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세존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설법하신 본회는 결국 우리 중생의 제도濟度, 즉 만민을 구별 없이 모두 구제하려는 것 외는 없다. 그러면 일부 불교 이론이나 좀 깊이 연구하고 수도생활을 거친 사람들 가운데는 어려운 자력수행을 즐기고, 서민 일반 대중이 친근 하는 염불의 정토문을 무언가 천박한 것으로 오해하여 이를 연구하고 그 깊은 뜻을 받들려 하지 아니하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일이 간혹 없지 않다.
그러나 일단 허심탄회하게 선입관을 버리고 아집을 버리고 『불설무량수경』을 정독한 후, 거기 숨어 있는 참 뜻에 접할 것 같으면 그런 오해가 얼마나 스스로 부끄러운 일인지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량수경』에 설해있는 무량수불의 홍원 즉, ‘일체 중생을 모두 남김없이 절대 무조건적으로 구제하겠다’는 큰 서원을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면 이 경 이전의 모든 경에서 설한 것은 궁극의 교설인 정토 왕생을 설하기 위한, 말하자면 일종의 준비라고 까지 느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삼계유일심을 설하는 화엄이나,계를 중하게 하는 아함이나, 불심의 광대 평등을 설한 방등方等, 일체개공皆空을 설한 반야, 일체 중생 모두의 성불을 설한 법화 등은 요컨대 예토를 싫어하고 번뇌를 해탈하여 미망迷妄을 바꾸어 깨달음에 들어가기 위한 자력적인 수행의 교敎로서, 거기에는 ‘어떠한 악인 범부일지라도 구제된다’는 절대의 증명은 아직 없으며, 오직 『무량수경』에 한 중생도 빠짐없이 모두 구제되는 법이 있다.
이야말로 전 불교에서 마치 용을 그림에 끝으로 눈을 그려 넣는 점안과 같은 것으로서, 이 경이야 말로 완벽한 종교로서 불교의 빛을 내게 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도덕을 제창하는 것으로는 유교가 있고, 심오한 철학을 설하는 것으로는 일찌기 인도나 그리스 시대의 거대한 형이상학의 체계가 있다. 오직 이 무량수불의 큰 원이 있고서야 비로소 불교가 진실로 중생제도의 종교로서 완성된다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개개의 뛰어난 소질을 가지는 사람만이 수행에 의해서 도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만인을 두루 구제하는 종교로서는 부적당 하지 않은가. 종교인이상 어리석은 자, 죄 있는 자, 악인이라고 하는 자 등이 구해지는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겸허하게 말한다면, 스스로 현명하고 죄 없는 착한 몸과 마음과 입의 즉, 세 가지의 행위인 삼업三業이 고루 완전하게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위선이 아닌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우리 일반인에게 있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이 깊이 생각한 뒤에 눈을 『무량수경』에 돌리면 이 경의 종지는 아미타부처님이 성불하시기 이전의 법장보살 때에 세운 48원 그 중에서도 특히 제18원 즉, “만약 내가 부처가 됨에 시방의 중생이 지성으로 믿고 나의 국토에 나기를 바라고, 내지 십념만 하여도 날수가 없다면 나는 정각을 이루지 아니 하겠습니다.” 라고 서원한 말씀에 모두가 집약되고 있는 큰 뜻을 찾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본원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본원에 귀의해서 우리가 구제받는 이 외에 취할 바 길이 또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많고 적고 간에 자기를 뽐내는 마음이 있다.
반드시 자기가 위인이라고 까지는 아니할지라도, 자기의 노력이나 수행에 따라서는 무언가 안심입명의 경지가 얻어지지나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특히 지식이 있다고 하는 층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서 스스로가 뽐내는 “자기란 무엇인가?” 라고 깊은 반성을 하게 된다면 바로 자기의 발밑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깊은 구렁텅이의 암흑이 있음을 느낄 것이고, 무서운 전율감마저 느낄 것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인생 그것도 귀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 한번은 부딪히는 벽이 아닐까?
자기라는 작은 존재는 공간적으로 미저골(꼬리 부분에 있는 등골뼈)을 가진 5척 나머지의 짧은 신체에 한정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그야말로 몽환포말에도 미치지 못할 짧은 생명에 의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 하루도 편히 지날 수가 있을지라도 내일이라도 병마의 습격을 받아 누워버릴지, 또는 언제 어떤 고난에 부딪혀 몸을 망칠지 그 누가 알 것인가?
때로는 행운이 깃들어 얼마간의 명성이나 재물을 몸에 두게 되었을지라도 내일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서 우리의 행복을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
자기의 존재 자체를 이 공간의 넓이와 시간의 무한한 길이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자기의 인생이 얼마나 적고도 짧은 것인지 스스로 느끼게 된다면 소름끼치는 일이니라.
우리들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자와 지식으로서도 생사의 묘한 원리를 밝힐 수는 없는 것이고, 또 가장 실증적인 지식인 과학마저도 그것이 미치는 것이라야 겨우 개연적. 상대적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일조차 모르고 있다.」
또 이러한 분별의 지혜를 떠나서 선정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도 그 대부분이 과연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또는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또는 엄한 계율을 지키고 소도에 힘썼다할지라도 번뇌를 완전히 해탈한다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고행에 의한 깨달음은 한정된 자신의 힘으로서 그것을 성취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우리 범부의 생존과 부처님와의 관계는 넘을 수 없는 깊은 못이 있으며 단점이 있다. 얼마간의 인간적인 복덕을 쌓아 올렸다고 해 보았자, 또 자그마한 자신의 수행이란 것을 한다고 해보았자, 이 생사의 고해를 넘어서 저 언덕 열반길에 이르기란 아득한 일인 것이다.
이 작은 선과 약간의 수행에 자만심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만약에 우리가 바다의 한 복판에 내던져지게 되었다고 한다면 수영에 서툰 자는 곧 물에 빠져 죽을 것이지만, 수영에 뛰어난 자 일지라도 결국은 그 망망대해 속에서는 지탱하지 못하고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영에 미숙할지라도 오직 아미타불의 큰 자비의 배(자항)에 매달린다면 건져져서 구제되어 저 언덕에까지 이를 수가 있지 않겠는가.
이 구제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곧 『불설무량수경』이라.
스스로의 힘 즉, 자력만을 믿는 자는 자기의 수영의 역량을 너무 믿어서 고해에 빠지는 사람이며, 아미타불의 대자대비 즉, 불력에 오직 매달리는 신자는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함을 솔직하고 겸허하게 자각하고서는 부처님의 홍원이라는 큰 비에 올라타 구제되는 사람이란 것을 가르쳐주게 될 것이다.
종교의 궁극 목적을 이룰진대 지금 바로 고해란 바다 속에서 허덕이고 몸부림치는 자를 눈앞에 두고서 그들에게 수영이 필요하다는 등 물에 들어가기 이전에 해야 할 것들을 역설하고, 또는 일상의 해태를 책망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요한 일은 한때라도 빨리 전력을 다해서 구제하는 방법 밖에는 아무것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진정한 대승적인 법문은 행하기 쉽다는 이행도인 정토문 즉,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진심으로 믿고 ‘오직 나무아미타불’ 이라고 염불하는 이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우리는 『무량수경』을 잘 읽고 생각하여 반성한다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죄에 오염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범부로서 거룩한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무량수불(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한 염불 밖에는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마음속에서 염불이 일어나더라도 입밖으로 소리 내는 것이 부끄러울 것 같고 잘되지 않는 것이 아마 젊은 지식인의 일반적 경향일 것이다.
그것은 얕은 인간의 자만심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궁극적 구제란 절대적 대명제를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더욱 깊게 한다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자만심에 억눌려서 마음에서는 염불하려는 진심을 속이는 일을 빨리 벗어나서 당당하게 소리 내어 입으로 염불하게 될 것이다.
신심으로 칭명하는 일의 종교적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참뜻을 깊이 믿고 오로지 일심 정력으로 정토신앙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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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만약에 우리가 바다의 한 복판에 내던져지게 되었다고 한다면 수영에 서툰 자는 곧 물에 빠져 죽을 것이지만, 수영에 뛰어난 자 일지라도 결국은 그 망망대해 속에서는 지탱하지 못하고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영에 미숙할지라도 오직 아미타불의 큰 자비의 배(자항)에 매달린다면 건져져서 구제되어 저 언덕에까지 이를 수가 있지 않겠는가.
......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수고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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