천국은 몰라도 지옥만은 있어야겠다. 절대 있어야만 한다. 현세에서 활개치는 이 따위 간악한 도둑놈들을 집어다가 몽둥이 찜질을 해서 뼈를 부수비벼 가루를 만들어 버리는 지옥이 없다면 종교도 종교려니와 사회정의란 미친놈의 잠꼬대가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는 짓밟히고 굶고 안병선이는 도둑질하고 난장 칠대로 치고 푸성지게 살다가 다 같이 죽으면 그만이래서는 너무나 억울하다.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안병선의 대가리에 벼락이 떨어져라!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리고 부아가 났다. 문득 차균의 싱글벙글하는 얼굴과 금뱐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이 자는 더한 자이다. 네가 무엇이길래 하룻밤에도 몇 맥만원어치 술을 먹는단 말이냐? 너는 어째서 기생을 두셋썩 껴안고 진탕치구 먹을 권리가 있구,
나는 어째서 보리죽도 먹을 권리가 없단 말이냐?
금반지를 안 가지고 나온 자기가 바보였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바보였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살 권리를 가지고 나왔다. 따라서 굶는 사람은 먹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옆에 놓고 금반지를 끼고 있을 권리는 있을 수 없다. 더구나 화로 속에 파묻혀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살자, 결단코 살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금반지가 머 네 것인 줄 아느냐? 엄숙한 표정으로 교단에서 ‘칸트’를 강연하던 교수의 얼굴이 밉살스러웠다.
―一하늘의 별은 어떻구 가슴의 도덕률은 어떻다구? 까불지 마라. 굶어죽는데 데데한 얘기를 지껄이지 말구 본때 있게 사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없느냐 말이다.
“천숙아, 너 안 자니?”
옆에 누운 민자가 불렀다.
“응, 너두 안 자논구나.”
“잠이 와야지.”
“너 배고프겠다.”
“넌?”
“나야 머.”
“이제 배두 고픈지 어쩐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 못난이야.”
“왜?”
“왜라니? 남같이 뻐젓이 못 사니 못난이지 뭐냐?”
“그래두 깨끗이 살잖니?”
민자논 ‘깨끗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깨끗이? 그놈의 깨끗이가 화단이다. 깨끗한 바람에 김빠진 맥주같이 되어서 촐촐히 굶어 자빠지구 있잖니?”
“그래두 깨끗이 살아야 하잖니?”
“얘얘 집어쳐, 짓밟히기 알맞지 뭐냐.”
“허지반 난 양심을 속이지 않구 살아가는 걸 최대의 푸라이드루 생각하는데.”
“아직 더 굶어 봐야 알겠니? 푸라이드란 건 말이다, 배부른 놈들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빛 좋은 개살구야, 개살구.”
“그럼 정의두 필요 없구 도덕도 필요 없단 말이냐?”
“거 다 최면술이다.”
“넌 그럼 지옥두 무섭잖니?”
“지옥? 거 다 협박이야.”
“도대체 넌 그럼 어떡할 작정이지?”
“꿋꿋하게 살아야지.”
“꿋꿋이 살다니?”
“억센 놈은 이기구 약한 놈은 지게 마련 아냐? 억세게 살지. 이용두 하고 넘겨치기두 하구 짓밟기두 해서 뻐젓이 산단 말이다.”
옆에 누운 민자 어머니가 혀를 찔쩔 갈면서 야단을 쳤다.
“요놈의 기집애들 필경 날 잡아먹구야 말겠니, 응?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더니만 난 기집애들 등살에 죽는구나.”
“엄만 가만 계세요.”
“고 주둥아릴 찢어 줄라. 굶은데다 잠두 못 자게 하니, 요 죽일 년들.”
“아이 참 엄마두.”
“이제 뼈만 남았다. 뼈까지 갈아먹구야 나가겠니?”
이것은 천숙에 대한 쌓이고 쌓이던 울분이 터진 것이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고 민자는 말리느라 서둘렀다.
“천숙아 미안해, 어떡 하니 ? ……엄만 무슨 노망이에요.”
“요 방정맞은 년, 무슨 개소리냐?”
초저녁에 축 늘어졌던 때와는 딴판으로 기운이 싱싱해서 딸을 후려갈긴다. 민자논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도로 자리에 눕히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천숙을 부등켜 안았다.
“천숙아…… 난, 용서해…… 응?”
민자논 목이 메어 울고 있었다.
“괜찮아 얘.”
천숙은 정신이 말뚱말뚱 하였다.
“조 여우 같은 년 봐, 조……”
어머니는 천숙의 천연스러운 태도에 더욱 화를 내며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 때메 불란이지, 누구 때문이냐! 어서 썩 물러가! 앉은 자릴 파 가지구 가라, 이에서 신물이 난다!”
어두운 가운데서 민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어루만지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민자야, 가만 있어……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낼부턴 잘 삽시다. 저두 생각이 있으니까요. ”
“조 년 봐라……”
“엄마, …… 천숙아 이런다구 너…… 아이 난……”
민자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이런다구 나가진 않는다. 어머니 낼부턴 살 도리가 있어요. 오늘까지의 저와 낼 저와는 좀 다를 겁니다.”
“흥, 주둥아리만은 살았구나. 그렇게 신통한 재주가 있는 년이 여태까진 굶어 죽는 걸 보느라구 가만 있었단 말이냐?”
“글쎄 두구보세요.”
어머니는 혼자 중얼거리며 자리에 드러눕고 민자는 천숙의 손을 붙잡은 채 울고 있었다. 천숙은 이 소동에도 마음이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천숙아 용서해……”
민자는 아직도 울음 섞인 말로 이렇게 애원하였다.
“용서가 다 뭐니 ? 어머닌들 오죽이나 탑답하믄 지러시겠니?……”
그는 도리어 민자를 달래어 눈물을 거두게 하고 나서 어머니를 향하여 말읕 이었다.
“어머니 용서 하세요. 낼부터는 틀림없이 길이 열릴 테니까요. 이렇게 가난에 우는 사람은 저희들만이 아닌 성싶어요. 우리끼리 이렇게 더욱 더 지옥으로 가까이 가는 일은 그만두구 내일에 희망을 걸어 보십시다.”
자리에 누워 팔딱이던 어머니는 아직도 진정되지는 않았으나 픽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얘, 다 집어쳐라. 내게 희망이 다 뭐냐? 죽지 못해 사는 거지. 하루에도 몇번씩 죽을라다가무 딸년의 무심한 얼굴을 보면 그만 용기가 없어져서 이날 이때까지 끌어왔단다. 죽을 때까지 단 하루라두 먹는 데 걱정이나 없으면 더 바랠 것이 없겠다.”
“어떻게든 되겠지요, 곤하실 텐데 어서 주무세요.”
어머니는 더 말없이 돌아누웠다. 민자와 천숙이도 따라 자리에 들어갔다. 민자는 천숙의 허리에 팔을 돌리면서 정답게 말을 건넸다.
“천숙아 너 사람이 달라진 것 겉구나.”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니?”
“무슨 일이 있는 것두 아니지만.”
“그럼?”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가 사는 방식이 틀렸어, 거지가 되기 알맞거던.”
“너 참 이상하다.”
“이상하긴? 생각해봐, 우리가 이렇게 못 사는 건 못된 놈들이 간악한 수단으루 우리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이 아냐? 그자들한테 우린 이용당하구 짓밟히구 있는 거야. 나는 깨끗하노라 정직하노라 하논 것은 남한테 이용당하기에 꼭 들어맞는 자기 만족이야.”
“그럼 네 말대루 이용하구 넘겨치구 나간다면 우리두 그런 부류가 되잔 말이냐?”
“그건 다르지. 우리는 악에게 이용당할 줄은 알아도 악을 이용할 줄을 몰랐어. 악이 침범해 오면 피할 줄은 앝았어두 넘겨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최소한도의 자기권리두 보전 못한 거야. 그래 가지구 양심이니 결백이니 하는 그자들의 웃음꺼리밖에 될 게 뭐냐.”
“그럼 어떡한단 말이니?”
“악은 악으루 넘겨치구 정당한 내 권리는 끝까지 주장하지.”
“그럼 큰소리 칠 것두 못 되잖아?”
“큰소리 칠 것두 없지만 쥐구멍 찾을 것두 없지. 악에 대항했다구 사회에 죄될 건 없거던.”
“도대체 선을 택한단 말이냐, 악을 택한단 말이냐?”
“알겠니? 선을 택하는 데는 틀림없는데 그 수단 방법이 다르단 말이다. 케케묵은 패배주의의 선은 거지의 도덕률이란 말이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이 졸려.”
민자는 두 팔로 천숙을 껴안은 채 잠이 든 모양이다.
멀리서 새벽종 소리가 울려왔다.
4
이튿날 아침 천숙이 차가의 집에 나타난 것은 아흡시 조금 지나서였다. 대문을 들어서니 고요한 것이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기웃거리면서 뒤에 돌아가니 예전 자기가 있던 방에서 손에 빗자투를 든 식모가 튀어나오면서 외쳤다.
“아이구 아씨두, 웬일이우, 왼통들 야단났는데.”
“야단은 왜 야단야?”
“한마디 간다 온다 말없이 벌써 몇 달이에요? 기다리다 못해 안 오시는 거라구 이 방두 지워버리라는 걸 작은댁 어른이 꼭 돌아올 테니 두구보라구 하시면서 종이 한 장 까딱 못하게 하시잖으우.”
“모두들 안 계신가부지.”
“마침 공일이라서 죄다 동래루 온천하러 가구 지만 집 지키구 있는 참이에요.”
천숙은 마루에 걸터앉았다가 방에 들어가 책상머리에 기대앉았다.
“조반 가져올께요.”
“조반 필요없어.”
“그래두요.”
식모는 빗자루를 마루 구석에 던지고 빠른 걸음으로 부엌 쪽으로 가 버렸다.
천숙은 화로를 뒤져보았다. 금반지와 케이스는 파묻은 대로 있었다. 치마자락으로 닦아서 손에 쥐고 일어섰다.
――마치 훔처가는 것 같은데.
한동안 망설였으나, 그렇다고 온천 갔다는 차균이 오는 것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신발을 신고 마당에 내려서는데 식모가 밥상을 들고 나타났다.
“조반 가져 왔는데……”
“아냐, 좀 바뻐서.”
“저녁엔 돌아오시죠?”
“가 봐야 알겠어.”
“작은댁 어른이 보거든 곧 알리라구 하셨는데, 공교롭게―-”
“……그럼 이따 여섯시에 태백 다방에서 뵙자구 그래.”
“여섯시, 태맥다방이죠?”
“그래.”
천숙은 그길로 나와서 반지를 팔아 육십만원을 손에 쥐고 시장에 가서 쌀 한 가마를 샀다.
지게꾼을 앞세우고 집에 들어가 던지다시피 쌀가마를 방바닥에 내던지니 반신을 자리에서 일으킨 어머니는 입을 벌리고 말도 안 나오는 표정이었다. 민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 이거…… 아 이거, 어, 어찌 된 거냐?”
놀란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천숙아, 어, 어 제밤에는……”
“다 알아요 어머니. 밥 해 디릴께 가만 누워 계세요.”
천숙은 부엌에 내려가서 팔을 걷고 밥을 지었다. 어머니는 놀라운 듯이 일어나 쌀가마를 어루만지다가 사잇문을 열고 앉아서 밥짓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두 바가지를 넣어야 꼭 맞네라.”
천숙은 어머니를 쳐다보고 생긋이 웃었다.
“엄마 어떡해, 안 됐어.”
하는 소리와 함께 민자가 들어왔다.
“어머나!”
들어선 민자는 눈이 휘둥그래서 그 자리에 주춤하고 섰다.
“천숙이 한 가마 가져왔단다.”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딸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알려 주었다.
“한 가마나!”
민자의 눈은 더욱 커졌다.
민자와 천숙이 의좋게 지은 흰 쌀밥읕 양껏 먹은 세 사람은 쌀의 유래를 캐어물을 겨를도 없이 자리에 쓰러져 단잠이 들었다. 밥에 취한 것이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잤는지 천숙이 눈을 뜨니 굵은 창살에는 벌써 어두움이 내리고 있었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밖에 나오니 발 아래 펄쳐진 부산 거리에는 전등불이 총총이 반짝이고 항구에 머물러 있는 배들의 밤모습은 찬란하였다. 밤하늘에 별도 유난히 빛나고 눈앞에 전개된 광경도 어제까지와는 달리 광채가 있는 듯 하였다. 가슴속에서는 기운도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희망이 솟아난 것일까? 생에 대한 기반이 선 것도 아니요 목표가 새로이 생긴 것도 아닌데 희망이란 있을 수 있느냐? …… 적어도 그것은 목적은 의식하지 못할망정 단행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행동의 시초였다. 그냥 앉아 있을 수 없는 불 같은 분노가 깜박이는 그의 생명의 마지막 불꽃에 기름을 부어 준 것이었다. 그의 온몸은 튀어 일어선 불덩어리였다.
언덕길을 더듬어 대청동 큰길까지 내려온 때는 이미 일곱시가 훨씬 지났다. 손에다 입김을 불면서 태백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차균의 쏘는 듯한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일어서 천숙올 반갑게 맞이하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차균의 입에서는 역시 술냄새가 풍겨나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천만에, 뭘 드실까?”
“밀크, 아니 에그밀크루 할까요.”
차균은 레지를 불리서 ‘에그밀크’하면서 두 손가락을 펴 보였다.
“오늘은 온천 갔던 김에 한잔 하구 집에 막 돌아오니 미쓰 남이 오셨더라구, 부랴부랴 쫓아왔움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시우?”
차균은 천과는 달리 점잔을 뺀다.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쓸겠어요?”
“허허허 여전허시군, 미쓰 남 나이 얼마시더라?”
“별안간에 나이는 왜요?”
“그저 물어본 거죠, 난 삼십 이 다 됐어두 그런 노숙한 말은 배우지 못했는데.”
“말은 못 매워도 행동을 배웠으면 고만이죠.”
“마잇다(손을 바짝 들었다), 미쓰 남은 암반해두 못 당하겠는데.”
“당하구 못 당할 거야 있어요?”
에그밀크를 단박 들이키고 나서 차균은 담배를 피워물고 천숙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요 계집이 필시 굶구 다녔구나, 굶다가 가죽이 뼉다구에 붙을 지경이 되니 도루 기어든 거지 뭐야. 내 눈은 틀림없어. 이젠 독 안에 든 쥐로구나. 네 신세두 불쌍하다. 이 차균의 호기심이 끊어지는 날이면 네 신세두 망치는 날이지.
“그래 지금 어디 계시오? 퍽 망가지셨는데.”
“동무네 있어요.”
“아주 못 됐는데.”
차균은 같은 의미를 되풀이하였다. 우리 집을 나가니 어떻더냐? 이제 맛을 알았지? 하는 배쨩이 빤연히 보였다.
“못 됐어요.”
천숙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꾸하였다.
“얼마나 고생하셨읍니까?”
“고생두 많이 했지요, 그놈의 고생이란 건 하나 둘 셀 수가 없어서 몇 갠지는 모르겠어요.”
“하하하 미쓰 남은 역시 재기활발이라 안 되겠는데? 저녁은 지났어요?”
“잡수실랴거든 염려 말구 잡수세요.”
“아니, 내가 먹구 싶어서 그러나요, 미쓰 남을 좀……”
“내구 싶으면 그냥 낼 것이지, 서론이 긴데.”
“이러다가는 본 차균 각하가 녹초가 되겠는데 …… 공격은 그만하시구 이층으루 갑시다.”
차균은 앞장서서 식당에 올라갔다. 천숙이도 말없이 따라섰다.
“양정식 하실까?”
차균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좋두룩 하세요.”
차균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양정식 두 상을 주문하였다.
――요 계집이 죽을 상읕 하구 축 늘어져서 애걸복걸할 줄 알았는데 건방지게스리 요것을 어떻게 구워 삶아야 하나.
괘씸한 생각으로는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팔팔한 것이 단박뛰쳐나갈 것이요, 뛰쳐만 나가면 다시 자기한테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一상판이 뺀뺀한 것이 남자깨나 녹여 먹게 생겼으니 서투른 짓을 하다가는 손에 잡았던 꿩을 엉뚱한 쪽제비한테 뺏기는 격이 된다. 참아야지. 고만해두 인테리라 차마 대가리가 안 수그러져서 겉으루 뻐기는 거 아냐? 네 뱃속은 거울알같이 환하게 보인단다. 네가 기면 나는 뛰구 네가 뛰면 나는 난다는 사실을 얄아야지, 어림두 없지.
차균은 식사를 몇 젓가락 뜨다가 위스키를 갖다 마시기 시작하였다.
“미쓰 남이 계실 때 끊으려던 술인데 미쓰 남이 가시구부터는 홧김에 두 배나 더 허게 됐단 말씀이오.”
쭉 마시고 난 컵을 식탁에 툭 치듯이 놓으면서 한탄조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천숙의 눈치를 살핀다. 한 걸음 양보만 하면 두 걸음을 요구하고 연달아 먹어 들어오다가 짓밟아 없애 버리고야 마는 차균의 성격을 잘 아는 천숙은 지금 시험대에 오른 자기 처지를 모를 리 없었다.
“거 다행이구먼요.”
“다행이라니?”
“다행 모르세요?”
“내가 술을 많이 먹어서 녹초가 되는 게 다행이란 말이우?”
“천만에, 목을 안 맨 게 다행이란 말이에요.”
“내가 그래, 목읕 매구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우, 에?”
차균은 낮이 새파래졌다. 천숙은 나이프와 포크를 놓으면서 차균을 쳐다보았다.
“누가 시원하댔어요?”
“그럼 왜 그런 소리 함부루 하는 거요?”
“정성이 지극하면 그럴 수두 있단 말이에요.”
차균은 두 팔을 불씬 걷어올리면서 턱을 쑥 내밀었다.
“그래 내 정성이 부족허다 이 말씀이우?”
“부족이란 건 있기는 있지만 양이 적은 걸 말하는 게 아니예요?”
“그럼 도시 내겐 정성이 없단 말이죠, 이 차균에겐.”
“난 그런 얘긴 싫어요. 무슨 일루 만나자구 하셨는지 용건이나 말씀하세요.”
“만나자구 하긴 미쓰 남이 하잖았오? 여섯시에 만나자구 한 건 누구죠?”
흥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천숙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제가 잘못 알았군요. 또 기회 있으면 뵙지요. 오늘밤은 실례 많았읍니다.”
차균은 놀란 빛을 감추면서 따라 일어서서 아무치도 않은 듯이 이에 응하였다.
“그러시다면…….”
바깥은 몹시 싸늘하였다.
로타리에서 헤어지자 차균은 먼저 서둘렀다.
“바쁘신가요?”
“바쁘지 않아요.”
너무나 솔직한 말, 당연한 말이 그렇듯이 이 말도 일종 유다른 맛을 자아내었다.
“하하…… 미쓰 남은 언제든지 솔직해.”
“전 여기서 실례하겠어요.”
“바쁘지 않다면서?”
“바쁘지 않은 사람은 길바닥에 장승같이 서 있어야 하나요?”
“아임 쏘리, 우리 어디 갑시다.”
“어디요?”
“조용한 데 갑시다. 여……”
‘여’만 나오고 ‘관’자는 추춤하였다.
“얘기두 없는데 조용한 텐 가서 뭐해요.”
“미쓰 남은 면도칼이야.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그간 쌓였던 얘기가 있을 거 아니우?”
“쌓였던 얘긴 남이 있으면 도루 들어가나요? 사람 없는 데만 찾아댕기는 건 난 질색이에요.”
차균은 자기의 소위 작전 계획, 천숙을 납짝하게 만들어서 마음대로 차지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자기에게 어떤 쓸모가 있어서 온 것만은 사실이니 마지막 순간에는 굴복하리라 생각하였는데 헤어지게 되는 이 순간까지 뻣대고 있다. 소위 무역이란 것을 해 가지고 며칠씩 배를 퉁기는 놀음에는 당할 사람이 없을 만큼 능란한 그도 천숙이만은 자기보다 한 수 더 뜨는 것 같았다. 자기와 결혼하겠다고 쫓아오는 처녀도 많았고 요리집에 가면 밭길로 차도 오는 것이 여자였다. 그런데 천숙이라논 계집은 잡힌 듯하다가도 쏙 빠지고 빠졌나부다 하면 또 잡힌 듯하고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릴수록 차균은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지금까진 다 농담이구 차나 한잔 합시다.”
차균은 말머리를 쓱 돌리면서 천숙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서서 다방에 들어 갔다.
“아깐 내가 술이 좀 돌았던 모양이야.”
하면서 차균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천숙은 입을 막고 하품을 하였다.
“미쓰 남 어디 직장에 다니시우?”
“아니요.”
“취직은 안하실 작정인가요?”
“적당하면 하죠.”
“적당한 데가 그래 있읍디까?”
“제가 취직 못할까 봐 걱정이세요? ”
천숙은 자신만만하게 나왔다. 그 태도로 보아서는 이미 결정된 것 같다. 결정돼 가지구 보라는 듯이 찾아온 것이 아닐까? 자칫하면 요 까투리를 영영 놓지구 말겠다.
“기왕이면 우리 회사를 위해서 힘써 주셨으면 좋겠단 말입니다. 아직 확정 안 됐으면 어떠시우?”
“글쎄요, 취직이란 건 먹구 살자는 거니까 조건이 나은 델 가는 게 원칙이죠.”
찬쓰다. 차균은 놓치지 않고 잡으러 들었다.
“조건이야 우리가 젤이죠, 우선 보수는 백만원 하고 그 외에 특별히 생각해 드리죠.”
“월급이면 월급이지 특별은 또 무슨 특별이에요? 그건 다 골치 아픈 거예요.”
“그럼 딱 잘라서 백오십만원, 이만한 조건이면 만족이죠?”
“조건이란 월급뿐인 줄 아세요?”
“그럼 뭐가 또 있어요?”
“근무시간은요?”
“그야 물을 거 있나요! 아흡시부티 다섯시까지죠.”
“직책은요?”
“전부터 말 있던 비서죠.”
“차균씨 비서요? 그렇잖으면 사장 비서예요?”
“차균이가 사장인 줄 모르시우? 차균 비서 이콜 사장 비서죠, 하하……”
“천만에, 차 선생은 나면서부터 사장입디까? 구분이 딱 있어야조.”
“나는 매한가지니까 좋두룩 하시우. 사장 비서루 하실라우?”
“좋습니다.”
“그럼 낼부터 근무하시죠?”
“좋아요.”
차균은 흡족하였다.
一―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단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이상 빠질 구멍이 없다는 걸 알아야지. 약빠른 척한다마는 며칠이나 가나 보자.
“참, 그 금반지는 어떡했어요?”
차균은 천숙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문득 이렇게 물었다.
“적당히 처분했어요. 왜 그러세요?”
“적당히라니?”
그의 안색은 약간 변하였다.
“제 물건읕 제가 처분하는 데 잘못이 있어요?”
“제 물건이라?”
“저한테 준다구 하셨잖아요.”
“그러긴 했지만……”
“미련이 있으세요? 그렇다면…….”
“아, 아냐, 그지 물어본 거지. 손에 보이지 않으니까 물어본 거지. 될 수 있는대로 끼지 왜 그러시우?”
천숙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낼부티 나가서 일 보지요.”
하면서 그는 일어섰다.
차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5
오막샅이 민자의 집에는 활기가 떠올랐다. 쌀 한 가마니는 몇 날 두고 먹어도 떨어질 염려가 없을 것만 같고 천숙이 하늘의 별 따듯 어려운 취직을 하였으니 앞 길은 환하게 트인 것만 같았다. 오래간만에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민자의 어머니는 천숙이 아침에 나올 때 어루만지고 저녁에 돌아올 때 또한 어루만졌다.
억지로 맡은 누덕 보따리같이 천대를 받던 천숙은 춥지 않으냐 시장하지 않으냐 쉴새없이 입으로 걱정하고 손으로 어루만져 주는 민자 어머니의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도리어 어색하고 민망하였다. 밥 지으러 나가면 손을 붙잡고 말리고 자리에 누우면 누덕이라도 덮어주느라 서둘렀다. 천숙의 지위는 하루 사이에 거꾸로 되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 자세와 사장실에 찾아오는 차균의 동료들의 그것과는 북극과 남극의 차가 있었다. 적혈구는 이미 하나도 없이 곪아서 인들인들하는 상업 ‘마키 아베리즘’속에서 꾸물거리는 독균이었다.
“하룻밤만 계집을 안겨놔 봐, 문제 없어.”
“그 작자논 소연(小姸, 기생)이 하구 죽자 사자 헌대. 갖다 맞세워 놓지.”
“오천만원은 문제없지?”
“그까짓 오천만원 보구 누가.”
“이번 딸라는 잘 굴려 먹어야지.”
“골치아프게 물건 가져오느라 말구 시장에 파는 게 수다. 삼 배 장사 아냐.”
“먹은 소 똥눈다고 별수 없어.”
굼벵이떼같이 물려들어 하는 일 없이 하루종일 수성대는 그들의 쑥떡공론에서 새어나오는 이러한 구절들은 종기에서 튀는 고름같이 천숙에게는 염증을 일으켰다. 드러누워서도 배불리 먹고 잘사는 것은 잘사는 자기들의 당연한 권리요, 문제는 어떻게 해서 더 많은 돈을 소매치기하는가에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돈이란 버는 것이 아니라 실로 소매치기하는 것이었다. 될 수만 있으면 대한민국 돈을 모조리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싶은 그들의 심사였다.
차균은 처음부터 될 수 있는 대로 천숙이와 단둘의 시간을 가지려고 애썼다. 점심을 같이 하자 혹은 저녁식사논 어떠냐고 떠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천숙은 핑 계를 붙여서 거절하였다. 하루는 퇴근시간이 되어서 막 퇴근하려는데 차균이 불렀다.
“미쓰 남은 좀 남으시오.”
“왜요?”
“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으니까.”
“근무시간은 다섯시까진 줄 알고 있는데요.”
“간부들만은 시간외 근무를 해야 할 일이 생겼오.”
“저두 간분가요? ”
“비서는 사실상 으뜸가논 간부죠.”
“무슨 일이에요?”
사장은 이 말에도 대답도 하지 않고 중역들과 함께 문을 나서면서 따라오라 하였는데 천숙이도 꽁무니를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는 하이야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리과장은 사장차의 문을 열고 차균을 떠받들어 앉힌 다음에 ‘어서 들어가십시오’하고 천숙이를 권하였다. 회사에는 소위 중역이라는 계급이 있는데 사장 다음에 자기부터 들어가는 것이 안 되어서 그는 뒤를 돌아보고 전무더러 앉기를 권하였다. 전무는 ‘아뇨, 난 뒷차에 타죠’ 하고는 차균을 힐끔 쳐다보면서 서로 이상한 웃음을 주고받는다. 천숙은 야비한 냄새를 풍기는 이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 알아채렸다. 기분으로 말하면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서슴치 않고 들어가 앉으면서 아무치도 않은 척 하였다. 겉눈으로 보니 사장과 전무는 무언 중에 또 웃는다. 차는 남포동을 지나 송도해변의 문패도 없는 으리으리한 적산집 앞에 멈추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뽀이들이 달려나오면서 받들어 모신다. 천숙은 이런 요리집이 있다는 것을 귀로 들은 일이 있어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굉장한 연회가 벌어졌다. 주빈은 무역을 쥐고 흔든다논 높은 사람과 돈을 쥐고 흔든다는 이 역시 높은 사람, 도합 두 사람이었다. 천숙은 시키는 대로 사장과 두 주빈 사이에 앉았다. 아무리 천숙이라도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차균을 면박할 수는 없었다.
기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자리에 있는 남자라는 동물들은 다 제각기 하나씩 차지 하고 ‘술을 부어라’ ‘오래간만이다’ ‘요전보다 이뻐졌구나’ 입 비뚤어지는 대로 지껄이고 마시고 먹어댔다. 개중에는 기생을 무릎에 앉히고 뺨에다 키스를 퍼붓는 작자도 있었다.
차균은 주빈에게 천숙을 소개하였다.
“우리 회사 비서, 미쓰 남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잘 부탁합니다.”
주빈들은 무슨 부탁인지 부탁한다고 한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천숙은 멋적었다. 여성이라고는 기생 밖에 없는 이 자리에 앉은 자기의 위치가 심히 불안스러웠다. 아닌게아니라 멀리 저쪽 구석에 앉은 친구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수근거리곤 웃는 품이 심상치 않다.
차균은 시종여일하게 공손하고 은근하고 호랑이 앞에 앉은 쥐새끼 모양으로 순종을 다하였다. 요구만 있으면 살점이라도 깎아바칠 것이요, 두 분의 일이라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을 태도를 보였다. 두 주빈은 가끔 호탕한 웃음을 쳤다. 신하를 데리고 왕국의 번영을 구가하는 연석에 앉은 제왕의 위풍이 있었다.
“우리 회사가 이만큼 된 것도 다 두 분의 덕택입니다.”
술이 머리에 돌기 시작하자 차균이 우선 그 홍은(鴻恩)에 공구감격하는 말을 아뢰면서 헌배(獻盃)하였다.
“온 천만에.”
두 분의 태도는 늠름하다.
“걍 국장께서 한잔 드시죠.”
차균은 마시고 난 술잔을 강 국창이라는 주빈에게 바치고 도꾸리를 갖다가 천숙에게 주면서 옆구리를 꾹 찔렀다. 강 주빈은 받아먹겠다고 술잔을 내미는데 천숙은 도꾸리를 쥐고 주춤하였다. 이 세상에 나서 이런 연회도 처음이려니와 남자에게 술을 따라준다는 것은 생각도 해본 일이 없었다. 차균의 하는 짓이 고약하기도 하고 가슴이 떨려서 그냥 망설이고 있는데 사장은 또 찌른다. 할 수없이 술을 따르고야 말았다. 단박 들이켜 버린 강 주빈이 차균에게 잔을 돌려주니 이번에는 차균이 받아먹겠다고 잔을 내민다. 천숙은 차균을 노려보았다. 차균은 시죽이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악마의 조소였다. 온몸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 손님들 앞에서 꼼짝도 못하게 차균의 올가미를 뒤집 어쓴 것이었다. 천숙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여긴 술이 떨어졌는데 좀 따라 드리세요.”
차균의 저쪽 옆에 앉아서 이 미묘한 공기를 알 까닭이 없는 기생은 선뜻 차균의 잔을 채워주었다. 차균의 안색이 변하는 것이 천숙의 눈에는 보였다. 잔을 마시고 난 차균은 천숙의 손에 있던 도꾸리를 흔들어 보고 그를 곁눈으로 꾸짖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게 술 한 병 가져 오시오, ……이건 가득하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서 천숙에게 튼튼한 올가미를 씌우자고 덤 벼들었다.
“자, 김 부장께 드립니다.”
차균은 천숙의 옆구리를 또 질렀다. 천숙이는 김 부장에게 술을 부어주고 얼른 일어섰다.
“어디 가요?”
차균은 상읕 찡그린다.
“변소에 좀……”
차균은 전무에게 눈짓을 하였다.
천숙은 뒤도 안 돌아보고 현관에 나와서 신발을 찾고 있는데 전무가 나오면서 손목을 덥썩 잡아끌었다.
“왜 이러시우?”
“전 갈래요.”
“별안간에 왜 그러시우?”
“절 뭘루 아세요?”
“그러지 마시오. 그자들이 머 우리 할아버지라구 떠받드는 줄 아시오? 구어삶는 거요 구어삶는 거, 그건 모르구·……”
“푹 삶으세요, 전 가요.”
뿌리치고 나가려 하였으나 억센 전무를 당해낼 재주는 없었다. 그래도 그냥 빠져나가려면 떠뜰썩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잘못은 이런 곳에 온 데 있고 온 이상에는 끝장을 보게 마련이었다.
자리에 돌아가 보니 사장과 두 주빈은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번 신청한 오만불은 꼭 부탁합니다.”
“가만 있자 수입품목은 뭘루 돼 있더라?”
“약품, 갱지, 설탕의 세 종목읕 써 넣었는데.”
“건 좀 곤란헌데, 명목만이라두 재건에 절대 필요한 걸 적어야죠. 예를 들면 어선이라든지 공작기계라든지.”
“그럼 적당히 고치죠, 이번 것만은 좀 잘해 주시오.”
“자 그건 우리헌테 맡기구 술이나 합시다.”
한쪽 구석에서는 노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 쓰러진 친구도 하나 둘 나왔다. 강 국장은 소연이더러 노래하라고 청하였다. 강 국장의 한마디를 좌중은 박수로써 환영하였다. 소연이가 ‘양산도’를 시작하니 강 주빈은 일어서 춤을 췄다. 모두 삼가 듣고 우러러보다가 끝나기 무섭게 우뢰 같은 박수를 치고 칭송이 자자했다.
“강 국장님 춤은 남바 원입니다.”
“소연의 노래와 국장님의 춤은 구격이 꼭 맞습니다.”
이번에는 김 부장이 끼고 앉았던 기생을 들어내놓으면서 노래를 청하였다. 기생은 모가지를 빼들고 ‘신라의 달밤’을 외쳤다. 춤을 추려고 일어서다가 김 부장은 그만 혀꼬부랑소리를 치면서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쿨쿨댔다. 기생은 ‘신라의 달밤’을 중지하고 옆방으로 김 부장을 모셔갔다.
“우리 회사의 호우프 미쓰 남!”
하면서 저쪽 구석배기에 앉았던 경리과장이 소리를 지르니 모두들 박수를 쳤다.
강 주빈도 호기심에 찬 미소를 띄우면서 박수를 친다.
“전 못해요.”
“아 그릴 수 있나요, 국장께서두 모처럼…….”
전무와 차균은 기어이 시키고야 말 기세다.
“전 노랜 몰라요.”
“아무거라도 좋습니다. ”
“…….”
“모르면 사까다찌라두 하시오.”
경리과장이란 놈이 아니꼽게 군다. 천숙은 피가 머리에 싹 모여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요”, 불쓱 일어서서 그는 시작하였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늙어서도 얼룩이
엄마 닮았네
천숙이가 시작할 때 터진 웃음판은 끝내고 앉아서도 계속되었다.
―너희 같은 놈들에게 노래가 다 뭐냐? 얼룩 송아지지, 너희 같은 놈들을 얼
룩이라구 하는 거야.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숙의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려던 차균은 반쯤 일어섰다가 엉거추춤하고 도루 주저앉았다.
제각기 노래를 부르고 기생과 얼려서 땐쓰하느라고 엉덩이 춤을 추는 꼴은 눈에서 불이 났다. 차균이 슬그머니 손을 잡는다. 천숙은 홱 뿌리쳤다.
“자 우리두 한번 출까?”
“추긴 뭘 춰요?”
“땐쓰 말이지.”
“땐쓰란 건 구경두 못했어요.”
차균은 옆에 앉았던 기생을 얼싸안고 빙빙 돌아가면서 이걸 보라는 듯이 천숙을 연방 내려다보았다. 천숙은 못 본 척하고 과일을 깎아먹고 있다. 차균은 못마땅하였다.
――조것을 어떻게 녹여 버릴까? 무슨 일이 있어두 녹이구야 말 테니 두구봐라. 돈이 썩어서 백오십반원씩 주는 줄 아느냐?
연회는 끝났다. 모두들 외투를 주워입고 모자를 손에 들고 인사를 교환하고 차균은 두 기생을 불러 수표를 한 장씩 주면서 중얼거렸다.
“알겠지, 소연이는 강 국장, 명월이는 김 부장이야.”
소연이는 즉시 응하였으나 명월이는 불평이었다.
“다른 사람은 받지 말라면서 왜 오늘밤은…… 난 싫어요.”
차균은 천숙의 눈치를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양해하면 그만 아냐?”
“난 싫어요. ”
“쉬…… 쉬 날 위해서 한번반.”
“싫어요, 차 사장 외에는 아무두 싫어요.”
“큰소리 내지 말라니까…… 백만원 주지.”
명월의 내민 손에 차균은 수표 한 장 더 쥐어 준다. 옆에 섰던 천숙이 밖에 나오니 남자란 남자논 모두 기생과 짱을 지어 하이야를 달려 뿔뿔이 헤어지고 있었다. 이 자들이 가는 곳은 어딜까?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통행금지 십분 전이다. 초조한 천숙은 얼른 사장 차에 올라탔다.
“사장 안 나오세요?”
묻는 운전수에게 천숙은 얼른 대답하였다.
“오늘밤은 여기서 주무신대요.”
“흥 명월이하구 또 붙었군.”
운전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차를 몰기 시작하였다.
6
‘원’이 ‘환’으로 바뀌고 차균의 양담배가 일시 ‘공작’으로 바뀌던 화폐개혁 선풍이’ 지나가고 상거래도 안정된 어느 날 천숙은 회사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청동에서 골목으로 꾸부러지려는 순간 앞에서 달려오던 자동차가 삑 하고 서면서 차균이 나타났다.
“벌써 퇴근이시우?”
“시간이 됐으니깐요.”
“우리 차나 한잔 합시다.”
“전 바뻐서 빨리 가야겠어요.”
“언제든지 바쁘다는 타령이구려, 좀 얘기가 있으니 잠깐만 들어갑시다.”
덮어놓고 들어가자는 바람에 천숙은 따라서지 않을 수 없었다.
“요샌 안색이 좋아지셨는데.”
자리에 앉은 차균의 첫말이었다.
“덕분에.”
“회산 재미 있조?”
“아주 재미있읍니다.”
“우리 회사 오래 계시조?”
“왜 그러세요?”
“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요.”
“늙어 죽을 때까지 있죠.”
“하하 미쓰 남의 재치는 여천하군. 많이 힘써 주시오. 힘쓰면 다 힘쓴 보람이 있거던.”
“…….”
천숙은 대답 대신 미소를 띠웠다. 차균은 이 미소를 기대에 찬 미소로 알고 속으로 은근히 만족하였다.
“헤븐 헬푸스…… 그 담이 무에드라? 하여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잖소?”
혀를 이상하게 꼬부려가면서 안 나오는 영어를 구태여 하려는 차균의 수작이 우스워서 천숙은 혀끝을 지극이 씹고 웃음을 참았다. 잠자코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말에 감복한 줄만 안 차균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 말은 진리거던. 이번 화폐개혁 때만 하더라도 모두 망한다구 야단법석인데 난 끄떡 없었거던요. 되려 이걸 계기루 돈냥이나 굴러들어왔으니 신통하잖소?”
“그런 수두 있나요?”
천숙은 진짜로 신통하였다.
“얘기 들어 보실라우? 여름에 수입 한 뽀오라 기지가 그만 시기를 놓쳐서 적지 아니 창고에 남아 있던 놈을 이 판에 평균 십 배씩 받고 팔아재껴 버렸단 말씀이오.”
“신화루요?”
“그야 구화죠, 종이 쪼각처럼 내던지는 구화라 부르는 것이 값이거던.”
“그래 다 바꾸셨어요?”
“바꾸셨나구? 못 바꾼 줄 아시우? 영돗다리에 나가서 뒤로 홱 돌아 산을 쳐다보면 무엇이 보이죠?
“산을 보면 산이 보이겠죠. ”
“산을 보면 산이 보이겠죠.”
“그러니까 틀렸다 말씀이요. 내 눈에는 산이 안 보이고 거지 같은 인간들이 사는 하꼬방이 좌악 늘어서 보이더라 이 말씀이오. 사원들을 시켜서 갖다 뿌렸죠, 백 호면 삼억원, 이백 호면 육억원, 신화루 육백만환. 원이 아니라 환이우.”
‘환’에 힘을 주어서 되풀이하였다
천숙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았는가 보시우?”
“차 선생이 스스로 돕는 사람이라. 이거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인데.”
“이거 왜 이라시우, 하하……”
“돈두 무정하지.”
“왜?”
“왜든지.”
“미쓰 남, 꿩 잡는 게 매라는 말 알죠?”
“차 선생은 매란 말씀이죠?”
“하하……”
“그 돈 다 얻다 쓰실래요?”
묻는 천숙의 표정은 농이 아니었다.
―요 계집이 돈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군, 내 그물에 안 걸리구 배기나 보자.
“엇다 쯔느냐구? 잘 사는 데 쓰죠.”
천숙은 머리를 숙이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참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졌군, 전부터 생각하구 있던 일인데 미쓰 남 양복 한벌 하시우.”
천숙은 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마디 더 물었다.
“대부받은 오만불은 어떻게 되나요? ”
“재건에 필요한 기계를 가져오기루 돼 있죠.”
“곧 가져오나요? ”
“곧 가져오느냐구? 미쓰 남, 너무 천진난만하시구려.”
“네?”
“그 따윌 갖다가 그래 수지맞을 상싶소?”
“수지 안 맞는 걸 왜 가져온다구 신청은 하나요?”
“그야 털어놓구 말이지 한몫 볼랴는 거죠.”
“그래도 괜찮은가요?”
“세상은 다 그렇구 그런 거죠, 잡혀갈까 걱정이 돼서 그러시우? 적당히 다 처리하는 방법이 있죠.”
“그 딸라가 어떻게 된 딸라길래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징용간 사람들이 총알 밑에서 피를 흘리면서 모은 것두 그 속에 적지 아니 들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러니까 그 돈에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배어 있을 거 아니에요, 진짜루 재건에 써야지 누가 차선생더러 한몫 보라구 모아둔 건가요?”
“아따, 정당한 방법으루 정당하게 대부받은 이상 삶아 먹던 구워 먹던 무슨 상관이요.”
“상관 없을까요?”
“내 말 좀 듣겠오? 사람이 기계라면 돈은 기름이거던요. 기름없이 기계가 못돌아가는 건 빤하잖소? 그러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구 돈을 벌어야 하는 거랍니다. 내 손에선 돈이 떨어져 보시우, 누가 거들떠나 보는가.”
“옳은 말씀이에요. 그런데 나라가 폐허에서 다시 움직일 기름이 제 생각으룬 딸라 같은데 그걸 차 선생이 가투채두 괜찮을까 말입니다.”
“미쓰 남 생각에는 세상을 다 아논 것만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거 다 못난 사람이나 하는 못난 소리주. 이를테면 자기가 못나서 못 먹다 보니 화낌에 내뿜는 불평에 불과하거던.”
“그래두 양심에 가책을 안 받아요?”
“양심? 허허…… 양심이란 걸 본 일이 있오? 모가 났읍니디까, 둥급디까?”
천숙은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육중한 바람벽을 대하듯이 바늘도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쓴 구렝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차균이었다. 간교한 꼬리를 이리저리 휘둘러서 닥치는 대로 갈기고 훔쳐서 더욱 더 살쪄가는 것이 차균이라는 구렝이었다. 이런 자에게 돈이 들어가면 갈수록 더 억세어지고 사회의 교란도 더 커질 것이다. 이런 자와 대결하려면 진실로 초인적 인간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구렝이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의 힘을 수단을 가리지 않고 깎아 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 정의란 실지에 있어서는 공염불이 아니냐?
“무슨 생각을 하시오?”
머리를 드니 차균의 웃는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 생각두 안해요.”
“시장하시겠군.”
“괜찮아요, 이젠 가 봐야죠.”
천숙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였다.
“아, 가만 계시오. 얘기두 안 끝났는데 아까 말대루 양복 한 벌 하시오.”
이 말에 천숙은 잠을 깨듯 정신이 들었다. 마치 오래 기다리던 기회가 왔을 때에 느끼는 흥분조차 일어났다.
“하지요.”
차균은 만족의 웃음을 띠웠다. 완천히 굴복한 것이 아니라 치더라도 적어도 굴복의 일보를 내디딘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양복집에 들어선 차균은 더욱 큰소리쳤다.
“맘에 드는 거면 무어든지 좋아.”
“외투까지 해 주실래요? ”
“물론이지.”
“한 벌 가지구는 갈아입을 것이 없는데 두 벌 할까요?”
속으로는 민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차균은 그의 마음이 완전히 돈 줄로 짐작하고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응하였다.
“그렇지, 두 벌은 있어야지.”
외투도 두 벌 양복도 두 벌 모두 선금을 치렀다.
“낼 다시 올께 한 벌은 그때까지 재단하지 마세요.”
천숙은 다집을 받고 차균과 함께 거리에 나섰다.
“하논 김에 구두두 해야지.”
차균은 앞장서서 구둣방에 들어섰다.
“이것두 두 켤레 할래?”
“네, 그렇게 해주세요.”
구둣방에서 나올 때에도 천숙은 잊지 않고 한 켤레의 재단은 내일 하도록 부탁하였다.
마지막으로 시계방에 들어갔다. 시계도 두 개 골라잡았으나 시계만은 한 번에 두 개찍 살 명목이 서지 않아서 방설이고 있는데 차균이 재촉하였다.
“내가 골라 줄까?”
“이거 어때요?”
하면서 천숙은 두 개 내놓았다.
“이쪽 것 말이야?”
“골라잡구 보니 둘 다 놓치기 아까워서 그래요.”
차균은 속으로 웃었다.
―ㅡ돈이란 건 푹푹 빠지는 습지와 같거던, 약빠른 척하더니만 맛을 붙이기 시작하니 궁덩이 나가는 줄 모르는구나.
“아 그럼 둘 다 사지 그래.”
상점에서 나오자 차균은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조용한 중국집에나 갈까?”
“중국집은 싫어요.”
“왜?”
“짱꼴로를 보면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있어야죠.”
차균의 뱃속을 빤히 아는 천숙은 이렇게 몸을 뺐다.
“그럼 어딜 가?”
“전 국밥이 먹구 싶어요.”
“아 고작해서 국밥이야, 그래.”
“국밥은 나뻐요?”
“나쁠 거야 없지만 쿠린내 나는 놈들이 들락낱락해서 제엔장.”
“그럼 양식 합시다.”
이번에는 천숙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서 양식집으로 들어갔다. 차균은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라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서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미쓰 남 사람이 달라지셨는데.”
“…….”
“뭘 하실까?”
“아무거락두 간단한 걸루 합시다. 빨리 가 봐야지.”
“기다리는 사람두 없을 텐데 왜 그리 서두루시우?”
“기다리는 사람두 없을 텐데 왜 그리 서두루시우?”
천숙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대답이 없었다. 정식 한 상만 시키고 자기는 술을 청해다가 제 손으로 따라 마셨다. 천숙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차균과 해어지려고 말을 건네도 ‘네’ 혹은 ‘아니요’로만 응하면서 식사에만 정신을 팔았다.
“아직두 보수동인가요? ”
“네.”
“산 위인가요?”
“네.”
“하꼬방인가요?”
“네,”
“같이 있는 사람은 많은가요?”
“아니요.”
“집이 춥지는 않으신가요? "
“네.”
술기운으로 얼굴이 붙불레한 차균은 천숙의 무관심한 대담이 언짢았다. 귀담아 듣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무에가 네요? ”
“네?”
“또 네야.”
천숙은 잠자코 식사를 계속하였다. 차균은 연달아 석 잔읕 들이키고 나서 한 손으로 식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미쓰 남의 뱃속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가요?”
“네?”
“뱃속이 어떻게 생겼나 말이요.”
차균의 어조는 조금 높아지고 검은 그림자가 얼굴을 지나갔다.
“뱃속이라니오?”
“미쓰 남의 뱃속 말이지.”
“호호…… 제 뱃속이 어떻게 생겼느냐구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 제 뱃속을 모른단 말이오?”
“그렇게 알구 싶으세요?”
“알구 싶지.”
“캄캄한 그믐밤이랍니다.”
“하하…… 캄캄한 그믐밤이라, 의미심장한데 무슨 뜻이오?”
“뜻이 무슨 뜻이에요? 그지 벼라별 것이 다 들어 있는데 하두 캄캄해서 꺼멓게만 보인다뿐이조.”
“이거 시적인데, 왜 그리 캄캄하시오?”
“그믐밤에 밝은 것이 있나요?”
“등불을 켜요.”
“기름두 없구 등두 없답니다.”
“차균이라는 등불이 바로 앞에 있잖소?”
차균은 또 한 잔 마시고 싱글벙글 웃는다. 천숙은 마지막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면서 말없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미쓰 남!”
식탁에 엎드리다시피 하고 허덕이는 차균의 두 눈에는 이상한 빛깔이 있었다.
뜨거운 입김이 천숙의 뺨에까지 느껴졌다.
“이제 가 봐야죠.”
천숙은 일어섰다.
차균은 일어서려다가 도루 주지앉아 서슴지 않고 나가버리는 천숙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요것이, 두구 보자. 맛을……”
차균은 식탁 위에 쓰러졌다가 이어서 의자와 함께 마룻바닥에 뒹굴렀다.
7
봄이다.
민자의 결혼식 며칠 전이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천숙은 늦잠을 자고 깨니 어머니는 장으로 가고 민자는 책상 앞에 앉아서 털실로 장갑을 뜨고 있었다. 곁눈도 팔지 않고 손을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는 빛났다. 천숙은 자리에 누운 채 빙그레 웃으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민자는 뜨다가 책상 위에 놓고 손가락을 펄쳐 재보고 나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다시 한번 재보고 몇코 풀고 나서 또 뜨기 시작하였다. 민자의 두 눈은 다시 빛나고 손가락은 재빨리 움직인다. 한 손가락을 마치고, 맺은 끝을 이빨로 뜯으면서 힐끔 곁눈을 팔다가 천숙의 시선과 마주치자 낮을 붉히면서 미소를 띠웠다.
“자지두 않으면저 능청 맞긴.”
“무언데 그렇게 열심히 뜨니?”
“장갑이야.”
“겨울이 다 갔는데 무슨 장갑이냐?”
“그이가 갈 때 가지구 가야지.”
“영국선 여름에두 장갑 끼는가.”
“영국이라구 여름만 있을라구.”
민자는 또 웃었다.
“참 몇 해나 계신데?”
“삼 년이라나봐.”
“넌 참 중겠다.”
이 한마디는 민자에게는 여러가지 의미로 들렸다. 특히 그것은 천숙이 자기의 신세한탄에서 나오는 탄식만 같았다.
“……넌 언제까지 그러구 있을래 ?”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민자가 이렇게 물었다.
“언제까지라구…… 글쎄.”
“글쎄라니?”
“난 인젠 한 고개를 넘은 것만 같다.”
“별소린, 몇 살 먹었다구 한 고개 넘어?”
“글쎄.”
“너 그럼 돌아가신 상철씨반 생각하구 늙겠단 거야?”
“별루 그런 것도 아니지만 상철씨한테 모든 것을 바지구…… 이젠 아무 생각두 없구나.”
“그럼 무손 희망으로 사니?”
“희망이야 더 무슨 희망이 있겠니? 그저 사니까 사나부다 하지.”
“너 그렇지두 않은가 보더라, 하는 걸 보믄 기운이 씽씽 나던데, 좋은 사람 있지?”
“얘 미쳤니? 기운이 씽씽하다면 그건 희망이 아니구 악에 받친 거지.”
“왜?”
“왜라니, 난 그저 못된 놈들을 보면 갈아마시구 싶구 송곳질 하고 싶어서 못 건디겠어.”
“네가 그런다구 사회가 나아질 줄 아니?”
“나아지구 안 나아지는 건 모르지만 안 그러군 못 배기겠는 걸.”
민자는 손에 잡았던 일감을 책상 위에 놓고 다가앉았다.
“박선생님 시간에 들은 일이 있잖니? 버마재비(사마귀)가 도끼를 들구 나무를 찍는다구 찍어질 줄 아니? 제 살 도리나 하는 게 옳잖아?”
“현대사희에서 개인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것두 아니란 것쯤 나두 알구 있어. 사회를 위해서 악과 투쟁한다, 그런 큰일은 내가 감히 할 수 있다구 생긱도 않지만 적어두 내 눈에 보이구 내 힘이 닿는 범위에서는 그것을 미워하구 그 힘을 조금이라두 깎는 것이 옳지 않을까?”
"글쎄…… 이론적으루야 옳다구도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실지 문제루 네 자체는 무어가 되느냐 말이다. 모리배를 한 놈 따라댕기면서 그걸 녹여 버렸다구 그리 장할 거야 없잖니? 되려 너나 물이 들지 말구 일찌감치 발뺌하는 게 옳잖아?”
“나만 똑똑하면 그만이지, 내가 머 그자들한테 팔린 줄 아니?”
“아닌게아니라 팔리기두 쉽지, 니가 늘 상철씨 생각하구 있지만 만약 상철씨가 살아 있다면 좋게 생각할 줄 아니?”
이 말에는 천숙이도 대답이 없었다.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으면서도 무엇인지 자기 자신도 몰랐다. 민자는 옷을 털고 일어나 밥상을 갖다 한쪽 구석에 놓으면서 천숙에게 부드럽 말했다.
“골났니?…… 나 잠깐 나갔다 올께.”
천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자논 옷을 주워입고 신발을 닦기 시작하였다.
“너 왜 외툰 안 입니? 아직 추운데.”
천숙의 묻는 말에 민자는 얼굴만 붉히고 대답이 없었다.
“입구 가지 왜 그래?”
“……그이가 그 외툴 좋아 안해.”
“왜? 색깔이 나빠서?”
민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천숙은 그 외투의 유래를 그리면서 다구처 물었다.
“왜? 말해 봐."
“……서해 응, 저어 깨끗치 못하다구. ”
하고 민자는 나가 버렸다.
천숙은 알아채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기깐에는 큰일이나 하는 듯이 서둘리도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도 흰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덕에 살고 있는 바로 그 사람까지가 이 지경이 아니냐? 가장 믿고 있던 사람의 배반을 당한 때의 그 참을 수 없는 울화가 터져나왔다.
―一내가 너희들이 생각하듯이 더러운 화냥년이라구 하자. 그럼 더러운 화냥년이 가져온 걸 먹구 앉은 너희들은 깨끗하단 말이냐? 입으룬 깨끗을 부르짖구 목구멍에다간 스스루 더럽다는 걸 처넣는 너희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족속이냐? 제 발루 한 발두 움직이지 못하면서 입만 뾰죽한 것들이.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더구나 자기의 생활 이면에 추잡한 것을 결부시키고 있다고 단정하고 보니 치가 떨렸다.
―더러운 걸 몸에두 못 걸치는 인간이 뱃속에 넣어서 살을 만들구 피두 빚어내니 몸뚱아린 어떻게 된단 말이냐? 썩어서 구데기가 이물이물 할 거 아니야. 건방지게…… 그렇게 깨끗하면 물이나 마시다가 죽어 자빠질 것이지.
누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일어나 앉았다. 차균이는 능청맞더니만 이자들은 간교(奸巧)하다. 용서해 응 어쩌구. 세상에 소위 똑바른 놈은 하나도 있을 상싶지 않았다. 어느 놈이고 할 것 없이 쓰레기통에서 웅성대는 구데기다. 큼직한 신발을 신고 짓밟아서 없애버리고만 싶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면서 떠들썩하였다.
“아직두 조반 안 먹었구나, 시장하겠다아, 이거락두 마셔라아.”
바구니에서 계란을 꺼내 온돌바닥에 뒹굴린다.
어머니의 상판을 쳐다보니 틀림없는 여우다. 얄미움이 그 웃는 얼굴에서 이글이글 한다. 망치 방방이로 갈겨서 때려눕히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가래침을 꿀꺽 삼키고 말없이 외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문 밖에 나섰다.
어머니는 뒹굴리던 계란을 주워들고 문으로 목을 내밀었다.
“어디가 아프냐아? 민자하고 싸운가부구나, 고놈에 기집 애가……”
천숙은 뒤도 안 돌아보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메뉴통과 가마뙈기 집들을 지나니 경사진 산허리에는 소나무가 총총히 들어서 있다. 돌멩이를 하나 주워서 홱 던졌다. 소나무에 쿵 하고 들어맞는다.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 다시 걸음을 옮겨 천천히 올라갔다.
봉우리에 이르니 검은 바위가 쓰러지듯이 뒹굴고 있다. 바위에 올라섰다. 이른 봄 바람은 아직도 싸늘하다. 흐트러진 머리를 추켜올리면서 내러다보니 멀리 바다가 보이고 밭 아래에는 거머직직한 부산 거리가 임종의 검은 소 모양으로 축 늘어져 있다. 모든 것이 허망하다. 마치 양의 탈을 쓴 이리떼가 으르렁대는 사막에 홀로 팽개쳐진 나그네모양으로 걷잡을 수 없는 고독이다. 의지할 나뭇가지 하나 없고 하소연할 친구 하나 없는 쓸쓸함에 천숙은 웅쿠리고 앉아서 한없이 울었다.
여러가지 환상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또 떠올랐다. 상철의 무표정 한 프로필이 나타났다. 지나간 몇 달 사이는 살아간다는 그 복잡한 일로 간혹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던 그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마지막으로 자기와 헤어질 때의 눈물어린 얼굴이다. 그의 유골이 파묻혀 있는 구덕산 기슭을 돌아다보았다. 앙상한 나무들이 섰을 뿐이다. 일어서 물끄러미 보았다. 말할 수 없는 적요(寂寥)가 무덤과 자기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상철이 또한 쓸쓸함에 못 이겨 자기를 부르고 있다.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이어서 흘렀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시간을 잊고 흐느껴 읕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고개를 드니 찬바람이 뺨에 부딪친다. 가슴에 엉켰던 것이 조금 홀가분해진 듯하다. 모든 것이 허무하면서도 상철이만은 죽지 않고 이 천지의 어느 구석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숨결이 자기의 숨결과 통하고 이어서 온몸에 퍼진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세상의 몰매에 쓰러진 자기를 부축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이 숨결이리라. 바위에 주저앉은 대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휘유하고 내쉬었다.
해질 무렵에 돌아온 천숙은 이리지리 어루만지려고 드는 민자와 어머니가 귀찮아서 저녁밥도 드는 둥 만 둥 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자리에 드러누었다.
어렴풋이 든 잠결에 어머니와 딸의 공론이 들려왔다.
“너 그래 집은 어떻게 한다던?”
“대신동에 산대요.”
“사게 되믄 잘 보구 사라. 수도가 잘 나오나두 보구. 집두 잘 되는 집이 있구 못 되는 집이 있단다. 흉가는 아닌지.”
“집 사믄 어머니두 모셔간댔어.”
“얌전한 품이 그릴 게다.”
천숙은 이런 대화가 자기와는 아주 관계없는 먼 세계에서 울려오는 듯이 무관심하게 청각에 부딪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 그런데 큰일났어. ”
“무슨 일인데?”
“나 말이지이, 그이한테 푸레센트해야 할 텐데 어떡해요?”
“푸레센트라니? 선물 말이냐?”
“그래요, 어떻게 가만 있어요?”
“글쎄 말이다. 천숙이하구 말해 보지 그래.”
“엄만.”
하고 민자는 끊었다가 말소리를 낮춰서 귓속말로 계속하였다.
“그이가 말이에요오, 지번에두 말했잖아요오? 천숙이하군 분가루두 같이 쓰지 말라구.”
천숙은 귀가 번쩍 띄었다가 다음 순간 도루 누그러졌다. 귀찮은 생각만 들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럼 어떡하니 네 말대루 더럽건 어쩌건 결혼할 때까진 꾹 참아야지.”
“난 싫어요!”
“그전엔 안 그라더니만 왜 요새 와서 별안간에 더러우니 마니 하구 야단이냐? 밥줄이나 먹는 것두 걔 덕이 아니구 뭐냐?”
“하두 궁한 김에 그런 생각두 못했지반 그이 말을 듣구 보니까 먹은 걸 도루 뱉아놓구만 싶어요. 빨리 우리 그 집에 갑시다.”
“글쎄 갈 땐 가더라두 그 선물인가 무엔가는 해야 하잖니?”
“참, 엄마 어떻게 할까?”
“너 그 외투하구 양복은 그래 안 입을라니?”
“그이가 질색이라니까, 낼 새루 해준댔어요.”
“그럼 그걸 갖다 팔아서 선물 사지 그래.”
“참 그릴까? 두 달이나 입어서 몇 푼 안 될 거예요.”
“그래두 원체 좋은 거니까.”
“……천숙이 무에라구 하잖을까?”
“며칠 안 있으면 가 버릴 걸 뭐. 동무한테 빌려줬다구 질질 끌다가 결혼하믄 고만 아냐?”
“그러조 그럼.”
어머니와 딸은 일어서 못에 걸린 외투와 양복을 벗겨다가 받을 값을 홍정하기 시작하였다.
누워 있는 천숙은 부아가 치밀었으나 전같이 불붙는 것이 아니고 일기 시작하다가 곧 사라지고 마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一ㅡ―될대루 돼라, 그리구 입 비뚤어지는 대루 써 버려라. 때에 따라서 편리한 대루 윤리두 만들어내라.
삼복지간에 구멍이 나도록 신고 다니던 양말을 땀냄새 난다고 벗어 팽개치듯이 자기를 따돌리는 이 인간들이 밉기로 말하면 그지없이 밉지마는 일어나 대항할 힘도 흥미도 없었다. 큰 숨을 쉬면서 벽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뜨니 깜짝 놀라 자기를 내려다보는 두 그림자가 희미하게 떨고 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8
민자의 결혼식 날은 천숙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깨꿋지 못한 존재,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신랑 앞에서는 되도록이면 피하려드는 민자의 결혼식에 가야 할지 안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어린 때부터의 정의, 지난 몇달 동안의 인연으로 보아서도 그 누구보다도 자기만은 먼지 가서 서둘러야 하겠지마는 뻐젓이 나가서 민자의 친구라고 나설 계제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수성대는 집안에서도 팔을 걷고 도울 수도 없고 안 돕자니 온 동네가 모인 가운데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수군거리다가는 가끔 돌아다보는 민자와 어머니의 태도도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이상하다. 누워 있을 수도 없어, 어떻게 몸을 간직해야 할지 몰랐다. 생각던 끝에 꽃다발을 사러 간다고 밖에 나오러고 하니 어머니도 쾌히 승낙하였다.
나서기는 하였으나 결혼식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이 있는데 지금부터 꽃다발을 사들고 갈 데도 없다.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상철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대신동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 풀도 나지 않은 무덤에는 누가 던졌는지 큰 돌멩이가 하나 파들어 있고, 어린아이들의 발자욱이 이리지리 흩어져 있었다. 잎사귀가 떨어진 나무가지에 앉았던 새들이 후루룩 하고 날아가 버린다.
천숙은 돌을 밀어 던지고 발자욱을 손으로 메우면서 한바퀴 돌고 나서 앞에 우두커니 섰다. 너무나 초라한 무덤이다. 살아서도 고독하였지마는 죽은 후에는 더욱 고독하다. 찾아보는 사람없이 거칠은 산기슭에 외로이 팽개쳐진 둥근 흙덩이가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남기고 간 단 한가지다. 너무나 쓸쓸한 이 광경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지닌 처량한 운명 그것인 양 천숙의 눈에는 눈물이 저절로 돌았다. 불러도 말이 없다. 세월이 가면 소위 무덤이라고 하는 이 흙무더기도 주저앉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한줌 백골도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란 물같이 흐르는 시간 위에 잠시 떴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거품이 아니냐? 죽음이 없이 무한히 살 듯이 사회라논 도가니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기의 자세는 광(狂)이 아니고 무엇이냐? 생이란 영원한 사(死)의 일부분이어든 중요한 문제는 오히려 사에 있지 않으냐? 여기는 영겁의 사가 있고 지 거리에는 사의 흐름 위에 뜬 거품들이 지향 없이 서로 아우성 치고 있다.
천숙은 자기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적막, 깊이도 넓이도 모를 적막 속에 고스란히 녹아버 리는 듯하였다.
이른 봄의 추위도 잊고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섰던 천숙은 까치가 우는 소리에 반사적으르 고개를 들었다. 까치의 울음도 다시 못 올 길을 떠난 그리운 이를 부르는 듯 서글펐다.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먼 옛날에 떠난 고향, 그리운 이가 잠자는 고향, 머지않아 다시 찾아와서 영영 떠나지 않을 고향을 등지듯 천숙은 돌아섰다. 두뇌의 활동이 일시 멈춘 듯 전후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회색의 우수에 싸여서 마치 중병을 지르고 난 환자와 같이 어슬렁 어슬렁 걷기 시작하였다.
꽃다발을 안고 예식 장 문을 들어서니 식은 이미 끝날 무렵이다. 천숙은 두려운 감이 들었다. 문간에서 주춤한 대로 그 이상 걸음을 옮겨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늘의 주인공 민자와 그 신랑의 눈에 띄는 것이 무서웠다. 죄지은 사람 모양으로 뒷사람들 틈에 끼어서 두 눈만 내놓고 앞을 바라보았다. 축사도 끝나고 주례의 지시로 신랑신부가 뒤로 돌아 손님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올린다. 천숙은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워서 눈을 내려감았다. 가슴이 싸늘해진다. 사리로 말하면 자기가 오늘만은 첫째 들러리를 서고 동기의 경사같이 서둘러야 할 이 자리를 숨어서 보아야 하는 심사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하였다. 머리를 드니 맨 앞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자기의 시선과 마주치자 외면하여 버린다. 천숙은 눈물이 한 줄기 주루루 흘렀다. 그는 더 견딜 수 없어서 꽃다발을 몰래 구석에 세워놓고 나와 버렸다. 행길에 나오니 어쩔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은 더욱 비오듯 하였다. 사람 없는 골목에 들어가 돌아서서 낯을 가리우고 소리 없이 울고 나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온세상이 귀찮고 걸음을 옮길 기운조차 없었다. 벽에 기대어 발 끝으로 사람 인(人)자를 수없이 썼다가는 지우고 지우고는 다시 썼다.
예식장에서는 식이 끝나서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눈에 띄는 것이 두려워서 반대쪽으로 긷기 시작하였다. 어느 구석에 놓으나 귀찮은 누덕 보따리같이 천숙은 자기의 한 몸을 안정할 곳이 없었다. 느린 걸음으로 그 골목을 빠져서 광복동에 나와 시청 쪽으로 걷고 있는데 왼편으로 회사 간판이 보였다. 회사 사람 보기도 싫어서 행길을 건너 골목으로 꾸부러지는 순간 천무와 부딪쳤다.
“미쓰 남 웬일이시오?”
천숙은 무어라고 할 말도 없고 할 기분도 없어서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니까 전무는 앞을 막아섰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아뇨.”
“요새 미쓰 남 기운이 하나두 없는 것이 이상하다구 사장님두 걱정하시는 길인데. 마침 잘 만났읍니다. 그러잖아두 미쓰 남이 안 계셔셔 모두들 야단인데.”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타합이 있는데 하여튼 사(社) 루 갑시다.”
성가시고 귀찮았으나 이러니 지러니 말을 주고받는 것도 골치아픈 일이라 잠자코 뒤를 따라섰다. 회사 문전에 이르자 전무는 들어가지 않고 이층을 향하여 ‘사장님, 사장님’하고 소리를 지른다. 창으로 목을 내민 차균은 두 사람을 보자 모자를 집어쓰고. 내려와서 놀란 표정으로 천숙에게 말을 던졌다.
“미쓰 남. 어찌된 일이오?”
“아무치두 않아요.”
천숙은 무표정 한 얼굴로 대답하었다.
“안색이 픽 나쁜데 어디 아프신가요?”
“아뇨, 동무 결혼식이 있어서요.”
이 말에 차균은 전무를 힐끔 건너다보고 전무는 입가에 이상한 웃음을 띄웠다. 차균은 전무를 끌고 몇 걸음 물러가서 낮은 소리로 몇 마디 하니 전무는 끄덕이고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면서 무엇인가 설명 하는 모양이다. 천숙은 아무 관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우두커니 저서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이윽고 차균과 전무가 가까이 오더니 전무가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고 차균은 천숙이더러 타라고 한다.
“어디 가시는데요?”
“중대한 타합이 있다니까.”
전무가 옆으로 가로챈다.
“무슨 타합인데 희사에선 안 되나요?”
“아, 회사에서 될 것이 있구 안 될 것이 있지. 다른 사원들은 전연 눈치두 못 채게 해야 할 타합이니까 이러잖슴니까?”
이상한 감도 없지는 않았으나 굳이 중대한 일이라고 하는데 기절할 이유도 없고 항변할 기운도. 없어서 ‘될 대로 되라’고 차에 올라탔다.
초량 쪽으로 달리던 차는 십자로에서 왼펀으로 꾸부러져서 큰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문패를 보니 이충식 (李忠植)이 라고 전무의 이름이 붙어 있다. 큰 채를 지나 뒤에 돌아가니 조그만 별관이 있다. 방에 들어서자 전무는 어리광을 부리고 나가 버렸다.
“다른 데야 어디 조용히 얘기할 데나 있어야조,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서 하십시다.”
깨끗한 방이다. 십조나 되는 다다미 방에 추사의 족자도 걸려 있고 소나무 화분도 탁자에 얹혀 있다.
차균은 외투 단추를 벗기고 나서 잔등을 천숙에게 돌렸다. 천숙이는 못 본 척 하고 옆으로 물러가 외투를 입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족자를 바라보고있었다.
“미쓰 남, 너무 하잖소?”
천숙을 노러보고 있던 차균은 흥분한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네?”
“사장이 아니라무 웃사람의 외투쯤 벳겨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요?”
“…….”
천숙은 잠자코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이때까지 사라졌던 온갖 감정 이 불현듯 한꺼번에 치밀어오르는 것을 침과 더불어 꿀꺽 샴컸다.
“너무 하잖소?”
차균은 다시 한번 되풀이하였다.
“뭐가요?”
천숙의 한마디에는 독기가 있었다. 차균이 무어라고 하려는 판에 전무가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니 차균과는 구면인 모양으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전무는 천숙에게 소개를 시작하였다.
“저의 첩니다…… 늘 얘기하잖아? 우리 회사 미쓰 남이야.”
천숙은 머리를 꿈벅 숙였다. 아래 위를 새까만 비로드로 휘감은 품이나 화창한 맵씨나 어디를 보아도 틀림없는 기생이다. 더구나 좁다랗게 그려붙인 눈썹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사왼들 사이에서 전무가 기생첩을 두고 있다고 수성대는 것을 들은 생각이 문득 났다.
―이 것이로구나.
두 남자들 사이에서 애교를 떨다가 여자는 나가 버리고 차균이 입을 열었다.
“미쓰 남 아까 껀 농담이야.”
“왜, 또 맞불질을 하신 모양이군, 난 미쓰 남 성미가 참 좋아, 꼿꼿하거던.”
전무가 한마디 하였다. 천숙은 시선읕 둘 곳이 없어서 복판에 놓은 식탁에 두 팔을 얹은 채로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줄을 그리고 있었다.
“미쓰 남, 우리 회사엔 기둥이야.”
차균이다.
“참말이지, 미쓰 남은 열 사람 앞치두 더 허거던.”
전무가 맞장구를 쳤다.
“미쓰 남 우리 회사엔 보배야.”
“보배구 말구요, 미쓰 남 온 뒤부터는 지두 맘놓구 나다니는 걸요.”
시치미를 떼고 아래만 보고 있던 천숙은 머리를 들고 쏘았다.
“이게 중대한 타합입니까?”
“그런 데가 마음에 쏙 들거던, 옳은 건 옳구 그른 건 그르구. 시원시원해.”
차균이 능글맞게 넘기는 판에 술상이 들어왔다. 전무는 또 한마디 하였다.
“별안간에 준비가 안 된 모양인데, 천천히 잡수시오, 지금 만드는 중이니까.”
천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가봐야겠어요.”
전무는 문을 막아서면서 굳이 말린다.
“아, 이제부터 다합을 막 하려는데 왜 그러시오.”
붙잡아 앉히는 바람에 천숙은 주저앉고 말았다.
―될 대루 되겠지.
“자, 우선 한잔씩 합시다.”
차균의 잔을 붓고 난 전무는 천숙의 잔을 채우고 자기 잔도 부었다. 이상하게 큰 컵이다.
“전 못해요.”
“아니, 우리 회사의 앞날을 위해서 간빠이합시다.”
두 사나이는 재각기 잔을 들고 천숙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정말 못해요.”
“그런 법이 어딨어요? 회살 위한다논데 입에다 대기만이라두 해야지.”
전무가 졸랐다. 천숙은 말에 못 이겨 억지로 입에 댔다 떼니 두 사람은 이미 다 마시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
“미쓰 남 그런 법 어딨서요? 간빠이이란 건 잔을 말린다는 거 아니오?”
차균이다.
“전 정말 못해요.”
“하구 못하구가 문제 아니죠, 예의가 문제지, 어서 요것만 드시오.”
전무가 일어서 제 손으로 컵을 들고 덤벼든다. 억지에 못 이겨 조금 마시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바람에 다 마시고야 말았다.
술을 마셔 본 일이 없는데다가 며칠을 두고 굶다시피 하였고 오늘은 아침부터 먹은 것이 없는지라 단박 머리가 돌고 눈앞이 캄캄하여진다. 애써 자제하면서 안주를 집으려고 하였으나 정신이 막 돌면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거 너무 빠른데.”
차균의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으나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이 없고 온몸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면서 정신이 가물거리다가 까맣게 되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심한 충격에 잠을 깨니 방에는 파란 전등이 켜 있는데 벌거벗은 차균이 달라붙어서 아랫 내의를 벗기고 있다. 천숙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주먹으로 힘껏 차균의 턱을 떠밀고 침을 뱉으려 하였으나 목이 타는 듯이 말라서 입에서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왜 이래. 나야 나.”
“나라니, 이……이……”
몸부림치고 막 일어나려 하였으나 전력을 다해 억누르는 사나이를 당해내는 재주는 없었다. 불 같은 증오심이 무럭무럭 타올랐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니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소용없어, 남을 웃기지나 말구 가만 있는 게 수야.”
차균은 결사적으로 즈로오쓰를 벗기고야 말았다.
천숙은 축 늘어졌다. 눈물이 막 쏟아지면서 상철의 얼굴이 나타났다.
저항이 없어진 것을 보고 차균은 한쪽 다리로 눌렀던 두 팔을 놓고 온 전신으로 내리누르면서 껴안으려 들었다.
천숙은 모든 것을 단념하고 눌렸던 두 팔이 지려서 위로 뻗었다. 물그릇이 손에 잡힌다.
순간, 그릇을 쥐고 힘껏 차균의 상판을 갈겼다. 양미간에서 피가 쏟아지면서 차균은 비명과 함께 모로 쓰러졌다.
천숙은 얼른 일어나 옷을 주워입고 막 나가려는데 전무와 기생첩이 달려오면서 외쳤다.
“웬일이야?”
“더러운, 더러운……”
천숙은 허덕이면서 중얼댔다.
“갈보믄 갈본 척하지 이게 무슨 꼴이야! ”
기생첩이 바라진 소리로 쏜다.
“갈본 누가 갈보야! ”
“이년아, 빛 좋은 개실구야, 응.”
기생첩은 천숙의 머리칼을 잡아끌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천숙은 맥없이 쓰러졌다. 달려든 키 큰 머슴이 천숙의 목덜미를 거머줘고 앞마당으로 돌아가고 전무와 기생첩은 차균을 어루만졌다.
“이년아, 갈보가 건방지게스리.”
소나무 밑에 엎어놓고 머슴은 천숙의 옆구리를 발길로 찼다.
천숙은 저항도 말도 없이 흐느껴 울었다. 오장육보가 터지는 듯한 통곡이다. 머슴은 머리를 잡아채면서 또 한 대 찼다. 천숙은 온몸을 내맡겼다.
―나를 갈갈이 찢어 먹어라.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목메어 울었다.
전무가 돌아오면서 천숙을 잡아일으켰다.
“미쓰 남 미안하오.”
천숙은 기둥을 안고 몸부림쳤다.
“미쓰 남한테는 섭섭히 안할 테니 이 말만은 제발 입밖에 내지 말아 주시오. 이웃 사람두 있구 하니 어서 들어가 주무시든지…… 그렇잖으면 아직 아흡시 밖에 안 됐는데 돌아가 주무시든지……”
천숙은 기둥을 놓고 흐느끼면서 소매로 얼굴을 닦고 나서 대문을 나섰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다만 죽음만이 머리에 떠올랐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다지도 정답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다. 지나간 스물 다섯 해를 걸어온 가시길이나 지금 겪고 있는 피나는 환경이나 그를 생에 비끌어맬 아무런 애착도 미련도 없었다.
천숙에게는 문 없는 이 기막힌 방에서 튀어나가는 단 한 가지 길은 죽음이 있읕 뿐이다. 바다로 가자!
몇 발자욱 옮겨놓는데 뒤에서 달려오는 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쓰 남, 같이 감시다.”
“…….”
전무는 지나가는 택시마다 세우려고 손을 들면서 천숙이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행길이 나타났다.
“돌아가요 ! ”
“미쓰 남 모셔다 디러야지.”
“내가 어딜 가는데.”
전무는 들은 척도 안하고 택시를 불러세웠다.
“자, 어서 타시오.”
“괜찮아요.”
“타시라니까.”
전무는 억지르 떠밀어 태운다.
“그럼 타구 갈께, 어서 들어가요.”
“아니 모셔다 디려야지.”
전무는 철썩 들어앉으면서 문을 닫았다.
“정말 괜찮다니까.”
천숙은 짜증을 냈으나 전무는 들은 척도 안하고 ‘보수동’하고 외쳤다.
차에서 내려서도 전무는 지긋지긋이 따라온다. 천숙은 집으로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는지라 고개를 올라오면서 몇 번이나 떠밀다시피 도루 쫓으려 하였으나 전무는 끝끝내 오막살이까지 와서 방안에 들여보내고 민자의 어머니를 불러서 무어라고 속삭이고야 가 버렸다.
민자의 어머니는 밤이 새도록 옆에 붙어 앉아서 한시도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다 알고 있다논 듯이 캐어묻지도 않고 몇 마디 말도 없이 결혼식에서 남은 음식을 머리맡에 갖다 놓고 꼬박 지키고 앉았다.
자정이 지나니 천숙이도 긴장이 풀려서 잠이 들었다.
9
중병을 치르고 난 사람 모양으로 천숙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민자도 가 버린 이 방에 하루 종일 누워서 이따금 눈을 뜨고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다시 눈을 감아버리곤 하였다. 살겠다는 용기는 물론 죽겠다논 의욕도 없어지고 다만 자리에 누운 이대로 녹아서 자기도 모르게 없어지고만 싶었다. 어머니가 갖다주는 죽을 몇 숟가락 뜨다가 물려 버렸다. 시장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
“너 그러다간 정말 앓겠다아. 어서 정신 채러서 죽이라두 먹어라.”
민자 어머니는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천숙에게는 얄밉게만 보였다. 이 세상에 거짓의 껍데기를 쓰지 않은 인간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가지각색 껍데기를 쓰고 자기를 농락하고 잡아먹으려 드는 것이 인간이었다. 천숙은 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해질 무렵이다.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이 집에 남 천숙이라고 있읍니까?”
어머니가 문을 여니 때묻은 군복을 입은 졸병 한 사람이 서 있다.
“왜 그러시죠? ”
어머니는 병정과 천숙이를 번갈아 보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있읍니까 없읍니까?”
병정은 다그쳐 묻고 어머니는 당황하여 천숙을 내려다보았다.
“네 있읍니다. 어디서 오셨는지……”
하면서 천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댁에서 김상철이라고 아십니까? ”
‘김상철’이라는 말에 천숙은 가슴이 덜컥 하였다.
“네?”
“일선에서 같이 있던 사람입니다.”
천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 자리를 한쪽으로 밀어 놓으면서 들어오라고 권하였다. 병정은 배낭을 짊어진 대로 서슴지 않고 쓱 들어와 앉았다. 땀과 먼지가 빈틈없이 밴 군복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기고 햇볕에 탄 토갈색 얼굴에는 두 눈만 유난히 빛난다.
“나는 김상철의 전우입니다. 오늘은 좀 전할 것이 있어서요.”
하면서 그는 배낭읕 내려놓고 풀기 시작하였다.
천숙은 가슴이 떨렸다. 병정의 때묻은 손의 움직임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병정은 배낭에서 큼직한 봉투를 끄집어냈다.
“사실은 김 하사(상철)가 살았을 때 누가 먼지 죽든 집에다 소식을 알리기루 했는데 졸병이라서 맘대루 돼야죠. 이렇게 늦었읍니다. 이건 김 하사가 만일 자기가 죽거던 댁에 전해 달라구 입버롯처럼 부탁하던 겁니다. 꽁한 사람이라서 배급나온 담배두 안 피구 건빵두 안 먹구 하더니만 아마 이 속에 무에 들어 있는가 봅니다…… 내가 먼지 죽을 줄만 알았는데 이런 걸음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마침 휴가를 얻은 김에 찾아왔읍니다……”
천숙의 손에 들어온 큰 봉투는 밀봉한 것이 아무도 뜯지 못하게 생겼다. 가슴이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아무리 자제하여도 목에서 새어 나오는 오열(嗚咽)을 어쩔 수 없었다. 머리를 숙인 천숙의 두 어깨가 희미하게 떨린다. 아랫목에 앉은 어머니도 옷고름으로 눈을 닦는다. 묵묵히 앉아 있던 병정의 눈에도 눈물이 감돌았다. 그는 얼른 일어서 배낭을 걸머지고 머리만 꾸뻑 숙이면서 입을 머뭇거리다가 그냥 말을 못하고 나가 버리자 석양이 비친 창에는 주먹으로 눈을 닦는 그의 그림자가 비쳤다.
한참 뒤에 진정한 천숙은 정신을 가다듬어 가며 봉투를 조심조심 뜯었다.
사변 전 종로 2가의 어떤 사진관에서 자기와 찍은 사진 한 장과 편지 한 장과 미화(美貨)를 싼 흰 종이 봉투가 들어 있고 흰 봉투 위에는 연월일과 금액이 나란히 척혀 있었다. 1불부터 시작하여 50센트, 10센트 짜리가 제일 많고 최고가 5불, 마지막 날은 전사한 전날인데 3불로 적혀 있었다.
천숙은 편지를 열었다.
저는 이 편지가 천숙씨의 손에 들어가는 운명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운명과 싸우고 있읍니다마논 만일을 위해서 몇 자 적어 둡니다.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은 항상 저를 지켜주었고, 가장 처참한 환경, 오히려 죽음을 택하려는 가장 괴로운 순간에도 정다웠던 과거의 추억과 천숙씨의 아낌 없는 정성은 저에게 용기를 북돋아 오늘에 이르게 하였읍니다. 흐린 세상에도 마치 밤하늘의 별같이 빛나는 천숙씨의 높고 맑은 심정은 길이 광망을 남길 것입니다. 부디 자애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쓰라린 과거를 거울삼아 천숙씨가 걸어가실 가시길에 조금이라도 괴로움을 덜어주는 계기가 될까 하여 푼푼이 여기 넣어 둡니다.
편지 위에 눈물이 수없이 떨어지다가 천숙은 마침내 목 놓아 울었다.
어머니도 천숙의 잔등을 어루만지면서 울었다.
천숙은 고개를 들고 낯을 닦으며 일어섰다. 문을 열고 한없이 멀리 바다를 보고 섰던 천숙은 힘있게 돌아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흰 종이에 사직원을 쓰기 시작하였다.
사 직 원
금번 일신상 사정으로 인하여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가하여 주시기를……
천숙은 붓을 멈추고 생각하다가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다시 썼다.
(사 직 계)
소위 회사라는 귀 도당의 파렴치적 모리적 망국적 반민족적 파괴적 행위에 도전함에 앞서 이에 퇴직을 계출함.
년 월 일 남천숙
―모리도당 두목 차균 귀하
붓을 놓고 천숙은 눈을 감았다.
이리와 양의 무질서한 싸움이다.
온순한 양은 피를 흘리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이리떼는 껄껄 웃는다. 피묻은 앞발로 양을 후려갈긴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겨 보려무나.
천숙은 퇴직계를 찢어버리고 문을 나섰다.
불붙는 증오심에 얼굴은 상기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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