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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징 법사, 미주불교회 평생고문 및 부회장
양파홍(미국 샌프란시스코 美洲佛敎會 平生監事長)
1) 샌프란시스코 미주불교회 노라사의 주지
미주불교회는 1960년에 생겼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불교가 싹 튼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선도교회를 세울 때 홍콩에서 우룬쟝 상사를 초청하여 도교회관에 모시는 불상 점안을 하였다. 우룬쟝 상사(상사는 티베트 불교의 호칭)는 쉬윈 화상의 재가 제자인데, 난징에 있을 때 노라를 만나게 되었다. 노라는 민국 정부의 몽골티베트위원회 입법위원이었는데, 우룬쟝이 그로부터 밀종을 배워 나중에 홍콩에 와서 그 밀교 법맥을 전해준 상사로 유명하다.
점안식에 참석한 우룬쟝은 샌프란시스코의 신도들에게 큰 감명을 줄 만큼 대단하여 마치 보살과 붇다가 나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처럼 대단한 법력에 감화가 된 6명은 우룬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돈을 모아 불교 사찰인 노라사를 세웠다. 6명 가운데 한 사람의 어머니인 메이위시가 25,000$를 내고 다른 신도가 5,000$을 내서 지금의 노라사를 세우고, 우룬쟝 상사가 주석을 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룬쟝은 이미 홍콩에 절과 많은 신도들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 계속 머물 수가 없어서 1년에 한 두 달 머무르며 법을 폈다.
초창기 미국에는 승려를 양성하는 절이나 기관이 없었고, 노라사에서는 우룬쟝 거사가 미국에 오래 머물 수가 없기 때문에 알맞은 스님을 동남아에서 초빙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 초빙한 것이 먀오펑 스님을 주지로 모셨다. 먀오펑 스님은 유명하고 바쁜 분이라 몇 달만 머문 뒤 그의 제자인 지광 스님에게 주지를 물려주었고, 지광 스님이 2년쯤 주재하다가 홍콩과 대만에서 유명한 옌페이 스님이 그 뒤를 이었다. 옌페이 스님도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시아에 많은 제자들을 가지고 있어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 칭촨 스님이 주지로 왔다. 칭촨 스님은 푸졘성에서 태어나 유명한 라이궈 선사를 스승으로 출가하였다. 중국에서 출가했지만 월남에 오래 있었다.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미국으로 건너와 노라사 주지를 맡았다.
바로 이 칭촨 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중국에서 관징 스님을 초청하였다. 관징 스님은 미주불교회에서 처음 초청하였으며, 중국 본토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수속을 미주불교회가 맡아서 했다.
언제 어떻게 초청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것은 모든 일을 셰완건 거사가 맡아서 했기 때문에 나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다 셰완건 거사는 지금 치매가 걸려 증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참 아쉽다.
관징 스님을 뉴욕 미동불교연구총회에서 처음 초청하였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우리 절에서 가장 먼저 초청하였다. 뉴욕의 미동불교연구총회 점안식을 맡았던 먀오펑 스님도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미주불교회에서 초청한 스님을 대승사가 미주불교회에 부탁하여 모셔갔다고 한다.
관징 스님은 우리 절에서 3년간 주지를 맡았다. 내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1983년에 우리 절에 계셨던 것은 확실하다. 바로 1983년 미주불교회와 노리사의 이사장이었던 셰완건과 관징 법사가 함께 우리 절에서 찍은 사진이 있기 때문이다.
관징 스님은 노라사 주지로 3년간 계시면서 노라사 안에서 거주하셨다. 관징 스님의 매달 용돈은 400$였고, 만일 왕생법회가 있으면 절에서 신도로부터 400$을 받아 그 가운데 100$를 관징 스님에게 드렸다. 그리고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스님에게 공양을 드리기도 하였다. 노라사는 신도가 많지 않아 달마다 열리는 초하루, 보름 법회에는 10명쯤 참가하고 관음법회 같은 주요 법회에는 20명이 넘게 참석하였다.
관징 스님은 한 달에 초하루, 보름 법회, 그리고 관음절을 비롯한 특별한 법회와 왕생법회가 있을 때만 일을 보아주고 나머지는 아주 자유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이 절은 새로 불사를 하여 세를 늘리는 것보다는 법인체처럼 임원들이 운영하며 샌프란시스코 불자들이 신행생활을 하는 작은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스님이 그렇게 바쁘지는 않았다.
미주불교회와 노라사는 당시 관징 법사님이 계실 때와 비교해 변한 것이 거의 없다. 같은 장소에다 스님을 모셔와 법회하는 운영방법도 같고 운영진도 바뀌지 않았다.
2) 미주불교회 평생 명회회장 및 고문
관징 스님이 우리 절에 와서 활동할 때 스님을 미국 미주불교회 평생회장겸 고문으로 모셨다. 이에 대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미주불교회
초빙서
여기서 모시고자 하는 것은
석 관징 대화상을 우리 회 평생 명예회장 및 고문으로 이에 초빙함
주 석 : 석칭찬
감사장 : 양파홍
천파춘
셰완건
이 자료에서 보면 관징 대화상을 미주불교회 평생 명예회장 및 고문으로 모신다는 내용이다. 관징 스님은 미국에 건너와 미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미주불교회 명예회장과 고문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초빙서에 보면 당시 관징 법사를 초청했던 주지 스님과 감사장 세 사람이 서명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사람은 지금 모두 살아 있으나 절에 출근한 것은 나혼자 뿐이다. 세 사람은 현재 상황은 다음과 같다.
⓵ 양파홍 : 정년퇴임하여 집에 있지만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절에 출근한다. 현재 노라사 평생 감사장이다.
② 첸파춘 : 지금은 홍콩 등지를 돌아 다니며 사업을 하기 때문에 절에 자주 오지 못하고 있다.
③ 셰완건 : 미주불교회 이사장이었다. 80살이 넘었는데 당시 절에서 주된 불법으로 모셨던 티베트 밀교(노라는 티베트교의 달라이라마와 같은 고승을 말한다) 교리를 10년간 가르쳤기 때문에 특별히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교리에 가장 밝은 분인데 지금은 치매에 걸려 있다.
관징 법사는 우리 절에 머물면서 앞에서 본 공식적인 행사를 하면서 늘 스스로가 극락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 절 신도였던 쩌우완니엔 거사가 그 내용을 받아 적어 책자를 냈다. 그런 사실이 쩌우완니엔 거사가 적은 「극락세계 방문기」에는 다음과 같은 머리말이 실려 있다.
1984년 4월 2일, 글쓴이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여러 대 선조들의 복을 빌기위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잇는 노라사의 청명법회에 참가하여 관징(부흥) 대화상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아주 겸허하게 스스로 문장이 뛰어나지 못하다며 글쓴이에게 글을 적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1984년4월이면 관징 스님이 미국으로 온 지 아직 만 2년이 안 된 시점이다. 쩌우완니엔 거사가 역은 책은 관징 스님이 극락세계 다녀온 이야기를 책으로 낸 최초의 것이다.
벌써 30년이 넘은 일이고 나도 이제 나이가 80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기억력이 없어 자세하게 증언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우리 절을 거쳐 간 스님들은 모두 큰일을 하였기 때문에 관징 법사님도 큰일을 하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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