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의 노래
최운숙
목포 앞바다. 망자의 혼백을 건져 올린다는 넋 그릇이 던져지고 징소리가 점점 커졌다. 빨라지던 북소리가 한 가닥으로 이어지고 물수제비가 물길을 내듯, 낱낱의 징소리가 바다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산 자의 정성이 망자의 혼백을 만나는 것일까, 신주를 잡은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파장(罷場)될 무렵, 한 모퉁이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앞에 놓고 소리판이 벌어졌다. 손에 쥔 건 없어도 목에 접어둔 소리만은 남부럽지 않은 사람들. 너덧이 둘러앉아 띄운 가락이 낭창거린다. 시퍼런 청춘에 남편을 떠나보낸 청상과부가 한가락 쭉 뽑아내자 곰삭은 노부부가 이어받는다. 강강수월래처럼 돌려주고 받으니 어깨가 들썩, 한바탕 춤판이 된다. 아버지의 소리도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는 여섯 마당 뿐만 아니라 육자배기를 좋아하셨다. 가락에 진한 감정을 담아 풀어내며 사람들을 웃고 울렸다. 늘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여인들은 훤칠한 외모 때문이었는지 소리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다. 연배가 한참 위인 어르신과 짝이 되어 장터는 물론, 굿판을 넘나들기도 했다. 두세 시간이 넘도록 서로가 주고받은 노래는 그 산비탈 어디쯤 아직도 생생히 살아서 수북이 쌓여 있을 것만 같다.
육자배기는 여섯 박자 장단으로 이루어진 남도 대표 소리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반음을 섞어 쓰는 소리로, 반음은 상행과 하행의 구조가 다른 음계로 되어있다. 평으로 내는 음과는 달리 ‘도’를 ‘시’로 꺾어 내리는 반음이기 때문에 이를 꺾는 음이라 부르며 한국음악에서 유일한 반음음계이다. 특히나 붉어지는 반음은 가슴에서 슬픔을 밀어내는 소리이자 뭉쳐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느낌이다. 남도 사람이면 육자배기 한 가락쯤 누구나 뽑아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고된 삶의 애환을 육자배기로 풀어내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자배기는 그들의 삶처럼 느리면서도 애절하다. 가만히 소리에 기대고 있노라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응어리진 속을 짜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거기 어딘가를 어른이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당신은 비 오는 날 논배미라도 다녀올라치면 어김없이 열 오른 얼굴로 소리를 하곤 하셨다. 그런 날이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버지 옆에는 몇 분의 소리꾼이 함께하곤 했다. 막걸릿잔 수가 늘어갈수록 판은 점점 커져서 우리 집은 한마당 잔치판이 되곤 했다.
가족에게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면서도 소리에는 한없이 너그럽기만 했던 당신의 속내를 감당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아니,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그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도 함께해주었다. 간암 말기의 통증을 아편꽃으로 다스릴 때에도 모르는 척해주었고, 방안 가득 울컥울컥 피를 토해 놓을 때도 함께 거두어주었다. 누구보다 먼저 당신을 부축했다. 그분들의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리고 나는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을 했다. 목청 그 너머에 넣어두었던 소리 대신 붉고 질척한 물체가 밀물처럼 쏟아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가끔 나는, 당신을 흉내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한 소절도 빚어내지 못한다. 버리려던 숨이 다시 몸으로 들어올 때의 막막함을, 몸이 바닷속에 잠겨 한숨도 쉬지 못하는 절대 고통을 내가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초상집에 흥이 돋는다. 신명이 날수록 망자의 혼백은 좋은 곳으로 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의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불리는 상여소리 또한 육자배기의 하나이다. 마을과 마지막 이별을 육자배기로 달랜다. 사람들은 처음과 끝을 소리와 함께하며 남은 자의 한을 다독인다.
어허어허너하넘차어하
간다 간다 나는간다
이승길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나는 간다
어허어허너하넘차어하 (후렴)
어허어허 만당 같은 집을 두고
천금같은 자식두고
어하넘차어허,
문전옥담 다버리고
원통해서 못가겠네
「긴상여 선소리타령중」 부분
상여를 탄 요령잡이는 떠난 자의 혼을 위로한다. 지금은 기억도 흐릿하지만 마흔여덟, 창창하던 당신도 요령잡이의 위로를 받았으리라. 아버지의 소리는 아버지보다 앞서 떠났다. 떠나지 못하는 당신을 소리가 앞서가며 당신의 길을 재촉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먼 곳에서 소리주머니를 두드리며 이승의 한을 거두어 갔을 것이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내게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아픔이 하나씩 살아나오는 것 같다. 아니, 소리에 기댈수록 몸 한구석이 고통보다 더 진한 슬픔의 물결에 휩싸이곤 하는 것이다. 한이란 평생을 두고 쌓이는, 어쩌면 이 세상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치매기가 있는 친정엄마와 함께 가족여행을 했을 때다. 마침,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공연이 있었다. 공연이 계속될수록 내 몸은 공연장의 열기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씻김굿의 ‘고풀이’가 시작되자 갑자기 엄마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느닷없는 모습에 놀라 “엄마 이러면 안돼” 팔을 잡아끄는 나를 언니가 강하게 팔을 붙잡아 막았다. 그냥 두라는 눈빛이었다. 엄마는 굿판의 일원이 되어 한 마리 새처럼 유영했다. 엄마의 춤이 가벼워질수록 내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잃은 기억으로 엄마는 하얀 꽃이 되어 공연장 한켠을 밝히고 있었다. 깜박깜박 수명을 다한 전구처럼 두 딸의 얼굴을 드문드문 알아보면서도 엄마는 아버지와의 시간에 멈춰있었던 걸까, 춤은 당신의 어깨춤을 닮아 있었다. 어쩌면 엄마는 지금껏 보내지 못하고 있던 당신을 그때야 비로소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노랫가락과 어깨춤만 선명하게 남겨놓고 엄마는 그 얼마 후 아버지의 길을 찾아 떠나버리셨다.
당골네의 노래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신의 노래라면 아버지의 노래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대의 노래다. 서로를 비춰주는 등대로서의 노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통통배의 못 자국처럼 내 몸의 궂은살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소리는 아버지의 삶의 소통방식이었던 것 같다. 시대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는 가장이 자기에게 거는 최면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운다. 자지러지던 징소리도 파도 소리에 묻힌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노랫소리도 희미해진다. 당골네의 기원의식도 파도에 묻힌다. 가물가물 꿈속처럼 노래의 끝을 잡고 섰던 나 또한, 다시 낯선 슬픔에 기댄다.
첫댓글 더수필에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운숙 선생님 좋은 작품으로 빛나는 수필가 60인에 선정 되셔서 축하드리고 아울러 감사합니다.
최운숙 선생님의 시작으로 이제 우리 무심수필에서 줄줄이 60인에 선정 되실 것으로 믿습니다.
벌써 이승애 선생님이 選수필에 선정되셔서 게재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지도 덕분입니다.
2021년에는 무심수필 회원들의 글이 빛나는 해가 될것을 믿습니다..
최운숙 선생님, The 수필에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바다에 나간 어부가 만선의 기를 펄럭이며 돌아오는것 같습니다.
운숙샘의 그 섬에 가면이 대박났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다시한번 축하 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충북수비의 살림을 맡으신 2021년은 선생님 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모두 화이팅요~~