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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14-18▪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4-18)
설교작성 노트
본문은 베데스다 못 가에 누어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이다. 이 표적은 무엇을 증거하기 위한 표적으로 사용되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본 설교 작성의 주안점이다. 본문을 관찰해 보면 두 가지를 들 수가 있다.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 그 사람이 <누구냐>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첫째요, 둘째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하신 그 분이 하시러 온 <일이> 무엇이냐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강론
요한복음서는 그대로 기록 목적을 분명히 밝혀 두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요한복음)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이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주어진 본문에서는 그 목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요한 복음은 앞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주님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들 중에서 7가지 표적만을 선별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은 세 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그곳에는 각색 병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것은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 소문을 인정하고 있다고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소망 없는 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곳에 모인 병자들의 대표자(고참이므로)라고 할 만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공교롭게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른다)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 하여 핍박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록 목적에서 이미 밝힌 바대로 이 표적을 통해서도 첫째는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들어내고 둘째는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성경의 의도일진대 우리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은 예수를 누구로 증거하고 있는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12절에서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하고 이 점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다
1-16은 표적을 행하신 기록입니다. 그런 후에 17절 이하에서는 그가 누구인가를 명백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고 대답하심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히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23의 일곱 절 속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여덟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23)고 말씀합니다.
또 주목하게 되는 것은 31-39의 아홉 절 속에는 “증거”라는 말이 무려 12번이나 강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36)하십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기 위하여 이 표적을 행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점은 히브리서 2:4에서도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욱 심각한 쟁점이 된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단순한 율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18)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는데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과 동등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표적을 통하여 들어내고자 하는 첫째 증거입니다.
영생을 주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이제 두 번째 기록 목적인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24절에서 이를 밝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은 기록목적에서도 밝힌 바대로 요한 복음의 일관 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3:36)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5:24)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6:47)하고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영생을 얻었고 영생을 가졌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보다 어떻게 더 증거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40)고 책망하십니다. 이것이 이 표적을 통하여 증거코자 하는 두 번째 목적입니다.
안식을 주시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9-10)고 힐난을 합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종교인”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38년이나 자리에 누어 있는 이 병자에게 안식이 있습니까 그에게 안식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 동안 매어 종노릇하는 자”(히 2: 15)에게 무슨 안식이 있겠습니까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이 있었습니까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안식일”을 명한 것은 유월절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해방된 이후에 주어졌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것을 “안식”(安息)을 주셨다(수 21:4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말은 두 번째 대지에서 상고한 “영생을 주시려 오신 예수”라는 주제 속에 함축되어 있는 뜻입니다. 영생을 얻음으로만이 진정한 안식이 있고 안식이란 영생에 들어감으로만이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이라는 주제가 성경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기에 항을 달리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 앞에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6)고 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질문다운 질문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낫고 싶지 않은 병자가 어디 있으며 오직 낫겠다는 희망 하나를 품고 여기 이토록 오래 누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데서 안식을 찾고 있는 그에게 바른 안식을 주시고자 하는 전도(傳道)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38년이 아니라 380년을 누어 있다고 해도 그에게 진정한 안식은 주어지지 않음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그는 헛된데서 안식을 찾으려고 했던 셈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안식을 주시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8년이나 병마에 매여 있던 이 사람을 병에서 놓여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에게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그에게 안식을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안식) 하리라”(마 11:28)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5-16)
3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하나님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풀어 안식을 주는 것이 잘못한 일이라는 말이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선포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 27) 이는 가히 혁명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뒤집어 놓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의 안식일에 대한 관념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38년 동안 매여 있다가 고침 받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 하다고 비난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여 주신 진정한 정신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 선포하십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여 주신 분이요 안식일에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면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요,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는 강력한 뜻인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심은 안식을 주시러 오실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를 대망(待望)하라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에서는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8-9)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여 정착하게 한 안식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예표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안식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 33:2)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인류의 시조가 범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첫 창조의 안식을 취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창조의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단의 노예가 됨과 동시에 깨졌던 것입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닙니다만 여러분의 자녀가 폭도들에 의하여 납치되었다면 여러분의 가정에 안식이 유지되겠습니까? 아니 탕자의 가정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성취해 오신 <일>이 무엇입니까? 구속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잃었던 안식을 회복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 될 때에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안식이 회복되게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도 안식에 들어가시게 될 것입니다.
모세도 이를 알았기에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 창조 원리(이레 되는 날 쉬셨기 때문에)에 의해서가 아닌 구속원리(출애굽)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란 안식일을 지킴으로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신 시대요, 안식일의 주인이 오셔서 회복하여 주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이 오셔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심”(히 2:14-15)이 가능하여진 “안식 후 첫날” 즉, 부활하신 날(주일)에 모여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일이었던 것입니다(행 20:7).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에게 매여 일생 동안 종노릇하는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시러 오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였을 뿐입니다(골 2:16-17). 우리는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붙들고 있는 것이며 의문이 아니라 주인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 2:14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고 그 어리석고 헛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주일이냐로 논쟁하면서 거기에 마치 영생이 있는 것같이 열을 올리는 것은 “머리”가 아닌 “꼬리”를 붙잡고 있는 일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오셔서 진정한 안식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도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는 붙들지 아니하고 안식일이라는 겉껍데기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심령 속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하신 평안의 안식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하신 대로 기쁨을 빼앗기지 아니하였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증거하십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일을 하시러 오셨는가를 알려 주십시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잃었던 안식을 회복하도록 하십시다.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 가정에 심신의 피곤함을 쉴 수 있는 안식이 있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에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는 안식이 있습니까?
이 안식이 파괴당하지 아니 하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지켜야 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참 안식을 위해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함을 깊이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