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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 (? ~ 1135) 정심(淨心)이라고도 한다. 서경(西京: 平壤) 출생.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白壽翰)을 통하여 근신(近臣)들과 접촉, 도참설(圖讖說)을 이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1127년(인종 5) 왕실 고문으로 추대되자 왕의 서경 거둥을 주청하여 실현하고, 당시의 혼란한 내외정세를 이용, 개경(開京) 출신 구신(舊臣)들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서경천도(遷都)를 획책하였다. 1129년 신궁을 낙성,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청하고 금나라 공략 등을 건의하였으나 김부식(金富軾)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34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三重大統知漏刻院事)에 오르고 왕에게 천도를 계속 주청하였으나 불가능해지자 1135년 서경에 기반을 두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여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을 조직,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원수(元帥) 김부식에게 섬멸되고 묘청 자신은 부하 조광(趙匡)에게 피살되어 개경에 효시되었다. |
*서경천도운동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은 15세에 즉위하였으므로, 국내가 어지럽고 민심이 동요하여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풍조로 불안해진 국내정세와 유행하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한 묘청은 인종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국수주의적 입장에 서서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開城)에서 고려조 중흥의 명당인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나라 밖에서는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가 고려를 엿보고 있어 불안한 정세를 자아냈고, 나라 안으로는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자기의 셋째·넷째딸을 인종에게 바쳐 세력을 확대시켜 대권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을 품고 난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은 더욱 더 기강이 어지러워졌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였다. 원래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시인·문신(文臣)인 정지상(鄭知常)이었는데,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과 더불어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복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여, 왕의 측근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설득시켜 묘청을 성현(聖賢)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의 교묘한 음양설에 넘어가게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 다시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는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花宮)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천도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그것이 폭로되면서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으며 민심 또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와, 인종의 서경천도 중지명령까지 나오게 됨으로써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반전(反轉)하자 묘청은 35년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및 분사병부상서 유참(柳哳)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守令) 이하 관리들을 잡아가두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모두 서경으로 집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으며,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州郡守)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이와 같은 묘청 등 서북인들의 반란에 부딪힌 개경의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하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고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이 안주(安州)에 이르는 동안 그 기세에 눌려 도중의 모든 반란군은 항복하고 서경에도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므로, 승산이 없음을 안 반란군 주모자 조광 등이 묘청·유참 등의 목을 베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조정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반란이 재연되어 이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36년 2월 관군의 총공격으로 조광 등이 전사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결국 묘청의 난은 약 1년만에 진압되었으나,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은 자주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기상의 표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