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4,15 이틀간 중고등학교 축구 응원차 제주도에 들렀다가 옛날이 생각나서 적은 글입니다.
제 주 도 회 상
제주도에는 36년전인 1970년도 이후로 세미나등 당일로 다녀간 이외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림에 들르니 문득 그때 일이 생각나서 두서없이 적어본다.
나와 클라스메이트인 신강균(현 한림대 교수)이는 일학년때부터 여행을 좋아하여 25일간에 걸친 전국무전여행을 비롯하여 수도 없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많은 경험들을 토대로 하여 1970년 여름방학엔 10일간에 걸친 제주도 여행을 기획하게 된다. 배낭에 무전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7월 어느날 제주도로 가기 위해 호남선 완행열차를 탔다 목포에 도착하니 빌리호태풍이 올것이라는 기상대예보로 제주행 가야호(450톤급)가 출발을 늦추고 있었다.승객들의 성화에 못이겨 어찌어찌하여 가야호는 제주도로 출발하게 되고 배는 약간의 바람을 맞으며 제주도로 향하였다. 중간지점에 이르니 아니나 다를까 바람은 거세지고 풍랑이 심하게 일기 시작한다.. 난생처음 맞이하는 풍랑이라 신기하여 갑판에 나가보면 어마어마한 파도가 밀려와 물보라는 마스트꼭대기까지 덮쳤다.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배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겁이나 얼른 선실안으로 들어오니 여기 또한 아비규환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젊은 여자가 정신없이 먹은 것을 할머니의 치마폭에 토해내고 할머니는 젊은 여자에게 욕을 해대던 일이다.온통 선실안은 토하는 사람, 이리딩굴 저리딩굴 하는 사람들로 체면이고 뭐고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점점 파도가 거칠어져 배는 제주항으로 가지 못하고 중간 어느 섬인가로 피신하여 정박하였다. 이튼날 파도가 수그러 들자 다시 배는 제주도로 입항하여 정신빠진 승객들을 내려 놓았다. 태풍의 위력이 그렇게 센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수 있다는 생각과 무서운 바다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고 제주시로 들어갔다. 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지방의 모대학생도 우리와 같은 처지라 일행이 되었다.
여행일정에 한라산등정이 들어있어 등산로로 갔지만 태풍 때문에 입산통제가 되어 있어 우선 제주도 일주를 하게 되었다.그때 여행중에 생각나는 것은 협제굴을 구경하고 근처에서 민박을 하였는데 제주도말을 한마디도 알아듯지 못한것과 친절하게 우리 여행을 안내해주던 제주도 아가씨다. 협제굴과 천제연폭포, 만장굴, 성산포등을 거쳐 제주도 일주를 마치고 다시 제주시로 돌아와 우리의 주목표인 한라산등정을 하기 위해 여관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짜는 가고 돈은 바닥나고 입산통제는 해제되지 않고 속이탄 우리들은 입산통제를 무시하고 등산을 강행하게 된다.샛길로 들어서 관음사를 지날때까지는 이정표도 있고 꼬리표도 있어서 휘파람을 불며 신기한 나무도 처다보고 푸른 초원도 처다보고 이따금씩 비춰지는 햇쌀도 쬐며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관음사를 지나 골짜기옆의 등성이에 이르자 갑자기 이정표도 없어지고 나무가 부러져 꼬리표도 없고 빗물에 길의 흔적이라고 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는 쏟아지고 깊이를 알수 없는 옆의 골짜기에서는 물소리가 굉음이 되어 공포심이 덮쳐왔다. 우리 일행 3명은 이 지점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선택을 하게 된다. 올라갈 것이냐? 내려갈 것이냐?.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절벽, 옆을 처다보니 심연을 알수 없는 물보라가 치는 골짜기,내려가다 미끄러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반대하던 한친구를 설득하여 올라가기로 결정하였다.길은 없고 나무들은 점점 작아져 가시가 팍팍 찌른다. 비는 억수같이 오다 멈추면 10미터 앞도 안보이는 안개가 밀려오고 다시 해가 반짝 나고 참으로 변화무쌍한 한라산 날씨였다. 빗물이 몸속까지 스며드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추위를 떨치기 위해 가져간 도끼로 열심히 가시나무들을 베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였다.이렇게 인간세계와 분리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맛보기는 처음이었다. 도끼질에 지쳐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는 친구를 끌고 한발짝 한발짝씩 전진하고 있을 때 햇빛사이로 평평한 초원이 나타났다. 한걸음에 달려가 주위를 돌아보니 주위에 소똥이 군데 군데 보였다. 이렇게 인간이라든가 짐승의 흔적이 반가운 줄을 미처 몰랐다. 우리들은 살았다는 기분에 만세삼창을 부르고 주위에는 분명히 소와 소를 키우는 주인이 있을것이라 추측하여 유심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추측대로 쉽게 소나 소주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시 실망하여 소똥의 흔적을 쫓아 위쪽으로 조심조심 올라갔다. 가시나무는 점점 많아지고 날씨는 추워지고 안개는 짙어지고 이런 상태로 구름속을 헤멘 끝에 우리 모두 기력이 탈진해 평평한 둔덕에 주저 앉아 버렸다.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산의 모습이 드러나고 이어서 산비탈이 나타나고 바닥에는 파란 물이 나타났다. 여기가 어딜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아래 보이는 저수지는 백록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한라상 정상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우리들은 하도 기뻐서 서로를 껴않고 소리를 질렀다. 정상까지만 가면 살수 있다는 생각이 적중한 것이다. 시계는 이때 오후 2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모두 배낭을 짊어지고 비탈아래 백록담으로 달려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백록담 물로 라면을 끓였다. 그 와중에도 백록담에 살고 있는 뱀 한 마리가 찾아와 우리를 맞이해주던 기억이 난다. 기갈이 감식이라고 부른 라면을 맛있게 먹고 다시 산비탈을 올라와 서둘러 하산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비가 다시 퍼붓기 시작하였다.
시계를 다시 보니 아직 3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섯시간이나 늦게 가는 시계를 갖고 다녔던 것이다. 시계를 찬 사람이 한사람뿐이라 탓할 수도 없고 그저 에피소드로 웃어넘길 수밖에.
그때 느낀것이지마는 깜깜한 것도 급이 있었다. 빗속의 한라산 칠흑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후래쉬로는 한발짝앞도 안보여 우리들은 배낭속을 양초를 모두 꺼내 한묶음으로 묶고 불을 붙이니 빗속이지만 꺼지지도 않고 걸을만 하였다. 산길로 흘러내리는 물은 무릅까지 빠지고 비는 그치지 않고 자동차도로인 516도로는 나타나지 않고 이따금씩 허연귀신이 나타나 확인해보면 방목하는 흰말들이었다. 흰옷이라도 입은 처녀가 나타났다면 우리는 모두 졸도하여 살아남지도 못했을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씩 한다. 암혹과 추위와 배고품과 공포에 시달리기를 몇시간, 드디어 우리가 생각하던 아스팔트도로가 나타났다.
지나가는 차가 보이면 무조건 손을 흔들고 태워달라고 구걸하기를 한시간, 마침 영업용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춰서 우리의 해괴한 몰골을 측은하게 느꼈던지 선선히 태워줬다. 무지하게 고마워 연신 고개를 꾸벅이다 어느듯 제주시 여관에 도착하였다. 그때 시각이 아마 새벽 3시쯤 되지 않았울까 생각된다. 우리들은 여관에 들자마자 씻을틈도 없이 모두 잠에 골아 떨어져 제주도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추억의 한페이지로 장식하게 된다.
목포에서 만난 친구는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고 신교수와 나는 각자 군대에 입대하게 되어 우리가 즐겨하던 여행은 제주여행이 끝이다. 지금도 이따금씩 당시에 한라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생사의 기로에 섰던 두사건중 한가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끝"
첫댓글 신 강균 교수와의 멋진 추억이군..... 그 친구 수채화 그림을 꽤나 잘 그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여행을 좋아 하는 지를 몰랐구먼. 알았으면 한 번쯤 같이 여행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여하튼 무식하면 깡다구만 는다구, 죽지 않고 살아 돌아 온 것만 기적일쎄. 산을 절대 가볍게 보면 안되는 것을.... 백운대 산행에서도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않된다네. 내일 결혼식이 아니면, 이번에 도봉산에 산행을 가기로 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