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편 긴 여로
1장 사춘의 상처
생인손의 치료를 받고 환국이 박외과의원에서 나올 때 일이다. 앓는
생인손이 오른편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왼손으로 좀 세차게 문을 밀기는
했었다.
"앗!"
열려진 문밖에서 비명과 함께 휘청거리던 소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세차게 밀어젖힌 문에 얼굴이 부딪친 모양이다.
"미, 미안합,"
사과를 하다 말고 환국은 자신도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도망을
치려는 자세로, 그러나 선 자리에 못박힌 채 시야를 빨아당기는 물체를
응시한다. 그것은 확실히 괴물이다. 소녀의 한쪽 손등에 꾸물거리고 있는
것만 같은 자두알보다 훨씬 큰 혹은 푸른빛과 자줏빛이 얽섞인 울퉁불퉁한
징그러운 형체였다. 환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나 다음 순간 두 손을
등뒤에 감춘 소녀의 얼굴은 거의 잿빛이었다. 크고 뚜렷한 눈동자가
환국이를 노려본다. 그 눈빛은 살기였으며 어둡게 타는 불꽃이었다. 언제
그랬는지 소녀는 병원 안으로 사라졌고 환국이는 병원 밖에 나와 있었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고 차가웠다. 환국은 토할 것만 같은 현기를
느끼며 걸음을 옮긴다. 소녀가 양소림이 아니었던들 기분은 다소 안
좋았겠지만 그 불구자를 위해 가슴이 아픈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충격은
너무나 컸었다. 충격이기보다 일종의 공포였는지 모른다. 순간적으로 느낀
혐오감, 또 계속해 남아 있는 징그럽다는 느낌에 자기 불신,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진주 지방의 일각을 점유한 지주이며 또 한말까지
고관대작은 아니었지만 벼슬길에 있었던 양씨 집안의 딸 소림에 대하여
환국이 알고 있는 것은 서울 K여고를 다닌다는 것뿐이다. 소학교에 다닐
적에는 그를 한 번도 본일이 없었다. 서울에서 소학교를 다녔는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방학이면 간혹 정거장에서, 진주거리에서 한두
번인가 그 소녀를 본 일이 있었다. 지난 겨울방학, 그러니까 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상경했을 때다. 기차를 탈 적에는 보지 못했는데 서울역 플랫폼에
내려서 몇 발짝이나 걸었을까? 트렁크를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 두 손을
외투 호주머니 속에 찔러넣고 서 있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가
양소림이었던 것이다. 때때로 장서방이 서울을 내왕했으므로 필요한 것은
날라다주었고 또 대개는 임교장댁에서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늘
홀가분하게 책과 옷 한 벌 정도로 귀성하고 상경했던 환국은 마음속으로
'저 가방이 무거워서 저러고 있는 걸까? 좀 들어주겠다면... 그랬다가
화라도 내면 어떡허지?'
땅바닥에 놓인 가방이라는 것도 실은 과히 큰 것은 아니었다. 환국이
망설이며 서 있는데 갑자기 양소림은 장갑 낀 한쪽 손을 번쩍 쳐들었다.
"...?"
감색 양단 두루마기를 맵시 있게 입고 진갈색 여우 목도리를 두른 젊은
여자가 사람 속을 헤치며 웃는 얼굴로 다가온다. 품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화장이 짙었다.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서, 엇갈릴까 싶어서 혼났단 말예요."
투정부리듯 소림이 말했다.
"좀 늦었구나. 어이구 이 애기, 혼자 오면 누가 업어갈까 봐서?"
환국이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여우 목도리의 젊은 여자가 환국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여자의 시선을 쫓아서 소림이도 되돌아보았다.
"어머!"
검정 외투 위에 둥글고 눈매가 뚜렷한 소림의 흰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볼에서 귀밑 뒤에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대하기론
처음이지만 소림의 당황하는 태도는 의외였고, 반사적으로 환국이도
걸음을 옮겨놓는데 발바닥이 땅에 닿는 것 같지가 않았다. 소림의 태도는
환국이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 것이다. 허둥지둥
걷는데 뒤에서 여우 목도리의 여자가
"누구니? 너 아는 학생이냐?"
하고 묻는다. 소림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알기는, 진주 최참판댁,"
"아드님이냐?"
"..."
"그래애? 애들도, 서로 알고 지낼 만한 집안끼린데 그리 놀라자빠질 것
뭐 있니?"
"이모도 참, 제발 떠들지 말아요."
낄낄낄 웃는 여자 웃음 소리,
"아, 아야! 이애가?"
소림이 꼬집은 모양이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 없이 그들도 뒤따라 걷는
기색이다.
"아니, 저기 저분은, 아이구머니나, 언니!"
환국은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여우 목도리의 여자는 소림을 이끌고
대열에서 빠져나간다. 여자를 향해 잠시 손짓을 한 사람은 명희였다.
명희는
"환국아!"
하고 이번에는 환국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다.
"아주머니, 웬일이지요?"
환국이 다가가며 묻는다.
"응, 평양 가시는 친척 전송하러 나왔는데 네가 온다기에 널 데리고
효자동 가마고 했다."
"그럼 전 밖에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환국은 어리둥절해하는 여자와 민망해하는 소림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러겠느냐? 차가 있으니 그 옆에서 기다려라."
소림의 이모가 소림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명희는 환국에게
다정스러웠다. 임교장댁에 사 년 넘게 묵는 동안 이따금 친정에 들르는
명희는 조카들보다 오히려 환국이를 더 사랑했었다. 환국이 역시 이모나
고모처럼 명희를 대하게 된 것이다. 환국이 조병모 남작댁 자가용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니 기차가 떠나는지 기적이 울렸다. 겨울방학은
끝났어도 겨울은 아직 머물고 있는 서울의 거리, 환국은 얼마 전 소림을
보았을 적에 그 강렬했던 느낌과 소림의 모습이 가위로 잘려진 듯,
우중충한 서울의 거리,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을씨년스런 모습만
의식에 실려온다.
'왜 그 기차에서 내렸을까. 기차로 곧장 갔으면 아버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을...'
언제부터였던지 환국이는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에 나오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임교장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고 싶다 했을 때 공부해야지,
서의돈아저씨는, 부친을 찾아가기엔 나이 어리다는 말을 했었다.
"오래 기다렸지?"
회색의, 거의 발끝까지 내려온 망토를 입은 명희가 다가왔다. 여우
목도리의 여자도 함께, 그리고 소림은 주춤거리듯 뒤따라왔다.
"어쩌면 저리 조각을 한 것같이 잘생겼수?"
명희를 보고 소림의 이모는 환국이를 칭찬했다.
"조각 같다는 건 칭찬으로 안 들리는데?"
명희는 웃는다.
"아니에요 언니, 저런 아들만 하나 둔다면 결혼한 것도 과히 밑지는 일
아닐 거예요."
"환국아."
"네."
"이분은 내 후배 홍성숙 씨, 성악가시다. 인사해라."
환국이 꾸벅 절을 한다.
"얘기를 듣고 보니 저 여학생도 진주서 왔다는데 서로 안면은
있겠구나."
이번에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으나 소림의 눈에 겁이 더럭 실렸다.
반대로 환국의 목덜미가 벌개진 것이다.
"그럼요 언니, 얘들이 아직 순진해서, 서로 알 만한 집안인데 말예요.
최참판댁 아드님도 잘생겼지만 우리 소림이도 좀 예뻐요?"
했으나 말을 끝낸 홍성숙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소림은 달아나듯이
돌아서다 말고 이모의 팔을 꽉 끼는 것이었다.
"성숙이 함께 타서 가지, 응?"
"그랬으면 좋겠는데 방향이 다른걸요."
명희는 다시 권했으나 홍성숙은 굳이 사양한다. 자동차가 떠날 때
환국의 눈은 소림의 겁먹은 눈과 부딪쳤다.
"환국이 너 이제 보니 상당히 부끄럼쟁이구먼. 그래 어머님은
안녕하시냐?"
"네."
"집에 별일은 없고?"
"별일 없습니다."
그날 밤 환국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새카만 외투 위에
마치 복사꽃이 핀 듯 새빨개졌던 소림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간다는 것에 다른 또 하나의 의미와 새로운
기대를 가졌었는데, 그 몇 달 동안의 꿈이 박외과의원 문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동경에 대한 배신, 그리움에 대한 배신, 양소림에
대한 배신, 환국은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양소림에 대하여 실망했다고
간단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그 끔찍스런 결함을 몰랐기 때문에
기만당한 것 같은 기분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방금 느낀, 지금도 느끼는
혐오감은 진실에 대한 배신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 소년을 담은 거울이 길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형!"
환국은 듣지 못하고 그냥 걷는다.
"형!"
겨우 돌아본다. 수건과 수영복을 똘똘 말아쥐고, 남강에서 수영하다
돌아오는가 윤국이 다가온다.
"병원에 갔다 오는 거요?"
"응."
"손가락이 몹시 아파요? 얼굴이 노오래."
"..."
"참, 형."
"왜 자꾸 불러."
"강에서 순철이형 만났수."
"그래서."
"형 안부 물으면서 한번 놀러 오겠다나요?"
"그래?"
새까맣게 탄 윤국은 형의 눈치를 힐끔 살핀다. 네 살 터울인 윤국이는
올해 열세 살, 두 아들을 다 서울로 보내기가 안됐던지 윤국이는 금년
이곳 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니까 환국이와 함께 서울K중학에 시험을
쳤다가 낙방한 이순철은 서울 진학을 단념하고 이곳 중학에 들어갔으니까
윤국에게는 상급생이다.
"형은 아직도 순철이형하고 감정이 안 좋아?"
"안 좋을 게 뭐 있니? 잘 만나지도 못하는데,"
"순철이형 우리 학교에선 이거요."
윤국은 엄지손가락을 내보인다.
"실력이 있으니까."
"공부도 잘하지만 기운도 세거든요. 장사같이 몸집이 커요."
"너한테는?"
"잘해주느냐 그 말이오?"
"응."
"그 형은 오학년이구 나는 일학년인걸. 잘 만날 수나 있나요? 하지만 나
순철이형 과히 싫지 않아. 씩씩하고 공부도 일등하는걸. 형한테는 못
당하겠지만 그 대신 힘이 세거든요."
"힘센 게 좋아?"
건성이다. 건성으로 묻는다.
"남자라면 힘은 세야지요. 형, 나는 장차 검사가 될래요."
"뭐라구?"
"나쁜 놈들 혼쭐 내주게요. 사정 안 둘 거예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어쩌고,"
"그때까지 우리가 독립하면 될 게 아니오?"
"기가 차서,"
환국은 하는 수 없이 웃는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힘이 있는데도 모범생 아니라 할까 봐서
나쁜놈하고 싸우려 안 하는 놈이 있는데, 나는 그런 비겁한 자식은 싫어."
"힘만 가지고 싸운다고 이기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맨날 강에 가서
사니까 어머님이 걱정하시잖아."
"강에 간다고 뭐 공부 안 하는 줄 알아요?"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굉장히 엄하시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으시면서,
우리들한테는 잔걱정을 하시니까 그렇지."
"그게 어째서 이상하니?"
"대개 사람들은 약하거나 강하거나 좋거나 나브거나 어느 한편, 안
그래요, 형?"
"글세..."
"맥빠지네. 형은 너무 착한 게 탈이란 말이오."
"건방진 소리 마."
"남들이 다 그러던걸?"
"바보라는 얘긴가 부지."
"학자밖엔 못될 거래요."
"그렇담 바보라는 얘기는 아니구먼."
"어이구 배고프다."
형제는 집 앞에까지 와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집안으로 들어간다.
"도련님, 점심도 안 드시고 여태 강가에 계셨드랬어요?"
안자가 나오며 묻는다.
"배고파서 빵은 사먹었지만, 밥 빨리 차려주어."
환국은 아무 말 않고 사랑으로 들어간다.
"목간통에 가셔서 몸부터 씻고 나오셔야지요."
"귀찮아. 안 씻으면 어때서 그래?"
"피부병 옮아요."
책상 앞에 앉으며 환국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빡빡 문지른다.
'어째서 그럴까? 병원에서 수술로 잘라내버릴 수는 없는 걸까?'
책상 위에 팔을 얹고 그 팔 위에 턱을 고인다. 독서로 인한 지적 수준은
상당한 높이에 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이는 나이다. 환국이는 계속
자신을 미워하는 감정에만 사로잡힌다. 그리고 계속 착각하는 것이다.
끔찍스런 그 혹을 본 뒤 혐오를 느꼈다는 것이 큰 배신이라고. 마치
소림을 깊이 사랑했던 것처럼, 둘이 서로 같이 사랑하다가 양소림을 버린
것처럼.
이튿날 새벽, 볼일이 좀 생겼다면서 유모를 데리고 부산으로 떠나는
어머니를 전송한 환국은 돌아오면서
"무슨 일일까?"
궁금하고 일말의 불안도 있었으나 전에도 더러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그러려니 했다.
환국은 반나절을 낙서도 아니요 그림도 아닌, 얼굴이며 손이며 발이며
그런 것을 그리며 보낸다. 생인손은 아물 단계이긴 했지만 박의사는 내일
한번 더 오라 했었다. 그러나 환국은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다시는 그
병원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거리에도 나가기가 싫었다. 거리에 나가면
양소림을 만날 것만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만일 내가 양소림하고 결혼한 사이라면? 그 혹 때문에 도망쳤을까?
도망쳤다면? 그래, 그건 성한 여자를 버리는 것보다 더 못할 짓을 한 게야.
눈을 감고 뒤통수를 감싸고 달아나는 남자처럼 못나고 겁쟁이고 비정한 게
또 있을까? 바로 내가 그런 놈이다. 절대로, 절대로 양소림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두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환국은 주먹으로 책상을 꽝! 친다.
'어디로 달아날까? 어머님을 따라 함께 부산으로 갈 걸 그랬나? 아니야,
하동에나 갈까, 섬진강에서 낚시질이나 할까?'
더 이상 그려볼 수 없게, 새까맣게 된 종이를 뿍 찢어버리고, 새
얼굴같이 하얀 종이에 다시 얼굴이며 손이며 발이며 그런 것을 계속
그리며 하얀 여백을 메워나간다. 그린다는 의식도 없이 쭉쭉 선을
그어나간다.
저녁때가 거의 가까워졌을 무렵
"형! 형!"
하며 윤국이 소란을 떨며 사랑으로 들어온다.
"나와봐요, 형! 순철이형 오셨수!"
환국은 본능적으로 화닥닥 몸을 일으킨다.
"환국아!"
완전히 변성을 해버린 우렁우렁 울리는 음성이다.
"순철이 네가 웬일이냐!"
우울했던 환국이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순철도 씩 웃는다.
"수영하다가 만났어요."
윤국은 쫑알대듯 말한다.
"임마, 니는 꺼져라."
순철은 윤국이 머리에 알밤을 먹이는 시늉을 한다. 윤국은 낄낄거리며
쫓아나간다.
"들어와."
"응."
방에 들어온 순철은
"오래간만이구나."
"앉어."
순철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앉는다.
"니는 변함없이 약골이고 꽁생원이구나."
환국이 피식 웃는다.
"하기는 내 대가리를 깬 놈은 너밖에 없다마는."
"미안하다."
"그거 다 한때 앙이가. 자라느라고 그랬일 기다. 하기는 그랬기 때문에
너한테만은 내가 경의를 품고 있지. 하하핫 하하하하... 이기기만 한다믄
무신 재미가 있겠노."
"이기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어."
"니도 지는 성미는 아니제. 그는 그렇고 배고파 죽겠는데 머 나오는 것
없나?"
"저녁 차리라 할까? 좀 이르지만."
"널 만냈으니 술 한잔 하고 싶네."
"뭐? 너 술 하나?"
"와? 남아 대장부 열여덟이믄 어른이다."
"나는 아직,"
"뻔한 일이지 머,"
하다가 순철이는 "윤국아, 윤국아!"
하고 큰 소리로 부른다.
"네에!"
윤국이 달려온다.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너 말이다아, 소주 한 병 사오너라. 몰래, 알았나?"
"소주를요?"
"허허 참, 이래서 이 집엔 오고 싶지 않았다. 윤국아, 동생은 형을 위해
봉사하는 게야. 돈 주까?"
"있어요."
갑자기 신이 난 듯 쫓아 나간다.
"걱정 말아. 내 주정 안 하께. 도둑술을 배워서 이래도 술버릇은
얌전하다. 생각해봐. 모범생은 아니지만 나 우등생이야. 우등생 체면이
있지. 하하핫..."
"하긴 그래. 네가 여태 술을 안 배웠다면 그게 이상하지."
환국이는 밖으로 나가 안자를 부른다.
"친구가 배고프다니까 저녁상 빨리 차려주어요."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는 그렇고 명년에는 우리 진학해야 하는데 환국이 너 우짤 것고?"
"또 한번 머리 깰려고 이러나?"
"이번엔 너 따라 안 간다. 넌 작정했나?"
"아니,"
"그럼?"
"차차 의논을 해야지."
"지가 가는데 지하고 의논하믄 되는 기지."
"글세."
"나는 집에서 경의전 가라고 하는데 의사는 취미 없다. 의사가 싫으면
고등상업으로 가라, 그것도 취미 없고 정통 코스를 밟고 싶다."
"...?"
"내 지망은 법과다. 고등학교냐 대학교 예과, 어느쪽을 택하는가 그거는
생각중이지만, 넌 어느 과로 가겠나? 우리 다시 경쟁하자, 좋은 뜻으로.
서로 자극을 받는 건 나브지 않지. 넌 명문 중학의 학생, 난 지방이지만,
실력이 문제 아니겠나? 대학만은 내 세상없어도, 아카몬 아니면
경도제대라도 들어갈 작정이다. 넌 우짤래?"
"나는, 어머님이 반대하실 것 같아서 아직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미술을 할까 싶어."
"뭐라구? 임마, 니 정신 있나?"
"소질대로 하는 거지 뭐."
"맥빠지는 소리 집어치아라, 환쟁이 될라고 니 명문 중학에서 일이 등
했나?"
그 말은 순철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환국이 자기와
꼭같은 코스로 갈 것을 믿고 있었던 눈치다. 사실 환국이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속으로 은근히 고민해온 터이다. 주변에서는 거의가 다 순철이와
같은 기대를 하고 있었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내 성격이, 활동적이 못되거든."
"공부하는 데 활동이 무신 상관고."
"공부에 그치는 일이 아니잖아."
"젠장, 해놓고 보는 거지."
"적성에 안 맞으면 허송 아니겠어?"
"그렇담 니는 아주 딱 작정을 했구나."
"..."
"형, 형, 술 사왔수."
윤국이 방문을 조금 열고 소주병을 디민다.
"저녁상 차리라 했으니 윤국이 넌 아무말 말어."
윤국이는 낄낄대며 재미가 나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나간다.
"너 동생은 딴판이다."
"그앤 공격적이지, 늘."
"자식이, 한자리 하겠어."
"한자리 하면 뭘해. 나라 없는 백성이,"
"너 그래서 미술하겠다는 건가?"
"반드시 그런 건 아니야. 그림이 좋으니까,"
"좋다고 업을 삼는다믄 난 씨름꾼이 돼야겠구나."
저녁상을 가져오는 모양이다. 밖에서 기척이 났다. 순철이는 얼른 술병을
들어 책상 밑에 감춘다.
"이력이 나서 잘하는구나."
환국이 웃는다.
"아이구, 도갓집 도련님 오셨네요."
안자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찾아온 것을 반가워한다.
"이거 미안합니다."
순철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잘 오셨수."
"상이나 어서 디밀어주소. 배고파 죽겄거마는,"
상을 내려놓고 안자는
"사람은 열두 번 변성한다는데 참말 많이도 변했어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안 있십니까?"
모두 웃고, 그리고 안자는 나갔다. 한 살의 차인데도 순철의 사람을
대하는 품은 아주 능숙했다.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자란
탓인가 보다. 그러나 내면적 성장은 환국이 편이 훨씬 빨랐고, 문제를
세분해가는 치밀한 면과 풍부한 정서는 순철에게는 아득한 것이다.
밥상을 당겨놓고 책상 밑의 술병을 꺼내려던 순철은 책상 위에 그려젖혀
놓은 그림을 본다. 한 장을 슬쩍 집어든다.
"아서, 낙서한 거야."
"허어, 낙서가 이만하믄 진짜 그림은 기차겠구나. 알 만하다, 이걸 보니."
"어릴 적부터 그렸거든."
"그런데 이 얼굴은... 아아니, 이 얼굴은 양소림이 아니가?"
"뭐라구?"
"응, 양소림이다! 이 손, 손은,"
"어디 보아!"
환국이 종이를 획 낚아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다. 그려놓은 손등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괴물, 그
징그러운 혹, 순철이 낯빛도 달라졌다.
"너 양소림하고 알고 지내나?" 대답 없이 종이를 확 꾸겨 쥔다.
"알고 지내느냐고 물었다."
"몰라!"
"그러면 어떻게 그림으로 그렸나?"
"어제, 병원에서 봐, 봤거든."
환국은 궁지에 몰린 듯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서울을 함께 오르내리면서..."
순철이는 하다 말고 눈살을 잔뜩 찌푸린다.
"먼빛으로 보기는 했지만,"
"불쌍하게 생각했나?"
"..."
"불쌍한 애다. 얼굴이라도 못생겼다면 얼마나 좋았으까."
"..."
"앞날이 불행할 거다."
"수술이 안 될까?"
"수술해서 될 일이라믄 아무도 혹 붙이고 다닐 사람은 없제?"
"..."
"술이나 마시자."
제법 주호같이 말했으나 사기 밥그릇의 뚜껑에다 술을 붓는 순철의
행동거지는 매우 서툴다. 환국이는 난생 처음 밥그릇 뚜껑에다 부어주는
술을 정신없이 들이마신다.
"사양도 않고 마시네? 처음 아니가?"
"처, 처음이다."
속이 타는 듯했다. 쓰고 뜨거운 맛이 입안에서 창자로 타고 내려 간다.
"술이란 급히 마시면 안 된다."
순철은 자신도 뚜껑의 술을 비우고 나서 이번에는 환국의 뚜껑에다 아주
소량의 술을 부어준다.
"순철아."
"와."
"넌 나보다 인간성이 좋은갑다."
"그건 무신 소리고?"
"나는 아찔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달아나고 싶었다. 그런데 넌 불쌍한
애라 했지?"
"그, 그거야, 나는 양소림이를 짝사랑했거든. 그애 때문에 밤잠 설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알고서 그랬나?"
"몰랐지."
"알고 나서는 그애를 잊었나?"
"잊고 자시고가 어디 있노? 양소림은 나한테 관심 없었다."
"관심 있다면?"
"관심 없었어!"
순철이는 괴로운지 술을 마신다.
"젠장, 도둑술 마시려니 이 술잔이 멋꼬?"
하다가
"실은 집안도 좋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나한테는 넘치는 상대거든, 그
손등만 아니라믄. 그래서 우리집에선 혼인 문제로 말이 많이 있었다. 우리
또래에 장가간 사람 많거든. 명년 봄엔 졸업이고 양소림도 사년제니까
졸업이지."
"그쪽 집에서?"
순철은 고개를 저었다.
"집안에서 애기가 다 돼가다가, 어머니가 고개를 흔든단 말이다."
"너는?"
"불쌍해. 양소림이는 서울 외가에서 소학교를 댕깄기 때문에 그 손등에
대해선 모리는 사람이 많다."
순철은 딴전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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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토지
[박경리] 토지(3부/2권/4편) 1장 사춘의 상처
黎明 김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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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24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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