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건축과 새로운 양식의 문화 예술
사람들은 황제들이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기를 기대했고, 그 가운데 아나스타시우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위대한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딸린 해자만 무려 45킬로미터에 달하는 총 65킬로미터의 장벽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에 세웠다. 즉 흑해와 마르마라 사이의 보스포루스반도를 육상에서 공략하는 일자체를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사 성벽을 넘는다 해도 아나스타시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운 수많은 성채가 남아 있었다. 이는비잔티움 제국의 주변 세계가 점점 더 위험해져 제국의 심장부마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종교적 성격을 가진 건축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의 건축 사업 대부분은 민간과 세속 방면에서 더 활발했다. 니카 봉기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크게 파괴된 후 그는 궁정 내에 곡창과 수조 시설을 설치하여 긴급한 상황에 대비했으며, 파괴된 건축물들은 이전보다 거대하고 화려하게 재건했다. 황궁과 콘스탄티누스 포룸, 히포드로무스 사이에 있는 도시의 의례 중심지는 더욱그랬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야 소피아 성당[본문의 아야 소피아(Agia Sofia)는 현대 그리스어식 표기로,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하기아소피아는 고전 그리스어(기원전 550년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이르는 시기의 그리스어를 지칭하는 역사학 용어식 표기이다.]이다. 이 장엄한 성당은 니카 봉기가 일어났을 때 테오도시우스 성당이 파괴된 지 5년 만에 완공되었다. 비잔티움 제국 건축물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아야 소피아 성당은 지금도 변함없이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대표한다. 지상에서 55미터나 띄운 아야 소피아의 거대한 돔을 동시대 사람들은하늘에서 내려온 사슬에 매달린 것 같다고 묘사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한 공학적인 위업으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준다.
성당은 색색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황제의 모노그램은 제국 각지에서 모여든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 꼭대기에 정교하게 새겨졌다. 기하학 문양과 꽃무늬로 장식된 황금빛 모자이크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제단 앞에는 금박을 입힌 은으로 된 성자들의 그림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영묘 옆에 세워진 성 사도 성당을 십자가 모양으로 배치한 다섯 개의 돔 구조로 재건했다. 이곳은 12세기 이전 비잔티움 군주들이 가장 선호한 매장지였고,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의 모델이다. 548년에 죽은 테오도라는 새로 건축된 성 사도 성당에 최초로 안장된 사람이다.
수도 외곽에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을 기리는 여러 건축물이 있다. 시나이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안에 있는 성당과 수도원을 둘러싼 성채는 유스티니아누스의 후원 덕택에 탄생했으며, 이곳은 오늘날에도 번화한 중심지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성모를 기리는 네아 성당(네아는 ‘새로운'이라는 의미이다)[바실리오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운 네아 성당과 구분하기 위해 '성모 네아 성당'이라 부르기도 한다.]을 건축했는데, 성당은 솔로몬 성전과 연결되고 동시에 그와 경쟁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로 건축 활동을 지속했지만 훨씬 작은 규모였다. 유스티누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블라헤르네(콘스탄티노폴리스 서북 방면)와 할코프라티아(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구리 시장'. 아야 소피아 성당의 서쪽)에 각각 성모를 기리는 교회를 세웠다. 후대의 전례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성물인 가운과 거들이 두 성당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중요성은 유스티누스 2세와 마우리키우스가 그녀의 탄생과 죽음을 기리는 기념일을 공식 축일로 만들었음에서도 방증된다.
유스티누스는 더 나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아파메이아에 보관된 성십자가 파편과 카파도키아의 카물리아네에 있던 아히로피이타Acheiropoiēta('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즉 기적의 이콘[동방 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畵像)을 일컫는 말이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 왔다. 이 같은 성유물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존재감을 한층 높여 주었다. 그리스도와 성모의 흔적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다는 것은 곧 이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보호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나중에 두 성물은 전장으로 나아가는 제국군과 함께 움직였다.
종교 의례의 중요성과 제국 행정에서의 비중 증대는 대관식 의례의 점진적인 변화에서도 관찰된다. 새 황제를 방패에 올리던 군대의 역할은 차츰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과 대중 정당의 갈채의식으로 대체되었다. 대중 정당의 갈채 의식은 대관식 의례에 통합되어 실질적인 의미가 축소된 관례가 되었다. 제국 내 그리스도교화는 6세기에 거의 완료되었다.
이 시기의 수준 높은 문학적·문화적 결과물 대부분은 7세기 초마우리키우스 재위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프로코피우스로부터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투스에 이르는 역사가들에 의해 고전기 언어와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좀 더 일반화하자면 이 시기의 문화는 옛 지식의 종합과 정리로 표현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 대전(Corpus luris Civilis)》이 대표적인 예이며, 의학과 철학 같은 분야도 그에 못지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법을 종합할 때는 라틴어를 사용했지만, 534년 이후 새로운 법을 입법할 때는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라틴어는 일상생활에서 사라져 갔지만 주화, 군 지휘 구조, 의례 등에서는 여전히 사용되었다.
문학에서는 새로운 문학 양식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도 연대기들은 천지창조부터 당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는데, 황제의 공적들과 자연재해 그리고 개가 냄새로 간통을 범한 사람을 잡아냈다거나 주화로 황제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기이한 이야기들도 다루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활동한 요안네스 말라라스의 연대기가 대표적이다.
이 시대에 새로 등장한 또 다른 문학 양식은 콘타키온(Kontakion)이다. 콘타키온은 전례에서 음악과 함께 읊는 긴 시를 가리킨다. 6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아나스타시우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 아래에서 활동한 작곡가 로마누스 멜로두스가 이 양식의 대표적 인물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시리아 출신인 로마누스 멜로두스에게 콘타키온 작곡을 의뢰하기까지 했다. <지진과 화재에 대하여 (Eis ekaston seismon kai emprésmon)〉라는 작품은 니카 봉기 이후 황제의 치세를 찬양하기 위하여 지어졌는데, 그 내용은 비잔티움 사람들이 범한 죄악을 벌하고자 신께서 내린 처벌이 봉기라는 것이었다. 전례용 시들이 이렇게 프로파간다로 이용되었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마저 깎아내릴 수는 없는 일이며,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