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희경 산문집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달, 2022)을 읽고
서점 주인은 항상 부러웠다. 서점 특유의 빛과 품어져 나오는 종이책 냄새와 잔잔하게 깔린 음악, 손님들은 공들여 책을 고르고 있다. 거기다가 커피 한 잔을 권하는 서점 주인과 은은한 커피 향까지 더한다면 정말 딱 맞다 싶은 서점 풍경이다. 1953년에 시작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동양서림은 혜화동에 있다고 한다. 그 2층에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 있다.
올해 5년이 되었다는 시집만 전문으로 파는 시집서점에 가려면 읽기만 해도 낭만적인 나선형 계단을 올라야 한단다. 심지어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소리와 함께 동그랗게 파인 부분으로 머리부터 몸체가 나타나는 사람의 등장을 반기는 떨림으로 기다리는 서점주인이 무려 시인이다. 그것도 유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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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시인은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오늘 아침 단어』, 『이다음 봄에 우리는』의 시집에서 자유롭고 완곡한 시들로 인상깊었던 시인이다. 이번에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으로 시집서점에서의 일상을 통해 서점을 오가는 사람들과 서점을 아끼는 마음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마땅한 약속 장소가 없었던 시절엔 당연하듯 서점이 약속 장소였다. 빼곡한 책들 앞에 빼곡한 사람들 속에서 약속 시간이 한두 시간씩 늦어져도 지루할 틈 없는 서점에 있는 시간은 늘 좋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선 채로 책을 읽었고, 누군가를 기다렸으며 자기가 읽을 책이거나 만날 사람에게 선물할 책이었을 그런 책들을 고르는 일들이 행복해 보였다.
'위트 앤 시니컬'에는 시인이 주인인 관계로 수많은 시인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 선물 받은 소품들과 인형과 머그잔, 책장과 궁리 책상, 화분의 식물들 등 시인들의 숨결이 언제나 떠돌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일삼아서 꼭 한 번만이라도 그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문을 나서기까지 내가 마땅히 머물 곳, 아무 때나 찾아와도 안심할 수 있는 그런 곳” 기꺼이 ‘자리’가 되어 주고 싶은 넉넉한 마음의 키다리 아저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그런 ‘자리’가 되기로 한다. 느리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와서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해낸다. 친구 시인들의 생각과 마음을 보태고 그의 성공을 빌어주는 모습들도 행복해 보였다.
서점을 드나드는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단 한 사람도 나쁘거나 서운하게 한 사람이 없다. 5년 동안 지켜 온 서점에서 어찌 마음을 불편하게 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런 사람들마저 품어 안아 좋은 생각으로 바꿔서 기억한다. 넉넉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시인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곁에 캔 커피를 품에 안고 온 친구, 서점일지를 읽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 또한 부러운 일이었다. 그도 아마 멋진 시인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서점 한 곳에 어린이들을 위한 코너를 만들고 싶다는 계획이 제일 반가웠다. 시집서점은 이미 성공했으니 내가 서점주인이라면 어린이들도 함께 갈 수 있는 책방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니, 그런 그림을 그리며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역시나, 서점주인도 그런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어린이가 책 속에 집중하는 모습이 “내가 서점을 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고백한 그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시집서점을 하면서 서점의 보물은 낭독회라고, 가장 큰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시를 좋아하게 될 사람들”이 온다고 확신하는 낭독회에 나도 꼭 가고 싶었다. 독자로, 아니면 꿈으로나마 무대에서 나의 시를 낭독하는 시인이라면 더없이 행복하겠다. 아니면 책장에 기대 그 모든 감동적인 장면을 호흡 참아가며 미소로 지켜보는 사람이면 좋겠다.
일년 중 하루도 쉬지 않는다는 서점은 시인의 일터이다. 쓸고 닦고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궁리하며 가꿔가는 곳이다. 서점주인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워낙에 선망의 대상인 서점주인인지라 약간의 투정들도 모두 부럽고 말았다. 다만, 고단한 그가 힘들지 않았으면, 조금 더 힘내서 웃는 일들이 더 많기를 간절히 빌게 되었다. 그의 곁에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 안심이 되었다.
서점에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껏 구름을 들여놓고, 비와 낙엽, 눈이 오는 풍경들이 몇 차례 지나갔고, 책을 고르는 독자와 독자들의 사연을 기록하는 서점일지가 있고 매일 아침 연필을 깎으며 고운 하루를 기록할 준비를 하는 시간이 있다. 서점을 오가는 손님들과 주변 사람들과 오가는 정으로 서점은 완성된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아니, 그처럼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는 선물 같은 곳이다.
책을 읽는 내내 부러워하던 서점 지기가 되었다가 시집을 골라 읽는 손님이 되어 보기도 한다. 서점의 부드러운 책장이 되었다가 소품들이 되어 보기도 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그 서점에 머물다 나온 것 같다. 내 것도 아닌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내 마음대로 가슴 가득 품어 보았다. 부러운 공간을 가진 서점지기가 한없이 부러운 시간이었다.
열 평 남짓 된다는 ‘위트 앤 시니컬’의 책들이 날개를 달고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가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넓고 큰 서점이 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마냥, 좋기만 한 일이 어디 있을까만 어려움들은 뒤로 하고 보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세상 어딘가에 한 명쯤 그런 일에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그도 그곳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일들을 더 자주 만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